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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곤 푸어-194화 (194/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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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 성전(聖戰)

달빛조차 없는 칠흑과도 같은 어느 밤, 마왕의 군대가 소리 없이 국경을 넘었다.

“뭐, 뭐가 이렇게 많아….”

가장 먼저 그들을 발견한 건 중부 왕국들 중에서도 서쪽으로 상당히 치우친 곳에 자리를 잡은 폴리시안 왕국의 장거리 순찰대였다.

장거리 순찰대의 대원들은 평원을 까맣게 물들인 마물의 무지막지한 수에 질렸고, 어둠 속에서도 선명하게 빛을 발하는 붉은 안광에 또 한 번 질려버렸다.

지옥이 있다면 이런 모습일까. 순찰대원들은 와락 겁을 집어 먹었다.

더욱 끔찍한 것은 그렇게 몰려든 마물들 중 어느 하나 입을 벌려 소리를 내는 놈이 없다는 것이었다.

“최대한 조용히 물러난다.”

순찰대는 마물들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할 수 있는 최대한 조용히 자리를 빠져나갔다.

마물들은 그런 그들을 쫓지 않았다. 그저 무언가에 이끌린 듯 한 방향으로 나아갔을 뿐이었다.

댕댕댕!

적의 접근을 알리는 타종 소리에 조용하던 폴리시안 왕국의 최전방 요새, 레그니차가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적이다! 모두 일어나!”

“비상! 전원 전투 준비!”

그렇지 않아도 오늘따라 유달리 가슴이 갑갑하고 불안해 잠을 못 이루고 있던 병사들은 타종 소리에 벌떡 몸을 일으켜 주어진 위치로 달려갔다.

그리고 그들은 새까맣게 몰려드는 마물들을 보고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진즉부터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음에도 병사들은 먼발치에서 마물의 모습을 확인한 것만으로도 사기가 꺾여버렸다.

“정신 차려! 이 새끼들아!”

“그냥 잡아먹힐래!”

지휘관들이 발작적으로 터뜨린 욕설이 아니었다면, 아마도 그들은 마물들이 바로 코앞까지 접근할 때까지 정신을 놓고 있었을 것이다.

그만큼 처음으로 마주한 마물들의 모습은 충격적이었다.

마물들은 그들이 상상했던 것 보다 몇 배는 끔찍했고, 그들이 풍기는 악취는 정신을 아득하게 만들 정도로 지독했다.

고르고 골라 엄선한 정예병들의 칼 같은 군기도 마물들의 흉험한 기세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폴리시안 왕국군은 이런 상황을 대비하여 많은 준비를 한 상태였다.

그중 하나가 바로 사제단이었다.

사제들이 지닌 신성력은 살아 있는 자를 움츠러들게 만드는 끔찍한 마기의 상극이었고, 그들이 소리 높여 부른 성가는 굳어버린 병사들의 몸을 풀어내기에 충분했다.

축복이 깃든 노랫소리에 병사들이 겨우 정신을 차렸다. 하지만 겨우 정신을 차렸을 뿐이다. 병사들은 여전히 마물들의 기세에 짓눌려 있었다.

그때 나선 것이 바로 폴리시안 왕국의 마법사들이었다.

허리 꺾어 쏘아 올린 궁병대의 화살도 닿지 않는 거리, 하지만 마법사들에게는 마물들이 바로 코앞에 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들은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가장 화려하고 강력한 주문을 외웠다. 수십의 마법사가 일제히 마법을 영창하자 어둠이 가득하던 요새의 하늘 위로 색색의 빛무리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번뜩이는 섬광, 그 서슬에 요새를 짓누르고 있던 어둠이 일시적이나마 밀려나며 칠흑의 그림자 속에 숨어 있던 마물들의 흉측한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아으….”

상상 이상으로 끔찍한 마물들의 생김새, 사제들의 성가에 겨우 진정되었던 병사들의 공포가 다시 발작하려 했다.

병사들의 마음을 좀먹는 두려움이 완전히 고개를 쳐들기 직전, 마법사들이 주문을 끝마쳤고 수십 종류의 마법이 동시에 발현되었다.

새빨간 화염이 혀를 날름거리며 마물들에게 달려들고, 송곳 같은 우박이 그 위로 떨어져 내렸다.

크아아아악!

꺼지지 않는 불길과 피부를 찢는 우박 세례에 마물들이 입을 벌리고 비명을 질러댔다.

“아….”

이제껏 그 어떤 소리도 내지 않던 마물의 군대가 내뱉은 단말마는 악몽 속을 헤매듯 몽롱했던 병사들의 정신을 현실로 끌어오기에 충분했다.

그런 그들의 눈에 불길에 휩싸여 비명을 내지르는 마물들의 모습과, 얼음의 창에 난도질당한 마물들의 처절한 모습이 보였다.

지옥에서 올라온 것 같은 저 괴물들은 진짜 악마가 아니었다. 그리고 불사의 존재도 아니었다.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두려움에 짓눌렸던 병사들의 눈빛이 다시 빛을 되찾았다.

“다행이군.”

지휘관들은 흔들리던 군기가 도로 자리를 잡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만약 적이 인간이었다면 연대 규모의 부대라고 해도 단번에 와해시켰을 강력한 마법, 하지만 그 효과는 지휘부가 기대했던 것에 한참이나 못미쳤다.

화려한 마법에 눈이 팔린 병사들은 벌써 전투에서 승리하기라도 한 것처럼 고무되었지만, 실질적으로 마법사들의 공격에 휘말린 마물의 수는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마물들의 주변을 둘러싼 마기가 마법의 위력을 상당 부분 상쇄시키고 있소.”

노마법사의 말에 레그니차 요새의 사령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보기에도 마물들과 함께 몰려온 검은 기운이 심상치 않았다.

모르긴 몰라도 저 기운이 요새의 병사들과 접촉하면 절대로 좋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벌써부터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레그니차 요새가 준비한 것은 마법사들의 마법뿐이 아니었다.

서서히 속도를 올리며 요새를 향해 접근 중인 마물들을 보며 사령관이 손을 들어 올렸다.

“캐터펄트! 발사!”

사령관의 손이 힘차게 요새 너머를 향한 순간, 진즉부터 발사 명령만을 기다리고 있던 수십 대의 투석기가 일제히 불이 붙은 기름 항아리를 쏘아 올렸다.

투석기의 공격은 마법사들의 마법만큼 화려하지도, 단번에 마물들을 절명시킬 정도로 강력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산산조각이 난 항아리 밖으로 터져 나온 기름은 일대를 불바다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사령관이 노린 바였다. 사령관은 거센 화염에 마물들이 물러가기를 바랐다.

“망할 놈들….”

안타깝게도 사령관의 바람은 그저 바람으로 끝이 나고 말았다.

마물들은 근방을 완전히 태워버릴 것 같은 화염의 열기에도 물러나지 않았고, 꾸역꾸역 요새를 향해 밀고 들어왔다.

“아무래도 긴 밤이 되겠어.”

사령관의 표정은 굳어 있었지만, 눈빛만큼은 형형했다.

레그니차 요새의 성벽은 철벽과도 같았고, 주둔 중인 병력의 질은 그 어느 때보다 높았다. 마물들이 아무리 그 수가 많고 사납다고 해도 요새가 뚫릴 걱정은 없었다.

하지만 전선의 모든 부대들이 레그니차 요새의 병사들처럼 운이 좋았던 것은 아니었다.

개중에는 운 나쁘게도 평지에서 마물들과 전투를 치러야 했던 이들도 있었다. 마물들이 전선의 주요 거점이 아닌 엉뚱한 곳으로 밀고 들어온 탓이었다.

이는 처음부터 예견된 상황이었다.

전선의 모든 요새와 성채들은 분명 적의 침입을 막아내기에 용이한 전략적 요지에 세워져 있었지만, 인간들 간의 전쟁을 상정하고 만든 요새들이 마물들에게도 꼭 점령해야 할 요지는 아니었다.

아니, 애초에 마물들에게 점령이란 개념은 존재하지도 않았다.

보급선을 염두에 두고 이동해야 할 이유도 없고, 정치적인 사안을 고려할 필요도 없다. 마물들은 단지 앞으로 나아갈 뿐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대륙의 서부와 중부를 가로지르는 거대한 전선에 모두 성채를 건설하고 병력을 배치하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당연하게도 전선의 일부는 마물들에게 무방비할 수밖에 없었다.

요새와 성채의 도움을 받지 못한 곳에서 벌어진 전투는 여지없이 인간들의 패배로 돌아갔고, 순식간에 전선의 이곳저곳에 구멍이 났다.

미리 대비하고 있었음에도 상당한 피해를 입어야 했던 중부 왕국 연맹은 필사적으로 구멍을 메우기 위해 발버둥을 쳤다.

그 과정에서 그들이 믿을 건 왕국이 꿍쳐두었던 초인 전력뿐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초인들은 그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고, 영토 내로 침투한 마물들을 격퇴해내고야 말았다.

하지만 상처뿐인 승리였다.

그토록이나 애지중지했던 초인 전력에 피해를 입은 것은 둘째 치더라도, 마물들이 죽어 누운 땅은 금세 마물들의 불결한 피에 물들어 죽음의 대지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그렇게 악취 나는 마물들의 피가 스며든 땅 위에는 마기가 쉽게 스며들었다.

마물들은 몰아냈지만, 전선 안쪽의 몇몇 영토가 마왕의 권역이 된 것이다.

전쟁은 모든 면에서 중부 왕국 연맹에게 불리했다. 단 한 번만 뚫려도 잃는 것이 너무나 많았다.

죽어버린 아군 병사의 빈자리를 메우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게 빈자리를 메운 병사들은 상대적으로 질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마저도 그 수가 무한하지 않았으니, 어떻게든 희생을 줄여야 했다.

그에 반해 마왕의 군대는 병력의 손실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었다. 전투에서 전사한 연맹군의 시체들은 모두가 언데드화 되어 마왕군의 새로운 병력이 되었다.

사제들이 필사적으로 정화를 해보아도 시체가 되살아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중부 왕국 연맹의 수뇌부들은 그제야 왜 서부의 왕국들이 그토록이나 빠르게 붕괴되었는지를 뼈저리게 느껴야만 했다.

성전은 구실에 불과했을 뿐, 실상 중부 왕국들의 군주들은 꿍꿍이가 있었다.

마물들을 몰아내고 마침내 서부까지 진격하여 멸망한 왕국들의 영토를 흡수하겠다던 포부를 품었지만, 뒤늦게 깨달았다.

그건 그저 헛된 망상에 불과했다.

지금 그들이 걱정해야 할 것은 전쟁 이후의 상황이 아니라 당장의 생존이었다.

개전 일주일 만에 중부 왕국 연맹은 전쟁의 심각성을 깨달았고, 진정으로 총력전을 펼치기로 결정했다.

군주들은 왕국의 숨겨둔 전력을 끌어내어 전선으로 배치시켰다.

조용히 은거하고 있던 검호들과 경지 높은 마법사들이 대거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하나하나가 일인 군단이라는 호칭이 과하지 않은 진짜 초인들이었다. 하지만 군주들은 안심할 수 없었다.

서부의 왕국들이라고 그런 강자들을 보유하지 않았을까. 그들 역시 자신들에 못지않은 전력을 지닌 당당한 왕국들이었다.

그런데 그런 왕국들이 소리 없이 무너졌다.

자신들이라고 같은 꼴이 되지 않으란 법은 없었다.

최악의 경우 왕국이 무너지거나, 전쟁의 피해로 중부의 균형이 무너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달리 방도가 떠오르지 않았다.

진짜 강자들이 희생되는 건 생각하기도 싫은 일이었지만, 전선 안쪽이 전장이 되는 것만큼은 어떻게든 막아야 했다. 마물들은 설령 패배하더라도 반드시 대지를 오염시켰고, 전선이 밀린다는 것은 왕국의 영토가 불모지가 된다는 이야기나 다름이 없었다.

중부 왕국 연맹은 최대한의 전력을 쥐어짜 전선의 방비를 강화시키고, 한편으로는 동부 왕국 연맹에 더욱 더 적극적으로 지원을 해줄 것을 요청했다.

“중부에서 막지 못하면 다음은 동부 차례다.”

그들은 마왕군과의 싸움이 어떤 것인지, 상세하게 동부 왕국들에게 전했다.

효과는 확실했다.

단 일주일 만에 중부 왕국 연맹이 입은 피해에 놀란 동부의 왕국들이 더욱더 적극적인 지원방안을 강구하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동부 왕국들의 본격적인 지원이 시작되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지금은 일단 전선 밖에서 마물들을 격퇴하는 것이 중요했다.

지칠 줄 모르는 마물들의 군대는 끝도 없었고, 곳곳에서 밤낮을 가리지 않는 전투가 벌어졌다.

개전 직후 일주일간 입었던 피해를 다 합친 것보다 훨씬 더 극심한 피해가 발생했고, 그 과정에서 운 나쁜 요새와 성채 몇 곳이 무너지기까지 했다.

군주들이 생각했던 최악의 상황보다 전황은 몇 배는 더 끔찍했다.

하지만 그 끔찍한 전황 속에서도 희망은 피어났다.

상당한 피해를 입어야 했던 전선의 방어선들 중에서도 피해 없이 마물들을 막아낸 곳이 있었다.

신성 교국 아스토리아를 중심으로 펼쳐진 중앙 전선이었다.

그리고 그 기적과도 같은 승리의 뒤에는 군주들이 몇 번이나 들어야 했던 익숙한 이름이 있었다.

스스로 참가한 모든 전투에서 승리하여 전승이라는 광오한 칭호를 받은 이방인,

[다수의 괴수를 거느린 드라흔이 전선의 모든 마물을 격퇴.]

김선혁이 바로 그 승리의 주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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