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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숲의 정원사들 (4)
“뭐요?”
방법을 찾아냈다며 웃어 보이는 나지마의 미소는 해맑고 천진했다. 그래서 김선혁은 더욱 불안해졌다.
인간에 대한 이해가 단편적이고 극단적인 퀘이샤의 면모를 전날 이미 한 번 겪어보았던 탓이다.
나지마가 입을 오므리고 작게 바람소리를 냈다. 신경 쓰지 않으면 바로 코앞에서도 듣지 못할 미약한 소리, 그에 화답하듯 창밖에서 작은 발소리가 들렸다.
탁.
새로운 퀘이샤가 창문을 통해 난입했다. 그리고는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제 복면에 손을 가져갔다.
그 순간 김선혁은 이 막무가내 요정들이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인지 깨달았다. 그래서 필사적으로 제지했다.
“멈춰! 멈추라고! 하지마!”
말로 하는 정도로는 불안감이 가시지 않아 몸소 달려가 퀘이샤의 양손을 잡았다. 막 복면을 벗으려던 퀘이샤가 그에게 손이 잡힌 채 눈을 동그랗게 떠보였다.
과격한 그의 행동에 다소 놀란 눈치였다.
“혹시 뭐, 그겁니까? 제가 나지마 당신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것 같아서, 다른 일족을 데려온 거. 그런 겁니까?”
언제 얼굴을 가린 것인지, 다시 복면을 한 나지마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혹시 저희가 잘못 생각한 건가요?”
당연하게도 그는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완전 잘못 생각했습니다.”
아직 그들의 부탁을 들어주겠다고 확답도 하지 않은 상황에서 선금만 계속 챙길 수는 없었다. 하물며 그 선금이라는 게 살아있는 존재였으니 부담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일단 저분은 돌려보내고 이야기를 마저 하죠.”
눈꼬리가 표가 날 정도로 처진 나지마였지만, 그의 말을 거부하지는 않았다. 그녀의 눈짓에 뒤늦게 난입했던 퀘이샤가 창밖으로 조용히 사라졌다.
스르륵.
일족이 모습을 감추자 다시 얼굴을 드러낸 나지마의 얼굴은 눈에 띄게 풀이 죽어 있었다.
“후우.”
그 시무룩한 표정을 보고 있자니, 김선혁은 마치 자신이 몹쓸 짓이라도 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나지마. 내 입장을 말해줄 테니, 잘 들어요.”
하지만 그는 그녀를 달래주는 대신, 먼저 자신의 입장을 설명했다. 부디 이 골치 아픈 요정 아가씨와 그 일족이 또 다른 사고를 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아….”
김선혁은 자신이 배우자가 있으며, 그녀의 위치가 지고하여 그 권위가 상하지 않도록 자신이 배려를 해주어야 하는 입장임을 밝혔다. 또한 처음의 자신이 개인적인 용무로 서부에 온 것은 맞지만, 이제는 공식적으로 선발대를 책임져야 하는 상황이라 독단적으로 부탁을 들어줄 수가 없노라 설명을 해주었다.
그의 설명이 끝이 나고도 한참을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던 나지마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당신의 말에는 모순이 있어요.”
따지려고 들기보다는 정말로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한 말투였다.
“뭐가 말입니까?”
그녀의 말이 이해가 가지 않는 건 김선혁도 마찬가지인지라 곧바로 되물었더니, 그녀가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은 이미 용의 반려인 걸요.”
생각지도 못한 그녀의 말에 그는 일순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당신은 그때 가서도 당신의 배우자가 지닌 지고한 권위를 내세울 건가요?”
나지마가 하지 않은 말 중에는 지금의 배우자가 지닌 권위 따위 용의 지엄한 존재 앞에서는 무의미할 뿐이라는 말 또한 있었다.
그는 듣지 않고도 그녀의 그러한 의도를 눈빛에서 읽을 수 있었고, 반박할 말을 찾아보았다.
“용은 다릅니다.”
한참을 고민하다 꺼낸 변명이 스스로가 느끼기에도 궁색했다.
“만약 용이 다르다면, 그 이유는 용과 인간이 다르기 때문인가요?”
김선혁은 그녀가 이후에 할 말이 무엇인지 머릿속에 그려지듯 선명하게 보여 눈살을 찌푸렸다.
“그럼 저 역시 마찬가지예요. 제 일족은 정령의 후예. 분명히 인간과는 다르답니다.”
역시나 예상대로 그녀는 자신의 종족을 내세워 그를 설득하려 했다.
하지만 그가 용과 오필리아와의 관계를 정의하지 못했다고 해서 요정에게까지 할 말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용은 저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 저의 배우자 역시 처음이야 어쨌건 간에 지금은 저에게 특별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나지마 당신은 이들과 전혀 달라요.”
다소 냉정하게 들릴 수는 있지만, 이쯤에서 태도를 분명히 해야 했다.
필연적으로 또는 스스로가 원해서 함께 하게 된 용과 오필리아를 눈앞의 요정과 비교할 수 없었다.
“당신은 제게 특별하지도 중요하지도 않은 존재입니다.”
나지마는 바로 며칠 전까지만 해도 전혀 접점이 없던 남에 불과했고, 지금 역시 마찬가지였다. 종족이고 뭐고 이유를 들어가며 굳이 함께 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무슨 말인지 알겠군요. 확실히 당신의 말은 합당해요.”
조금 더 고집을 부릴 거라 생각했던 김선혁의 예상과는 달리 나지마는 선선히 그의 말을 인정해주었다. 하다못해 냉정한 어투에 상처를 받은 기색도 아니었다.
“저는 ‘아직’ 당신에게 아무것도 아니니까요.”
어쩐지 ‘아직’이라는 단어가 불길했다.
“그러니 앞으로 당신에게 특별한 존재가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 할게요.”
다부진 얼굴로 각오를 드러내 보이는 그녀의 모습을 본 김선혁은 그저 한숨만 내쉬었다.
**
나지마는 돌아갔다. 그리고 다음 날 날이 밝기가 무섭게 돌아왔다.
“함께 하는 시간이 길어진다는 것은 서로가 공유해야 할 기억이 많아진다는 것. 그 기억들이야말로 당신과 나를 특별하게 만들어주겠지요.”
김선혁은 할 말을 잊고 말았다.
복면으로 얼굴을 가렸지만, 어쩐지 그 너머에서 상큼하게 웃고 있을 나지마의 얼굴이 머릿속에 그려지는 듯했다. 고집불통의 요정 탓에 머리가 아파올 지경이었다.
“이거 봐! 내가 이럴 줄 알았어! 분명 내가 예쁠 줄 알았다고!”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용사 박준민 탓에 두통이 더해졌다.
“눈밖에 안 보이는데, 예쁘고 말고가 어딨어.”
“미녀는 눈만 봐도 아는 법입니다.”
뻔뻔스럽기까지 한 용사의 대답에 그는 차라리 이 골치 아픈 남녀를 무시하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그조차도 쉽지 않았다.
말 많고 시끄러운 용사야 무시하면 그만이었지만, 작정하고 뒤를 따라다니는 나지마를 무시하는 것은 영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단지 당신이 보는 것을 함께 보고 싶을 뿐이에요. 그게 당신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테니까요.”
사랑 고백도 아니고 낯 뜨거운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나지마의 태도에 클라크를 비롯한 사내들이 뜨악한 얼굴을 해 보였다.
“여, 영주님. 지금 이 아가씨가 뭐라고 하는 겁니까?”
“제가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민망할 만도 하련만 나지마는 그들을 철저하게 무시했다. 김선혁을 대할 때면 부드럽게 휘어 올라가는 눈동자도 다른 이들을 대할 때는 무감정할 뿐이었다.
게하임니스는 그것 또한 퀘이샤의 특징이며 그들이 마음을 열고 다정하게 대하는 건 오직 영혼의 동반자뿐이라 말했다.
“이젠 나도 모르겠다.”
그저 조금이라도 빨리 통신 마법사가 회복하여 아덴버그의 전언을 확인해볼 수 있기를 바랐다.
**
어딘가의 시계는 거꾸로 매달아도 간다고 했던가.
김선혁이 뒤를 따라다니는 나지마의 존재에 무감각해질 무렵, 마법사의 몸이 가까스로 회복되었다.
그는 지체할 것 없이 곧장 그라나도와 연락을 취했고, 예상대로 아덴버그에서 보내온 마법 전문을 받아볼 수 있었다.
[전승공에게. 성전 원정대 일백이십, 해로를 통해 이베리아 연합으로 향하는 중. 자세한 내용은 원정대를 통해 듣기를 바람. 아덴버그.]
서부에서 일어난 난리가 동부까지 영향을 미치지 않기를 바라는 아데스덴 왕실이니만큼 실질적인 병력의 파견은 그도 어느 정도 예상한 바였다.
그런데 생각보다 동부의 왕국들이 서부의 문제를 더욱 심각하게 생각했던 모양이다.
[동부 왕국 연맹 결성.]
놀랍게도 중부 왕국에 이어 동부 왕국들도 연맹을 경성했다. 그리고 더욱 놀라운 것은 아덴버그가 그 맹주의 자리에 올랐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놀라움은 잠시였을 뿐, 그는 금세 납득하고 말았다.
최근에 있었던 녹테인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국토를 크게 늘리고, 위세를 떨친 아덴버그는 수많은 나라들을 대표하기 충분한 무게가 있었다.
거기에 더해 서부의 몰락을 최초로 알린 것이 아덴버그의 자랑 드라흔이었던 데다가 비록 눈속임용이었을지언정 실질적인 병력을 가장 먼저 파견한 것 역시 아덴버그였다.
이제 와서 다른 나라가 맹주의 자리를 맡기에는 위상에서도 명분에서도 밀릴 수밖에 없었다.
물론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연맹의 결성이 쉬웠을 리가 없었다. 당장 녹테인과 그리핀도르만 해도 아덴버그가 연맹의 맹주 자리를 맡는 것에 대해 결사반대를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부의 왕국들은 이례적으로 빠른 결단을 내렸고, 그 모든 게 다 마왕이 퍼트린 공포 탓임이 분명했다.
[각 왕국에서 정예 병력들이 출발, 또는 출발 예정.]
전후 과정이야 어쨌건 간에 동부의 왕국들이 소수나마 정예 병력을 파견했다는 것은 고무적인 일이었다.
한편으로는 그만큼 그들이 마왕과 마기의 존재에 위기감을 느끼고 있다는 말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리고 김선혁이 보기에 그런 그들의 우려는 절대로 과하지 않았다.
살아있는 존재에 대한 적의와 증오로 가득 찬 마수와 마물들은 인간의 천적이라 불리기에 충분했고, 대지를 썩게 만드는 마기는 인간들이 발붙이고 살아가야 할 터전마저 앗아가는 끔찍한 질병과도 같았다.
“흠….”
아덴버그에서 보내온 마법 전문들을 계속해서 확인하던 그는 그중 퀘이샤에 대한 것도 찾을 수 있었다.
[퀘이샤의 요청은 전승공에게 일임. 재량껏 판단할 것. 단 수락 시에 묘목은 아덴버그에.]
현장에서 멀리 떨어진 아덴버그에서 모든 상황을 조율할 수는 없으니, 차라리 현장에 있는 그에게 판단권을 넘기는 것이 현명하다 판단한 것일까.
아덴버그의 지침은 원정대의 임무를 비롯해 거의 모든 부분을 그에게 완전히 일임하고 있었다.
“하. 한동안 또 계획 짜야겠네.”
김선혁은 만들어진 판에서 날뛰는 것을 선호하지, 스스로 판을 짜는 데 재능이 없다는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부디 원정대의 구성원 중에 그런 자신의 부족함을 채워줄 이가 있기만을 간절히 바랄 뿐이었다.
[모든 일을 진행함에 있어 스스로의 안위를 최우선으로 하라.]
마지막으로 도착한 마법 전문은 확인할 것도 없이 오필리아의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말하면 더 열심히 할 수밖에 없잖아.”
그 넘쳐나는 친애의 감정에 절로 쓴웃음이 비어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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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 왕국들이 소수의 병력이나마 파병을 결정한 직후, 중부 왕국들의 전쟁 준비가 가속화되었다. 그들은 연맹이라는 이름으로 뭉쳐 한시적 불가침 조약을 맺었고, 마왕과의 전쟁이 끝이 나기 전까지는 한마음 한뜻으로 싸워나갈 것을 천명하였다.
후방을 다진 왕국들은 정예들을 중부와 서부의 경계로 전진 배치시켰다. 순식간에 대륙의 중부와 서부 전체를 가로 지르는 사상 초유의 거대 전선이 형성되었다.
그렇게 펼쳐진 전선으로 대륙 전체에 퍼져 있던 사제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사제들은 끔찍한 마기에 대항할 수 있는 연합군의 유일한 수단이자 희망이었다.
각 왕국들은 지휘부에 못지않은 엄중한 호위로 그들을 지키게 하였고, 그 어떤 마수의 위협에도 대응할 수 있도록 편제를 갖췄다.
그들이 모든 준비를 마쳤을 때, 전쟁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