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래곤 푸어-192화 (192/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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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 숲의 정원사들 (3)

“어떻게 할까요. 전문을 확인해보시겠습니까?”

보나 마나 아덴버그에서 왔을 게 뻔한 전문, 통신 마법을 맡은 마법사의 질문에 김선혁은 생각할 것도 없이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전승공에게. 정확한 상황 보고 요망. 아덴버그.]

[전승공에게. 도움이 필요할 시, 즉시 연락 바람. 아덴버그.]

[전승공에게. 골드레이크와 줄리앙 뱅키쉬 외 다수. 서부를 향해 이동 중. 아덴버그.]

[전승공에게. 줄리앙 뱅키쉬와 합류 후, 연락 요망. 아덴버그.]

역시나 예상했던 대로 마법 전문은 모두 아덴버그에서 보낸 것이었다.

[전승공에게. 현재 추가 인원 대기 중. 답변 여하에 따라 파병 여부 결정. 아덴버그.]

대부분의 전문은 공식적인 아덴버그의 입장과 서부의 상황을 묻는 공문의 형식을 띠고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전문도 있었다.

[너무 오래 걸리는구나.]

다른 것들과는 다르게 누가 보낸 것인지조차 쓰여 있지 않은 전문 하나, 어쩐지 전문을 읽는 것만으로 그리운 음성이 귓가에 들려오는 듯했다.

김선혁은 전문을 보는 순간 발신자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전문은 당연하게도 오필리아가 보낸 것이었다.

그녀가 아니고서야 누가 있어 이렇게 자신에게 절절한 그리움을 표할까.

“화났겠지….”

최대한 빨리 돌아오겠다고 큰소리 탕탕 치고는 몇 달이나 서부에 머물고 있으니, 오필리아가 화를 내도 변명할 말이 없었다.

“그라나도에서 추가 전문이 도착했습니다.”

그리움에 젖어있던 김선혁은 마법사의 음성을 듣고 상념에서 깨어났다.

“아덴버그에서 긴급을 요하는 전문이 왔답니다. 원한다면 그라나도 측에서 양방향 통신을 중계해보겠답니다.”

“그게 가능합니까?”

“그라나도의 마법사들은 통신에 관한 한 대륙 최고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법사는 연락석의 소모와 마법적인 부담이 상당이 크긴 하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며 다시 한 번 그의 의향을 물었다.

“그럼 그렇게 합시다.”

원거리 통신에 필요한 연락석의 소모도, 마법적인 부담도 모두 그라나도에서 떠안겠다는데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부탁합니다.”

김선혁의 말에 마법사가 곧장 그라나도의 마법사에게 통신 마법의 주도권을 넘겨주었다.

“약간의 잡음과 시간차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또한 중계 측에서 통신을 감청할 가능성이 있으니 감안하시기를….”

마법사의 당부에 고개를 끄덕인 그는 통신 마법이 연결되기를 기다렸다. 잠시 시간이 흐르자 지지직거리는 잡음과 함께 저 너머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는가?]

주파수를 제대로 잡지 못하는 오래된 라디오의 소음처럼 답답한 소리였지만, 음성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 없을 정도는 아니었다.

“섭정 폐하!”

반가움을 가득 담아 대답을 해주었더니, 들려오는 대답이 어쩐지 싸늘했다.

[목소리를 들으니 크게 몸이 상한 곳은 없는 듯하구나.]

그 말이 마치 몸도 멀쩡한데 왜 이제야 연락을 했냐고 책망하는 듯해 김선혁은 무심코 변명하고 말았다.

“사, 사정이 좀 있었습니다.”

[그래. 서부 대륙의 생존자들을 구조하고 있었다지. 장하다.]

이어진 대답조차 비꼬는 것처럼 들렸다면 스스로가 너무 소심한 것일까.

“그게 말입니다….”

그는 애써 침착하게 짧은 전문으로는 미처 전달하지 못했던 그간의 일을 설명해주었다.

그마저도 통신 마법의 여건상 짧게 간추려야 했지만, 영민한 오필리아가 상황을 파악하기에는 충분할 거라 판단했다.

[그대의 말대로라면 중부 왕국 연맹이 홀로 이번 일을 수습하기에는 지난할 듯 보이는구나, 아무래도 동부 쪽에서도 더욱더 적극적으로 중부를 도울 수 있도록 목소리를 높여야겠다.]

“중부에서 막지 못한다면, 동부 또한 언제 서부와 같은 상황이 될지 알 수 없습니다.”

그가 재차 서부의 어려움을 강조하자 오필리아가 최대한 빠른 시일 내로 선발대의 향후 행보에 대한 답을 주겠다 말했다.

[그보다 용사라 했던가.]

오필리아가 용사 박준민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어쩌면 교국이 숨기고자 하는 민감한 사안에 휘말린 것일지도 모르겠구나.]

그녀는 단번에 용사의 존재 이면에 도사린 교국 지도부의 추악한 아집과 권력욕을 눈치챘는지 우려를 표했다. 그리고 김선혁 역시 그녀의 우려에 공감하는 바가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용사의 배경이 되어주기로 했던 결정을 후회하지는 않았다. 단지 자신의 결정이 아덴버그의 공식적인 입장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는 게 다소 마음에 걸릴 뿐이었다.

[그대가 그런 결정을 내렸다면 필시 그런 부담을 감수할 가치가 있을 거라 믿노라.]

그런 그의 염려를 오필리아가 불식시켜주었다.

그녀는 오염된 대지를 정화할 힘을 지닌 박준민이 향후 성전에 중요한 역할을 할 거라 예상했고, 그의 결정을 지지해주기까지 했다.

[그대의 결정은 곧 아덴버그의 공식적인 입장, 그대는 그대가 행하고자 하는 바를 행하라. 아데스덴이 그대의 뒤를 받쳐 주리라.]

그녀는 필요할 경우 그 어떤 지원도 아끼지 않겠다며 오히려 그를 부추겼다.

많은 말이 생략되었지만, 혹시라도 교국과 용사의 관계가 틀어질 경우까지 염두에 두고 있는 게 분명했다.

아데스덴 왕실은 강박적일 정도로 인재를 중시했고, 김선혁이 보기에 용사 박준민은 충분히 인재라 인정받을 잠재력이 있었다. 오필리아가 욕심을 낸다고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조만간 이베리아 연합을 통해 지침을 전달하도록 하겠다. 그때까지 그대는 그 어떤 위험한 일도 행하지 말고 최대한의 휴식을 취하라. 중부에는 그대만 있는 것이 아니다.]

“명심하겠습니다.”

부부의 대화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사무적이었지만, 그 저변에는 차고도 넘칠 정도의 정이 있었다. 그는 충분히 그 정을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의 배우자가 더 이상 위험한 일에 휘말리지 않기를 바라는 오필리아의 진심을 절절하게 느낀 것이다.

[그보다….]

이대로 끝마칠 줄 알았던 통신, 그런데 오필리아가 한마디를 더했다.

[퀘이샤라고 했던가.]

“아….”

전문을 통해 간략하게나마 퀘이샤 일족과 만났다는 이야기를 해두었다. 당연하게도 그 과정에서 나지마와의 일도 설명을 해줄 수밖에 없었다.

김선혁은 식은땀을 흘렸다.

[불가항력이었다는 점은 알고 있으나, 기분이 과히 좋지는 않도다. 차후 그대는 이 점에 대해 단 하나도 누락됨이 없이 모두 나에게 설명을 해주어야 할 것이다.]

보안을 확신할 수 없는 중계 통신의 감청 가능성 탓인지 오필리아는 말을 아꼈다. 그게 더욱 그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또한 미리 당부하건대, 그대는 절대로….]

오필리아의 말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갑작스레 통신이 끊겨버렸다.

“어?”

당황하여 마법사를 찾아 고개를 돌렸더니, 마법적인 피로가 여실히 드러나는 창백한 낯빛을 한 마법사가 변명처럼 말했다.

“제공하신 연락석의 수명이 다하였습니다. 아무리 그라나도가 모든 부담을 떠안는다고 해도 이쪽 역시 최소한 그라나도까지의 통신을 유지해야 했던지라….”

마법사는 연락석도 연락석이지만 자신 역시 이제는 한계라며 죽는소리를 해댔다.

최악의 타이밍, 하필이면 통신이 끊겨도 이런 타이밍에 끊길 수가 있을까.

“망했다.”

김선혁은 차라리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

“섭정 폐하. 통신이 끊겼습니다.”

한기가 내려앉은 섭정의 눈치를 살피며 몇 번이나 망설이던 왕실 마법사가 그녀를 불렀다.

“아무래도 저쪽에서 통신 마법을 맡은 마법사의 실력이 그리 좋지 않은 모양입니다.”

혹시라도 자신에게 불똥이 튀지는 않을까 염려가 되었는지, 마법사가 황급히 변명을 주워섬겼다.

“알았으니 돌아가 보도록 하라.”

다행스럽게도 섭정은 자제력이 강했고, 제 분노를 애먼 이에게 풀 정도로 경우가 없지는 않았다.

“그, 그럼 이만….”

마법사는 도망치듯 자리를 벗어났다.

홀로 남은 오필리아의 손에 쥐어진 종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왕도의 이방인들이 제공한 신기술로 만들어낸 질 좋은 종이는 언제 보아도 감탄이 나오는 대단한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 신기술의 산물을 보는 그녀의 눈길은 절대로 곱지 않았다.

‘퀘이샤는 선량하고 유순하나 한 번 결정을 내린 부분에 대해서는 절대로 굽히지 않는 고집스러운 면모가 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이러한 그들의 성향은 특히 그들이 섬기는 어머니 나무와 반려에 대해 도드라진다고 전해집니다. 이때의 퀘이샤들은 제 목숨마저 초개와 같이 여기니, 모든 전승이 그들의 금기를 건드리지 않을 것을 권하고 있습니다.’

‘퀘이샤들은 수백 미터 밖에서 주먹만 한 표적을 명중시킬 정도로 뛰어난 궁수들입니다. 오랜 세월 경험을 쌓은 퀘이샤 궁수들은 살에 특별한 힘을 담을 수 있는데, 이들의 궁술은 경지에 도달한 상급 기사에 못지않다 알려져 있습니다.’

그라나도에서 온 마법 전문을 확인하고 마법사들에게 일러 급하게 준비한 퀘이샤의 정보, 오필리아는 마뜩잖은 기색으로나마 계속해서 보고서를 읽어갔다.

‘퀘이샤들은 남녀를 불문하고 그 용모가 수려하고 자태가 빼어납니다. 이는 그들이 물려받은 정령의 혈통과도 관계가 있으니 항간에 그들을 가리켜 요정(Elf)라 부르는 이들의 주장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닙니다. 하여 수많은 이들이 과거에도 이 아름다운 요정의 얼굴을 보기를 바라며 숲을 헤매고 다녀….’

몇 번이나 글을 읽어가던 오필리아가 와락 종이를 구겼다.

“요정이라….”

한기가 돌다 못해 서릿발이 내려앉은 듯 차가운 음성, 그녀가 싸늘하게 혼잣말을 내뱉었다.

“만약 주제넘은 욕심을 부렸다간, 요정이 아니라 요절을 내리라.”

**

근방에서 유일하게 원거리 통신이 가능한 마법사가 퍼져버리자, 아덴버그에 연락할 방법이 사라지고 말았다.

김선혁은 어쩔 수 없이 마법사가 회복하기를 기다리기로 마음먹었다.

“뭐라고 하려고 했을까.”

그는 통신이 단절되면서 함께 말허리가 끊겨버린 오필리아의 당부에 대해 고민했다.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차라리 잘 된 건가.”

말을 끝까지 듣지는 못했지만, 통신이 끝나기 직전에 오필리아는 불편한 심기를 내비쳤다. 어쩌면 차라리 듣지 못한 것이 나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괜히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라는 말이 있는 게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듣지 못한 오필리아의 마지막 말이 너무도 신경 쓰였다.

“으아아.”

괴성을 지르며 괴로워해보아도,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그렇게 밤이 되었고, 모든 일의 원흉이라고 할 수 있는 퀘이샤, 나지마가 다시 그를 방문했다.

요정족의 처녀는 당연하다는 듯이 창문을 열고 들어와 그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는 물 흐르듯이 자연스러운 손동작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던 답답한 천을 치우고는 맨얼굴을 드러냈다.

스르륵.

벌써 두 번째 보는 나지마의 맨얼굴이었지만, 충격적일 정도의 아름다움은 여전했다.

마치 자신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한 그녀의 얼굴은 지나칠 정도로 무방비했고 순진무구했다. 그래서 그는 차마 그 얼굴에 대고 분풀이를 할 수가 없었다.

“당신이 나를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어요. 그래서 많이 고민했고, 일족과 상의해보았어요.”

당사자의 입장에서 꽤나 불편할 수도 있는 이야기를 그녀는 태연하게 늘어놓았다.

“일족과 상의하면 뭐 있었던 일이 없었던 일이 된답니까?”

김선혁의 말에 나지마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니요. 하지만 당신을 만족시켜줄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낼 수는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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