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래곤 푸어-191화 (19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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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 숲의 정원사들 (2)

게하임니스의 예상대로였다.

나지마는 대륙 서쪽에서도 가장 끝단에 위치한 숲의 어머니 나무를 섬기던 퀘이샤였다. 그리고 그녀와 그녀의 일족이 섬기던 어머니 나무와 숲은 지금 마왕의 땅 한복판에 고립된 상황이었다.

당연하게도 그녀가 김선혁을 찾아온 건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서였다.

“지금은 어머니의 신령한 정기가 마기의 침범을 막아내고 있지만, 그것도 무한정 버틸 수는 없어요.”

[이상하구나. 그녀가 섬기는 어머니 나무를 직접 본 적은 없으나, 내가 기억하는 가장 작고 약한 어머니 나무라고 해도 마기를 버텨내지 못할 정도로 약하지는 않았단다.]

게하임니스에게 들은 말을 그대로 물었더니, 나지마가 한숨을 어두운 얼굴을 해 보였다.

“마기가 창궐하기 얼마 전, 어머니께서는 파종(播種)에 들어가셨어요.”

[이제야 이해가 가네. 다음 대의 묘목을 위해 기운을 소진한 어머니 나무라면 마기가 버거울 만도 해. 이때의 어머니 나무들은 놀라울 정도로 취약한 편이니까.]

대체 어머니 나무라는 게 어떤 존재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단지 그냥 평범한 나무는 아니겠거니 싶었을 뿐이었다.

“그래서 지금 나한테 어머니 나무를 지켜달라는 겁니까?”

대륙 서쪽에서부터 이곳에 이르기까지의 여정이 얼마나 험난했을지는 보지 않아도 뻔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왕의 땅에 또 한 번 들어가 뭔지도 모르는 나무 한 그루를 지키겠다고 죽을 고생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떨떠름한 그의 얼굴을 보며 나지마가 고개를 저었다.

“그럼…?”

어머니 나무를 지켜달라는 것도 아닌데 대체 무슨 도움이 필요한 것인지, 도통 감이 잡히지 않았다.

“어머니의 묘목을 안전한 곳으로 옮길 수 있게 도와주세요.”

“아….”

확실히 어머니 나무를 지켜달라는 것보다는 합리적인 부탁이었다. 단지 묘목을 안전한 곳으로 옮기는 거라면 레드번을 타고 다녀오면 그만이었으니까.

물론 비교적 쉬운 부탁이라고 해서 냉큼 들어줄 생각은 없었다.

그가 서쪽에 온 것은 단지 용의 아종을 테이밍하기 위해서였고, 언제까지고 서부에 머무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음….”

잠시 고민하던 김선혁은 문득 머릿속을 스쳐 가는 의문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정은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을 바라보는 아름다운 요정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대체 왜 얼굴을 보여준 겁니까?”

단지 도움이 필요한 것이었다면 부탁을 하면 그만이다. 평생의 동반자가 아니면 보여주지 않는다던 자신의 맨얼굴을 보여준 이유가 무엇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인간을 만나본 적은 없지만, 일족의 어른들에게 들은 게 있어요.”

무슨 말을 들었기에 다짜고짜 제 맨얼굴을 보여주었을까.

“인간에게 뭔가를 부탁할 때는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제공해야 한다고요.”

황당했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그녀에게 잘못된 지식을 알려준 이름 모를 퀘이샤를 욕해야 할까. 그도 아니면 사명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일생조차 기꺼이 바치고야 마는 그녀의 투철한 희생정신을 욕해야 할까.

머리가 지끈거리는 느낌이었다.

[따지고 보면 틀린 말도 아니지 않아? 내가 아는 인간도 그녀의 말과 다르지 않은데.]

어쩐지 웃음기가 섞인 페어리 드래곤의 음성은 그냥 싹 무시하기로 했다. 김선혁은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그녀에게 물었다.

“혹시 그걸 알려준 일족이 상대가 부탁을 들어준다는 확신이 들기 전에 먼저 대가를 제공하지 말라는 말은 안 가르쳐줬습니까?”

상대가 어떻게 나올지도 모르는데 덜컥 얼굴부터 보여준 나지마의 어리숙함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아니, 그 이전에 단지 묘목을 옮기기 위해서라면 자신의 일생 따위는 아무래도 좋은 겁니까?”

“단지 묘목이 아니랍니다. 어머니를 지키는 것은 일족의 사명, 어머니의 묘목을 지키는 것 역시 마찬가지이지요. 평생을 바쳐 지켜야 할 사명을 두고 도움을 요청하려면 저 역시 평생을 거는 게 합당하다 생각했을 뿐이에요.”

의외로 현기 어린 그녀의 대답에 그는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나지마는 어리숙한 것도 어리석은 것도 아니었다. 자신의 부탁이 지닌 무게를 알고 있었고, 그 무게를 측량하는 데 스스로에게조차 엄격한 기준을 내세웠을 뿐이었다.

“일단 알겠습니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새삼 그녀를 훈계할 마음은 들지 않았다. 이제 와서 그녀의 결정에 대해 왈가왈부하기에는 그 스스로가 퀘이샤들이 지닌 사명의 무게와 가치를 전혀 알지 못했다.

하지만 짚고 넘어갈 건 짚고 넘어가야 했다.

“얼굴은 못 본 걸로 하겠습니다. 그러니 다시 가리세요.”

부탁을 들어주건 들어주지 않건, 그건 나중에 생각해볼 문제였다. 그리고 설령 그녀의 부탁을 들어준다고 해도 그녀가 제시한 대가를 받을 생각은 전혀 없었다.

나지마가 지닌 가치관은 존중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장단을 맞춰줄 생각은 없었다.

인신매매도 아니고 말이야.

게다가 김선혁 자신에게는 두 눈 시퍼렇게 뜨고 기다리고 있을 임자가 있었다. 축첩은 안 된다며 단호하게 말하던 오필리아의 얼굴을 떠올린 그가 괜스레 몸을 떨었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죄를 지은 듯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지금이라면 상황을 수습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그의 생각은 틀리고 말았다.

[단지 사명이기에 제 평생을 바치는 이들이야. 네 말 한마디에 있던 일을 없던 일로 만들 정도로 저들은 약지 않단다.]

“뭐?”

[네가 받아들이건 받아들이지 않건 맨얼굴을 너에게 보여준 이상 저 퀘이샤는 평생 동안 네가 아닌 다른 이를 만나지 않을 거란 뜻이야.]

“그런 게 어딨어!”

버럭 소리친 김선혁이 나지마를 보고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게하임니스의 말대로 그녀는 얼굴을 가릴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일단은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시다니, 내일 다시 찾아뵙도록 하겠어요.”

떠나는 순간이 되어서야 다시 제 얼굴을 가린 나지마의 마지막 모습을 보고 있자니, 페어리 드래곤의 말이 그냥 하는 말 같지 않았다.

[받아들이기에 따라 다른 문제란다. 퀘이샤들의 반려는 단 하나뿐이지만, 그게 꼭 이성 간의 관계를 뜻하는 건 아니니까. 실제로 퀘이샤들 중에는 동성을 제 반려로 삼는 자들이 더러 있단다.]

게하임니스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산증인은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있었다.

“진짜 미친 거 아니에요?”

바로 박준민이었다.

“시커먼 남자 놈이 갑자기 제 얼굴을 보여주면서 평생 동안 헌신하겠다고 맹세하는데, 완전 소름 돋았다니까요!”

아닌 게 아니라 말을 하는 용사의 피부에 닭살이 우둘투둘하게 올라와 있었다. 정말 어지간히 싫었던 모양이다.

야심한 시각에 퀘이샤의 방문을 받은 것은 똑같았지만, 두 사람이 처한 상황은 달랐다. 김선혁은 어머니 나무의 묘목을 운송해달라는 부탁을 받았고, 박준민은 마왕과의 싸움을 함께 할 새로운 동료를 얻었다.

여기까지만 들으면 힘겨운 싸움에 자청해 합류한 퀘이샤의 존재를 달가워해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박준민은 거의 히스테리에 가까울 정도로 거부감을 보였다.

“진짜 여자한테도 못 받아본 프로포즈를 시커먼 사내놈한테 먼저 받을 줄은… 으아아.”

아무래도 합류의 과정 탓인 듯했다.

“퀘이샤들의 반려관이라는 게 우리가 생각하는 거랑 다른 모양이야. 종종 동성 간에도 반려의 관계를 맺는 경우가 있….”

“바, 반려의 관계요?”

페어리 드래곤에게 들었던 퀘이샤들의 반려관을 설명해준다는 것이 오히려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말았다.

용사의 얼굴이 아예 하얗게 질려버렸다.

“음….”

왠지 모르게 어색한 공기, 김선혁은 황급히 화제를 돌렸다.

그는 퀘이샤 일족이 처한 상황과 어머니 나무의 묘목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자신 역시 퀘이샤의 방문을 받았고, 맨얼굴을 보고 말았다는 이야기를 해줄 수밖에 없었다.

“여자요? 여자 엘프라고요?”

“여자 엘프가 아니라 퀘이샤.”

“그러니까 여자 퀘이샤요.”

다른 이야기는 귀에도 들어오지 않았는지, 박준민은 오직 퀘이샤의 성별에만 관심을 보였다.

“아, 왜!”

용사가 버럭 소리쳤다.

“왜! 왜! 대체 왜! 형님은 유부남인데 여자 퀘이샤고, 난 총각인데! 남자 퀘이샤냐고!”

전날 퀘이샤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뭔가 기대하던 눈치더니,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이 큰 모양이었다.

“이뻐요? 이뻤냐고요? 아니, 물을 필요도 없지. 분명 이뻤을 거야. 남자 퀘이샤도 그렇게 잘 생겼는데. 여자 퀘이샤는 얼마나 이쁠까.”

속사포처럼 질문을 쏟아내는 박준민을 보며 김선혁은 그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왠지 모르게 대답을 해서는 안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후우….”

박준민이 진정한 건 그로부터 한참이나 시간이 흐른 뒤였다.

“그럼 형님은 그 어머니 나무의 묘목이라는 걸 옮기기만 하면 끝인 거예요?”

김선혁은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하, 진짜 그것도 불공평하네. 형님은 택배 한 번 뛰면 되는 거고. 나는 마왕이랑 죽네 마네 싸워야 하잖아요. 그런데도 형님은 여자 엘프고 나는 남자 엘프고….”

그대로 두었다가는 또다시 되지도 않을 소리를 지껄여댈 기세라 그가 빠르게 그 말을 막았다.

“아직 들어준다고는 하지 않았어. 너도 알다시피 서부에서의 내 볼일은 전부 끝이 났고, 내 소속은 아덴버그 성전 원정 선발대잖아.”

“그래서 설마 안 들어주실 거예요? 얼굴 보셨다면서요?”

“내가 원해서 본 건 아니니까.”

김선혁의 입장에서는 억울할 뿐이었다. 원하지도 않았는데 다짜고짜 찾아와 얼굴을 보여주고는 평생을 바치겠다니 부담이 돼도 여간 부담이 되는 게 아니었다.

하물며 그는 임자가 있는 몸이 아니던가.

아무리 퀘이샤들의 반려관이 인간의 그것과 남다른 면이 있다고 해도, 다른 이들이 보기에 자신의 꼴이 그다지 좋아 보이지는 않을 게 분명했다.

여왕의 남편으로서 그런 추문에 휩싸이는 건 사양하고 싶었다.

물론 개중에는 이 대책 없는 용사처럼 맹목적으로 부러워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자신으로 인해 차기 여왕의 권위가 실추되는 것은 절대로 바라지 않는 일이었다.

“일단 이 이야기는 여기까지.”

이러니저러니 불평을 하며 속을 뒤집어놓기는 했어도 박준민은 그의 말에 토를 달지는 않았다.

“넌 이제 어떻게 할 거야?”

김선혁은 박준민에게 앞으로의 진로를 물었다.

“저는 외곽에서부터 마수를 잡으면서 힘을 키울 생각이에요.”

만티코어를 상대하며 스스로의 부족함을 절실하게 깨달았다 말하는 박준민의 다부진 얼굴에서, 무작정 마왕이 있는 곳으로 쳐들어가겠다던 처음의 무모함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지금은 마수 하나도 제대로 상대하지 못해 애먹고 있지만, 언젠가는 마왕도 잡을 수 있을 정도가 되겠죠. 발뭉이가 그렇게 약속했고, 저도 자신 있어요.”

그렇게 자신의 포부를 밝힌 용사가 이번에는 김선혁에게 물었다.

“형님은 어떻게 하실 거예요?”

명분을 만들기 위해 급조한 원정대였지만, 어쩌다보니 원정대의 책임자 자리를 맡게 되었다. 개인적인 볼일이 끝났다고 해서 훌쩍 서부를 떠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일단은 아덴버그에 연락을 해봐야겠지.”

기왕지사 상황이 이렇게 되었으니, 김선혁은 차라리 아데스덴 왕실이 어디까지 성전에 관여하려는 것인지 의사를 물어보고 향후의 계획을 짜볼 생각이었다.

김선혁은 박준민을 뒤로 하고 줄리앙 일행을 찾았다.

“국경 수비대에서 전시를 대비하여 상비하고 있던 비상용 연락석입니다. 섭정 폐하의 배려로 몇 개 챙겨올 수 있었습니다.”

역시나 예상대로 줄리앙은 원거리 통신이 가능한 질 좋은 연락석을 갖고 있었다.

“아덴버그까지 한 번에 연락을 보내는 건 불가능합니다.”

단지 문제가 있었다면 마법사에 대해 배타적인 교국의 특성상 멀리 동부의 아덴버그에까지 한 번에 연결해줄 수준 높은 마법사가 없었다는 것이었다.

“그럼 이베리아 연합의 그라나도 시로 통신을 중계해주시겠습니까?”

“확실히 그라나도라면 실력 있는 마법사가 넘쳐나지요. 알겠습니다. 바로 연결하겠습니다.”

결국 김선혁은 이베리아 연합을 경유하는 식으로 마법 전문을 보내기로 했다.

[용건 마무리. 선발대와 합류, 현재 명령 대기 중.]

자신의 무사함을 알리는 간단한 메시지와 함께 대강의 사정을 설명하는 전문을 보냈더니, 그라나도에서 곧장 답신이 왔다.

[전승공에게 도착한 마법 전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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