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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 숲의 정원사들 (1)
머리에서 발끝까지 망토로 꽁꽁 싸맨 상대의 모습은 마치 저쪽 세상의 중동의 암살자를 닮아 있었고, 몹시 수상했다.
“저희는 수상한 이들이 아닙니다.”
경계의 시선을 느낀 것인지, 무리의 대표가 한마디를 덧붙였다.
당연하게도 설득력은 전혀 없었다. 세상 천지에 자신이 수상한 존재라 주장하는 이들은 없을 테니까.
“어디에서 온 누구인지는 모르겠으나, 얼굴조차 드러내지 않은 인사를 반겨주기에는 일행이 겪은 일들이 결코 순탄치만은 않았음을 말해드리고 싶군요.”
처세에 능한 줄리앙이 낯선 무리의 행동을 콕 집어 지적하며, 정체를 밝힐 것을 권유했다.
하지만 엉뚱하게도 낯선 상대는 제 사정만 툭, 하고 변명했을 뿐 후드를 걷어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사정이 있어 얼굴을 드러내지 못함을 이해해주시기를.”
물씬 풍겨오는 싱그러운 향과는 달리 건조하기 짝이 없는 어투, 대화를 하면 할수록 경계심이 강해졌다.
혹시라도 교국의 인물들이라면 이들의 정체를 알까 싶었지만, 낯선 무리를 경계하는 것은 교국 일행도 마찬가지였다.
김선혁은 고민했다.
그냥 지나치자니 자신들을 기다렸다 말한 이들의 용건이 궁금했고, 그렇다고 맞상대를 하자니 얼굴도 드러내지 않는 자들과 대화를 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음.”
고민하던 그는 한 발 물러나기로 마음먹었다. 어차피 이곳은 아스토리아의 영토, 굳이 자신이 나서야 할 이유가 없었다.
[퀘이샤(Qeisha)]
만약 작은 아룡이 갑작스레 말을 걸어오지 않았다면, 정말로 모든 일을 교국의 인물들에게 떠넘기고 물러났을 것이다.
“퀘이샤?”
물러나려던 걸음을 멈춘 그를 보며 게하임니스가 설명해주었다.
[숲과 들, 모든 푸른 땅의 원주인들이자, 정령의 피를 이은 요정 일족이란다.]
“요정?”
요정이라는 말에 김선혁은 저도 모르게 망토를 뒤집어쓴 일단의 무리를 바라보았다.
먼지 가득 덮인 망토를 보면 필시 먼 거리를 달려왔을 텐데도 땀 냄새는커녕 상쾌한 풀냄새가 나는 것도 이상했고, 유달리 호리호리한 체형도 어딘지 모르게 인간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하기야 마법도 있고 정령도 있는 세상에 요정이 있다고 해서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래도 신기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저들이 정말로 내가 아는 퀘이샤들이라면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야. 저들은 평생을 함께 할 동반자가 아니라면 절대로 맨얼굴을 보여주지 않는 족속들이거든.]
“아….”
페어리 드래곤의 설명에 이제는 망토로 꽁꽁 싸맨 수상한 모습조차 신기하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형님. 이 사람들 대체 누군데요?”
아룡과 대화를 나눈다고 몇 마디를 내뱉은 걸 용케 들은 박준민이 퀘이샤들의 정체를 물었다. 딱히 숨길 이유가 없었던 그는 자신이 들은 대로 퀘이샤에 대해 알려주었다.
“그럼 엘프 같은 거네요?”
대체 무엇을 기대한 것인지 박준민이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퀘이샤들을 바라보았다. 몽롱한 눈빛을 보니 필시 뭔가 망상이라도 떠올리고 있는 게 분명했다.
“어머니 나무를 섬기는 선량한 정원사들이라면 성서에도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설마 살아생전에 제가 저들을 직접 보게 될 줄은 몰랐지만 말입니다.”
교국의 인물들 역시 요정의 존재가 신기한 건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일행은 좀처럼 퀘이샤들에게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 사이에도 김선혁은 게하임니스와 계속해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대충 저들의 정체는 알겠는데, 대체 저들이 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던 거지?”
정체에 대한 궁금증이 충족되자 이제는 저들이 자신을 찾아온 용건이 궁금해진 그였다.
[그건 나보다는 저들에게 직접 듣는 게 좋겠구나.]
그의 질문에 게하임니스가 뾰족한 턱을 내밀어 퀘이샤들의 대표를 가리켰다.
[다만 퀘이샤들이 자신들의 영역을 떠나는 건, 오직 어머니 나무의 안위에 위험이 생겼거나, 어머니 나무 스스로의 의지가 저들에게 전해졌을 때뿐이란다. 그저 지금으로선 전자가 아니길 바라야겠지.]
**
일단 거듭된 전투로 지쳐있던 일행은 마기 중독자들이 치료를 받던 신전으로 향했다. 퀘이샤들 역시 함께였다.
가타부타 말도 없이 일행의 뒤를 따르는 퀘이샤들의 행동을 본 한센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되게 답답한 사람들이네. 용건이 있으면 먼저 말을 하지. 뭐 저렇게 뜸을 들여.”
다른 일행 역시 한센과 마찬가지 생각인지 무심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퀘이샤들은 김선혁과 일행이 신전에 도착할 때까지 말이 없었다. 정말로 용건이 있기는 한 건지 의심이 갈 지경이었다.
[퀘이샤들은 예로부터 말이 없기로 유명한 족속들. 하지만 그렇다고 할 말을 하지 않을 정도는 아니니 기다리면 저들이 반드시 먼저 말을 걸어올 거야.]
페어리 드래곤의 말이 아니더라도 달리 방법이 없었다. 용건을 물어도 대답이 없는 저들의 입을 억지로 열 방법 따위 김선혁은 알지 못했다.
“오오! 주교님과 전승공 일행이 돌아오셨다!”
신전에 도착하니, 기다리고 있던 이들이 그들을 반겨주었다.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먼저 신전에 도착한 이들이 마수의 존재를 알려준 탓인지, 신전에 남아있던 사제들은 일행의 무사귀환에 몹시 감격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서쪽 하늘에서 몇 번이나 상서로운 빛이 번쩍여서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비교적 나이가 지긋한 중년 사제가 건네는 말에 노사제가 껄껄 웃으며 그간의 이야기를 간략하게 설명해주었다.
“신의 보살핌입니다. 그런 끔찍한 마수들의 습격을 물리치고, 이리 무사히 돌아오신 건.”
짧게 추린 이야기나마 대강의 사정을 알게 된 중년 사제는 몇 번이나 성호를 그으며 신께 감사를 드렸다.
그리고는 연이은 격전에 지쳤을 일행을 배려해 곧장 숙소로 안내를 해주었다. 과연 금욕적인 사제다운 담백한 태도였다.
“성전사단과 신전 기사들에게 미리 당부하여 성검에 대한 이야기는 언급치 않도록 했습니다. 혹여 대접이 시원찮다 해도 너무 허물치 마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노사제의 말에 박준민은 차라리 잘되었다는 표정이었다.
“허물은요. 돌려달라고 쫓아다니지 않는 것만 해도 어딘데요.”
그 속 편한 대답에 피식 웃어 보인 김선혁이 뒤를 돌아보았다.
“갔네.”
신전에 도착하기 직전까지만 해도 뒤를 따라오고 있던 퀘이샤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중간에 어디로 사라진 모양이었다.
“또 오겠지.”
어차피 퀘이샤들의 용건이 자신에게 있다는 사실을 안 이상, 굳이 안달 낼 필요가 없었다.
아쉬운 건 저들이었지 자신이 아니었으니까.
예상대로였다. 사라졌던 퀘이샤 무리는 돌아간 게 아니었고, 금방 모습을 드러냈다. 다만 그 시간이 그의 예상과 달랐을 뿐이었다.
똑똑.
막 잠이 들려다 인기척을 느끼고 벌떡 일어난 김선혁은 창문을 두들기는 퀘이샤의 모습을 보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똑똑.
그런 그를 빤히 바라보며 퀘이샤가 다시 정중하게 문을 두들겼다. 만약 퀘이샤가 서 있는 곳이 창밖이 아니라 문밖이었다면 상대의 매너를 칭찬해주었을 정도로 예의바른 모습이었다.
하지만 맨살 하나 드러내지 않은 채 망토를 휘감고 어둠을 등지고 선 퀘이샤의 모습은 보기에 따라 섬뜩해 보이기도 했다. 한밤에 암살자가 찾아온 것이라고 해도 믿어질 정도였다.
똑똑.
그대로 두었다간 언제까지고 창을 두들길 것 같은 퀘이샤의 모습에 한숨을 내쉰 김선혁이 창문을 열어주었다.
“실례할게요.”
아무래도 이 요정은 예절을 잘못 배워도 한참을 잘못 배운 게 확실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때와 장소가 한참이나 잘못됐음에도 저리 뻔뻔하게 인사를 건네올 리가 없었다.
“끄응.”
어차피 상대가 인간이 아닌 이상 인간의 규범을 엄격하게 들이대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다. 한숨을 내쉬며 다 포기한 김선혁은 자신을 찾아온 용건을 물었다.
“절 왜 찾아온 겁니까.”
퀘이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았을 뿐이었다.
이건 또 뭐 하자는 짓이야.
한참이나 말이 없는 상대를 보며 김선혁이 다시 한 번 용건을 물으려는데, 갑작스레 퀘이샤가 손을 들어 후드를 들춰냈다.
스르륵.
창백한 달빛을 닮은 백발이 후드 밖으로 쏟아져 내렸다.
“지금 뭐 하는….”
미처 말릴 새도 없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요정의 맨얼굴이 드러나고 난 뒤였다.
확, 하고 코를 파고드는 상큼한 향에 저도 모르게 숨을 크게 들이켰다. 가슴 깊이 파고드는 풀 내음, 그는 홀린 듯이 퀘이샤 여인의 모습을 바라보고 말았다.
평생을 가리고 다녔던 탓인지 피부는 하얗다 못해 핏줄이 다 보일 정도로 투명했고, 별을 닮은 푸른 눈동자는 맑고 또 맑았다. 달빛을 받아 파랗게 빛나는 기다란 생머리 아래의 조그만 얼굴은 너무도 아름다웠다.
퀘이샤는 마치 이 세상의 존재가 아닌 것처럼 신비로웠고, 매혹적이었다.
“아….”
김선혁은 순수한 마음으로 감탄했다. 하지만 감탄도 잠시였을 뿐, 이내 정신을 차리고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저들은 평생을 함께 할 반려가 아니라면 절대로 맨얼굴을 보여주지 않는 족속들이거든.’
‘저들은 평생을 함께 할 반려가 아니라면 절대로 맨얼굴을….’
‘저들은 평생을 함께 할 반려가…’
‘평생을 함께 할 반려….’
머릿속으로 페어리 드래곤에게 들었던 말이 수도 없이 맴돌았다.
‘축첩은 불가하니라.’
그 사이로 엄격하면서도 정감이 넘치는 여인의 음성이 환청처럼 섞여들었다.
“아이씨….”
반려가 아니면 얼굴 안 보여준다던 페어리 드래곤을 원망해야 할까, 그도 아니면 이번 일은 불가항력이었다고 스스로를 합리화해야 할까.
김선혁이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데, 문제의 퀘이샤가 입을 열었다.
“제 이름은 나지마 빈트 알가르브움무(Najma bint Algharb Al'umm).”
상큼한 체향과 달리 건조한 어투 탓에 느꼈던 위화감이 거짓말처럼 씻겨 내려갔다. 퀘이샤, 나지마의 음성은 처음 보았을 때와는 달리 마치 노래하듯 생기가 넘쳤다.
“당신의 이름이 알고 싶어요.”
이건 절대로 바람을 피는 것도 축첩을 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필리아.
닿지도 않을 변명을 몇 번이나 속으로 곱씹던 김선혁이었지만, 뒤이어 들려온 게하임니스의 말에 퀘이샤의 율법 따위는 안중에도 없게 되었다.
[이런, 안 좋은 예감이 맞아버렸구나. 그녀의 이름에 들어간 알가르브움무는 ‘서쪽의 어머니’라는 뜻이란다.]
“설마….”
김선혁은 서쪽이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저도 모르게 몸이 굳고 말았다.
[아무래도 그녀는 서쪽에 있는 어머니 나무를 섬기던 퀘이샤인 모양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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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이샤가 찾아온 것은 김선혁뿐이 아니었다.
박준민 역시 때 늦은 퀘이샤의 방문을 받았고, 그를 찾은 퀘이샤는 나지마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맨얼굴을 보여주었다.
스르륵.
퀘이샤는 평생을 함께 할 동반자가 아니라면 절대로 맨얼굴을 보여주지 않는다던 김선혁의 설명을 떠올린 용사는 완전히 넋을 잃고 말았다.
그런데 그 표정이 아름다운 요정의 맨얼굴을 보고 감탄했다기보다는 차라리 못 볼 것을 봤다는 표정에 가까웠다.
“마람 빈 알가르브움무(Maram bin Algharb Al'umm).”
창백하게 질려 뒷걸음질을 치는 용사를 보며 퀘이샤가 자신의 이름을 말해주었다.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십시오.”
그를 찾아온 퀘이샤, 마람은 선이 고운 미남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