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90 =========================================================================
190. 드라카네이드
- 3차 병과 용기병대장(Dragon Master Chief Rider)에서 4차 병과 용기사(Dragon Knight)로 전직합니다.
- 용기사로 전직하시겠습니까?
세 차례에 걸쳐 전직을 해왔지만, 본질은 결국 용기병이었다. 용기병이라는 명칭 뒤에 장, 또는 대장의 칭호가 더해졌을 뿐이었다.
하지만 4차 전직은 달랐다. 기병이라는 칭호가 완전히 사라지고, 그 자리에 기사의 호칭이 붙은 것이다.
4차 전직 메시지를 들었을 때부터 두근거리기 시작한 심장이 더욱 더 날뛰어대기 시작했다.
“전직.”
그 순간 더 없이 강렬한 빛이 그의 온몸을 휘감았다. 이제껏 그가 겪어왔던 세 차례의 전직, 그 어느 때보다 찬란하고 강렬한 섬광이었다.
“전승공?”
“영주님?”
한창 찬사를 늘어놓던 사람들이 섬광에 휩싸인 그를 발견하고는 눈을 찢어져라 부릅떴다.
“이건 또 무슨….”
사람들은 갑작스러운 빛에 영문을 몰라 발을 동동 굴렀다. 그들 중에 상황을 알아차린 것은 오직 박준민 뿐이었다.
“레, 레벨 업? 아니, 저건 전직?”
용사 스스로도 겪어보았던 추가 전직의 현상, 박준민은 질린 얼굴로 김선혁을 바라보았다.
“지금도 충분히 강한데 얼마나 더 강해지려고….”
창공을 자유롭게 누비는 와이번을 탄 용기병은 분명 강한 존재였다. 하지만 박준민은 마수를 상대할 때만큼은 자신이 훨씬 더 강하다고 자부했다.
그런 자부심이 깨어진 게 바로 방금 전이었다.
비록 자신이 지쳐 있었다고는 하지만, 팔라딘들의 도움을 받고도 겨우 평수를 이루었던 강력한 마수를 용기병이 단번에 도륙 내버렸다.
발뭉의 힘을 최대치로 발휘한다고 해도 저런 위력을 낼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엄두가 나지 않는 초월적인 힘이었다.
그런데 그런 용기병이 또 한 번 성장을 하려 하고 있었다.
스스로의 힘과 발뭉의 힘을 자신하던 용사로서는 질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고오오오오오.
빛이 더욱더 강렬해졌다. 처음에는 김선혁의 몸을 둘러싸는 게 고작이었던 섬광이 이제는 하늘 끝까지 닿을 듯했다.
빛으로 만들어진 기둥, 그 너머에 김선혁이 뭔가 생각하는 표정으로 허공을 훑어보고 있었다.
“발뭉아. 너 내가 최고라고 하지 않았어?”
박준민은 애먼 성검에게 얼빠진 소리를 내뱉었다.
[네 스스로의 힘을 믿고 나를 믿어라. 지금의 너는 전부가 아니니, 너 또한 성장할 것이다.]
“성장이야 하겠지.”
성검의 말에 박준민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근데 내가 성장한다고 해도 저 사람보다 강해질 것 같지는 않은데….”
그의 눈에 각기 푸르고 붉고 누런 기운이 교차하여 만들어낸 신비로운 섬광이 비쳤다. 그리고 그 너머에 김선혁이 있었다.
“진짜….”
대륙에 퍼진 드라흔의 드높은 명성, 공작이라는 작위와 차기 여왕의 남편이라는 배경, 거기에 더해 다섯의 팔라딘과 자신이 달려들고도 제압하지 못했던 마수를 둘씩이나 홀로 찢어발길 정도의 힘. 뭐 하나 부족한 게 없었다.
“괴물이 따로 없잖아.”
패배감조차 느껴지지 않아 그저 감탄만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음….”
박준민이 이상을 느낀 것은 한참이나 시간이 더 흐른 뒤였다.
일반적인 전직이라면 이렇게까지 요란하지도, 시간이 오래 걸리지도 않는다. 짧은 섬광이 스쳐가듯 발광하며, 금방 끝나게 마련이다.
그런데 지금 김선혁을 둘러싼 오색의 섬광은 거의 10분이 지나도록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이건 절대로 정상적이지 않았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걱정보다 기대감이 드는 것은 당사자를 둘러싼 섬광이 너무도 상서로웠고, 주변을 둘러싼 아룡들의 기색이 너무도 평안했던 탓이었다.
사아아아아.
하늘 끝까지 치솟았던 빛의 기둥이 위에서부터 조금씩 줄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이 되자 작은 빛무리만을 남기고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형님?”
박준민은 드디어 전직이 끝이 났음을 깨닫고 허겁지겁 달려갔다.
“형님, 전직하신 거죠?”
김선혁은 박준민의 호들갑스러운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가만히 제 몸을 살펴보고 있었다.
“영주님!”
자신들의 영주에게 관련된 일이라면,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쉬이 넘어가는 법이 없는 충성스러운 이들이 와락 달려와 영주를 살폈다.
“방금 전 빛은 대체 뭡니까. 몸은 괜찮으십니까?”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질문, 그는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그는 여전히 몽롱해 보였고, 정신도 없어 보였다. 멍한 와중에도 그의 눈만큼은 바쁘게 허공을 훑고 있었다.
그런 김선혁이 입을 연 것은 빛이 걷히고도 한참이나 시간이 흐른 뒤였다.
“드라카네이드(Drakanade)”
“드라… 뭐요?”
이건 또 무슨 말인지, 뜻 모를 한마디에 사람들이 얼빠진 얼굴을 해 보이는데 갑작스레 어디선가 우드득, 뼈마디가 갈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의 근원지를 찾을 것도 없었다. 소리는 일행의 바로 코앞에서 들려왔으니까.
김선혁, 그의 온몸에서 뼈가 갈리고 부딪치는 소리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투드득.
그 사이로 무언가가 끊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싶더니, 넝마가 되어 있던 갑주의 연결 고리가 떨어져 나갔다.
“어? 어?”
완전히 노출된 김선혁의 육신 이곳저곳이 뚝, 뚝 하는 소리와 함께 경련을 일으켰다.
근육이 팽창하고 팔, 다리가 쑥 하고 길어졌다. 그리고 그 위로 각질 같은 단단한 무언가가 돋아났다.
순식간에 일어난 변화가 끝이 났을 때는 난생 처음 보는 괴인(怪人)이 있었다.
머리는 드레이크의 머리를 형상화한 투구를 쓴 듯 했고, 어깨는 머리통보다 거대한 각질로 덮여 있었다. 변한 것은 어깨와 머리뿐만이 아니었다. 온몸을 감싼 금빛 비늘로 인해 맨살 하나 드러나지 않는 육신은 마치 금린으로 만들어진 갑주를 입은 듯한 모습이었다.
상체는 구부정하게 굽혀져 있었는데, 2미터를 훌쩍 넘어 3미터에 가까운 신장과 너른 어깨 탓에 그게 외소해 보이기는커녕 도리어 위압적으로 보였다.
후우. 후우.
눈을 감고 유황 냄새 섞인 숨을 거칠게 몰아쉬고 있던 괴인, 김선혁이 눈을 번쩍 떴다.
그 순간 그의 존재감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두려움을 모르는 팔라딘들마저도 무심코 뒷걸음질을 칠 정도로 무지막지한 기세였다.
“이게 용인화(龍人化)….”
으르렁거리듯 묵직한 음성이 마치 상처 입은 짐승의 그것처럼 사나웠다.
“더럽게 아프네….”
**
“그러니까, 그게 이번 전직으로 얻은 힘이라는 거죠?”
“그렇다니까.”
용인은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끙끙 앓으면서도 성실하게 일행의 질문에 답변을 해주었다.
“대체 무슨 병과로 전직했길래 이런 말도 안 되는 스킬이 생긴 거예요?”
단지 기세만으로 팔라딘들을 물러서게 만든 용인의 힘,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 것도 당연했다.
김선혁은 자신들 보며 눈을 빛내는 줄리앙 일행과 교국 사람들을 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화악.
그 숨결이 어찌나 뜨거운지 가까이 붙어 있던 이들이 화들짝 놀라 물러날 정도였다.
“미안. 아직 힘 조절이 안 돼서.”
아닌 게 아니라 평생 동안 사용해왔던 제 몸 대신 남의 몸에 들어가 있기라도 한 것처럼 몸을 움직이는 게 쉽지 않았다.
게다가 새로운 육신은 끔찍할 정도로 힘이 넘쳤고, 조금만 신경을 쓰지 않아도 멋대로 움직이기 일쑤였다.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잠시 사람들에게 멀리 떨어져 줄 것을 당부한 그가 뒤늦게 질문에 대답했다.
“용기사. 그게 내 새로운 병과의 이름이다.”
**
4차 전직은 그간 그가 겪어왔던 세 차례의 전직과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이제까지의 전직이 용기병 병과의 연장선상에 있었던 것이라면, 4차 전직은 아예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 식이었다.
그간 그가 체감하기 힘들었던 용기병대를 지휘하는 지휘관으로서의 능력 대신 개인의 무력과 힘의 성장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드라카네이드, 용인화는 그런 용기사의 스킬들 중에서도 정점에 있는 강력한 힘이었다.
일시적으로 육신을 변형시키는 드라카네이드 스킬의 효과는 단지 위압적인 겉모습을 갖추는 데 있지 않았다.
완벽하게 스킬을 발현한 용기사의 육신은 인간의 한계를 아득히 초월한 초인들의 그것마저 넘어서는 무지막지한 근력과 순발력, 내구력을 지니게 된다.
인간과 다른 구조의 신체이기에 무기조차 필요하지 않았다. 그저 몸으로 들이받고 날카로운 손톱을 휘두르는 것만으로도 어지간한 적들을 썰어버릴 수 있는 막강한 힘이 있었다.
다른 힘에 의지할 필요도 없었다.
용인의 육신은 그 자체로 가장 강력한 무기이자 단단한 갑옷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여건만 갖춰지면 용인은 아룡들이 지닌 속성의 힘을 보다 능동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 단지 바람의 힘을 빌어 예기를 더하고 땅의 힘을 빌어 몸을 단단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속성이 지닌 힘 자체를 무기로 사용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당장은 불가능했다.
지금의 김선혁은 용인화 스킬의 부작용인 근육통과 골통을 극복하기에도 힘든 상황이었다. 속성의 힘을 구현하기는커녕, 이 거대한 육신을 움직이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하지만 용인화 스킬이 무한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것만큼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근래 들어 부쩍 효과를 보지 못한 윈드 피어싱과 풍아 등의 주력 공격 스킬들을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힘인 것이다.
용기사의 힘은 비단 드라카네이드 스킬 하나가 아니었다.
용기사는 용기병과는 다르게 하나의 적을 상대로 압도적인 힘을 발휘하는 데 특화되어 있었고, 이와 관련된 스킬이 여러 개 있었다.
단지 그가 지금 당장 사용할 수 있는 스킬이 이 드라카네이드 스킬 하나였을 뿐이었다.
“그게 뭔데요?”
복잡한 얼굴로 물어오는 박준민을 보며 김선혁이 피식 웃었다.
“차차 알게 될 거야.”
본인은 웃는다고 웃고 있었지만, 그게 남들이 보기에는 살벌한 흉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지라 분위기가 요상해지고 말았다.
물론 김선혁은 그 사실을 몰랐다.
“끙. 근데 이거 진짜 아프네.”
그리고 그는 용인의 강력한 성량은 혼잣말조차도 주변을 쩌렁쩌렁하게 울릴 정도로 크다는 사실을 몰랐다.
“용기사가 되면 계속 그 모습인 건 아니죠?”
박준민의 황당무계한 질문에 김선혁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설마 그럴 리가 있겠냐. 스킬이 풀리…어?”
그는 뒤늦게 자신이 용인화 스킬을 해제하는 방법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굳어버렸다.
**
용인화 스킬이 풀린 것은 그로부터 한 시간 가까이 시간이 흐른 뒤였다.
“아고. 죽겠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존재 자체로 사방을 위압하던 용인은 온데간데없었고, 그 자리에는 다 죽어가는 병자 하나가 있었다.
“이거 함부로 쓰지도 못하겠네. 후유증이 장난이 아니야.”
그의 불평에 박준민이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애매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 정도면 필살기 아닙니까. 필살기.”
용사는 용인의 모습이 꽤나 멋져보였는지 자신도 그런 스킬 하나쯤은 갖고 싶다며 푸념을 했다.
“이제 갑시다.”
이질적인 용인의 모습으로 국경을 넘을 수도 없어 한참이나 시간을 허비해야 했던 김선혁과 일행이 그제야 이동을 시작했다.
용사가 주변을 정화한 덕에 근방의 마물들은 씨가 말랐고, 숨통을 조여오던 마기도 더 이상 그들의 발목을 붙잡지 않았다.
당연하게도 그들은 들어왔을 때보다 몇 배는 빠른 속도로 국경에 도달할 수 있었다.
“어?”
그렇게 무사히 교국의 영역에 도달한 김선혁 일행은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던 낯선 무리를 발견하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두 분을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무리의 대표로 보이는 자가 사뿐히 다가와 건네는 인사에 어쩐지 풀 내음이 가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