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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용기병대(Dragon Squad) (3)
만티코어, 이슈바트는 몹시 기분이 좋았다.
야들야들한 인간들이 대부분 도망쳤지만, 상관없었다. 그보다 몇 배는 맛 좋은 용의 아종들이 하나도 아니고 셋씩이나 남아있었다. 새삼 흔해빠진 인간의 고기에 아쉬울 이유가 없었다.
물론 드물게 강인하고 사나운 아룡들을 제압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아룡들의 저항은 격렬했고, 그 바람에 날개를 찢기고 온몸에 상처를 입고 말았다.
하지만 이슈바트에게는 그것 또한 사냥의 유희 중 하나였다. 발밑에 깔려 아등바등 대는 사냥감의 저항은 언제나 그녀를 즐겁게 만드는 것이었고, 이번 경우라고 다르지 않았다. 하물며 그 사냥감이 희귀한 별미임에야 그 즐거움이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곧 있을 만찬을 기대하며 아룡들이 지치기를 끈질기게 기다렸다.
이제 곧 저 거추장스러운 비늘 아래 있을 정기(正氣) 가득한 고기와 내장을 먹을 수 있다는 생각에 벌써부터 입에 군침이 고이기 시작했다.
성대한 만찬 전의 즐거움, 이슈바트는 탐욕스럽게 웃었다.
하지만 그런 즐거움도 딱 방금 전까지였다.
고오오오오오오.
하늘 저편에서 갑작스레 신비로운 오색 섬광이 퍼져나간다 싶더니, 온 하늘을 뒤덮었다.
무언가 잘못되었다.
본능, 그보다 훨씬 더 원초적이고 근원에 가까운 예감이 그녀에게 경고했다.
그때 도망쳤어야 했다. 하지만 이 일대의 지배자로 군림해왔던 이슈바트는 경고를 무시했다. 그리고 그건 명백한 실수였다.
크르르르르.
발밑에서 들려온 울음소리에 온몸의 털이 쭈뼛 섰다.
이슈바트는 소리의 주인을 찾아 고개를 돌렸다.
방금 전까지 자신의 발아래 깔려 필사적으로 발버둥을 쳐댔던 사냥감은 더 이상 그 자리에 존재하지 않았다.
덜덜덜.
온몸이 떨려왔다. 태어나 한 번도 무언가에 대한 경외, 또는 두려움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그랬기에 이슈바트는 지금 자신이 느끼는 맹렬한 감정의 정체를 깨닫는 데 한참이나 걸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게 포악한 마수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비켜.]
웅혼한 음성이 머릿속을 파고들었지만, 몸이 굳은 이슈바트는 움직일 수 없었다.
[추잡한 혼돈의 마수 따위가 감히!]
성난 존재가 호통을 치고는 턱을 꿈틀댔다. 그리고 그 간단한 움직임만으로 이슈바트의 억센 다리 하나가 뚝, 하고 끊어졌다.
아아….
자신의 몸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미처 파악할 새도 없이 끔찍한 고통이 찾아왔고, 반대편 다리 하나가 또다시 잘려나갔다.
크아아아악.
앞발이 모두 잘린 이슈바트는 제 몸에서 흘러나온 피 웅덩이에 머리를 처박고 비명을 질러댔다.
[딱 좋군.]
경배하듯 머리를 처박은 마수를 바라보던 금빛 존재가 그제야 흡족하게 웃었다.
**
“이게 대체 무슨….”
김선혁은 눈앞의 광경을 보고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마수의 발아래 깔려 버둥거리던 골드레이크가 단번에 전세를 역전시킨 것이다.
무성의하게 턱을 아그작 거린 것만으로 이제껏 수도 없는 공격을 버텨냈던 마수의 억센 두 다리가 잘려져 나갔고, 마수는 전의를 상실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해할 수 없는 현상 속에서 단 하나 확실한 것이 있다면, 사나운 마수의 머리통 위에 발을 올려놓고 기분 좋게 목을 울려대는 저 금빛 괴수가 자신이 알던 골드레이크와는 완전히 격이 다른 존재라는 것뿐이었다.
금빛 서기를 철갑처럼 두른 골드레이크는 마치 이 세상의 생물이 아닌 것처럼 아름다웠다. 전에는 없었던, 이마에 돋아난 뿔은 뭉툭했지만, 그게 둔해 보이기보다는 강인해 보였다. 보기 흉하게 돋아 있던 목의 돌기는 이미 온데간데없이 되었고, 미끈하게 뻗은 목은 조금의 굽힘도 없이 쭉 뻗어 있었다.
자신감을 넘어 차라리 고고하기까지 한 그 자태에 김선혁은 그만 감탄하고 말았다.
변한 것은 골드레이크 뿐이 아니었다.
레드웜의 변화는 골드레이크 이상으로 과격했다.
끓어오르는 쇳물처럼 출렁이는 육신은 모든 것을 태워버릴 것 같은 겁화에 휩싸여 있었는데, 그 모습이 마치 용암으로 만들어진 창이 하늘을 향해 꼿꼿이 서 있는 듯한 모양새였다.
크아아아아아.
그렇게 불꽃에 둘러싸인 레드웜이 놀라울 정도로 신속하게 수컷 만티코어를 덮쳤다. 당연하게도 수컷 만티코어는 불꽃에 휩싸였고, 끔찍한 비명을 지르며 타들어 갔다.
순식간에 만티코어 암수 한 쌍이 전투불능 상태에 빠진 것이다.
“형님, 이게 지금 무슨 상황입니까….”
자신의 상대를 잃어버린 용사가 김선혁에게 상황을 물었다. 하지만 정확한 상황을 모르는 것은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우리를 이토록이나 하찮게 만든 것은 그녀지만, 또한 우리를 영광되게 만드는 것 역시 그녀.]
그런 그에게 공작새의 그것처럼 화려한 꼬리를 활짝 펼친 페어리 드래곤이 설명을 해주었다.
[그리고 그녀가 나의 청을 들어주었어.]
양뿔을 닮은 우아한 생김새의 뿔, 날갯짓을 할 때마다 흘러내리는 신비로운 빛 가루, 김선혁은 왜 게하임니스가 요정용이라 불리는지 깨닫게 되었다.
[비록 잠시뿐이지만, 과거 우리에게 주어졌던 원천의 일부를 쓸 수 있도록 허락해주었다는 말이야.]
“아….”
과거 페어리 드래곤은 아룡들이 모종의 죄를 짓고 형벌을 받은 바 있다 말했었다. 그 과정에서 자신들이 갖고 있던 힘의 근원과 능력을 대부분 상실하여 짐승과도 같은 신세가 되었다 하였다.
그런데 무슨 수를 썼는지 그 잃어버린 힘을 일부나마 돌려받았다는 것이다.
그 결과가 바로 마치 이 세상의 존재들이 아닌 것처럼 변해버린 아룡들의 모습이었고, 처참하게 박살이 난 만티코어들의 몰골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자비는 그저 한 순간에 불과한 것, 서둘러 저 흉악한 마수들을 마무리 하는 게 좋겠구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레드번이 세 쌍의 날개를 펼친 채 급강하했다. 그리고는 이마에 돋아난 2미터 남짓한 뿔로 레드웜에게 붙들려 반쯤 타버린 만티코어를 꿰어버렸다.
끄악.
짧은 단말마를 외친 만티코어가 그대로 축 늘어졌다. 생기가 느껴지지 않는 육신을 보니, 그대로 절명한 게 분명했다.
“이건 진짜….”
뭐라 표현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존재의 격 자체가 올라간 듯 변해버린 모습도 모습이었지만, 그보다 더욱 대단한 것은 강력한 마수들을 순식간에 짓밟아버린 압도적인 힘이었다.
그런데 그게 ‘원천의 일부’에 불과하다니, 대체 용의 아종들이 원래 지니고 있던 힘이 얼마나 대단하다는 말인가. 아니, 그보다 그런 대단한 존재들을 하찮은 짐승처럼 만들어버린 진짜 용의 힘은 또 얼마나 대단한 걸까.
심장이 두근거렸다.
이제까지 막연하게만 느껴왔던 용기병의 진짜 힘을 조금이나마 엿본 듯한 기분이었다.
“나, 나를 살려준다면 저들처럼 충실한 종이 되겠어.”
그때 놀랍게도 암컷 만티코어가 말을 걸어왔다.
“아….”
추악한 노파의 얼굴을 한 마수가 입술을 질겅이며 말을 하는 모습은 신기하다기보다는 차라리 불결했다.
“그러니 나를 살려다오. 살려만 준다면 뭐든지 하마.”
그 불길하고 사악한 음성을 듣는 것만으로도 기대감으로 두근거리던 심장이 차갑게 식어버렸다.
김선혁의 표정이 싸늘하게 변하자, 만티코어가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하지만 그는 만티코어 같이 사악한 마수를 종으로 둘 생각이 전혀 없었다. 지금은 저리 저자세로 나오지만 상황이 바뀌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뒤통수를 칠 게 분명했다.
이심전심, 침묵을 통해 그의 의지가 아룡들에게 전해졌다.
“제발 나를 살….”
콰드득.
골드레이크가 비굴하게 애원하던 암컷 만티코어의 목을 부러트렸다.
[다음에 또 기대하도록 하지.]
“어?”
페어리 드래곤의 속삭이는 듯한 음성과도 다르고, 진짜 용의 도도하면서도 위엄 있는 음성과도 다른 거칠고 웅혼한 음성, 그런데 어쩐지 그 목소리가 낯이 익었다.
“골디?”
언젠가 서리 봉우리에서 들었던 것처럼 거친 음성은 분명 골드레이크의 것이었다.
“너 이제 말 할 줄 알게 된 거야?”
하지만 골드레이크는 다시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서광이 일렁이는 눈동자를 들어 가만히 그를 응시했을 뿐이었다.
스으윽.
골드레이크의 몸이 쪼그라들었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갑주처럼 몸을 둘러싸고 있던 금빛 광채가 희미해지다 완전히 사라졌다.
크르르르.
상처투성이의 몸을 한 골드레이크가 마수의 시체에 쓰러지듯 엎어졌다.
[나에게도 그들과 같은 멋진 이름을 지어줄 날이 오기를 바란다.]
동굴에서 울리듯 나직하고 깊이 있는 음성에 고개를 돌린 그는 사그라지는 불꽃 속에서 자신을 응시하는 수십 쌍의 눈동자를 보았다.
레드웜이었다.
“아….”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간 레드웜을 본 김선혁은 반사적으로 다른 아룡들을 살펴보았다.
“레드번?”
[빼에엑.]
마지막 순간 굳이 왜 머릿속에 대고 빼액 하고 울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레드번 역시 어느새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간 상태였다.
[그녀가 허락한 시간이 벌써 끝이 났구나.]
뿔과 꼬리를 잃은 게하임니스가 탄식을 내뱉었다.
[그녀가 우리에게 가해졌던 서른여섯 개의 형벌 중 하나를 감하여주었으니, 이는 오랜 시간동안 감히 바랄 수 없었던 그녀의 자비를 몸소 체험한 것과 다름이 없구나.]
**
일대를 지배하던 사악한 만티코어 한 쌍을 처리한 김선혁 일행은 곧장 마기의 정화를 시도했다.
파앗.
발뭉이 빛을 발하며 근원을 잃은 마기를 마구잡이로 먹어치웠다. 순식간에 마기가 걷혀지고, 검은 기운에 뒤덮여 있던 대지가 맨살을 드러냈다.
하지만 그간 너무도 오랜 시간 동안 마기에 노출되었던 대지는 이미 흉물스럽게 썩어 문드러진 상태였다.
아마도 앞으로 이 땅에서 풀이 자라고 생명이 깃드는 데는 무지막지하게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만큼 마기에 오염되었던 대지의 상태는 처참했다.
하지만 당장 온몸을 옥죄는 마기가 사라졌다는 것만으로도 일행은 충분히 만족했다.
“그런데 저건 어쩌죠? 그냥 두고 가기 왠지 아까운데.”
발뭉의 성스러운 기운에 흔적조차 남기지 못하고 사라져 버린 다른 마물들의 시체와는 다르게, 만티코어 한 쌍의 시체는 여전히 그대로 남아 있었다.
[비록 그 사악한 기운을 먼저 정화해야 하겠지만, 만티코어의 시체는 여러모로 쓸모가 많단다.]
“흠….”
게하임니스의 말이 아니더라도 김선혁은 마수들의 시체를 두고 갈 생각이 전혀 없었다. 아룡들의 이빨마저 막아내던 그 강력한 방어력이라면 가볍고 강력한 방어구를 만들기에 충분하다 여긴 것이다.
“어쩐다….”
하지만 가지고 돌아갈 방법이 문제였다. 골드레이크와 레드웜은 마수들의 시체를 옮기고 가기에 충분할 정도의 힘이 있었지만, 상처가 너무 컸다. 그런 상황에서 무리하게 마수의 시체에 대한 욕심을 부리기에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런 고민을 해결해준 것은 먼저 떠나갔던 일행들이었다.
“영주니이임!”
마기가 정화되자 성군과 일행들 중 일부가 되돌아온 것이다. 그들은 김선혁과 박준민을 비롯한 이들의 무사함에 감사했고, 거대한 마수를 상대로 승리를 거둔 그 영웅적인 업적에 경의를 표했다.
“사실 우리는 그냥 물고 늘어지기만 했을 뿐, 마무리는 형님 혼자 다 한 거나 다름이 없어요.”
“맞습니다. 전승공과 저들이 아니었다면, 쓰러진 것은 우리였을 겁니다.”
찬사를 토해내는 일행을 보며 박준민과 팔라딘들이 민망한 얼굴을 해 보였다.
하지만 정작 그들이 모든 공을 돌린 김선혁은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지 않았다.
- 4차 전직에 필요한 조건이 모두 충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