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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용기병대(Dragon Squad) (2)
검은 피막의 날개가 한 번 움직일 때마다 십 미터가 넘는 거리가 쭉쭉 좁혀졌다. 그리고 마침내 마수가 지척에 당도했을 때, 사람들은 비로소 흉악한 괴물의 실체를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누르스름한 거체는 영락없는 네 발 짐승의 생김새였지만, 박쥐를 닮은 날개는 날짐승의 모습과도 같았다. 목둘레를 감싼 붉은 털은 사자의 갈기를 쏙 빼닮았고, 빳빳하게 선 꼬리는 전갈을 빼닮았다.
사자와 박쥐, 전갈을 합쳐놓은 듯한 모습, 그중에서도 가장 끔찍한 것은 히죽거리는 마수의 얼굴이었다. 짐승의 그것이 있어야 마땅할 곳에 자리 잡은 노인의 얼굴은 교활하게 눈을 굴려댔는데, 쭉 찢어진 입가에서 끊임없이 기괴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르르르.
노인의 기침 소리 같기도 하고, 사나운 짐승이 목을 긁어대는 것 같기도 한 마수의 울음소리는 듣는 이로 하여금 절로 두려움을 느끼게 만들었다.
이제껏 그 어떤 적을 마주하고도 한 번도 물러나지 않았던 성전사들조차도 마수의 기세에 질려 주춤주춤 물러날 정도였다.
키기긱.
겁을 먹은 사냥감들의 모습이 만족스러운지 마수가 이를 딱딱거리며 웃었다.
그것은 곧 있을 만찬을 기대하는 잔인한 포식자의 미소였고, 교수대에 매달린 사형수를 바라보는 처형자의 흥얼거림이었다.
노인을 닮은 만티코어의 얼굴이 그 노골적인 기대감을 고스란히 보여주었다.
“이 빌어먹을 새끼가!”
용사가 그런 괴물에게 성검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파앗.
단번에 치솟은 눈부신 성광이 마수를 향해 쏘아져 내렸다.
이제껏 수도 없이 많은 마물들과 마수를 무(無)로 돌려보낸 발뭉의 광휘를 보면서도 마수는 조금도 움츠러들지 않았다.
퍼드득.
거체에 비해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아담한 날개를 한 번 펄럭이는 것만으로 그 강력한 일격을 수월하게 피해낸 것이다.
“여긴 제가 맡을 테니, 물러서요!”
화아악!
박준민은 만티코어와 성전사단 사이를 막아서고 더 없이 찬란한 광휘를 일으켜 마수의 존재감에 압도되었던 이들을 일깨웠다.
크아아아아.
그리고 그 순간 만티코어가 사납게 울부짖으며 박준민을 향해 달려들었다.
“제길! 저 멍청이!”
멀리서 그 모습을 보고 있던 김선혁이 와락 인상을 쓰며 욕설을 내뱉었다.
“적당히 연기만 하라니까, 정말로 지쳤어!”
처음으로 인정받았다는 사실에 고무된 나머지 체력을 안배하지 못한 것일까. 박준민은 만티코어와의 일전을 대비해 체력을 비축하라는 당부를 지키지 못했다.
용사 스스로도 성검의 위력이 전 같지 않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팔라딘들은 나를 따라라!”
그나마 다행이라면 신전 기사들 중에도 저 강력한 마수를 상대할 초인들이 있다는 것이었다.
“신전 기사들은 사제들과 생존자들을 보호하라!”
평범한 신전 기사들이 마수를 상대할 수 없다 판단한 단장은 신전 기사들 중에서도 격이 높은 팔라딘들만을 이끌고 만티코어를 향해 달려들었다.
“사악한 것들을 무저갱으로!”
단장을 포함하여 다섯의 팔라딘들이 전투에 가세하고 나서야 박준민과 만티코어의 싸움은 겨우 대등해졌다.
인세에 다시없을 끔찍할 마물을 상대로 신화에나 나올 법한 광휘를 두르고 분전하는 용사와 팔라딘들을 보면서도 김선혁은 여전히 초조한 기색이었다.
“영주님?”
클라크와 일행은 그런 그의 모습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평소의 그라면 진즉에 마수를 향해 달려들었을 텐데, 지금의 그는 당장 뛰쳐나갈 것처럼 으르렁거리는 아룡들을 진정시키며 전투를 관망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무언가를 기다리는 듯 보여 클라크는 저도 모르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방이 아비규환이다. 마수의 등장에 기세가 오른 마물들은 사납게 성전사들을 몰아붙였고, 지친 성전사들은 그런 마물들을 상대로 힘겨운 싸움을 이어가고 있었다.
성전사들이 내지르는 단말마, 그리고 비명소리가 커질수록 더욱 높아만 가는 사제들의 성가, 마물들의 거북스러운 포효로 귀가 먹먹해질 지경이었다.
만약 이 세상에 지옥이 있다면 이곳이야말로 지옥이었다.
“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거친 사내조차도 질릴 정도로 살벌한 전장, 클라크는 그 한 귀퉁이에서 기묘한 위화감을 느끼고는 눈을 가늘게 떴다.
허공이 일그러져 있었다. 마치 깨어진 거울의 파편처럼 부자연스러운 모습, 하지만 그게 무엇인지는 클라크도 알 수 없었다.
“신이시여! 저에게 힘을!”
클라크가 그 위화감의 정체를 알아차린 것은 기묘한 일그러짐이 성전사 하나를 완전히 집어삼키고 난 뒤였다.
“만티코어?”
신기루처럼 나타난 습격자의 정체는 놀랍게도 또 다른 만티코어였다.
먼저 나타났던 놈과 차이가 있다면, 단지 덩치가 조금 더 작고 노파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는 것뿐이었다.
“여, 영주님! 저기!”
서둘러 영주에게 또 다른 만티코어의 정체를 알려한다는 생각에 고개를 돌린 클라크는 비상하는 레드번을 볼 수 있었다.
“골디! 레드웜! 가자!”
주인의 호명에 아룡들이 억누르고 있던 흉성을 폭발시켰다.
골디가 사납게 울부짖으며 뛰쳐나가고, 레드웜이 굉음을 내며 땅을 파고 들어갔다.
빼애애액!
그 순간 비상을 마친 레드번이 쏜살처럼 또 하나의 만티코어를 향해 쏘아져 나갔다.
**
만티코어는 끔찍할 정도로 강했다.
광휘를 갑주처럼 온몸에 두른 용사도 마수의 일격을 감히 정면으로 받아낼 엄두를 내지 못했다. 만약 성력을 한계까지 이끌어낸 팔라딘들의 보조가 아니었다면 용사는 절대로 무사하지 못했을 것이다.
용사 일당과 마수의 전투는 마치 신과 악마의 대결처럼 성스럽고 사악한 기운이 충돌하는, 신화 속에나 나올 법한 선과 악의 대결 그 자체였다.
그에 반해 아룡들과 또 다른 만티코어의 전투는 거룩함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야만적이고 거친 것이었다.
붉고 푸른 피가 내를 이루고, 깨어진 비늘과 찢어진 가죽이 사방에 즐비했다.
골드레이크는 방어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듯 마수의 몸을 물어뜯고 찢어발기는 데만 혈안이 되어 있었고, 마수 역시 억센 턱을 아그작거리며 아룡의 비늘을 바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야말로 피가 튀고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살벌한 전투, 하지만 힘의 우위는 명명백백했다.
골드레이크는 크고 강했지만, 만티코어는 그보다 더 크고 사나웠다.
금빛 아룡은 시종일관 마수의 발에 깔린 채 힘겨운 싸움을 이어가야 했다.
금빛 찬란한 비늘이 순식간에 깨어지고 엉망진창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골드레이크는 여전히 흉성을 잃지 않았고 열세일지언정 용맹하게 마수의 목덜미를 물고 늘어졌다. 그리고 기어이 마수의 날개를 찢고 단단한 육신에 이빨을 박아 넣는 데 성공했다.
화가 난 마수가 골드레이크의 다리를 물고 마구 흔들어댔다. 다리를 감싼 비늘이 순식간에 깨어져 나가고 우드득거리며 듣기 거북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골디!”
아룡의 다리가 완전히 절단나기 직전, 내리꽂히듯 레드번이 하강했다. 속성의 기운에 의해 예기가 극대화된 김선혁의 창이 마수의 거죽을 뚫고 박혀 들었다.
그아아아.
골드레이크의 앞발을 물고 털어내던 마수가 입을 벌리고는 비명을 질렀다. 아무래도 이번 공격은 제법 깊숙이 박혀 든 모양이었다.
텁.
김선혁은 거대한 머리통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는 창을 놓고 날아올랐다. 하마터면 방어력이 빈약한 레드번이 마수의 이빨에 두 동강이 날 뻔했다.
약이 오른 마수가 사납게 울부짖었다. 그 순간 레드웜이 지면을 뚫고 나와 마수의 몸을 휘감았다.
크륵, 크륵.
이제껏 덩치를 앞세워 골디를 짓밟다시피 한 만티코어였지만, 그보다 거대한 레드웜에 비하면 그 상대적인 우위도 부질없었다.
레드웜의 거체는 골드레이크와 만티코어를 전부 합친 것보다 두 배 이상 거대했다.
하지만 레드웜의 거대한 몸뚱어리는 그 크기에 비하면 너무나도 물렀다. 마수의 발톱에 할퀴어지고 찢겨져 나간 거죽이 금세 피투성이가 되어 속살을 드러냈다.
“이런 빌어먹을 새끼가!”
김선혁은 자신의 아룡들이 고전하는 모습을 보며, 눈에 핏발을 세웠다.
판단 미스다.
수컷에 비해 덩치가 작은 만티코어, 당연히 더 약할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암컷 만티코어는 수컷보다 훨씬 더 강인하고 사나웠다.
정령들의 도움이라도 있다면 좋으련만 안타깝게도 이 오염된 땅에서 정령들은 무력했다.
믿을 건은 단 하나뿐이었다.
“게하임니스! 아직도냐!”
페어리 드래곤의 이름을 불러보았지만, 수다쟁이 아룡의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이제는 시간이 맞지 않을 경우를 염두에 두어야 했다.
“라파예트! 롤랑! 일행을 데리고 이곳을 빠져나가!”
흉험한 전투에 감히 끼어들 생각도 못하고 허공을 맴돌고만 있던 그리핀 라이더들이 곧장 사제단에게 향했다. 잠시 꾸물거리나 싶더니 사제단과 성전사단이 빠르게 이동하기 시작했다.
**
일행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진 뒤로도 만티코어와의 전투는 계속되었다.
발뭉의 광휘는 아직까지 건재하다 할 수 있었지만, 정작 성검의 주인인 박준민의 움직임이 많이 둔화되었다. 근접전 경험이 많지 않은 용사에게 만티코어는 지나치게 까다로운 상대였다.
팔라딘들이 그 경험의 부족을 메워주었지만, 그들 역시 지쳐 있기는 매한가지였다. 그들이 발휘하는 성력은 막대한 체력의 소모를 동반하는 것, 오히려 사정은 용사보다 좋지 않았다.
하지만 신전에서 고르고 고른 초인들의 정신력은 강인했고, 극도로 지친 상태에서도 마수를 효과적으로 견제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계는 있었다.
“제길!”
창을 잃은 탓에 빈약한 양손검에 의지해서 만티코어를 상대하던 김선혁은 연신 욕설을 내뱉었다.
아룡들은 잘 싸우고 있었다. 골드레이크는 자신보다 훨씬 거대하고 강인한 마수를 상대로 그야말로 눈물겨운 분투를 이어가고 있었고, 레드웜 역시 제 몸이 찢겨나가면서도 끈질기게 적을 물고 늘어지고 있었다.
만티코어 역시 상처가 상당했다. 피를 너무 흘린 탓인지 움직임도 처음에 비해 많이 느려져 있었다.
하지만 부족했다. 만티코어가 입은 상처 이상으로 아룡들의 상처는 심각했다. 이대로 가다간 골드레이크나 레드웜 어느 하나가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지경이었다.
물론 만티코어 역시 그 대가를 치르게 되겠지만, 김선혁은 이곳에서 자신의 아룡을 단 하나라도 잃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렇기에 더더욱 모습을 감춘 페어리 드래곤의 힘이 필요했다.
‘만티코어는 유배된 자들을 벌써 몇씩이나 잡아먹은 진짜 마수야. 그런 마수를 상대하려면 준비가 필요해. 그러니 나에게 시간을 벌어줘.’
게하임니스가 모습을 감추고도 한참이나 시간이 흘렀다. 하지만 사라진 아룡은 여전히 모습을 드러낼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상황은 계속해서 악화되어만 가고 있었다.
하지만 세상에 그냥 죽으라는 법은 없었다.
그토록이나 애타게 기다렸던 게하임니스가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게하임니스!”
그의 간절한 외침에 화답이라도 하듯 게하임니스가 온몸으로 신비로운 빛을 뿜어대기 시작했다.
마치 저 땅끝 하늘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신비로운 극광(極光, 오로라)이 마기에 오염된 서부의 하늘을 뒤덮었다.
아아아아아아.
그 순간 아룡들의 몸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