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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용기병대(Dragon Squad) (1)
레드웜의 온몸을 뒤덮고 있던 마기가 흩어졌다.
- 마기에 오염되어 단절되었던 레드웜(Red Wyrm)과의 교감이 회복되었습니다.
- 속성 항목에 화(火) 속성 지배력이 다시 추가되었습니다.
하지만 맨살이 드러난 레드웜의 빛깔은 처음 같지 않았다. 타오르는 화염처럼 붉기만 했던 레드웜의 비늘은 어쩐지 불길한 느낌이 드는 검붉은 빛을 띠고 있었다.
“죄송해요. 형님.”
가만히 레드웜의 몸을 살피고 있자니, 언제 내려온 것인지 박준민이 난데없이 사과를 해왔다.
“뭐?”
“마기를 다 제거하지 못했어요.”
미처 그 의미를 깨닫기도 전에 다시 메시지가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 성스러운 기운은 강력했지만, 뼛속 깊이 스며들었던 레드웜의 마기를 완전히 분리할 수 없었습니다.
- 레드웜의 속성(火)이 변질되어 새로운 속성이 되었습니다.
- 화 속성 지배력이 흑염(黑炎) 속성 지배력이 되었습니다.
- 변질된 속성이 레드웜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잔뜩 인상을 찌푸린 김선혁의 얼굴을 본 박준민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여기서 더 손을 댔다간, 이놈 죽어버릴지도 몰라요.”
“아…”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그가 박준민을 따라 한숨을 내쉬었다.
“큰 소리만 떵떵 쳐놓고는 면목이 없네요.”
그는 고개를 저었다. 박준민을 원망할 일이 아니었다. 사실상 반쯤 포기했던 레드웜을 이렇게라도 다시 되찾은 건 순전히 박준민의 결단 때문이었다.
“아냐. 이 정도만 해도 충분해.”
속성이 변질되었지만, 어쨌건 레드웜을 지키는 데 성공했다. 그는 박준민의 노고를 칭찬해주었다.
“음…”
멋쩍게 그의 감사를 받던 박준민이 뒤늦게 주변을 둘러싼 신전 기사들과 사제들을 발견하고는 엉거주춤하게 물러났다. 혹시라도 빼앗길까 봐 성검을 꽉 부여잡고 발을 움찔거리는 모습이 당장에라도 도망칠 기세였다.
하지만 도망칠 곳이 없었다. 3천의 성전사들이 주변을 물 샐 틈 없이 둘러싸고 있었고, 지근거리에는 검을 뽑아든 신전 기사들이 잔뜩이었다.
또르르.
박준민의 눈이 굴러간다. 그리고 빈틈을 찾아 이곳저곳을 헤매던 눈동자가 그리핀 앞에서 멈춰 섰다.
“형님….”
뒷말은 내뱉지 않았지만, 김선혁은 박준민이 무엇을 바라는지 알 수 있었다.
땅을 통해 도망칠 수가 없으니, 그리핀을 빌려 타고서라도 도망칠 작정인 모양이었다.
철컥.
신전 기사들 역시 그런 기색을 눈치챈 모양인지 박준민과 그리핀 사이를 가로막고는 칼과 방패로 벽을 세웠다.
언제 충돌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만큼의 긴장감, 하지만 최악의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다.
“당장 성검을 회수함이 마땅하나, 한시적으로 성검의 처분에 대한 결정을 보류하도록 하겠습니다.”
노사제가 나서서 당장 박준민을 어찌할 생각이 없음을 알려준 것이다.
“아아?”
생각지도 못한 반응에 어떻게든 도망갈 궁리만 하고 있던 박준민이 얼빠진 소리를 내뱉었다.
“또한 이 땅을 벗어날 때까지 이방인 박준민의 신병을 전승공께 위임하도록 하겠습니다.”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부디 이번 일로 인해 전승공의 명예에 누가 생기는 일이 없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만약 그런 일이 생긴다면 기꺼이 모든 것을 감수하겠습니다.”
사제와 대화를 나누는 김선혁을 보면서도 박준민은 여전히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듯 보였다.
“형님, 이게 무슨 상황인지….”
그간 성검을 회수하기 위한 교국의 추격대로 인해 모진 고생을 해야 했던 박준민은 비록 ‘한시적’이라는 전제가 붙기는 했지만 자신을 그대로 두겠다는 사제의 결정이 선뜻 믿어지지 않았던 모양이다.
박준민의 질문에 대답한 건 노사제였다.
“전승공께서 귀하의 신분을 보증하셨습니다.”
그제야 상황을 이해한 어벙한 용사가 감격한 얼굴로 김선혁을 바라보다 다시 울상을 지어 보였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여기까지야. 이제 남은 건 네 스스로 발뭉의 주인이 누구인지 저들에게 보여주는 것뿐이야. 할 수 있지?”
“할 수는 있는데, 저들이 과연 인정해줄까요. 그 전의 추격대도 몇 번이나 보여줬는데, 믿지 않았어요. 아니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다고요.”
교국의 인물들에게 맺힌 것이 어지간히 많은 것인지 박준민은 노사제의 말을 신뢰하지 않았다.
“그때랑 지금은 다르지.”
그런 박준민의 우려와는 달리 김선혁은 여전히 걱정이 없어 보였다.
“뭐가 다른….”
“그때는 내가 없었고, 지금은 내가 있으니까.”
그는 스스로가 지닌 이름값의 가치를 알고 있었고, 언제든 그 값을 비싸게 받을 자신이 있었다.
“어쨌건 빚 갚은 거다.”
태평스러운 그의 말에도 박준민은 여전히 걱정이 가득한 기색이었다.
기회는 금방 찾아왔다. 지리멸렬하여 달아났던 마물들과 언데드들이 다시금 몰려온 것이다.
“전 기사단 전투 준비!”
수많은 마물들을 향해 돌격했던 신전 기사단은 이번에도 전혀 위축된 기색이 없었다. 그들은 추호의 두려움도 없이 마물들과의 일전을 준비했고, 사제단과 성전사단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들은 마물을 향해 칼 한 번 휘두를 수 없었다.
그들이 검 끝에 또는 손끝에 그러모은 성광을 전부 합친 것보다 훨씬 더 거대하고 농도 짙은 성광이 마물들의 한복판에 떨어졌다.
콰앙.
비명도 뭣도 없는 완전한 소멸, 단 한 번의 성광이 세상에 현신한 것만으로도 마물들은 전멸해 버렸다.
“이게 대체….”
그 엄청난 위력에 잠시 넋을 잃었던 이들은 뒤늦게 그 모든 것이 박준민, 스스로를 성검의 주인이라 주장하는 자에 의해 일어난 일이라는 사실을 깨닫고는 경악하고 말았다.
“제가 말했잖아요. 제가 성검의 주인….”
이제껏 수도 없이 성검의 힘을 보여주고도 도리어 도둑놈 취급을 받아야 했던 박준민이 억울한 얼굴로 푸념을 늘어놓다 눈을 동그랗게 떴다.
털썩.
노사제를 비롯한 사제들이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새하얀 백마에 올라타고 있던 신전 기사들도 말에서 내려 그들의 뒤를 따랐다. 성전사단 역시 성검의 주인에게 경의를 표했다.
“눈부신 광휘로 신께서 이 땅에 사도를 보내셨음을 입증하셨으니, 늙어 쉬어빠진 목소리로나마 이 모든 것을 증언하겠나이다!”
“어? 어?”
마치 신이라도 영접한 듯, 경건하기까지 한 사람들의 반응에 당황한 박준민이 얼빠진 소리를 내뱉었다.
“형님, 이 사람들 왜 이래요.”
그간의 고초가 무색하게 너무도 쉽게 인정을 받았다는 사실에 용사는 어리둥절한 모양이었다.
“이러고 저 끌고 가서 발뭉이 뺏으려는 거 아니에요?”
그리고 차라리 의심하기까지 했다.
“절대로 그런 일은 없을 거다.”
최소한 이곳에 모인 사제와 신전 기사들 중에 교국의 고위 사제들처럼 세속에 물들어 뒤통수를 칠만한 위인은 보이지 않았다.
아니, 설령 그런 자가 있다고 해도 중요하지 않았다.
먼저 장담한 대로 김선혁에게는 사제들이 꿍꿍이가 있다 해도 이를 뒤집을 힘이 있었다.
서부의 몰락을 가장 처음으로 세상에 알리며 더욱 공고해진 그의 명성과 동부에서도 최초로 지원 병력을 파견한 아덴버그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아무리 자국 내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해도 그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 이상, 사제들이 동전을 뒤집듯 태도를 달리할 수는 없을 것이다.
“진짜요? 진짜요?”
박준민은 어린아이처럼 몇 번이나 물었고, 그는 그때마다 부드럽게 웃으며 대답해주었다.
“어느 누구도 드라흔의 맹우(盟友)를 함부로 대할 수는 없을 거라고 장담하지.”
김선혁의 말은 교국을 향한 선언이었고, 경고이기도 했다.
“이 검과 방패를 걸고, 그런 일은 절대 없을 거라 약속드립니다.”
신전 기사단의 단장은 그런 그의 경고에 기분 나빠하기는커녕 도리어 미안한 얼굴을 해 보였다. 세속의 일 따위는 전혀 관심도 없어 보이는 노사제와는 달리 단장은 용사가 말해주지 않은 뒷사정에 대해 이미 파악한 눈치였다.
“전 기사단은 성검의 주인과 전승공 일행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한다!”
단장의 지시에 신전 기사들의 대열이 미세하게 출렁였다. 탈주를 막기 위해 은근히 안쪽을 견제하고 있던 신전 기사들이 어느새 완벽한 호위대형을 갖춘 것이다.
“그럼 교국까지 모시겠습니다.”
“부탁드립니다.”
김선혁은 신전 기사들의 호의를 거절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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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환길은 결코 평탄하지 않았다. 실종된 원정대들이 그랬듯이 김선혁 일행 역시 무수히 많은 마물들의 습격을 받았고, 이에 맞서 쉬지 않고 싸워야 했다.
“으아! 그만 좀 와라! 이 지겨운 놈들아!”
얼마나 싸워댔는지 신이 나서 발뭉을 휘두르던 박준민마저도 나중에 가서는 죽은 소리를 내뱉을 지경이었다.
“아무래도 우리를 이대로 돌려보낼 생각이 없는 모양입니다.”
지친 용사를 대신해 마물들을 막아내던 신전 기사단의 단장이 무거운 얼굴로 말했다. 수도 없이 많은 마물들을 상대로도 주저앉고 돌격했던 강인한 기사에게도 이 끝도 없는 습격은 버거웠던 모양이다.
“이대로라면 국경에 도달하기 전에 아군이 먼저 지쳐버릴 겁니다.”
단장은 눈에 띌 정도로 누적되는 아군의 피로를 우려하고 있었다. 사제들이 지속적으로 아군의 체력을 회복시키고 있었지만, 한계가 있었다.
사제들의 회복술은 심신을 고양시켜 일시적으로 피로를 잊게 만드는 술법이었고, 그마저도 피시전자의 체력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어야 가능한 것이었다.
눈앞의 전승공처럼 오랜 전투로 완전히 지쳐서야 ‘고양의 술’도 효과를 볼 수 없었다.
“전승공께서 전투에 참가할 여력이 안 되는 지금, 사도님마저 체력이 떨어지시면 큰일입니다.”
처음 만났을 때까지만 해도 자신만만했던 신전 기사단장은 이제 더없이 굳은 얼굴로 최악의 상황을 대비하고 있었다.
“그렇게 보이십니까?”
“뭐가 말입니까?”
뜬금없는 질문에 신전 기사단장이 영문을 몰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경께서 보시기에도 준민이나 저나 지쳐 보이냐는 말입니다.”
“이 끔찍한 곳에서 그리 오랜 시간을 버티셨으니, 지치는 게 당연하지 않습니까.”
혹시라도 호승심 강한 기사의 자존심을 건드린 것은 아닌지, 신전 기사단장이 조심스레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김선혁은 자존심이 상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단장의 말에 도리어 만족스러운 얼굴을 해 보였다.
“경의 눈에도 그렇게 보인다면, 그놈 눈에도 그렇게 보이겠군요.”
“무슨 말씀이신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단장은 이제 눈앞의 전승공이 마기에 너무 오래 노출되어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것은 아닌가 하고 염려하는 얼굴을 해 보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용의 기운에 의해 보호받는 그가 마기에 침식될 일은 없었다.
“의심 많고 겁도 많고, 그래서 사냥감이 지칠 때까지 기다리는 영악한 놈이 있습니다.”
“설마?”
단장이 뒤늦게 그의 말을 알아듣고는 설마 하는 얼굴을 해 보였다.
크와아아아아앙.
바로 그때 어디선가 귀청이 떨어질 듯한 괴성이 들려왔다.
이히이이잉.
이제껏 수많은 마물들을 상대하면서도 단 한 번도 겁을 집어먹지 않았던 신전 기사단의 신마(神馬)들이 무언가의 포효에 놀라 앞발을 들고 난동을 피워댔다.
“끄악!”
그 바람에 성전사단에게 잠시 전투를 맡기고 체력을 비축하고 있던 신전 기사들이 말에서 우르르 굴러 떨어졌다.
“전원 하마! 대열 정비하여 적을 맞을 준비를 하라!”
도무지 말들이 진정할 기미가 보이지 않자, 단장은 차라리 하마하여 전투를 준비할 것을 명령했고, 신전 기사들은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충실히 명령을 이행했다.
“미리 말씀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놈이 워낙에 눈치가 빨라서 말입니다.”
“저, 전승공?”
언제 올라탄 것인지 레드번의 위에 올라탄 김선혁이 그렇게 단장에게 사과를 하고는 줄리앙을 불렀다.
“줄리앙.”
갑작스러운 호명에 놀랐을지언정 줄리앙은 냉큼 대답을 해왔다.
“영주님?”
“내 얼굴을 이렇게 만든 놈이 어떤 놈인지 물었었지?”
그의 손이 왼쪽 이마에서부터 오른쪽 턱을 가로지르는 기다란 상처를 어루만졌다. 마치 맹수의 발톱이 훑고 간 것처럼 깊게 파인 세 가닥 흉터에는 아직까지도 붉은 기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만티코어.”
상처를 거칠게 쓸어 만진 김선혁이 손을 내려 창을 움켜잡았다.
“내 얼굴을 이렇게 만든 놈의 이름이자, 이 땅을 지배하는 마수의 이름이다. 또한….”
그리고 그렇게 드러난 그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도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참람되게도 용을 잡아먹는 포식자라 스스로를 내세운 마수의 이름이기도 하다.”
크아아아아아.
다시 한 번 끔찍한 포효가 들려왔고, 그에 화답하듯 골드레이크와 레드번, 레드웜이 마주 울부짖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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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어어어어.
그 시각 강바닥을 기어 올라온 거대한 푸른 괴수가 불현듯 고개를 쳐들고는 사납게 목을 울려댔다.
그리고는 세 쌍의 억센 발을 힘차게 내딛어 대지를 박찼다.
쿵. 쿵.
하지만 그 사납고 거친 기세와는 달리 괴수의 걸음은 너무도 느리기만 했다.
쿵. 쿵.
푸른 아룡이 라인펄을 출발한 지 한 달이 지난 그 어느 날, 블루곤이 라인펄 강 지류의 끝을 벗어나 서부에 접어들기까지 약 2주일의 시간이 더 남은 시점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