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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 거룡(巨龍) (3)
서부가 완전히 마기에 오염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이베리아 연합을 통해 전 대륙에 소식을 알린 김선혁은 곧장 서쪽으로 떠났다.
처음에는 페어리 드래곤이 있으니, 용의 아종을 발견하는 게 어렵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일이 꼬여 버렸다.
마기로 가득 찬 서쪽 땅은 페어리 드래곤의 감각을 둔하게 만들었고, 게하임니스는 대략적인 방향과 거리를 가늠하여 알려주었을 뿐이었다.
창공을 누비며 온 사방을 들쑤시고 다셨다. 용의 아종이 있을 만한 곳이라면 어디든 날아갔다. 하지만 아룡은 쉽게 발견되지 않았고, 엉뚱하게도 서부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을 발견하게 되었다.
마기에 짓눌려 반쯤 삶을 포기한 생존자들을 앞에 두고 김선혁은 한참을 고민해야 했다. 하지만 이미 답은 나와 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는 아룡의 탐색을 멈추고 생존자들을 실어 나르기 시작했다. 다행스럽게도 그리핀들은 다수의 사람들을 태우고 날 수 있을 정도로 덩치가 크고 힘이 좋았다.
그렇게 그들은 신성 교국으로 날아갔다. 본능적으로 마기에 오염된 이들을 치료하려면 사제들의 도움이 필요하다 판단했던 탓이다.
그 과정에서 사고가 생겼다.
간신히 오염된 땅을 탈출한 직후, 생존자들이 발작을 일으킨 것이다. 뒤늦게 달려온 교국의 사제들은 이를 금단증세라 알려주었고, 자신들이 해결하겠다고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혹시 다른 생존자들도 있습니까?”
사제의 질문에 김선혁은 순간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탐색을 위해 어쩌면 더 있을지 모를 생존자들의 존재를 모른 척했던 스스로가 너무도 혐오스러웠던 것이다.
용의 아종을 찾는 이유가 무엇이었던가.
처음에는 그저 강해지고 싶어서였다. 그래야 더 이상 다른 이들에게 휘둘리지 않고, 전장에서 허무히 죽지 않을 수 있다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떠한가.
하나뿐인 왕위 계승자의 배우자가 되었고, 귀족으로서 최고의 위치라고 할 수 있는 공의 작위를 얻었다. 더불어 평생을 쪼들리지 않고 살아갈 기반을 마련했다.
사회적인 권위와 실질적인 무력, 그리고 재력, 모두 손에 거머쥔 것이다. 더 이상 다른 이들에게 끌려 다닐 걱정도 없었고, 아무도 모르게 비명횡사할 걱정도 없었다.
그런데도 자신은 여전히 한 마리의 아룡이라도 더 모으려고 눈에 핏발을 세우고 있었다.
[더 시간을 지체했다가는 남아 있는 용의 아종도 타락할 거야. 서둘러야 해.]
게하임니스의 독촉을 듣고 나서야, 스스로가 왜 이렇게까지 맹목적으로 변했는지 알게 되었다.
저 망할 놈의 시간제한 때문이었다. 이미 한 마리의 아룡이 마왕에게 굴복했기에, 남은 하나라도 지키기 위해서였다.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그는 머릿속으로 빠르게 우선순위를 정했다.
“남은 생존자들을 구해 오도록 하겠습니다.”
생존자라고 해봐야 따지고 보면 사제와는 일면식도 없는 생판 남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제는 제 일이라도 되는 양 거듭 감사를 표하고 그의 용단을 칭송했다.
그런 사제의 행동이 마치 자신을 꾸짖는 것 같았다. 자신을 구세주 바라보듯 보는 사제의 맑은 눈빛에 그는 저도 모르게 눈을 피하고 말았다.
부끄러웠다. 너무나 부끄러웠다. 더 이상 부끄럽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휴식을 권하는 사제들의 제안을 뿌리치고 곧장 다시 서부로 향했다.
그리고 다시 수색을 시작했다. 이번에 그가 찾는 것은 용의 아종이 아니라 이 끔찍한 마기 속에서도 살아남은 서부의 사람들이었다.
당연히 쉽지 않았다. 마물을 피해, 언데드들을 피해 꼭꼭 숨은 이들을 찾아내는 것은 그에게도 어려운 일이었다.
아티야를 비롯한 정령들은 마기로 오염된 대지에서 활동하는 것 자체를 꺼려했고, 그 힘에 상당한 제약을 받았다. 덕분에 그는 오직 자신의 눈과 귀에 의지하여 생존자들을 탐색해야 했다.
[반드시 후회하게 될 거야.]
페어리 드래곤은 생존자의 수색에 여념이 없는 그를 굉장히 못마땅해했다. 하지만 그는 그 모든 불평을 무시했다.
하지만 그는 계속해서 수색을 이어갔고, 운 좋게 살아남은 생존자 집단을 발견할 수 있었다.
와이번과 그리핀들이 마왕의 땅과 교국을 오가며 분주하게 그들을 실어 날랐다.
하지만 역부족이었다.
레드번과 두 그리핀은 그 어떤 땅 짐승보다 빠르고 사나운 존재들이었지만, 생존자들의 구출에는 그다지 적합하지 않았다. 그들이 한 번에 실어 나를 수 있는 생존자들의 수는 한정되어 있었다.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더욱 많은 생존자들을 한꺼번에 옮길 수 있는 존재가 필요했다.
그게 골드레이크였다.
김선혁은 콜드래곤 스킬을 사용했고, 조금이라도 빨리 골드레이크가 당도하기를 기다렸다.
그 사이에도 생존자들의 구조는 계속되었다. 그렇게 구조 활동을 이어가던 중, 김선혁은 반쯤 포기했던 아룡의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
[어쩐지 기운이 미약해 추적이 힘들다 싶었더니, 하필이면 레드웜(Red Wyrm)이었을 줄이야!]
거대한 구멍를 발견한 게하임니스가 반색을 했다.
구멍은 까맣게 썩어버린 대지에서도 유달리 도드라질 정도로 새까만 색을 하고 있었는데, 그 모양새가 마치 불에 달군 송곳으로 들쑤신 듯했다.
게하임니스는 그 구덩이가 땅속 깊은 곳의 열기를 먹고사는 레드웜의 흔적이라 했다.
김선혁은 순간적으로 고민했지만, 굳이 눈앞에 나타난 아룡의 흔적을 외면하지는 않았다. 어쩌면 이 거대한 토굴의 주인이 생존자들을 구해내는 데 보탬이 될 거라 판단했던 탓이다.
아룡의 흔적을 발견한 페어리 드래곤은 더 이상 헤매지 않았고, 단숨에 그 주인을 찾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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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바로 이 녀석입니다.”
김선혁은 마치 탑처럼 솟아난 거대한 괴물을 가리키며 말했다.
“레드웜이라고 하기에는 색이….”
이제껏 가만히 그의 이야기를 듣고만 있던 일행도 이번만큼은 참지 못했는지, 괴물에 대해 물었다.
“마기에 오염된 탓이지요.”
김선혁은 한숨을 내쉬었다.
“운 좋게 이들을 발견할 수 있었고, 레드웜의 토굴을 이용해 마물들의 손이 닿지 않는 땅속에서 이동할 수 있었으니까요.”
레드웜의 토굴은 땅속 그 어디에나 존재했다. 어쩌면 마물들의 습격을 받지 않고, 마왕의 땅을 벗어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세상만사 마음대로 되는 일보다 되지 않는 일이 더 많은 법이다.
처음에는 새빨갛던 레드웜의 몸통이 조금씩 짙어지기 시작하더니, 어느 순간이 되자 까맣게 변했다. 그리고 그렇게 색이 변한 레드웜이 갑작스레 난동을 부렸다.
김선혁과 일행은 토굴에 파묻혀 죽지 않기 위해서 미친 듯이 달렸고, 그러다 보니 지상까지 올라오게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지상에 올라온 그들을 기다렸던 건, 수도 없이 몰려든 마물과 언데드의 군대였다.
“이 뒤는 여러분께서 보신 그대롭니다. 저희는 필사적으로 싸웠지만, 마물의 수가 너무 많았습니다.”
“그럼 그 빛은 대체….”
노사제의 질문에 김선혁의 시선이 까마득히 높은 곳에 위치한 레드웜의 머리를 향했다.
“그 빛의 기둥을 만든 건 제가 아니라….”
그런 그의 시선에 성검, 발뭉을 거대한 괴수의 머리통에 꽂아 넣은 채 미동도 없는 용사, 박준민의 모습이 보였다.
“저 친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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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놈 형님한테 많이 중요한 놈이죠?”
일대를 완전히 박살 낼 기세로 난동을 부리는 레드웜을 보며 박준민이 물었다.
“뭐?”
몰려드는 마물들을 상대하느라 정신이 없었던 김선혁은 제대로 대답할 수 없었다. 아니, 그 이전에 질문의 의도를 알 수 없었다.
“뭐, 여기까지 형님을 오게 만들 정도니, 대답은 들은 걸로 할게요.”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그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런 쓸데없는 소리 할 시간 있으면….”
“형님. 저한테 빚 하나 지신 거예요.”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박준민이 라파예트에게 말했다.
“저 괴물 머리 위로!”
라파예트는 바로 움직이지 않고, 눈짓으로 김선혁에게 어떻게 할지를 물었다.
“일단 해달라는 대로 해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리핀이 상승했다. 그리고 박준민이 묘기를 부리듯 레드웜의 머리 위로 뛰어내렸다.
“뭐 하는….”
미처 말릴 틈도 없이 발뭉이 레드웜의 이마에 꽂혔다.
화아아악!
그 순간 성스러운 빛이 사방으로 퍼져나갔고, 난동을 부리던 레드웜이 돌처럼 굳어버렸다.
“아….”
김선혁은 그제야 깨달았다.
성검 발뭉, 마기를 먹고 성장하는 포식자, 그 먹성 좋은 검이 레드웜의 몸에 침투한 마기를 먹어치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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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기를 치유하는 검이라니, 설마….”
설명을 들은 노사제와 신전 기사단의 단장이 뒤늦게 놀란 얼굴을 해보였다.
“성검 발뭉!”
경악한 노사제의 한마디에 신전 기사들이 검을 뽑고 레드웜의 주변을 포위했다.
“도난당한 발뭉이 설마 이곳에 있었을 줄이야!”
교국이 박준민을 성검의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더니, 정말이었다. 신전 기사들은 박준민을 천하의 몹쓸 놈이라도 보듯 적개심 가득한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전승공께 도움이 된다니, 잠깐은 기다리도록 하겠습니다.”
마치 인심이라도 쓰듯 말하는 단장의 얼굴을 보며 김선혁은 한숨을 내쉬었다.
“혹시 성검이라는 게 아무나 막 쓸 수 있는 겁니까?”
그의 질문에 노사제가 고개를 저었다.
“자격이 되지 않는 자가 손을 대었다간, 제명을 단축하게 되겠지요.”
노사제는 박준민이 주제 넘는 힘을 사용한 대가로 곧 죽게 될 거라 확신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전에 보셨다던 그 빛의 기둥은 어떻습니까? 그 정도 힘을 쓸 정도면, 어느 정도의 대가를 치러야 합니까?”
“감당할 수 없는 성력을 발휘한 대가로 육신이 무너져 내리겠지요.”
“그럼 저 친구도 곧 죽겠군요.”
그의 태도가 어딘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노사제와 단장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데 제 눈에는 저 친구가 너무 멀쩡해 보이는데요.”
그런 그들을 보며 김선혁이 한마디를 덧붙였다.
“저 친구가 성검의 힘을 빌어 쓴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제가 본 것만 해도 벌써 수십 차롑니다.”
노사제의 얼굴에 의혹이 떠올랐다.
“그런데 왜 저 친구는 멀쩡할까요.”
그제야 그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를 깨달은 노사제가 눈을 찢어져라 부릅떴다.
“설마….”
그 놀라움 가득한 얼굴을 보며 김선혁은 확신했다.
용사 박준민이 성검에게 선택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건, 신전의 고위 인사들뿐이다.
만약 그게 아니라면 저 노사제는 희대의 사기꾼이라 해도 좋을 연기력을 지녔다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기에는 노사제의 눈빛과 기운이 너무도 맑았다.
“저 사람이 몇 번이나 성검의 힘을 끌어다 썼다는 걸, 보증하실 수 있으십니까.”
노사제보다는 한결 침착한, 하지만 여전히 불신이 가득한 단장의 질문에 김선혁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꺼이.”
아무래도 박준민에게 진 빚을 생각보다 빨리 청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저희들도 보증하겠습니다.”
라파예트와 롤랑이 가만히 대화를 듣고 있다가 끼어들어 그의 말에 힘을 보태주었다.
“궁금한 게 많으시겠지만, 조금만 참아주시지요.”
혼란스러운 얼굴로 몇 번이나 입을 열었다 도로 다무는 노사제를 보며 그가 하늘 위를 가리켰다.
“마침 당사자가 깨어나려는 것 같으니까.”
지긋이 눈을 감은 채 발뭉을 부여잡고 있던 박준민이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레드웜의 검은 표피가 후두둑 뭉텅이로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