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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 거룡(巨龍) (2)
괴수가 다시 질주를 시작했다. 줄리앙 일행을 비롯한 신전 기사단은 그 뒤를 쫓아 속도를 올리는 대신 흐트러진 대열을 정비했다.
“사주경계에 각별히 주의하라.”
이곳은 수도 없이 많은 이들을 먹어치운 마왕의 땅이다. 체력을 보전하고 혹시 모를 습격에 대비해야 했다. 무리하게 속도를 올리다 싸우기도 전에 지치는 일 만큼은 절대로 피해야 했다.
게다가 어차피 골드레이크가 향하는 곳은 정해져 있었다.
거대한 괴물의 목이 검은 탑처럼 우뚝 선 서편 저 어딘가, 골드레이크의 목적지는 그곳밖에 없었다.
“음.”
줄리앙은 불길한 보랏빛 하늘에 솟아난 괴수의 일부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저놈은 대체 뭡니까.”
마왕의 땅과 국경을 접한 신성 교국의 인물들이라면 혹시 저 괴물체의 정체를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줄리앙이 물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저 괴생명체를 처음 본 것은 교국의 인물들 역시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신의 역사는 오래도록 기록되었지만, 맹세코 저런 괴물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습니다.”
노사제의 대답에 신전 기사단의 단장이 한마디를 덧붙였다.
“저게 무엇이든 간에, 우리에게 이로운 존재일 것 같진 않소.”
마왕의 땅에 어울리는 칠흑의 빛, 굳이 그게 아니더라도 이 오염된 대지에서 온전한 생명체가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만나는 모든 것이 적대적일 수밖에 없는 저주받은 땅, 하지만 줄리앙은 여전히 저 괴물의 정체가 신경 쓰였다. 골드레이크의 그것과 쏙 빼닮은 울음소리 때문이었다.
어쩌면 저 괴물이야말로 영주의 갑작스러운 외유의 이유일지도 몰랐다.
“어차피 가까이 가면 알게 되겠지.”
만약 저 괴물이 정말로 영주가 이곳까지 오게 만든 존재라면, 보는 순간 알게 될 것이다.
영주의 아룡들은 모두가 신화 속의 용을 조금씩 닮아 있었으니, 구분은 어렵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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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드레이크는 이제 완전히 사라져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었지만, 길을 잃을 걱정은 없었다. 검은 괴수의 존재가 여전히 일행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알려주고 있었다.
“음….”
몇 시간을 쉬지 않고 걸었다.
혹시 모를 습격에 대비한 느린 걸음이었을지라도, 그들이 이동한 거리는 결코 적지 않았다. 하지만 여전히 괴수와의 거리는 아직도 멀기만 했다.
가는 동안 신전 기사단의 인물들과 사제단은 거대 괴수를 상대할 방법을 강구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뾰족한 방법을 생각해내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전 기사단의 기사들은 괴수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애초에 그들은 마물과의 전투에 특화된 존재들, 덩치가 아무리 크다 해도 검력 대신 성력을 두른 자신들의 검이라면 능히 저 괴수를 상대할 수 있다 여긴 것이다.
그러한 그들의 생각은 오만이 아니었다.
신전 기사단의 기사들은 자신들을 습격한 다수의 마물들을 너무도 손쉽게 격퇴함으로써 스스로의 용맹이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했다.
사제단 역시 마찬가지였다.
사제들의 능력은 최소한 이 오염된 땅에서만큼은 다재다능한 마법사들의 부재를 메우기에 충분했다. 그들이 쉬지 않고 흥얼거리는 성가는 일행이 마기에 침식되지 않도록 해주었고, 이따금씩 발휘하는 거룩한 신의 빛은 마물들을 흔적도 없이 녹여버렸다.
3천의 성전사단 역시 만만치 않았다.
신앙 깊은 사제들에게 축복을 받은 성갑과 검을 꼬나 잡은 베테랑 전사들은 신전 기사들과 사제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면 언제든 순교할 각오가 되어 있는 자들이었다. 그리고 그런 각오에 걸맞는 실력을 갖고 있었다.
세 무리가 마치 톱니바퀴가 맞물리듯 서로의 부족함을 보완하니, 흉악하고 사나운 마물들조차도 감히 성군의 앞을 막을 수 없었다.
이들이야말로 마수와 마물들의 천적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들이라고 해도 평원을 가득 메운 마물의 군대를 만났을 때만큼은 주춤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이건 대체….”
“오. 신이시여.”
이제껏 그 어떤 마물을 만났을 때도 흔들리지 않았던 신전 기사들의 얼굴이 해쓱하게 질렸다. 사제단의 사제들과 성전사단 역시 마찬가지였다.
최소한 수만은 되어 보이는 언데드와 마물의 군대, 그나마 다행이라면 저 끔찍한 군대가 바라보는 것이 자신들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아, 저기!”
성군의 모든 이들이 헤아릴 수 없는 마물의 군대에 시선을 빼앗겼을 때, 줄리앙 일행만이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레드번과 그리핀들이다!”
그들의 시선에 수시로 하강과 상승을 반복하는 붉은 와이번과 필요 이상으로 저공비행을 하는 그리핀 라이더들의 모습이 보였다.
“아….”
당장에라도 자신들의 영주에게 달려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평원을 가득 메운 마물들의 군대를 통과하는 건 자살행위였다.
그들은 이제야 겨우 찾은 영주를 보며 발을 동동 굴러댔다.
“잠깐, 영주님의 모습이 안 보여.”
기병들 중에서도 유달리 눈이 밝은 편에 속하는 요나슨이 잔뜩 찌푸린 얼굴로 말했다.
“뭐?”
레드번의 모습이 보여 당연히 영주가 타고 있을 거라 생각했던 일행이 요나슨을 돌아보았다.
“레드번 말이야. 혼자라고.”
눈에 힘을 주고 하늘을 바라보던 요나슨이 저 너머를 살펴보다, 반가운 얼굴을 해 보였다.
“골드레이크! 영주님은 골드레이크에 타고 계셔!”
홀로 질주하여 사라졌던 금빛 괴수, 그 위에 그들이 그토록이나 애타게 찾던 영주가 있었다.
“아아!”
하지만 반가움에 화색을 띄었던 요나슨의 얼굴은 금세 하얗게 질리고 말았다.
평원을 가득 메운 마물들의 목표가 누구인지를 이제야 깨달았던 탓이다. 그들의 영주는 골드레이크에 올라탄 채 수도 없이 몰려드는 마물들과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었다.
“왜 하필 지금 골드레이클….”
이해가 가지 않았다. 평소의 영주라면 저 끝없는 마물의 군대를 상대하는 대신 레드번에 올라탄 채 유유히 자리를 벗어났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영주는 무모하게도 지상에서 마물들을 맞아 싸우는 것을 선택했다.
이해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
“저기 사람들이 모여 있다!”
신전 기사들 중 하나가 외친 소리에 요나슨은 그제야 그 무모한 선택의 이유를 알게 되었다.
자신들의 영주는 도망치지 못한 것이 아니었다. 도망치지 않은 것이었다.
언젠가 주둔지의 민간인들을 지키기 위해 몇 배나 되는 녹테인의 기병들을 상대로 무모한 싸움을 벌였던 것처럼, 영주는 또다시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철컥.
저 너머에서 펼쳐진 광경에 반쯤 넋을 놓았던 클라크와 기병들은 날카로운 쇳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줄리앙?”
그런 그들의 눈에 작은 머리통에 걸맞게 제작된 투구의 면갑을 내린 채, 자신의 장비를 점검하는 어린 종자의 모습이 보였다.
“너 지금 뭐….”
“보고만 있을 겁니까?”
그녀는 당장에라도 끔찍한 마물의 군대 사이로 뛰어들 것처럼 숨을 고르고 있었다.
“빠질 사람은 빠지십시오. 나는 가볼 테니까.”
클라크가 잠시 멍한 표정으로 있다, 안장에 매어두었던 기병용 양손검을 꺼내 들었다.
“뭐, 따지고 보면 저 못 생긴 새끼들도 땅개지. 그리고 땅개는 우리 밥.”
클라크의 말에 요나슨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와, 이 미친 양반들 보소. 저기에 뛰어들게?”
하지만 정작 그렇게 말하는 요나슨도 어느새 제 검을 꺼내든 상태였다.
“미치지 않으면 기병 못하지.”
자신들을 잡아먹기 위해 눈 시퍼렇게 뜨고 창을 꼬나쥔 창병들 사이로 돌격하는 건 제정신 박힌 이들이라면 절대로 하지 못할 일이었다. 하지만 블루 코트들은 그 미친 짓을 예사로 하는 이들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그런 블루 코트들 중에서도 가장 미치광이였다.
“언제는 우리가 숫자 보고 들어가고말고 결정했냐. 까라면 까는 거지.”
한센과 남은 기병들 역시 제 무기를 꺼내들며, 낄낄거렸다. 아무래도 정말로 저 끔찍한 마물의 바닷속으로 몸을 던질 생각인 모양이었다.
“나중에 원망 말고 쫄리면 그냥 여기 남으십쇼. 대신 고추 떼십쇼.”
줄리앙의 말에 한센이 뭐라고 대답하려는 찰나, 묵직한 음성이 그들 사이로 끼어들었다.
“어린 아가씨의 말이 마치 우리한테 하는 말 같군.”
신전 기사단의 단장이었다.
“그렇게 느끼셨습니까?”
노골적인 도발에 신전 기사단의 단장이 피식 웃었다.
“설마 아스토리아의 신전 기사들이 저 사악한 마물들을 두고 등을 보일 거라 생각한 건가. 그것도 저런 광경을 보고?”
단장의 시선이 마물들과 분투하는 금빛 괴수와 그 기수에게 향했다.
“우리는 사악한 것들을 무저갱으로 돌려보내기 위해서라면 죽음조차 두렵지 않네. 그리고 내가 보기엔 저 자리가 죽음을 각오해야 할 정도로 위험해 보이지도 않는구만.”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단장의 뒤에 도열해 있던 신전 기사들이 저마다 축언을 내뱉으며 검을 뽑아 성호를 그었다.
“성전사 1천을 남겨 대주교님과 사제들을 보호하도록 하라. 저들을 처리하는 건 우리와 성전사 2천이면 충분하다.”
단장의 지시에 성전사단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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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기하지 마!”
골드레이크에 올라탄 김선혁은 잔뜩 갈라지고 쉬어터진 목소리로 고함을 쳤다. 그가 고함을 칠 때마다 헤아릴 수 없는 마물의 군대에 기가 눌려 무기를 늘어트렸던 생존자들이 다시금 용기를 얻었다.
“조금만 버텨! 아스토리아의 군대가 바로 근처에 와 있다!”
하지만 정작 아군을 독려하는 김선혁의 속은 까맣게 타들어가고 있었다.
마물들의 수가 너무도 많았다. 용기만으로 상황을 헤쳐 나가기에는 상황이 너무 좋지 않았다. 생존자들은 너무 오래 싸워왔고, 지쳐 있었다. 그리고 자신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냥 혼자라도 도망치라고 새끼야!”
“답답한 놈아! 같이 죽을래!”
지나치게 스스로를 혹사한 그가 한계에 도달했다는 사실을 알아챈 생존자들이 혼자라도 도망치라고 등을 떠밀었다.
“나 가면! 나 가면 다 여기서 뒤질래!”
그런 생존자들에게 김선혁이 욕설을 내뱉었다.
“이렇게 뒤지려고 이 거지같은 세상에 와서 그렇게 고생을 했냐고! 이 새끼들아!”
그의 말에 생존자들이 분한 얼굴을 해보였다.
“그러니 닥치고 싸워! 조금만 버티면 살 수 있다고!”
빈말이 아니었다. 지원군이 바로 근방까지 도착했다는 사실은 그도 알고 있었다. 단지 그들이 언제 도착하느냐의 문제였을 뿐이었다.
“제발! 제발!”
김선혁은 간절히 기도했다. 아스토리아의 지원군이 조금이라도 빨리 이곳에 당도하기를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그런 그의 기도가 통한 것일까.
“전승공이시여! 지원군이 도착했습니다!”
바쁘게 하늘을 누비며 마물들을 쓸어가던 라파예트가 지원군의 당도를 알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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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전 기사단의 활약은 놀라웠다. 그들이 검력 대신 검날에 모은 성력은 마물들의 몸을 종잇장처럼 찢어발겼다. 수만의 마물들은 감히 그들의 앞을 막아설 수 없었다.
결국 그들은 끝이 나지 않을 것 같았던 마물들의 한가운데를 종단하는 데 성공했다.
“여기서부터는 우리가 맡겠소!”
신전 기사단을 따라온 성전사들이 김선혁과 생존자들의 주변을 둘러쌌다. 그 사이에 섞여 있던 줄리앙 일행이 자신들의 영주에게 달려든 것도 그 즈음이었다.
“영주님!”
골드레이크에 엎드려 숨을 몰아쉬던 김선혁이 낯익은 얼굴을 발견하고는 얼빠진 얼굴을 해 보였다.
“어? 너희들이 왜?”
“왜기는 왜겠….”
반가움과 원망이 반반 섞인 얼굴로 그를 타박하던 줄리앙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영주님. 얼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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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는 쉽사리 끝이 나지 않았다. 신전 기사들과 성전사들은 용맹했지만, 마물의 수가 너무도 많았던 탓이다. 하지만 끝이 없는 전투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으니, 그 힘겨운 전투도 동이 터올 무렵에는 완전히 끝이 났다.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남아있던 마물들마저 성력에 밀려 도망을 치고, 신전 기사단의 단장이 자초지종을 물었다.
“이쪽은 서부의 반란에 가담하지 않은 이방인 생존자들입니다.”
새삼 놀랄 것도 없었다. 검은 머리만 보아도 그들이 서부의 난리에서 살아남은 이방인들이라는 사실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사실 단장이 묻고 싶었던 건 따로 있었다.
“대체 그 빛의 기둥은 뭐였고….”
단장의 시선이 그 격렬한 전투의 와중에도 단 한 번도 움직이지 않았던 검은 괴수를 향했다.
“이 괴물은 대체 뭡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