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83 =========================================================================
183.마왕의 땅 (3)
너른 평원을 가로지르는 골드레이크의 질주는 거침이 없었다. 일직선으로 달리는 괴수의 앞을 가로막는 건 그게 무엇이든지 파괴되었다. 거대한 머리통을 내세운 살벌한 질주였다.
잠도 자지 않았고, 먹지도 않았다. 골드레이크는 오직 앞만 보고 달릴 뿐이었다. 마치 그게 유일한 명제인 듯 필사적인 질주였다.
“으아! 미친놈아! 대체 어디까지 가는 거야!”
그런 괴수를 뒤따르는 기병들의 입에서 곡소리가 흘러나왔다.
하루 종일 잠만 퍼질러 자던 골드레이크가 갑작스레 우리를 부수고 내달리기 시작했고, 클라크를 비롯한 기병들은 그 난데없는 난동에 기겁을 하고 따라붙었다. 그리고 그게 벌써 나흘 전이었다.
“멈춰! 멈추라고!”
“그런다고 멈추겠냐!”
한센의 비명에 요나슨이 핀잔을 주었다.
하지만 정작 그렇게 타박을 하는 요나슨도 골드레이크가 멈추기를 간절히 바라는 눈치였다. 아니, 그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기병들 역시 지친 얼굴로 골드레이크의 질주가 멈추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대체 왜 갑자기….”
출동은 너무도 갑작스러웠고, 당연하게도 기병들은 장거리 이동을 할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이제 결정해야 돼! 더 이상은 무리라고!”
요나슨의 말에 선두에서 내달리던 클라크가 이를 악물었다.
말도 지쳤고 사람도 지쳤다.
중간에 휴식을 취하기는 했지만, 충분하지 않았다. 자신들이야 억지로 버틴다고 해도 말이 버텨내지 못할 것이다.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하필이면 골드레이크가 향하는 방향이 녹테인의 국경 쪽이라는 것도 문제였다. 그리고 그들이 보기에 골드레이크가 국경에 도달하기 전에 멈춰설 가능성은 조금도 없어 보였다.
“재수 없으면, 전쟁이다.”
다른 나라도 아니고 하필이면 녹테인이다. 드라흔이라는 이름과 그가 애용하는 괴수들이라면 갈아 마셔도 시원찮아 할 자들이 넘쳐나는 곳이 바로 녹테인이었다.
그런 녹테인이 국경을 넘은 괴수를 그냥 두고 볼 리가 만무했다.
기수의 부재는 핑계가 될 수 없었다. 아니, 녹테인은 오히려 기수가 없는 괴수를 손쉬운 사냥감으로 여기고 달려들 것이다.
어쩌면 국경을 침범한 괴수를 빌미로 또 한 번 전쟁을 걸어올 수도 있었다.
물론 지난 전쟁에서 입은 타격이 큰 녹테인이니만큼 전쟁이 쉬이 벌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도 가능성만큼은 염두에 두어야 했다.
“일단 갈 수 있는 데까지는 따라가 본다.”
얽히고설킨 상황, 그 모든 우려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골드레이크를 멈춰 세울 수 없었다.
무슨 수로 저리 미쳐 달리는 괴수를 막아 세운다는 말인가.
아니, 그보다는 괴수의 질주를 막고 싶지 않았다.
충성스러운 골드레이크가 저리 달리는 걸 보면 주인의 안위에 문제가 생긴 게 분명했다.
“진짜 영주님한테 무슨 일 생긴 건 아니겠지?”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 영주님이 그렇게 쉽게 당할 사람이야?”
“다른 놈도 아니고 레드번을 타고 가셨다. 무슨 일이 있었다고 해도 몸 하나쯤은 충분히 뺄 수 있으실 거야.”
기병들 중 하나가 무심코 내뱉은 걱정에 한센과 요나슨이 버럭 역정을 냈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그럴 시간 있으면 우리 일이나 걱정해.”
클라크까지 두 사람의 말을 거들고 나서자, 말을 꺼냈던 기병도 입을 다물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국경까지는 무조건 따라가 본다. 운이 좋다면 줄리앙이 무슨 수를 냈을지도 몰라.”
괴수를 앞질러 간 줄리앙이 부디 뭔가 방법을 마련해두었기를 바랄 뿐이었다.
하지만 국경지대에 다 도착하도록 수비대의 움직임은 없었다.
순찰대들이 이따금씩 모습을 보였지만, 그뿐이었다. 그들은 일행을 뒤쫓다 금세 모습을 감췄다.
“진짜 국경 넘겠네.”
“어떻게 할 거야?”
평원의 먼지를 온통 들이마신 탓에 탁하게 갈라지는 목소리로 요나슨이 물었다.
“어쩌긴 뭘 어째! 혹시라도 골드레이크한테 문제 생기면, 나중에 영주님 얼굴 어떻게 볼래!”
한센은 영주의 안위에 문제가 생겼을까 봐 몸이 달았는지, 세상 끝까지라도 쫓아갈 기세였다.
고민하던 클라크는 결국 국경을 넘더라도 골드레이크를 쫓기로 했다. 혹시라도 자신의 짐작대로 영주가 위험에 처해 있다면 골드레이크의 도움이 절실할 거라 여겼던 탓이었다.
“가자.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해봐야지.”
기병들 중 클라크의 결정에 반대하는 이는 단 하나도 없었다.
“우리가 언제부터 승냥이 새끼들을 무서워했다고!”
“까짓 거 한 번 죽지, 두 번 죽냐!”
이미 드라흔이라는 이름에 매료된 그들은 실종된 영주를 찾기 위해서라면 불구덩이 속에라도 뛰어들 각오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세상만사 마음만으로 되는 법이 없다.
“으아아!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뒤따르던 기병의 말 하나가 기어이 퍼져버린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낙오자는 늘어만 갔다.
하기야 이 살벌한 질주를 이만큼이나마 따라온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었다. 여기서부터는 언제 누가 낙오한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기병들은 그만큼 지쳐 있었다.
열다섯, 열넷, 열셋, 열, 그리고 아홉.
스물이 출발했지만, 남은 것은 아홉뿐이었다.
그리고 아홉이 다시 일곱이 되었을 때, 그들은 마침내 국경에 도달할 수 있었다.
“넘는다, 넘는다, 넘는다! 넘었다!”
우려대로 골드레이크는 멈추지 않았고, 그대로 국경선을 돌파했다.
클라크를 비롯해 끝까지 따라붙었던 기병들이 이를 악물었다. 여기서 멈추지 않으면 돌이킬 수 없었다. 저 너머는 사나운 승냥이들의 땅이었고, 그들에게 있어 자신들은 그저 좋은 사냥감에 불과했다.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기병들 중 말의 속도를 줄인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냥 넘어!”
“내가 또 국경을 넘을 줄이야!”
“끼얏호!”
기병들이 고래고래 악을 쓰는 것을 보며 클라크는 피식 웃었다.
“미친놈들.”
세상에 이런 정신 나간 놈들이 또 어디에 있을까.
“기왕 이렇게 된 거 녹테인을 가로지른 최초의 기병이 되는 거다!”
물론 그 역시 그 미친놈들 중 하나였다.
두두두두두.
그렇게 내달리는 와중에 갑작스레 말발굽소리가 들려왔다.
“설마 벌써 녹테인 놈들이 냄새를 맡은 건가!”
“전원 전투 준비!”
틈이 쉬었다고 해도 말이나 기수나 한계에 달한 상황, 제대로 싸울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하지만 기병들은 군말 없이 기병용 양손 검을 꺼내들고 전투를 준비했다.
“어?”
비장한 얼굴로 뒤에 따라붙은 먼지구름을 바라보던 후미의 기병 하나가 얼빠진 소리를 내뱉었다.
“아군인데?”
“뭐 인마? 국경 너머에 왜 아군이 있어!”
한센이 버럭 소리를 지르고는 뒤를 돌아보았다가, 똑같이 얼빠진 소리를 내뱉었다.
“진짜 블루 코트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저 멀리 먼지구름 속에서 쏜살같이 튀어나오는 이가 있었다.
“줄리앙!”
“예상보다 속도가 빨라서 늦었습니다!”
작은 체구의 기병, 영주의 종자이자 견습 기사인 줄리앙 뱅키쉬였다.
“왜 아군이 국경 너머에까지….”
그의 질문에 줄리앙이 대답했다.
“설명은 나중에 할 테니까, 일단 말부터!”
“뭐?”
미처 그 의미를 파악하기도 줄리앙을 따라온 무리들이 지척까지 따라붙었다.
“여기!”
그렇게 소리쳐 외치는 블루 코트들의 손에 기수 없는 말의 고삐가 붙잡혀 있었다.
“아….”
머리보다 몸이 먼저 반응했다. 그들은 달리던 상태 그대로 블루 코트들이 넘겨준 말의 고삐를 건네받고는, 묘기와도 같은 동작으로 말을 바꿔 탔다.
“식량과 식수라면 안장에 메어뒀으니 배부터 채우쇼!”
“당신들의 말은 우리가 잘 보살피고 있을 테니 걱정 말라고!”
친근함 가득한 어투에 기병들이 울컥한 얼굴을 해 보였다. 국경 너머에서 만난 아군의 조력이 왠지 모르게 감격스러웠던 것이다.
“행운을 빌겠소!”
“블루 코트답게 끝까지 달려! 포기하고 돌아오는 놈은 내가 기억해뒀다가 엉덩이를 걷어 차주겠어!”
거칠지만 진심 가득한 사내들의 응원에 기병들은 제 나름의 방식으로 고마움을 표했다.
“나중에 돌아올 때 선물 사다줄 테니, 내 말 좀 잘 챙겨주쇼!”
전송을 마친 아덴버그의 블루 코트들이 말 머리를 돌려 사라지고, 기병들은 안장에 메인 식수와 육포를 찾아 입에 때려 넣었다.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조금이나마 체력을 보충한 클라크가 자초지종을 묻자, 줄리앙이 대답했다.
“섭정 폐하께서 직접 나서셨습니다.”
설마 섭정까지 나설 줄은 생각도 못했던, 클라크가 깜짝 놀란 얼굴을 해보이니 줄리앙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섭정 폐하께서 성전에 참전하실 것을 만천하에 공표하셨습니다.”
“뭐?”
지금 이 상황이 성전과 무슨 상관인지, 클라크는 좀처럼 그 의미를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저희를 신성 교국으로 향하는 원정대의 선발대로 임명하셨지요.”
줄리앙의 말에 클라크가 탄성을 내뱉었다.
“그럼….”
“녹테인은 우리를 공격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
녹테인의 귀족들은 갈아 마셔도 시원찮을 드라흔이 실종되었다는 사실에 쾌재를 불렀고, 주인을 잃은 괴수가 폭주하여 자국의 영토를 향해 달려오고 있다는 사실에 또 한 번 쾌재를 불렀다.
붉은 와이번의 존재에 가려지기는 했지만, 금빛 드레이크 역시 한때 녹테인의 충성스러운 병사들을 학살했던 존재였다. 그런 드레이크가 기수도 없이 홀로 자국에 흘러들어온다는 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회였다.
그들은 드레이크의 머리를 잘라 왕성에 장식을 해두는 것으로 그간의 한을 풀려 했다.
하지만 그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 버렸다.
아덴버그의 섭정이 성전에 참전할 것을 선포하고, 드레이크와 그 뒤를 쫓는 일단의 무리들을 공식적인 원정대로 공언한 것이다.
그런 그들을 공격한다는 것은 신성 교국이 표명한 대륙의 정의를 부정하는 행위이자, 중부 왕국 연맹을 적대할 것을 천명하는 행위나 마찬가지였다.
“마왕만 아니었으면!”
다른 때였다면 눈 딱 감고 모른 척 일을 벌였을 것이다.
하지만 신성 교국이 마왕과의 성전을 선포하고, 중부와 동부의 모든 왕국들이 이를 지원하기로 공표한 지금은 그럴 수도 없었다.
만약 이 상황에서 일을 벌였다간 대륙의 안위조차 무시하고 사사로운 복수심에 일을 그르친 옹졸한 존재가 된다.
이는 단순히 명예의 문제가 아니었다.
차후 성전이 끝나고 인접국들이 합심하여 녹테인을 갈기갈기 찢어버릴 명분과도 연관이 깊은 문제였다.
“원수의 종자 놈들을 코앞에 두고도 지켜만 봐야 하다니!”
절호의 기회를 앞에 두고도 지나쳐야 한다는 사실이 분했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지금은 오히려 녹테인을 지나는 동안 아덴버그의 선발대가 변을 당하지 않기를 바라야 했다. 혹시라도 왕실이 사주하여 그들을 해코지했다는 오명을 뒤집어쓰지 않기 위해서였다.
결국 그들은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왕국을 가로지르는 금빛 괴수와 소수의 기병들을 모른 척해야 했다.
녹테인으로서는 전쟁에서 진 것보다 더욱 분한 일이었다.
그마나 위안거리가 있다면, 그리핀도르 역시 자신들과 처지가 같다는 것이었다.
**
“살다 살다 녹테인 궁기병들의 에스코트를 받을 날이 올 줄이야.”
먼발치에서 자신들의 뒤를 따르는 녹테인 기병들의 존재를 확인한 클라크가 낮게 중얼거렸다.
“마지막까지 경계를 늦추지 마!”
혹시 모를 습격에 곤두섰던 신경이 무뎌질 때 즈음, 녹테인의 영토가 끝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