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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마왕의 땅 (2)
이제껏 서부의 사태를 강 건너 불구경하듯 관망하던 중부의 왕국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발 빠른 기병들과 수색에 능한 이들을 추려 소규모 정찰대를 조직했고, 그들로 하여금 서부의 상황을 정탐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기다렸다. 사흘이 지나고 나흘이 지나고, 다시 열흘이 지났다.
아무리 기다려도 서부로 향한 이들 중 돌아온 이는 아무도 없었다.
다시 인원이 선발되었다.
처음 서부로 향했던 이들보다 더욱 더 기량이 출중한 인원들이 수색대에 포함되었다. 개중에는 왕국 전력의 총화라 할 수 있는 기사와 마법사들도 있었다.
비록 하급 마법사와 평기사들이라 해도 그들 역시 초인들이었다.
그들이라면 능히 먼저 사라진 정찰대의 행방과 서부의 상황에 대한 답을 들고 돌아오리라 모두가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그 믿음이 깨어지는 데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고가의 연락석을 다수 챙겨간 마법사들이 서부에 도착했다는 마법 전문을 보내온 것을 끝으로 연락이 끊긴 것이다.
귀하디귀한 초인 전력을 헛되이 잃었지만, 소득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드라흔이 옳았다.]
연락이 두절된 수색대 중에 하나가 마지막으로 보내온 전문은 짤막했지만, 동부와 중부의 왕국들이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기에는 충분했다.
“대체 왜 이제까지 서부의 상황이 알려지지 않았던 건가!”
“과연 서부와 국경을 맞댄 중부의 왕국들은 믿을 만한가? 그들이 작정하고 속인 것이 아니라면, 이 정도까지 사태가 진행되도록 서부의 상황이 알려지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동부 왕국들이 중부에 위치한 왕국들을 거세게 비난하며, 보다 적극적으로 정찰에 임할 것을 강요했다. 호전적인 몇몇 왕국들은 국경의 군대를 움직여 무력시위를 벌이기까지 했다.
“중부의 왕국들은 스스로가 결백함을 증명하라!”
그간 자국에 침투한 마수들을 정리하느라 소극적으로 정찰 활동에 임해왔던 중부의 왕국들이 동부 왕국들의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마침내 군대의 파견을 결정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중대 규모의 기병들과 연대 규모의 보병들로 조직된 대규모 원정대가 국경을 넘어 대륙 서부로 향했다.
그리고 그들은 마침내 드라흔이 말했던 죽음의 땅에 도달하게 되었다.
“이건 말도 안 돼….”
병사들은 음울한 보랏빛 하늘을 보고 겁에 질렸고,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부정한 기운에 완전히 압도되었다.
“앞으로 나아간다. 이 정도의 정황만으로 서부의 왕국들이 전부 무너졌다고 판단할 수는 없다.”
지휘관들은 겁에 질린 병사들을 독려하여 계속해서 진군했다.
서부로의 여정은 뭐 하나 쉬운 게 없었다.
오염된 강물을 떠마신 병사들은 알 수 없는 질병에 걸려 시름시름 앓았고, 멀쩡한 이들은 밤마다 끔찍한 악몽에 시달려 광증을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지휘관들은 계속해서 나아갔다.
그리고 마침내 서부 왕국들의 주요 거점이라 할 수 있는 지점에 도달할 수 있었다.
“아….”
무너진 요새, 폐허로 변해버린 도시, 텅 비어버린 병영, 그 어디에서도 인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마치 증발이라도 한 것처럼 사라져버린 사람들, 원정대의 지휘관들은 잠시 고민했다. 사라진 사람들의 행방을 찾아볼 것인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것에 만족하고 군대를 물릴 것인지 갈등했다.
하지만 이미 답은 나온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부족한 식수에 알 수 없는 질병, 그리고 광증을 보이는 병사들, 더 이상의 진군은 무리였다. 그들은 이 정도의 정보를 얻은 것만 해도 충분한 성과라 자위하며 군대의 머리를 틀었다.
“돌아간다.”
중부 왕국들이 신중을 기해 엄선한 지휘관들은 먼저 출발했던 이들이 실종되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고, 그 자리에서 군대의 머리를 돌렸다.
귀환길은 쉽지 않았다. 갈증에 시달려 탈진한 병사들의 걸음은 무겁기만 했고, 광증이 도진 병사들로 인해 군율마저 무너지기 직전이었다.
그들은 하루라도 빨리 죽음의 땅이 되어버린 서부를 탈출하여 지옥에서 벗어나기를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진짜 지옥은 이제 시작이었다.
그들이 그 사실을 깨달은 것은 귀환을 결정하고 하루가 지났을 무렵이었다.
가장 먼저 희생당한 것은 탈진하여 터덜터덜 걸음을 옮기던 병사들이었다.
“음?”
갑작스레 땅 밑에서 튀어나온 수백 수천의 손길이 병사들의 발목을 잡아챘다.
“끄악!”
순식간에 대열이 엉망진창이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엉망진창으로 뒤섞여 엎어진 병사들을 악취 나는 무언가가 덮쳐왔다.
“사, 살려줘!”
곳곳에서 비명이 솟구쳤다. 병사들을 덮친 정체불명의 무언가는 아구아구대며 병사들을 찢어발기고 물어뜯었다.
그어어어어.
검은 흙 속에서 튀어나온 그것들은 놀랍게도 인간의 외양을 하고 있었다. 반쯤 썩어버린 육신과 길게 돋아난 녹색의 손톱만이 인간의 그것과 달랐을 뿐이었다.
습격자들의 정체를 확인한 지휘관들과 마법사들은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어, 언데드….”
마침내 그들은 사라진 서부 백성들이 어디로 향했는지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대가는 수많은 병사들의 피와 육신이었다.
“바닥이 단단한 곳을 찾아 대열을 정비하라!”
현명하고 경험 많은 지휘관들은 최선의 답을 찾아 행동했고, 마법사와 기사들 역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했다.
그들은 병사들과 엉망진창으로 엉킨 언데드들을 찾아 모조리 박살을 내었다. 과연 왕국 전력의 총화라 불리는 이들답게 그들의 활약은 놀라웠다.
언데드들이 불에 타고 검광에 썰려 나갔다.
시간이 흘러 겨우 혼란이 수습되었다. 하지만 최선을 다했음에도 병사들의 희생은 막대했다. 잠깐 사이에 희생된 보병들의 수가 부대의 절반 이상이었다. 기병들 역시 말을 잃은 이들이 태반이었으니, 순식간에 부대의 전투력이 급감하고 말았다.
그렇게 전투력이 약화된 군대를 수많은 언데드들과 몬스터들이 덮쳤다.
하지만 그래도 그들은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초인들은 아직 건재했고, 지휘부는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
그 희망이 산산조각 난 건 귀환 길에 오른 지 사흘이 흘렀을 즈음이었다.
땅에서 튀어나온 거대한 촉수가 마법사들의 몸을 으스러트렸다. 기사들이 재빨리 나서 촉수 괴물을 퇴치했지만, 이미 마법사들은 절명하고 난 뒤였다.
마법사들의 보조를 잃은 기사들은 한계까지 스스로를 혹사시켰다.
“경들이라도 살아 돌아가 이 사실을 알려야 합니다.”
지휘관들은 결단을 내렸다. 그들은 이대로 가다가는 지친 기사들마저도 희생될 거라 판단했고, 그들을 무리에서 빼 기병들과 함께 본국으로 복귀하도록 하였다.
마지막 남은 초인들이 부대를 빠져나가고 하루가 채 지나지 않아, 부대는 전멸하고 말았다.
각자 위치는 달랐지만, 원정대들이 처한 상황은 대동소이했다.
“병사들의 희생을 헛되이 할 수는 없다.”
필사의 탈출을 감행한 소규모 무리들이 중부를 향해 내달렸다. 하지만 그조차도 쉽지 않았다.
국경에 다가설수록 강력한 적이 그들의 앞길을 막았다. 기사들은 왜 스스로가 초인이라 불리는지 차고 넘칠 정도로 입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힘만으로 지옥을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했다.
결국 대다수의 생존자 무리는 전멸하고 말았다.
운 좋게 살아남은 극소수의 생존자들만이 다시 푸르른 하늘을 다시 볼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서부와 국경을 접한 8개 왕국에서 보낸 도합 이만에 가까운 군대, 그중에서 살아남은 것은 마흔이 채 되지 않았다.
그렇게 살아남은 이들조차도 귀환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시름시름 앓다 절명하고 말았으니, 마법사들은 그들의 죽임이 마기에 중독된 탓이라 설명했다.
“서부가 마왕의 손에 떨어졌음을 확인했다.”
생존자들은 전부 사망했지만, 그들로 인해 서부의 상황이 보다 상세하게 주변국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건 더 이상 서부 왕국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왕국에 침투한 마수들을 총력을 다해 몰아내고, 국경을 걸어 잠글 것이다.”
중부의 왕국들은 서부에서의 사태를 범대륙적인 문제로 규정하고 중부의 왕국들이 힘을 모을 것을 천명했다.
중부 왕국 연맹이 결성되는 순간이었다.
이에 맞추어 동부 왕국들 역시 최대한의 지원을 통해 중부 왕국들을 도울 것을 공표했다. 서부 다음은 중부, 그리고 중부가 막지 못하면 동부 역시 마찬가지 꼴을 당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신성 교국의 도움이 필요하다.”
“이런 상황에서까지 아스토리아는 여전히 집안싸움에 열을 올리는가.”
왕국들은 까마득하게 먼 옛날 신을 섬기는 이들이 사악하고 부정한 것들과 싸워 마침내 승리했음을 떠올렸고, 아스토리아의 권력자들이 권력 다툼을 중단하고 대륙의 문제에 주목할 것을 강력하게 권했다.
아스토리아의 대주교들도 뒤늦게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는 한시적인 동맹을 맺고, 권력 투쟁을 마무리 지었다.
“마왕의 군대와 싸운다는 것은 마기와의 싸움이기도 하다.”
“마기에 중독된 이들은 광기가 골수에까지 스며들어 절명하거나, 피를 탐하는 광인이 되거나 둘 중에 하나다.”
신전에 보관된 옛 기록들이 일시에 풀렸고, 그 기록들로 인해 서부가 무너진 게 마왕의 군대 때문이 아니라 마기 그 자체로 인한 것임이 알려졌다.
“마기에 저항하고 마침내 이겨내는 데 필요한 것은 거룩한 신에 대한 믿음, 그리고 신의 은총뿐이다.”
신성 교국은 오직 신성력만이 마기를 몰아낼 수 있는 유일한 수단임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자국 내에 출몰한 마수들을 일시에 쓸어내는 것으로 스스로의 주장이 사실이라는 것을 입증하였다.
중부 왕국 연맹의 맹주국으로 신성 교국이 추대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라 할 수 있었다.
“거룩한 신께 평생을 바친 신도들아. 오늘 이 자리에서 성전(聖戰)을 선포하노니, 그대들의 삶과 죽음을 약속된 그분께 바쳐라.”
맹주로 추대된 신성 교국은 성전을 선포했다. 마수가 소란을 일으켰을 당시에도 성전을 주장한 바 있었던 교국이지만, 지금의 성전 선포는 그 무게가 달랐다.
이는 세속을 향한 허망한 부르짖음이 아닌, 대륙 각지에 흩어진 사제들을 한자리에 불러 모으는 절대적인 명령이었다.
바야흐로 사악한 마왕과의 성전이 시작된 것이다.
서서히 무르익어가는 전쟁의 분위기, 그 무렵 왕국들은 누군가의 행방을 수소문하고 있었다.
이베리아 연합을 움직여 서부의 상황을 알리고, 스스로 서부로 향한 드라흔의 행방을 말이다.
하지만 그라나도를 떠나 서쪽으로 향한다는 소문을 마지막으로 소식이 끊긴 드라흔에 대한 이야기는 그 어디에서도 들려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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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라도 변고를 당한 것은 아닌지….”
어느 귀족이 눈치 없이 한마디를 내뱉었다가 제 풀에 놀라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이미 내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었으니, 가장 듣지 말아야 할 이가 그 말을 듣고 말았다.
“그 입 다물라.”
이제껏 표정 하나 없이 회의를 주관해왔던 섭정, 오필리아가 얼음장과도 같은 얼굴로 입 가벼운 귀족에게 경고했다.
“소신이 경망되이 입을 놀렸으니, 벌하여 주시옵소서.”
전에 없는 섭정의 분노에 사색이 된 귀족이 엎드려 죄를 청했다.
“이제껏 그 어떤 어려운 전투에서도 승리를 거머쥔 전승공이다. 그의 무사함을 의심하는 자는 내가 내린 전승의 이름을 무시하는 것과 같도다.”
오필리아의 싸늘한 음성에 귀족들이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였다.
전승공이 지옥이 되어버린 서쪽으로 향했다는 소식이 알려진 뒤에 부쩍 대하기 힘들어진 섭정이다. 오늘은 방정맞은 귀족 하나가 그 심기마저 어지럽혔으니, 함부로 입을 열었다간 불벼락을 맞기 십상이었다.
귀족들이 입을 다물자, 중부 왕국들에 지원할 병참의 규모와 품목을 결정하기 위해 마련된 회의도 금방 흐지부지되었다.
“휴우.”
귀족들이 빠져나가고 홀로 남은 오필리아의 얼굴이 금세 수심에 잠겼다.
“빨리 돌아온다고 약속하지 않았더냐.”
힘없이 중얼거리는 그녀의 손에는 한 달 전에 날아온 마법 전문이 꼭 쥐여 있었다.
[일이 꼬여 시간이 걸릴 것 같습니다.]
오필리아가 다시 한 번 한숨을 쉬었다.
“섭정 폐하!”
홀로 앉아 소식이 끊긴 반려에 대한 생각에 잠겨있는데, 갑작스레 호들갑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말하라.”
다시 무표정의 가면을 쓴 그녀가 차갑게 말하니, 문을 열고 들어섰던 시종이 엎드려 외쳤다.
“전승공의 드레이크가 라인펄 영지를 뛰쳐나가 서쪽으로 향했다는 소식이 들어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