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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마왕의 땅 (1)
노르딕의 이방인들이 차지한 영역은 대륙 북서부에 위치한 노르딕과 인접한 왕국들의 일부에 불과했다.
아직 북서부만큼 직접적으로 전쟁에 휘말리지 않은 서부의 왕국들의 경우에는 어느 정도 여력이 있다고 들은 바가 있었다.
하지만 막상 서부에 도달해서 보니 들었던 것과 너무도 달랐다.
세상천지를 뒤덮은 마기는 사람이 살아갈 수 없을 정도로 지독했고, 오염된 대지는 작물이 자라기에는 지나치게 생기가 없었다.
김선혁이 보는 대륙 서부는 말 그대로 죽음의 땅 그 자체였다.
“아아아아아아!”
라파예트의 등 뒤에 타고 있던 박준민이 갑작스레 괴성을 질렀다. 그리고 거의 그와 동시에 발뭉이 성광을 마구 뿜어내기 시작했다.
거룩한 광휘가 마기를 밀어낸다. 하지만 역부족이었다. 온 천지에 가득한 마기는 밀려났다가도 금세 검은 아지랑이를 피워내며 달려들었고, 거대 마수조차 소멸시켰던 성광은 아무런 소득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허억. 허억.”
잠깐 사이에 온 힘을 다 쏟아부은 듯, 박준민이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우우우우웅.
발뭉이 몸을 떨어대는데 그 모습이 마치 스스로의 부족한 힘을 한스러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발뭉이 지닌 기운은 마기와 정반대에 놓인 것, 이 정도의 마기를 보고 분노하지 않는 게 도리어 이상하지.]
게하임니스가 성검과 용사의 갑작스러운 발작의 이유를 설명해주었고, 김선혁은 금세 납득했다.
박준민만큼은 아니어도 자신 역시 비슷한 심정이었다.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적개심과 투쟁심이 당장에라도 온 힘을 쏟아부어 저 부정한 기운을 갈기갈기 찢어내라 등을 떠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이성을 잃고 힘을 소진한 성검의 주인과는 달리, 스스로의 충동을 억눌렀다.
“미, 미안해요. 저도 모르게 그만.”
박준민이 뒤늦게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사과해왔다.
“아니. 이해해.”
여전히 붉은 빛이 남은 박준민의 눈을 바라보며 김선혁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은 물러나자. 이 정도로 요란을 떨었으니, 뭐가 와도 올 거야.”
만전을 기해도 모자랄 상황에서 헛되이 힘을 낭비했으니, 만약 일이 벌어진다면 대처하기가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소득 없는 싸움을 벌이는 대신 자리를 벗어나는 것을 선택했다.
꺄아아아악!
예상이 맞아떨어졌다. 저 멀리서 무언가가 불길한 귀곡성을 내지르며 다가오고 있었다. 그것도 하나가 아니었다. 최소한 수십, 어쩌면 수백일지 모를 울음소리, 김선혁은 조용히 일행을 추슬러 뒤로 물러났다.
“후아.”
발뭉이 힘을 잃은 동안 일행을 마기로부터 보호한 건 드래곤 피어였다. 온몸으로 뿜어대는 용의 기세에 마기도 감히 범접하지 못하고 수그러들었다.
하지만 그래봐야 고작 일행을 둘러싼 주변의 마기가 옅어졌을 뿐이었다. 세상은 여전히 마기로 가득 차 있었고, 그렇게 마기가 가득한 세상에서 용사와 성검의 회복은 더디기만 했다.
가만히 용사가 몸을 추스르기를 기다리며 김선혁은 생각에 잠겼다.
“정보가 잘못 됐어.”
그것도 그냥 잘못된 게 아니라 단단히 잘못되었다. 만약 서부의 상황이 이토록이나 끔찍하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중부와 동부의 왕국들이 그렇게 태평하게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의도한 것이구나.
김선혁은 노르딕의 마왕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어렵지 않게 깨달았다.
마왕, 박상진은 중부와 동부의 왕국들이 상황을 낙관하고 방심하기를 유도하고 있었다. 그들이 위기감을 느끼고 한데 뭉치는 대신, 서부의 왕국들에게 책임을 떠넘기게 만든 것이다.
실제로 중부의 아스토리아 교국이 성전을 부르짖으며 각 왕국들에게 협조를 요청하고 있었지만, 아직까지 군대를 파견했다거나 본격적으로 지원을 시작한 국가들은 없었다.
그들은 서부에서 일어난 내란을 서부인들이 끝내기를 바라고 있었다. 정작 그들이 책임을 떠넘긴 서부의 왕국들은 이미 궤멸 지경에 이르렀는데 말이다.
“알려야 해.”
마기에 노출된 아룡이 완전히 타락하기까지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는 그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시간을 허비하더라도 중부와 동부의 왕국들에 이 사실을 알려야 했다.
“라파예트.”
그의 호명에 라파예트가 곧장 대답해왔다.
“이 근방에 위치한 왕국들 중에 비교적 주변국에 발언권이 강한 왕국을 말하라.”
라파예트가 잠시 고민하다 대답했다.
“중부에서 가장 발언권이 강한 건 신성 교국이지만, 그쪽 상황이 워낙 좋지 않아서 크게 도움이 되지는 않을 겁니다.”
마왕이 보낸 암살자로 인해 지도자를 잃은 신성 교국은 현재 내란 상태나 다름이 없었다. 기존에 권력을 쥐고 있었던 교황파의 주교들이 성전을 부르짖고는 있지만, 당장 의견이 모아지지 않으니 주변국에서도 무시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설마 노린 건가….”
마수를 풀어 혼란만 부추겼던 마왕이 왜 유독 아스토리아만 지도자를 암살한 것인지, 이제야 이해가 갔다.
“신성 교국을 제외하면 그나마 발언권이 강한 나라라 할 수 있는 건, 이베리아뿐입니다.”
“이베리아?”
아직까지 주요 왕국들을 제외하고는 이름을 전부 숙지하지 못했던 김선혁이 고개를 갸웃거리니, 롤랑이 나서서 보충 설명을 해주었다.
“나라라기보다는 대륙 중남부에 속한 자치도시들의 연합입니다. 교역을 통해 벌어들인 막대한 재화를 신성 교국에 바쳐 자치권을 인정받은 곳이지요. 그들이라면 교역 라인을 통해 각국에 보다 빠르게 상황을 전파할 수 있을 겁니다.”
기왕지사 결정을 내렸으니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안내하라.”
그는 곧장 그리핀 라이더들을 앞세워 이베리아 연합으로 향했다.
**
이베리아 연합의 맹주라 할 수 있는 그라나도는 그야말로 발칵 뒤집혔다.
“드라흔, 그 드라흔이란 말인가!”
3국 전쟁을 통해 동부의 강국으로 거듭난 아덴버그의 국서이자 명성 높은 전승공이 갑작스레 그라나도에 방문한다는 소식이 전해진 것이다.
“믿기지 않는군. 동부에서도 주요 인사라 할 수 있는 그 자가 어찌 하여 이 먼 중부까지 왔단 말인가.”
전승공을 사칭한 사기꾼이 아닌가 생각했지만, 당장 전령의 정체가 범상치 않았다.
한때 질풍의 기사라 불리며 그리핀도르의 자랑으로 여겨졌으나, 드라흔에게 패배하여 아덴버그의 기사가 된 장 마리 드 롤랑이 전승공의 방문을 알려온 것이다.
“그리핀을 탄 사기꾼이라면, 설령 사기라 해도 믿어주는 척 해야겠지.”
그라나도의 집정관이자 이베리아 연합의 맹주인 디에고 벨라스케스는 호들갑을 떠는 귀족들에게 일침을 가하고는 곧장 롤랑을 찾았다.
“혹시 전승공께서 이 누추한 곳까지 무슨 용건으로 오셨는지 알 수 있겠소.”
“자세한 내용은 직접 듣도록 하시오.”
중부에서도 나름대로 한가락 한다는 이베리아 연합의 맹주를 상대로도 롤랑은 당당했다. 일견 무례해 보일 수 있는 태도였지만, 애초에 군주라기보다는 상인에 가까운 디에고 벨라스케스는 그런 태도를 나무라지 않았다.
오히려 기품 넘치고 아름다운 그리핀과 그 기수의 자태에 감탄을 토해냈을 뿐이었다.
창공의 기사만 해도 이 정도의 위용을 보여주는데, 대체 드라흔은 얼마나 대단한 것일까.
근래 들어 가장 큰 명성을 떨친 거물을 만난다는 사실에 디에고 벨라스케스가 기대감이 역력한 얼굴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의 기대는 그 이상의 보답을 받았다.
드라흔의 상징과도 같은 자색의 와이번은 사납고 포악하기만 할 거라 여겼던 그의 예상을 아득히 넘어서는 아름다움이 있었다.
넓게 펼친 피막의 날개는 각 한 쪽이 어지간한 상선의 돛만큼이나 거대했고, 쭉 뻗은 몸통은 가장 아름다운 함선의 선수에 걸린 조각상만큼이나 미려했다. 마치 이 세상의 생물이 아닌 듯한 자태였다.
신이 만들어낸 걸작과도 같은 맹수가 천천히 하강했다. 그리고는 이윽고 사뿐히 공터에 내려앉았다.
“아아….”
가까이서 마주한 와이번의 자태는 마치 제왕과도 같았다. 그 위용에 압도된 디에고 벨라스케스는 드라흔을 위해 준비했던 온갖 미사여구 보탠 인사말조차 잊고 말았다.
“아데스덴의 적법한 왕위 계승자이신 오필리아 라우렐 로 아데스덴 섭정 폐하의 반려이시자, 라인펄의 영주, 선혁 라인펄 김 드라흔, 전승공이시오.”
먼저 왔던 창공의 기사가 주의를 환기시켜주지 않았다면 디에고 벨라스케스는 언제까지고 와이번의 자태에 감탄하고만 있었을 것이다.
“전승공의 방문을 환영하는 바요.”
뒤늦게 정신을 차린 그가 인사를 건네며 드라흔을 찾았다. 거대한 괴수에게 가려져 있었던 명성 높은 기사가 그제야 그의 눈에 들어왔다.
“아….”
디에고 벨라스케스는 창공의 제왕과도 같은 괴수를 목도하여 이제는 그 무엇을 봐도 놀라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스스로의 생각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 깨달았다.
와이번은 창공의 제왕이 아니었다. 진짜 제왕은 드라흔이었다.
지고한 신분을 알려주듯 화려하면서도 품위를 잃지 않은 갑주는 벽화 속의 용을 형상화하여 그 분위기가 남달랐고, 풍기는 기세가 웅혼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름난 명장이 영혼을 바쳐 만들어낸 것 같은 갑주도 그 주인에 비하면 빛이 바래고 말았다.
그 새까만 눈동자와 마주한 디에고 벨라스케스가 순간 몸을 휘청거렸다. 마치 심령이 흔들리는 듯한 충격을 받은 것이다.
간신히 정신을 차린 디에고 벨라스케스가 몸을 바로 세웠다.
순간적으로 드라흔 앞에서 무릎을 꿇는 게 온당하다 여겼다. 그리고 실제로 무릎을 굽히기까지 했다. 정신을 차리는 게 조금만 늦었다면 오늘 이베리아 연합의 역사에 맹주가 타국의 인물에게 무릎을 꿇었다고 기록이 되었을 것이다.
그만큼 드라흔의 존재감은 무지막지했다.
하기야 그럴 수밖에 없었다. 드라흔, 김선혁은 지금 의도적으로 드래곤 피어의 기운을 흘려대고 있었다.
예정에도 없던 방문으로 혹시라도 상대가 자신의 경고를 가벼이 여길까 염려했던 탓이었다.
드래곤 피어의 효과는 확실했다. 이베리아 연합의 맹주로 보이는 장년의 사내는 드래곤 피어의 기운에 완전히 압도되어 말문조차 제대로 잇지 못하고 있었다.
할 말이 있다면 지금 해야 했다.
“당장 인근 왕국에 마법 전보를 보내주시오.”
다소 무례할 수 있는 태도였지만, 사안의 중대성을 생각하면 어느 누구도 그를 비난할 수 없을 것이다.
“건재하다고 알려졌던 서부 왕국들이 무너졌소.”
그의 존재감에 짓눌려 멍한 얼굴을 해 보였던 디에고 벨라스케스가 눈을 찢어져라 부릅떴다.
“그게 무슨….”
“말 그대로요.”
김선혁은 그런 디에고 벨라스케스를 똑바로 바라보며 한 자 한 자 힘을 주어 말했다.
“서부는 지금 지옥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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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혁이 이베리아 연합에 도착한 그날, 대륙의 중부와 동부에 위치한 모든 왕국들에 마법 전보가 전해졌다.
처음에는 아무도 믿지 않았다. 서부에 속한 크고 작은 왕국들만 해도 열둘, 그런데 그 모든 왕국들이 무너졌다는 게 도저히 믿겨지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이내 마법 전보에 담긴 내용의 보증인으로 명성 높은 드라흔의 이름이 적혀 있는 것을 확인했다.
처음에는 믿지 않았던 이들이 이제는 혼란스러워 했다.
그들은 서부 왕국을 대상으로 마법 전보를 보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수많은 왕국들 중 어느 한 군데도 답신을 보내오지 않았다.
몇날 며칠을 기다려도 오지 않는 답신, 의혹은 점차 확신이 되어갔다. 그리고 그들이 마침내 이베리아 연합에서 날아온 마법 전보를 믿게 되었을 때 즈음, 서부에 속한 왕국들 중 하나가 응답을 해왔다.
[서부 전멸, 생존자 극소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