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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 대책 없는 용사 (2)
“혀, 형님. 이제 볼일도 마쳤으니 바로 가죠.”
손님이 껄끄러운 것은 김선혁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래도 라파예트와 롤랑, 두 기사의 출신이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박준민은 오히려 그런 그보다 훨씬 더 손님의 등장을 껄끄러워하고 있었다.
그는 가만히 박준민을 바라보다 아티야에게 물었다.
“아티야. 접근하고 있는 자들의 인상착의가 어떻게 되지?”
‘새하얀 갑옷에 망토, 하얀 옷을 입고 하얀 말을 탄 자들이었어요.’
“하얀 갑옷에 백마라, 특이한 일행이군.”
움찔.
역시나 예상대로였다. 온통 하얗게 치장한 손님의 모습을 언급하자, 박준민이 눈에 띌 정도로 당황해 허둥지둥하였다.
[순백의 갑주와 백마라면 짐작 가는 바가 있어.]
이제 협조적으로 나오기로 작정한 것인지 게하임니스가 타이밍 좋게 끼어들어 정체불명의 무리에 대해 알려주었다.
[신을 섬기는 가장 경건한 무리로 만들어진 기사단, 신전 기사단이라면 그리 순백의 복장을 고집할 만하다.]
“신전 기사단?”
멀리 중부의 신성 교국에나 있어야 할 자들이 그리핀도르에 나타났다는 사실에 김선혁이 인상을 찌푸렸다.
“박준민.”
“네? 네!”
필요 이상으로 호들갑스러운 대답에 그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너 나한테 말하지 않은 게 있지?”
박준민은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흔들리는 고개만큼이나 마구 흔들리는 눈동자는 누가 보아도 이 어리숙한 용사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게 만들었다.
[이상하구나. 신전 기사단을 그들의 영역을 떠나지 않는 이들이야. 하지만 내 눈에는 이곳이 그들의 영역으로 보이지는 않아.]
“마수 때문이 아닐까?”
[그것도 일리가 있지만, 그것 때문만은 아닌 듯하구나.]
게하임니스의 시선이 박준민을 향했다. 아니, 정확하게는 박준민이 움켜쥔 성검을 향했다.
[예로부터 성검을 보관하고 수호해왔던 것은 신전이었지.]
김선혁의 시선이 게하임니스를 따라 성검으로 향했다 다시 박준민에게 향했다. 어리숙한 용사는 이제 제자리에 서 있지도 못할 만큼 불안해하고 있었다.
“너 설마….”
아니겠지, 아니겠지 하면서도 짧은 시간이나마 봐왔던 용사의 대책 없는 행동을 생각해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성검 그냥 집어온 건 아니지?”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안절부절 못하고 있던 박준민이 딱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맞구나.”
김선혁은 저도 모르게 이마에 손을 짚고 말았다.
**
“일단 이야기는 자리를 벗어난 다음에 하도록 하지.”
때마침 성광에 이끌린 라파예트와 롤랑이 나타났고, 김선혁은 일단 박준민을 그리핀에 태워 물러나기로 했다.
상대가 그리핀도르의 기사들이라면 거북스럽더라도 생색이라도 내며 외교적인 이득을 얻을 기반이라도 만들어두겠지만, 신성 교국의 신전 기사들이라면 만나봐야 얻는 게 없었다.
“아티야.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도록 해줘.”
‘맡겨주세요.’
자리를 완전히 벗어난 이후, 김선혁은 그리핀 라이더들과 조금은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고 박준민에게 그간의 사정을 물었다.
박준민은 신전 기사들의 추격을 받게 된 경위를 사실대로 털어놨다.
“제가 처음 이 세상에 떨어진 건 아스토리아에서였어요.”
박준민은 신성 교국 아스토리아의 신전에서 각성을 했고 용사라는 병과를 얻었으나 거창한 병과의 이름과는 달리 별다른 스킬도 특이점도 없어 금세 찬밥 신세가 되었다고 했다. 결국 신전에서 허드렛일이나 하는 잡부 취급을 받았지만 크게 불만은 없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것도 마왕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기 이전까지의 이야기였다.
마왕이 등장한 후 박준민은 환청을 들었고, 그게 성검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신전이 보관되어 있는 중앙 신전을 찾았지만, 교국은 그를 성검의 주인으로 인정해주지 않았다.
“그래서 홧김에 성검을 들고 튀었다고?”
“들고 튄 게 아니라 정당한 주인이 물건을 찾아간 거죠.”
성검의 인정을 받았음에도 별의별 핑계를 다 대며 그 사실을 부정한 신전의 태도야말로 불합리하고 이기적인 행태라며 박준민은 억울함을 토로했다.
“성검이 절 주인으로 인정했는데, 자기들이 무슨 권리로 그러냐고요. 걔들 교리에도 있다니까요. 진짜 성검의 주인이 나타나면 도와주라고.”
[신전의 고위 사제라면 발뭉의 주인이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는 힘을 빌어다 쓸 수 있을 거야. 아니, 그게 아니더라도 발뭉이 신전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부정한 것들이 넘볼 수 없으니, 그 자체로 이득이지.]
사람 사는 데는 어디를 가나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그간 헌신적이고 검박한 사제들만 보아왔던 탓에 사제들을 탈속적이라 여겼었다. 하지만 신성 교국처럼 사제들이 다스리는 나라라면, 그들 중 몇몇이 세속에 물이 들어 권력과 이득을 탐한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뻔하다면 뻔한 이야기였지만, 정작 당사자에게는 그만큼 심각한 일도 없었으니 김선혁도 이번만큼은 진지하게 박준민의 푸념을 들어주었다.
“저치들은 진짜 포기를 몰라요. 사람 하나 없는 곳에 숨어도 금세 쫓아와서 성검을 내놓으라고 징징대는데, 진짜 지긋지긋해요.”
한참 만에 이야기를 마친 박준민의 표정에 처음으로 지친 기색이 떠올랐다.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바를 행하지만 자꾸 현실에 부딪히다 보니 아무래도 그간 꽤나 마음고생이 심했던 모양이다.
[그렇게 오랫동안 성검을 보관해왔으니, 성검이 도난당할 때를 대비해 추적할 방법 하나쯤은 마련해두었어도 이상하지 않단다.]
신전 기사들이 발뭉을 찾아낼 수단을 갖고 있다는 점은 박준민 스스로도 알고 있는 눈치였다. 발뭉을 버리지 않는 한 계속될 그들의 추격을 감내하는 것 말고는 달리 무슨 방법이 있으랴.
“알았어. 서쪽으로 데려다 주지.”
“정말요? 형님. 진짜 감사해요! 저 데려가면 분명 도움이 될 거예요. 아까 보셨잖아요. 저 마수가 상대라면 진짜 잘 싸울 수 있어요.”
김선혁은 박준민의 말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대규모 병력이 부딪치는 전쟁터라면 모를까. 마수와의 싸움에서는 박준민이 자신보다 훨씬 더 특화가 되어 있었다.
만약 아룡을 찾기 전에 마수와 또다시 맞닥뜨리는 일이 생길 경우를 대비해 용사의 조력이 절실했다.
“대신 앞으로는 속이지 마. 전부 털어놓을 필요는 없지만, 최소한 뭔가를 부탁하려면 뒷사정 정도는 알려주도록 해.”
“명심, 명심, 또 명심할게요!”
신이 나서 떠들어대는 박준민의 모습은 아무리 봐도 마왕이라는 대적을 찾아 서쪽으로 향하는 사람 같아 보이지 않았다.
“너 서쪽으로 가는 이유 중 하나가 신전 기사들 피해서 가는 거 아냐?”
“그것도 있죠.”
정명한 기운에 어울리지 않는 야비한 얼굴로 박준민이 헤헤, 하고 웃었다.
“음. 이제 끝나신 겁니까?”
한쪽에 물러나 두 이방인의 대화를 듣고 있던 라파예트가 끼어들어 물었다.
“혹시 그쪽에 계신 분이 누구신지 저희도 알 수 있을까요.”
멀리 떨어져 있느라 용사의 활약을 보지 못했던 그들은 명성 높은 전승공과 격의 없이 대화를 나누는 박준민의 정체에 대해 몹시 궁금해 했다.
“박준민. 아스토리아 출신이고, 마수 사냥에 특화된 특수병과의 이방인이다.”
성검이니 용사니, 자세한 사정은 걸러내고 간단하게 소개를 시켜주니 라파예트와 롤랑이 감탄을 했다.
“오오! 어쩐지 기운이 범상치 않다 했습니다!”
“마치 신전 기사들을 대하듯 기운이 맑은 것이 보통 사람 같아 보이지 않더군요!”
용사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특유의 정명한 기운을 느낀 것인지, 두 라이더들의 눈에 호의가 가득했다.
“오늘은 여기에서 쉬고 내일 출발하도록 한다.”
하루종일 벤시와 치고받았던 김선혁은 뒤늦게 피로가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배를 깔고 누운 레드번의 허리께에 등을 기댄 김선혁이 잠시 레드번의 머리통을 보았다.
“뿔이….”
마수와 싸우기 전까지만 해도 고작해야 아이 주먹만 한 크기였던 레드번의 뿔이 부쩍 자라 이제는 성인 남성 두 개를 겹친 크기에 육박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마수의 마기를 먹고 성장한 것은 용사와 발뭉뿐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마수의 독마저 소화해내는 와이번의 소화력이 경이롭긴 하지만, 그로 인해 순수한 아룡에게 어떤 변화가 생길지….]
그런 레드번의 뿔을 본 게하임니스는 우려를 표했지만, 김선혁은 개의치 않았다.
“뭐, 두고 보면 알겠지.”
골드레이크도 블루곤도 처음 만났을 때와는 그 모습이 많이 달라졌다. 레드번이 변한다고 해서 새삼스러울 건 없었다.
**
김선혁과 일행은 계속해서 서쪽으로 향했다. 순조로운 여정이었다.
“으아아! 이거 엄청 빨라요!”
단지 문제가 있었다면, 수다스러운 박준민이 귀가 아플 정도로 떠들어댔다는 것뿐이었다.
“어디 가면 또 이런 놈을 구할 수 있죠?”
박준민은 날렵하고 우아한 레드번보다는 순백의 날개가 고고한 그리핀이 마음에 들었던 모양인지, 몇 번이나 그리핀에 대한 욕심을 보였다. 그때마다 미온테의 고삐를 잡은 라파예트가 움찔 몸을 떨었다.
“진짜 탐난다! 이놈만 있었으면, 그 지긋지긋한 신전 기사들한테 시달릴 일도 없었을 텐데.”
그리핀도르에서조차도 애지중지하는 그리핀을 단지 도주용 탈것으로 여기는 행태가 황당할 지경이었다.
박준민이 뭐라고 떠들건 간에 일행은 계속해서 서쪽으로 향했고, 마침내 동부를 벗어나 중부에 도달할 수 있었다.
“음….”
중부의 왕국들의 영공에 접어든 김선혁은 인상을 찌푸렸다.
“형님. 느끼셨어요?”
이제껏 방정맞게 떠들어대던 박준민의 음성도 지금만큼은 착, 하고 가라앉아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호들갑을 떨기에는 주변의 공기가 너무도 심상치 않았던 것이다.
[마기. 대륙의 중앙이 마수들로 인해 혼란을 겪고 있다더니, 생각했던 것보다 상황이 좋지 않은 모양이야.]
그리핀도르에서 겪었던 마기보다 농도는 옅었지만, 중부 왕국들 사이에 퍼진 마기는 그보다 훨씬 더 넓은 영역에 걸쳐 퍼져 있었다.
“형님. 어쩌실 거예요?”
“계속해서 나아간다.”
김선혁의 말에 박준민이 불만어린 얼굴을 해보였지만, 자신의 처지를 잊지는 않은 것인지 딴지를 걸지는 않았다.
“후우.”
사방에 가득한 마기의 근원들을 일일이 찾아 제거하는 건 절대로 짧은 시간 내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다른 때였다면 기꺼이 그 수고를 마다하지 않으련만, 지금은 그에게도 시간이 많지 않았다.
[서둘러야 해. 서쪽의 기운이 심상치 않은 게 일이 생긴 것 같아. 지체했다간 또 하나의 용의 아종이 타락하고 말 거야.]
게하임니스가 서쪽에 웅크린 아룡의 신변에 뭔가 이상 징후가 보인다고 몇 차례 경고를 해온 것이다.
“부디 왕국의 초인들이 제때 나서기를 바랄 뿐.”
안타깝지만 이곳은 각국이 스스로의 힘으로 정화를 할 수 있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인간들이 잘 싸우고 있어. 만약 마수들이 자리를 잡고 성장할 시간을 주었다면, 이 근방에 퍼진 마기는 고작 이 정도가 아니었을 거야.]
그런 그의 쓰린 속을 짐작이라도 한 듯, 게하임니스가 상황을 설명해주었다.
김선혁은 안도했다. 하지만 안도는 길지 않았다.
중부에 퍼진 마기는 끝이 없었다. 레드번을 타고 몇날 며칠을 날아도 거북스러운 기운은 사라지지 않았다. 마치 온 대륙이 마기에 오염이 된 듯한 기분이었다.
발뭉이 지닌 기운 덕에 일행이 다시 마기에 휘말리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지만, 그 혜택을 누릴 여유조차 없었다.
그만큼 중부 대륙 전체에 퍼져나간 마기는 심각했다. 그 수다스러운 박준민조차도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말을 잊었을 정도였다.
한참 비행을 이어가던 김선혁과 일행은 마침내 대륙 서부에 도달하였다.
그런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푸르름을 잃은 보랏빛 하늘과 까맣게 죽다 못해 썩어버린 오염된 땅이었다.
“이게 대체….”
숨을 쉬기가 힘들 정도로 농도 깊은 마기, 김선혁은 그 순간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