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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 대책 없는 용사 (1)
김선혁은 레드번과 함께 천천히 하강했다. 성검의 주인이라는 사내를 보다 가까운 곳에서 살펴보기 위해서였다.
“끄아아. 죽겠다.”
사내, 용사는 그가 내려오거나 말거나 바닥에 드러누운 채 끙끙 앓고 있었다. 조금 전에 그토록 거룩한 이적을 발휘한 당사자라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는 용사의 몸에서 풍기는 기세가 진짜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성광을 소환했을 때처럼 폭발적이지는 않았지만, 마기와는 완전히 상반된 정명한 기운만큼은 여전했던 탓이다.
가까이에서 살펴본 용사는 생각보다 평범한 인상이었다. 적당한 체구에 적당한 인상,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면 단지 용사의 머리색이 이 세상에서 보기 드문 검정이라는 사실뿐이었다.
또 이방인인가.
이 세상의 주민들과는 달리 상대적으로 낮은 콧대와 두툼한 눈두덩은 전형적인 동양인의 생김새였다. 이것을 보고도 용사의 출신을 알아채지 못하면 그게 도리어 멍청한 일이었다.
“음?”
그런데 용사의 행동이 이상했다.
“뭐? 용기병? 아, 저 사람이 그 유명한… 못 알아볼 수도 있지, 뭘 그런 걸 가지고….”
바닥에 드러누운 용사는 끊임없이 입을 웅얼거리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는 듯한 모습이었다.
“대답하지 말라고 왜? 아니, 니가 말을 걸고 있잖아. 아, 알았어. 알았다고.”
제 딴에는 잔뜩 낮춘 목소리였지만, 아티야와 계약을 맺은 뒤로 청력이 극대화된 김선혁에게는 바로 곁에서 속삭이듯 선명한 음성이었다.
“다 듣고 있을 거라고? 거리가 이렇게 떨어졌는데? 정말?”
용사가 힐끔거리며 그의 눈치를 살폈다.
“못 들은 것 같은데?”
대체 뭐 하자는 건지, 나사 하나쯤은 풀린 듯 보이는 용사의 덜 떨어진 모습에 김선혁은 황당함을 금하지 못했다.
한참을 혼자 중얼거리던 용사가 벌떡 몸을 일으키더니, 손을 내밀었다.
“반갑습니다.”
“나도 반갑….”
“제 동료가 되어 주시겠습니까?”
이건 또 무슨 소리인지, 갑작스러운 용사의 말에 김선혁은 황당한 얼굴을 해 보였다. 하지만 그가 그러거나 말거나 용사는 저 혼자 귀를 막고는 오만상을 찌푸렸다.
“…는 이거 아냐?”
종잡을 수 없는 태도, 만약 이 자리에 있는 것이 김선혁이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면 용사를 미쳤다 생각하고 꺼림칙하게 여겼을 것이다.
하지만 김선혁은 아니었다.
그 역시 이따금씩 보이지 않는 누군가와 대화를 나눌 때가 있었다. 반려이자 용기병의 원천, 용과 대화를 할 때였다.
그는 용사가 한시도 놓지 않는 대검을 빤히 바라보았다.
“검과 이야기하는 건가?”
그의 말에 용사가 눈을 찢어져라 부릅떴다. 마치 아무에게도 밝히고 싶지 않았던 비밀을 들키기라도 한 것 같은 반응이었다.
“아닌데요.”
슬며시 대검에서 손을 놓으며 겨우 내뱉은 용사의 대답은 설득력이 전혀 없었다. 당연하게도 그는 믿지 않았다.
도리도리.
물끄러미 용사를 바라보고 있자니, 용사가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성검.”
“성검 아닌데요.”
성검이라는 말에 움찔 몸을 떤 용사가 떨리는 음성으로 시치미를 뗐다.
우우우웅.
그 순간 용사가 내팽개쳐 두었던 성검이 갑작스레 몸을 떨었다. 덩달아 용사의 눈동자도 마구 흔들렸다.
**
“어쩔 수 없군요. 맞습니다. 제가 성검 ‘발뭉(Balmung)’의 주인, 박준민입니다.”
그렇게 잡아뗄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대단한 비밀이라도 밝히는 양 대검의 정체를 고백하는 용사, 박준민은 차라리 뻔뻔하게 보일 지경이었다.
“반갑다. 김선혁이다.”
“선혁이 형님이라 부르겠습니다. 괜찮죠?”
붙임성 좋게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이더니 금세 친한 척을 하는 박준민의 태도는 변덕스러워도 너무 변덕스러웠다.
“어쨌건 형님 덕분에 골치 아픈 놈을 처리할 수 있었습니다. 아까 그 놈 잡으려고 몇날 며칠을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제대로 먹지도 못했거든요.”
대답조차 기다리지 않고 멋대로 형님 거리는 상대의 모습이 김선혁은 그리 밉게 보이지 않았다.
“마무리 하려고만 하면 줄행랑을 치는데, 어찌나 빠르던지 진짜 고생만 엄청 했다니까요.”
그렇게 잡아뗄 때는 언제고 한 번 트인 박준민의 입은 좀처럼 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끙.”
머리가 아파왔다.
박준민과의 대화는 정말 정신이 없었다. 한참 떠들다가 갑자기 입을 다물고 성검을 노려보는가 하면, 앞뒤 중간 할 것 없이 말을 뚝뚝 잘라먹고 제 하고 싶은 말만 횡설수설해대니 대화를 따라가기가 영 쉽지 않았다.
이 정도면 거의 정신분열은 아닌가 걱정이 될 지경이었다.
그래도 그런 맥락 없는 대화를 통해서나마 상대에 대해 조금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발뭉이를 찾기 전까지는 진짜 완전 쓰레기 취급 받았다니까요? 검병만도 못하다고 얼마나 구박을 받았는데요.”
먼저 박준민은 스스로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별 볼 일 없는 하급 병과의 이방인에 불과했었노라며, 벤시를 처리할 때 보여줬던 강력한 성광(聖光)을 사용할 수 있게 된 것도 얼마 되지 않았다고 말해주었다.
그마저도 처음 실전에서 능력을 써본 게 벤시와의 전투라 했으니, 박준민이 용사로서의 자각이 부족한 것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잠깐만.”
한창 이야기를 하던 그는 문득 의문이 생겼다.
아덴버그 만큼은 아니어도 동부의 왕국들은 대체적으로 이방인들을 중요하게 여겼다. 그 취급의 귀추야 제각각이라도 그들이 지닌 잠재력만큼은 인정한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박준민은 지닌바 능력에 비해 지나치게 자유로워 보였다. 소속을 알리는 표식도 없었고, 제 스스로도 자신이 어느 나라에 속해있는지를 알려주지 않았다.
“너 지금 소속이 어디야?”
그의 질문에 수다스럽게 떠들어대던 박준민이 처음으로 대답을 기피했다. 김선혁은 그 떨떠름한 얼굴을 보며 단박에 그 사정을 파악할 수 있었다.
“너 탈영병이지?”
박준민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는 확신했다.
용사는 탈영병이었다.
“너 진짜 대책 없구나.”
처음 본 자신에게 경계심 없이 미주알고주알 사정을 늘어놓을 때부터 알아봤다. 용사는 어리숙해 보이는 게 아니었다. 정말로 어리숙했다.
“하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았으면 병영에 틀어박혀서 마수가 오기만을 기다려야 했다고요! 그리고 애초에 우리나라도 아닌데! 구박만 죽어라 하던 놈들이 뭐가 이쁘다고!”
그 억울한 심정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박준민의 말마따나 이 세상은 자신들이 살던 세상이 아니었고, 왕국들 역시 아무런 연고도 없는 남의 나라였다.
새삼 충성이니 소속감이니 가질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동부 왕국들이 보이는 초인에 대한 집착을 생각해봤을 때, 무작정 탈영을 한 박준민의 태도가 대책 없게 느껴진 것도 사실이었다.
“무사히 국경을 넘은 게 용하다. 용해.”
“발뭉이 덕이죠.”
자랑스럽게 대꾸하는 박준민의 얼굴이 태평스럽기만 했다.
“그런데 너, 나한테 그런 이야기 다 해도 돼? 우리 오늘 처음 봤잖아.”
비록 마수와 함께 싸운 처지라고는 하나 어디까지나 박준민과 김선혁은 생면부지의 관계였다. 애초에 이런 깊은 이야기를 나눌 사이가 아니었던 것이다.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박준민은 발뭉을 꽉 움켜잡았다. 이따금씩 고개를 끄덕이거나 입을 웅얼거리는 게 발뭉과 대화를 나누는 게 분명했다.
“음. 이왕 이렇게 된 거. 부탁 좀 할게요.”
한참 만에 발뭉을 내려놓은 박준민이 그를 보며 넉살 좋은 얼굴을 해 보였다.
“형님. 저 좀 태워주세요.”
마치 택시라도 잡아타듯 당당한 태도에 김선혁은 그만 할 말을 잊고 말았다.
“형님, 서쪽으로 가시는 거 아니에요?”
“그건 맞긴 한데….”
그의 머리가 빠르게 돌기 시작했다.
“서쪽으로 가는 이유는?”
“당연히 마왕 때문이죠.”
예상대로의 대답, 하지만 의문은 여전했다.
고작 마수 하나를 처리하고 땅에 드러누워 헉헉대던 박준민이다. 종일 싸우고도 마무리를 짓지 못했던 그가 할 말은 아니었지만, 용사가 마왕을 상대하기에는 부족해 보인 것도 사실이었다.
“형님이 뭘 걱정하는지 알겠어요.”
한쪽에 팽개쳐 두었던 발뭉을 다시 들어 올린 용사가 저벅저벅 오염된 대지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분명 지금의 저는 약해요. 하지만….”
어지간한 사람이라면 단지 발을 딛는 것만으로도 끔찍한 마기에 오염되었을 저주받은 땅에 발을 딛고도 박준민은 태연해 보였다.
“오늘 제가 약하다고 해서….”
그를 돌아본 박준민이 하늘 높이 성검을 치켜들었다가 오염된 대지에 힘차게 내리꽂았다.
“내일의 저도 약할 거라 생각하지는 않아요.”
성검 발뭉이 폭발적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화악!
갑작스레 요동치는 용사의 기운, 찬란한 섬광이 오염된 대지에 도사린 검은 기운을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발뭉, 마기를 잡아먹는 포식자.”
하늘까지 치솟은 섬광의 중심에서 박준민은 웃고 있었다.
“그리고 전 발뭉의 주인, 마왕의 대적자랍니다.”
한층 강렬해진 섬광이 일대를 완전히 뒤덮었다.
**
발뭉은 게걸스럽게 마기를 먹어치웠고, 일대에 펼쳐진 마기가 완전히 사라지는 데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 발뭉이 먹어치운 마기는 고스란히 용사의 성장을 위한 양분이 되었다.
“오오! 레벨업!”
박준민은 신이 나서 외치며 경망스럽게 방방 뛰어댔다.
“완전 대박! 광렙!”
그 찬란한 이적의 주인공이 오두방정을 떠는 모습을 보며 김선혁은 그만 할 말을 잊고 말았다.
박준민의 말이 맞았다. 마수와 싸울 때의 용사는 약했지만, 지금의 용사는 약하지 않았다. 단 한 번 마기를 흡수한 것만으로도 이 사기적인 병과는 무지막지한 성장을 이루었다.
성장한 건 용사뿐만이 아니었다.
단지 곧게 뻗어있을 뿐, 화려함이라고는 눈곱만큼도 보이지 않았던 발뭉의 모습이 완전히 바뀌어버렸다. 자루 아래로는 주먹만 한 금빛 구슬이 생겨났고, 위로는 가로로 뻗은 물결 모양의 가드가 생겨났다. 거무튀튀한 쇳덩이라고는 믿겨지지 않는 뽀얀 검신은 전보다 더 예리해 보였고 더 성스러워 보였다.
“뭐, 이런 사기가 다 있….”
감탄인지 신음인지 모를 소리를 내뱉던 김선혁이 입을 다물었다.
사기적인 건 용기병도 만만치 않았다. 차이가 있다면 용사의 힘이 단지 마왕과 그 수하들을 상대하는데 특화되어 있었을 뿐이었다.
[제 스스로의 운명을 받아들인 자는 그에 대한 합당한 대가를 받는 법이란다.]
언제 다가왔는지 작은 아룡이 귓가에서 속삭였다.
게하임니스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김선혁의 얼굴에 떠올라 있던 복잡한 감정이 단 하나의 감정만을 남겨두고 사라졌다.
남은 것은 불신의 감정뿐이었다.
“네가 무슨 꿍꿍이를 갖고 있는 것까지는 신경 쓰지 않겠어.”
스테이터스 창이라도 살펴보며 레벨업의 결과를 확인하는 것인지 정신없어 보이는 용사를 한 눈으로 흘겨보며 김선혁이 낮게 으르렁거렸다.
“하지만 최소한 나에게 협력하기로 했다면, 태도를 똑바로 해라.”
아무리 주종의 관계를 맺은 다른 아룡들과 조력의 계약을 맺은 게하임니스의 입장이 다르다고 해도 페어리 드래곤의 행동은 도가 지나쳤다. 한발 늦게 적의 등장을 알려주는 건 둘째 치고서라도, 그 언행이 지나치게 음흉했다. 마치 다른 꿍꿍이라도 있는 듯한 태도였다.
“만약 그게 싫다면 떠나라.”
그의 말에 정말로 게하임니스가 떠나버리면, 당장 대륙 서부에 있을 용의 아종을 찾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그는 그런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조금도 걱정하지 않았다.
페어리 드래곤은 용기병을 돕는 행위를 통해 용에게 뭔가를 약속받은 게 분명했다. 그래서 그는 이 음흉한 아룡이 절대로 자신을 떠날 수 없을 거라 확신했다.
[나는….]
갑작스러운 그의 폭탄선언에 놀란 것인지 작은 아룡이 처음으로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나에게 굴종하라거나, 많은 걸 바라는 게 아니야.”
김선혁이 원하는 건 속을 알 수 없는 음흉한 동행자가 아닌, 진정으로 믿을 수 있는 조력자였다. 그는 단지 페어리 드래곤이 조금 더 신용할 수 있는 모습을 보여주기를 바랄 뿐이었다.
[네 권고를 받아들일게.]
그 간단한 대답에 이리 뜸을 들였던 것을 보면 확실히 게하임니스는 뭔가 꿍꿍이가 있긴 있는 게 분명했다.
“좋아. 믿어보도록 하지.”
하지만 그는 궁지에 몰린 작은 아룡을 더 몰아붙이는 대신 적당한 선에서 타협을 했다. 지금은 이 정도면 충분했다.
‘주인님! 멀리서 다가오는 자들이 있어요!’
아티야의 말에 고개를 돌린 김선혁은 멀리서 피어오르는 흙먼지를 발견할 수 있었다.
“박준민.”
“네, 형님!”
아직까지 폭발적인 레벨업이 가져온 여운을 떨쳐내지 못한 박준민이 그의 질문에 들뜬 음성으로 대답했다.
“접근하는 이들이 있다.”
별생각 없이 한 경고였다. 단지 접근하는 이들이 있음을 알려주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박준민의 반응이 영 이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