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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곤 푸어-177화 (177/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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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오염된 대지 (3)

김선혁의 장담대로 레드번은 탈이 나지 않았다. 오히려 입맛을 다시며 아쉬움을 표했으니, 그 말도 안 되는 먹성에 게하임니스도 할 말을 잊고 말았다.

“속성까지 오른 걸 보면 완전히 소화했나 보네.”

주인이나 아룡이나 정신없어 보이는 건 마찬가지였던지라 결국 게하임니스가 참았던 한숨을 토해내며 말했다.

[이번에는 운이 좋았지만, 다음에도 이럴 거라 생각하지는 않는 게 좋겠어. 마수는 만만히 볼 존재가 아니야.]

김선혁도 게하임니스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운 좋게 독 속성의 마수를 만나 어이없을 정도로 쉽게 승리를 거두었지만, 다음에도 이런 행운이 지속될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 정도로 그는 전투에 있어서 어리숙하지 않았다.

“만만하게 생각한 적 없어. 그리고….”

김선혁이 창을 고쳐 잡으며 오염된 대지 너머를 노려보았다.

“아직 끝난 것도 아니잖아?”

그의 말에 화답이라도 하듯 저 멀리서 연거푸 벤시의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방금 상대한 놈이 본체가 아니었다는 걸 너도 알고 있었구나.]

“저렇게 요란하게 마기를 풍겨대는데 모르는 게 이상하지.”

한 번 마기를 겪고 나니, 느껴지지 않는 많은 것들이 감각에 잡히기 시작했다.

음울하게 울부짖는 오염된 대지의 통곡, 그리고 그 통곡마저 집어삼켜 단말마와 같은 포효를 내뱉는 진짜 마수의 기운, 그는 다시금 레드번을 타고 날아올랐다.

**

“대체 섭정 폐하께서는 우리가 무슨 도움이 된다고 우릴 보낸 건지 모르겠군.”

멀리 드라흔과 마수로 보이는 존재가 싸우는 것을 본 라파예트가 탄식과도 같은 한마디를 내뱉었다.

“처음의 그놈 정도라면 어떻게 해보겠는데….”

롤랑이 자괴감이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라파예트의 말에 대꾸했다.

그런 그의 시선이 저 멀리 하늘을 향해 있었다.

처음에 나타났던 기괴한 마수만 해도 기이한 움직임이 예측하기 힘들어 상대하기 까다로워 보였다. 스스로도 직접 겪어본 바 있었던 드라흔 특유의 강력한 돌격마저 흘려내는 그 유연함은 멀리서 보는 것만으로도 질릴 정도였다.

하지만 그런 마수조차도 지금 모습을 드러낸 마수에 비하면 차라리 우스울 지경이었다.

너풀거리는 커튼처럼 흐물흐물한 모습은 처음에 나타난 마수나 지금의 마수나 큰 차이가 없었다. 하지만 그 위용은 결코 비교할 수조차 없을 만큼 차이가 났다.

검붉은 피막은 하늘 한켠을 완전히 가릴 정도로 거대했다. 마치 하늘에 검붉은 장막이 생겨난 듯한 모습이었다.

피에 물든 하늘, 그들이 보는 마수는 마치 하늘과도 같았다.

항거할 수 없는 존재에 대한 공포감이 두 기사들의 투쟁심마저 앗아갔고, 그들은 감히 드라흔을 도울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런데 드라흔은 그런 끔찍한 괴수를 향해 조금도 흔들림 없이 달려들었다. 아니, 그냥 달려드는 게 아니라 시시때때로 저 거대한 괴수를 찢어발기기까지 했다.

비록 금세 회복되었다 해도 하늘 전체를 가릴 정도로 거대한 괴수의 몸통을 찢는 모습은 마치 천지가 개벽하는 모습을 보듯 장엄했다.

“도대체 무슨 정신으로 저런 사람을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했었던 걸까요.”

“끄응.”

잠깐이나마 저런 무지막지한 괴물을 상대로 승리를 거둘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게 얼마나 얼토당토 않은 망상이었는지, 얼굴이 화끈거릴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때의 드라흔과 지금의 드라흔을 같다 말할 수는 없었다. 라파예트와 롤랑이 보기에 드라흔은 당시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힘의 수발이 자유로워져 있었다.

앗, 하는 순간 이미 창끝에 무지막지한 바람을 휘감고 돌격을 하고 있었고, 그 나아가는 방향이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기이막측했다.

“이기겠죠?”

“이기겠지. 만약 저 드라흔이 못 막으면 어느 누구도 못 막아.”

물론 마법사 다수의 지원을 받은 창공의 기사단이라면 저 끔찍한 괴물을 제압할 수 있을 것이다.

“하기야 세상에 어느 누가 있어 저 마수를 단신으로 막아설 수 있겠습니까.”

패배감이 가득한 음성으로 롤랑이 한마디를 내뱉자, 라파예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최소한 드러내놓고 활동하는 자들 중에는 없어. 그건 내가 장담할 수 있지.”

물론 왕성에 웅크린 진짜 괴물 중의 괴물들이라면 저와 같은 위용을 보일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그들은 군주가 나서 설득해도 움직이지 않는 고고한 성품을 지닌 자들이었고, 어지간해서는 세상일에 나서는 법이 없었다.

“그나저나 저렇게 요란을 떨었으니, 누가 와도 올 텐데.”

굉음이 수시로 터져 나오는 전장을 바라보던 라파예트가 꺼림칙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이제는 전향하여 아덴버그의 기사가 되었다지만, 그래도 한때 고국으로 여겼던 그리핀도르다. 만약 재수 없게 자신들을 아는 이라도 만난다면 그보다 더 껄끄러운 일은 없을 것이다.

“제발 누가 오기 전에 끝났으면 좋겠군.”

“가세할까요? 그럼 조금 빨리 끝나지 않을까요?”

롤랑의 말에 라파예트가 황당하다는 얼굴을 해 보였다.

“저기를 끼어들겠다고?”

때마침 드라흔이 일으킨 광풍과 마수가 뿜어댄 검은 기운이 충돌했다.

콰아아아아아!

멀리서 듣는 것만으로도 어깨가 움츠러드는 그 끔찍한 소음에 먼저 말을 꺼냈던 롤랑이 입을 다물었다.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전투도 어느새 끝을 보이고 있었다.

마수는 강력했지만, 결국 폭풍과도 같은 김선혁의 기세를 이겨내지 못하고 주춤주춤 물러서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마수를 놔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가자!”

정령들이 그의 주변을 맴돌며 삭풍을 만들어대는 동안, 그의 창끝에 다시 한 번 섬광이 맺혔다.

꺄아아아!

도망칠 것처럼 물러나던 벤시의 본체가 다시금 그에게 달려든 것도 그때였다.

왼쪽, 오른쪽, 위아래, 어디를 보아도 검붉은 피막이다. 피할 곳은 없어 보였다. 하지만 김선혁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창을 세우고는 그대로 돌격했다.

부욱, 하는 소리와 함께 그를 집어삼킬 것처럼 덮쳐들던 마수의 몸이 찢겨져 나가고 레드번이 그 틈을 꿰뚫고 나왔다.

“안 죽어! 절대 안 죽어!”

덩치가 커도 너무 큰 마수, 바람을 감고 창을 찔러봐야 거대한 몸뚱이에 생채기 하나 생길 뿐이었다. 횡으로 베어내도, 종으로 갈라내도 금세 복구하는 마수는 지독스러울 정도로 끈질겼다.

레드번의 먹성도 이 거대한 마수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이러다가는 마수를 격퇴하기 전에 자신이 먼저 지칠 판이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자신이 마수를 마무리 짓지 못하듯 마수 역시 자신을 어쩌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음?”

마기에 대한 적응은 이쯤에서 마무리하고 몸을 빼야 하나 잠시 고민하던 그가 이질적인 기운을 알아차리고는 고개를 돌렸다.

놀랍게도 닿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오염된다는 마의 땅을 건너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 존재가 있었다.

“이크.”

잠시 한눈을 판 사이에 벤시의 본체가 다시 집어삼킬 듯 몸을 펼쳤고, 레드번이 빽빽거리며 울며 주인에게 경고를 하더니 날개를 활짝 펴고 높이 날아올랐다.

“후우.”

잠시 거리를 벌리고 숨을 돌리는 김에 김선혁은 눈에 힘을 주고 정체불명의 존재를 살펴보았다.

“설마 그리핀도르의 기사인가.”

그리핀도르의 기사라고 하기에는 접근하는 사내의 복색이 지나치게 투박했다. 화려함이라고는 눈곱만큼도 보이지 않는 실용적인 갑옷은 차라리 야전 중갑보병의 그것을 닮아 있었고, 기사들이 선호하는 균형 잡힌 검 대신 어깨에 짊어진 대검은 무식할 정도로 두꺼웠다.

도대체 정체를 짐작할 수 없는 모습, 더욱 놀라운 것은 마기에 오염된 대지를 아무렇지도 않게 주파하는 사내의 거침없는 걸음이었다.

일단 저게 누구든지 적은 아닌 것 같군.

불길하고 거북스러운 마의 땅을 건너면서도 사내의 기운은 맑고 깨끗했다. 마치 마기와는 정 반대에 놓인 듯한 정명함이었다.

끼에에에에.

잠시 숨을 고르는 사이에 여기저기 흩어져 허공을 부유하던 피막의 파편들을 불러모아 몸을 복구해낸 마수가 울부짖으며 훌쩍 거체를 펼쳐 들었다.

“지긋지긋한 새… 어?”

당연히 자신을 향해 달려들 거라 생각했던 마수가 예상과는 달리 엉뚱한 곳을 향해 날아가는 게 아닌가.

마치 도망이라도 치듯 다급함이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김선혁으로서는 이제까지 막상막하로 싸우던 마수가 이제 와서 저리 황급하게 도망을 칠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방금 전과 달라진 것이라고는 정체불명의 사내의 등장뿐이었다.

설마 저 남자를 피해서?

말도 안 되는 상상이었지만, 그것 말고는 달리 이유를 떠올릴 수가 없었다.

“이번에는 안 놓친다!”

그런데 그 근거 없는 추측이 맞아 떨어졌다. 오염된 대지를 주파하던 사내가 몸을 빼내는 마수를 보며 사납게 포효한 것이다.

끼에에에에!

자신을 상대로 한 번도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거대 마수가 사내의 등장에 겁을 집어먹은 듯 울부짖었다. 그 기묘한 광경에 김선혁은 저도 모르게 움켜잡았던 창을 늘어트리고 말았다.

“놈이 도망치지 못하게 도와주시오”

김선혁은 순간 고민했다. 하지만 답은 이미 나온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사내의 정체는 여전히 알 길이 없었지만, 사내가 지닌 밝고 깨끗한 기운은 마기와 완전히 상극으로 보였다. 그런 사내가 마수의 발을 묶어달라고 하니 일단 따라보기로 작정한 것이다.

“합!”

늘어트렸던 창을 다시금 세우고 도망치는 마수의 등을 향해 돌격했다. 순식간에 도달한 창끝이 마수의 등을 꿰뚫었다.

방금 전이었다면 이쯤에서 바람을 모아 마수의 몸을 발기발기 찢어냈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는 바람을 날카롭게 펼치는 대신 뭉툭하게 모아 창끝의 방향을 틀었다.

꺄아아아악!

창에 꿰인 마수가 비명을 지르다 선회하는 레드번을 따라 쭉 끌려왔다.

“오래 못 잡고 있을 거요!”

제 스스로 몸을 흩어내려는 마수를 억지로 붙잡고 있자니 여간 곤욕스러운 게 아니었다. 그의 다급한 외침에 정체불명의 사내가 화답해 왔다.

“잠깐이면 되오!”

그렇게 말한 사내가 등 뒤의 대검을 뽑아들더니, 마수를 향해 겨냥했다.

화악!

그 순간 눈부신 섬광이 터져 나왔다.

“아….”

김선혁은 맹세코 살아가면서 단 한 번도 이렇게 거룩하고 성스러운 빛을 본 적이 없었다. 단순히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그 신성함이 전해져와 마음이 정화되는 듯한 느낌이었다.

꺄아아아악!

성광(聖光)에 노출된 마수가 비명을 지르는데, 이제껏 그 어떤 공격 속에서도 거뜬히 재생되었던 마수의 몸뚱이가 검은 연기를 내며 타들어갔다.

“이리로! 이리로!”

성광에 감탄하는 사이에 바로 근처까지 접근한 사내가 검을 하늘 높이 들어올린 채 다시 외쳤다.

퍼뜩 정신을 차린 김선혁이 속으로 구시렁거렸다.

바라는 것도 많네.

하지만 속내와는 달리 그는 망설이지 않고 마수를 꿴 창을 사내 쪽을 향해 들이댔다.

“부정하고 사악한 존재는 흙으로 돌아가라!”

진언과도 같은 짧은 한마디를 내뱉은 사내가 검을 힘차게 내리그었다.

그 순간 기적이 일어났다.

“아….”

사내가 내리그은 검 끝에 매달린 섬광이 마수의 몸통을 베어냈다.

끄아아아아아아!

절대로 사라지지 않을 것 같았던 마수가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지르며 서서히 흩어지기 시작했다.

파스스슥.

그리고는 이내 먼지로 화해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공교롭구나! 공교로워! 어찌 이보다 공교로운 일이 있을까!]

멍하니 그 비현실적인 광경을 바라보고 있자니, 격전의 와중에 멀리 밀려났던 게하임니스가 탄성을 내뱉었다.

[마왕의 권역을 향해 나아가는 여정에 이런 인연을 만날 줄이야! 이것이야말로 숙명이리라!]

“너 저 사람이 누군지 알아?”

그렇지 않아도 사내의 정체가 궁금하던 차에 게하임니스가 뭔가를 아는 기색이자 김선혁은 반가운 얼굴을 해 보였다.

[알다 마다!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저 세상에 다시없을 정명한 빛을 잊을까!]

이제는 사라진 마수와 함께 흩어져 버려 잔상만이 희미하게 남은 빛을 바라보던 아룡이 사내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는 성검(聖劍)의 주인.]

왕실 비고에 가득한 옛 마법 무구들을 보고도 콧방귀도 끼지 않았던 게하임니스다.

그런 아룡이 놀랄 정도니 성검이 평범한 물건이 아니라는 사실 정도는 그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성검이 주인으로 선택하는 건 오직, 용사(勇士)뿐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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