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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오염된 대지 (2)
끔찍한 마수의 포효를 듣고도 김선혁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다음에는 조금 일찍 말해줘.”
그저 조용히 억눌렀던 적개심을 풀어내며 투기를 불러 일으켰을 뿐이었다.
“그래야 나도 조금쯤은 대비를 할 테니까.”
전투의 조짐을 느낀 그는 놀라울 정도로 침착했고, 그 모습 어디에도 왕도에 머무는 동안 잔뜩 풀어져 귀족들에게마저 조롱을 당하던 한량공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선택은 잘못되지 않았구나.]
게하임니스의 음성에 감탄하는 기색이 묻어났다. 아무래도 그간 풀어진 모습만을 보아왔던 탓에 내심 그를 미덥지 않게 여기기라도 했던 모양이다.
김선혁은 자신을 얕잡아본 페어리 드래곤을 나무라지 않았다.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그간 보여주었던 모습이 한심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탓이다.
하지만 그도 그 나름대로 변명할 거리가 있었다.
영문도 모르고 엉뚱한 곳에 떨어진 그에게 이 세상이 처음으로 부여한 과제는 생존을 위한 투쟁이었다. 그리고 그는 첫 실전에서 그 과제를 차고 넘칠 정도로 훌륭하게 완수했다.
하지만 과제는 한 번으로 끝이 나지 않았다. 그는 첫 승리를 거둔 이후로도 끊임없이 싸워야 했다.
지긋지긋했다. 전장을 벗어나 편히 여생을 보는 게 소원이었다.
하지만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미친개처럼 싸우고 적을 물어뜯는 것밖에 없게 되어버린 그에게 전투는 이미 삶 그 자체였다.
평화를 간절히 바라고, 전쟁을 혐오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는 전쟁터에서 가장 빛이 났다.
그도 이제는 그런 스스로의 모순을 어렴풋이나마 느끼고 있었다.
모르는 게 바보였다. 평화로운 영지와 왕도에서 지내온 시간보다 피 튀기는 전장에서 보낸 시간이 훨씬 더 길었다. 그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동안 이미 자신은 전장에 완전히 익숙해져 버렸다. 그 결과 그는 전장에 있을 때 스스로가 살아있음을 느끼는 존재가 되고 말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왕도에서 누린 극진한 호사 속에서도 채워지지 않았던 공허함이 마수와의 전투를 앞두고 이렇게까지 말끔하게 사라졌을 리가 없었다.
“라파예트! 롤랑! 당장 그리핀을 타고 멀리 물러나라!”
스스로가 생각해도 깜짝 놀랄 정도로 활기찬 음성, 오염된 대지를 보고 느꼈던 중압감은 이미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설명은 나중에 할 테니까! 서둘러!”
마수의 포효에 몸이 굳어 멍하니 저 너머를 바라보던 두 기사가 그의 음성에 퍼뜩 깨어났다.
“저건 대체….”
“더 지체했다간 마기에 휘말린다!”
의문이 가득 떠오른 얼굴로 두 기사가 입을 벙긋거리다 이내 그리핀에 올라탔다.
“괜찮으시겠습니까?”
김선혁은 대답대신 레드번에 올라탄 채로 자신의 전용 창을 꼬나 잡았다.
“멀리 가지 않겠습니다!”
서서히 피어오르는 드래곤 피어의 기운에 찔끔 놀란 그리핀 라이더들이 황급히 날아올랐다. 그리고는 금세 저 하늘 너머로 사라졌다.
라파예트와 롤랑이 사라지자 김선혁은 완전히 드래곤 피어의 기운을 개방했다. 순식간에 그의 주변에 용의 기운이 들어차고, 마기에 억눌려 사라졌던 아티야와 정령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디 얼마나 못 생겼는지, 얼굴이나 보자.”
주변을 둘러싼 정령들과 용의 기운에 자신감이 충만해진 그가 레드번을 상승시키며 저 오염된 대지 너머를 노려보았다.
꺄아아아아.
조금씩 선명해지는 마수의 울음소리는 여인의 비명소리처럼 가늘고 불길했다. 아마 평범한 이였다면 듣는 것만으로도 정신을 잃고 말았을 끔찍한 포효, 하지만 이미 전투 준비를 마친 그에게는 귀에 거슬리는 소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대지가 너무 오랫동안 마기에 노출됐어. 그 시간만큼 마수도 성장했을 거야. 그러니 조심해.]
김선혁은 게하임니스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투구의 바이저를 내리고, 창끝에 바람을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선빵 필승.
언제나 지켜온 스스로의 원칙, 그는 마수가 먼저 다가오길 기다리고만 있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
고오오오오.
순식간에 모여든 바람의 힘이 창끝에서 흘러넘쳐 광풍이 되었고, 그 위로 물의 정령들이 일으킨 냉기가 내려앉았다. 광풍은 이제 한 겨울 살 에는 삭풍이 되어 사납게 몰아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 힘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마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꺄아아아아아!
망토처럼 몸 위를 감싼 검붉은 피막은 흉물스럽게 흐느적거리고 있었고, 그 위로 돋아난 열 쌍의 팔과 다리는 마치 인간의 그것을 꼭 닮았다. 다른 것이 있었다면 낫처럼 굽은 손톱이 손가락 발가락마다 달려있다는 것뿐이었다.
돌출된 팔과 다리와 달리 흐느적거리는 피막의 몸통 속에 움푹 들어간 머리통은 날카로운 이가 돋아난 아가리가 반절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건 뭐 어마어마하게 못 생겼군.”
생긴 건 꼭 물을 머금어 축축해진 거적때기에 사람의 팔과 다리만 누더기처럼 기워놓은 것처럼 생겼다. 하지만 느껴지는 기운은 이제껏 김선혁이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어둡고 음습한 종류의 것이었다.
“혹시 넌 저게 뭔지 알고 있어?”
[벤시, 희생자에게 가장 끔찍한 죽음을 선사하여 그 단말마를 먹고 자라는 마수란다.]
게하임니스가 경고했다.
[이미 상당한 희생자를 집어 삼키고 변이를 마친 놈이야. 조심해. 벤시의 손톱은 산 자의 혼백을 빼앗는 극독이니까.]
“하필 또 독이야?”
게하임니스의 설명에 김선혁은 차라리 웃었다.
“이쪽도 독, 저쪽도 독. 누구 독이 더 지독한지 재봐야겠네.”
레드번의 속성 역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지독한 독, 최소한 레드번이 벤시의 독에 당할 일은 없을 것이다.
“물론 그 전에….”
김선혁은 웃으며 창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저 축축한 몸뚱이부터 시원하게 말려놓고 시작해야겠지.”
창을 뒤로 쭉 빼자 싸울 때만큼은 눈치 빠른 레드번이 순식간에 속도를 올렸다.
“풍아, 윈드 피어싱.”
짧은 읊조림이 끝이 나기가 무섭게 창끝에 모인 삭풍이 벤시를 향해 쏘아져 나갔다.
성장에 성장을 거듭하여 이제는 과거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해진 바람의 짐승이 순식간에 벤시를 덮쳤다.
사나운 삭풍에 휘말려 허공을 떠돌다 저 멀리 튕겨져 나간 벤시의 모습은 무력해 보였지만, 김선혁은 그 모습을 보고 도리어 인상을 찌푸렸다.
“안 먹히네.”
창끝을 통해 느껴지는 반발이 전혀 없었다. 광풍에 저항하는 대신 차라리 몸을 맡기는 식으로 공격을 흘려낸 것이다.
꺄아아아악!
바람에 떠밀려 형편없이 바닥에 처박혔던 벤시가 피막으로 이루어진 몸뚱어리를 흐느적거리더니 다시금 날아올랐다. 열 쌍의 팔다리 중 꺾이고 잘려나간 것은 고작 해야 한 쌍, 그마저도 우두둑거리며 금세 붙어버렸다.
[벤시가 까다로운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저 때문이지. 어지간한 공격은 벤시에게 통하지 않는단다.]
“넌 항상 늦게 말해주는 게 탈이야.”
게하임니스의 속 편한 설명에 김선혁이 구시렁거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을 뿐, 그는 다시금 창을 고쳐 잡았다.
“일단 아예 타격이 없었던 건 아니니까.”
금세 복구되기는 했지만, 아예 피해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 말은 회복할 시간만 주지 않으면 저 흉물스러운 열 쌍의 팔다리를 전부 꺾어버리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는 뜻이었다.
“다시 한 번!”
그는 또 한 번 윈드 피어싱을 발동시켰다. 방금 전의 공격보다 훨씬 더 근접해 내지른 일격이었다.
벤시는 또 한 번 팔다리가 꺾여 나풀거리며 추락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금세 꿈틀거리며 날아오르려 했다.
“어딜!”
김선혁은 그대로 다시 한 번 창을 잡고 돌격했고, 수직으로 내리꽂힌 창에 벤시가 그대로 꿰뚫렸다.
[그렇게 해서는 끝이 없을 걸.]
태평스러운 페어리 드래곤의 음성이 머릿속에 들려온 순간, 그가 피식 웃었다.
“누가 찌르기만 한데?”
그렇게 말하는 그의 창끝으로 바람이 모여들었다.
꺄아아아악.
피막으로 이루어진 몸통을 꿰뚫은 창끝에 삭풍이 모여들자, 벤시의 몸뚱어리가 바람 들어간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
벤시가 비명을 지르며 팔다리를 휘둘러 레드번을 공격했다. 단단한 비늘을 깨고 손톱 몇 개가 생채기를 냈지만, 스스로도 독의 속성을 지닌 레드번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도리어 신경질적으로 자신을 할퀴어대는 팔다리 몇 개를 물어뜯어 대기까지 했다.
끼에에에.
레드번에게 짓눌린 벤시가 억눌린 신음소리를 내뱉으며 움푹 들어간 주둥이를 딱딱거리다 그대로 쩍 벌리고는 굳어버렸다.
그 순간 한계까지 부풀어 올랐던 벤시의 몸뚱어리가 뻥, 하고 터져나갔다.
“음… 너무 싱거운데? 이 정도라면 그리핀도르의 마법사들이 처리하지 못할 리가 없는데.”
아덴버그의 왕실 마법사단은 요새를 집어삼킬 정도로 거대한 환수마저 갈기갈기 찢어발기는 위엄을 보였다. 그리고 그가 생각하기에 그리핀도르의 마법사들이 아덴버그의 마법사들보다 수준이 떨어질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는 그리핀도르가 이 생김새만 요란한 마수를 처리하지 못한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다.
[마기에 영향을 받지 않는 너와는 다르게, 인간은 마기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단다. 너보다 강한 자가 있다고 한들, 너처럼 쉽게 마수를 상대할 수 있는 존재는 드물 거야.]
게하임니스는 이 허탈한 싸움의 결과가 용의 기운 덕이라 말했다.
[그리고 한 가지 경고하겠는데.]
흩어진 피막의 파편들을 가만히 보고 있자니, 게하임니스가 혀를 찼다.
[마수와 싸울 때는 끝까지 방심하지 않는 게 좋….]
작은 아룡의 경고가 채 끝이 나기도 전에 흩어졌던 벤시의 파편들이 확 하고 날아올랐다. 그리고 넓게 펼쳐진 피막의 몸뚱어리가 한데 뭉쳐 그를 뒤덮었다.
“그런 건 네가 말해주지 않아도 알고 있어.”
완전히 집어 삼켜진 줄 알았던 김선혁의 음성이 피막 너머에서 흘러나왔다. 그런데 그 음성이 너무도 태연하기만 했다.
검붉은 피막이 울룩불룩 튀어나온다 싶더니, 이내 다시 산산조각이 났다.
빼애애애애액!
웅크리고 있다 날개를 활짝 편 것만으로 마수의 몸을 찢어낸 레드번이 사납게 포효했다.
[벤시의 가장 큰 무기인 통곡과 마기, 독. 뭐 하나 너에게 통하는 것이 없으니 확실히 상성에 있어 네가 우위구나. 하지만 그런 식으로는 절대 끝이 나지 않을 텐데.]
“끝이라….”
김선혁이 이리저리 흩어진 피막 조각들이 다시금 스멀스멀 들러붙는 것을 바라보다 레드번을 불렀다.
“레드번.”
빼애애애액!
눈을 번뜩이며 피막의 파편들을 노려보던 레드번이 입을 쩍 벌렸다.
“전부 먹어치워.”
먹성 좋은 용의 아종이 기다렸다는 듯이 흩어진 벤시의 몸뚱어리들을 와구와구 먹어대기 시작했다.
[멈춰! 아무리 상성이 있다지만, 마수의 독은 용의 아종에게도 치명적이야! 와이번은 놈을 소화해낼 수 없어!]
깜짝 놀란 게하임니스가 소리쳤지만 김선혁은 시큰둥하기만 했다.
“평범한 용의 아종이라면 그랬겠지.”
[그게 무슨….]
“네가 깨어나기 전에 말이야.”
그는 게걸스럽게 마수를 먹어치우는 레드번의 목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레드번의 주식이 뭐였는지 알아?”
한때 서부 전장에서 그리핀에 비해 상대적으로 열세를 보이는 레드번을 강제로 각성시키려고 했던 적이 있었다.
“독 속성의 아룡마저도 고통에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뒹굴 정도로 끔찍한 극독.”
그리고 그 당시 레드번은 수도 없이 많은 독을 얻어먹었다. 개중에는 독 속성의 아룡마저 바닥을 뒹굴며 고통스러워 할 정도로 끔찍한 독이 수도 없이 많았다.
“이놈이 먹성 하나는 최고라는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