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래곤 푸어-175화 (175/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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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오염된 대지 (1)

오필리아의 말에 김선혁은 저도 모르게 아무렇게나 움켜잡고 있었던 부러진 창을, 다시 고쳐 잡았다. 마냥 가볍게 듣기에는 그녀의 표정과 말투가 너무나 진지했다.

“명심하도록 할게요.”

아무리 스스로 괜찮다 말해도 어린 아내가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쉽사리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음….”

당장에라도 몸을 돌릴 것 같았던 그가 머뭇거리고 있자, 오필리아가 별안간 손을 들어 올렸다.

척.

그 작은 손짓에 왕가 수호대의 기사들이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주변을 둘러싸더니, 등을 내보인 채 망토자락을 끌어 올렸다.

사라락,

순식간에 생겨난 붉은 장막, 그 속에서 어린 아내가 성큼성큼 다가와 품에 안겨왔다.

“아….”

“너무 오래 걸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오필리아의 돌발적인 행동에 어쩔 줄 몰라 했던 것도 잠시였을 뿐, 그는 오갈 곳 없이 방황하던 손을 가만히 들어 그녀의 작은 어깨를 감싸 안았다.

“다치지 말거라. 아프지 말거라. 그리고….”

품에 쏙 안긴 오필리아가 작게 속삭였다.

“한눈 팔지 말거라.”

**

오필리아와 작별을 마치고 나니, 대기하고 있던 시종이 다가와 물었다.

“이쪽으로.”

“인사할 이들이 있으니, 잠시 기다려주겠는가.”

아내를 제일 먼저 찾아왔던 탓에 아직 다른 이들과는 제대로 된 작별 인사조차 하지 못했다. 그의 말에 시종이 작게 알았다 대답을 하고는 멀찍이 물러났다.

“영주님.”

이미 그가 떠날 것이라는 언질을 받은 것인지 라인펄의 가솔들은 한 자리에 모여 영주를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멀리 다녀올 일이 생겼다.”

“저희는 또 기다려야겠지요?”

클라크가 아쉬움 가득한 음성으로 물었다.

“레드번을 타고 단숨에 이동할 생각이다.”

“이거야 원, 저희도 나름 어디 가서 발이 느리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 없는데, 유독 영주님께만 짐이 되니 서럽기까지 합니다.”

한때 왕국 최정예로 불리던 야전 기병, 블루 코트의 자부심이 운다며 클라크가 진담 반 농담 반 섞인 푸념을 했다.

하지만 금세 웃는 낯으로 어디 가서 와이번이라도 한 마리 잡아타야겠다며 너스레를 떨며 다음에는 꼭 자신들을 데려가줄 것을 부탁했다.

“다음에는 꼭 그렇게 하도록 하지.”

어차피 이번 일만 끝이 나면 당분간 왕국을 멀리 떠날 일도 없었다. 그리고 왕국 내에서라면 이 거친 기병들이 따르지 못할 곳이 없었다.

“그럼 저희도 영주님이 떠나시는 걸 보고, 바로 라인펄로 돌아가 봐야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기병들은 당장 떠날 것처럼, 여행 채비를 마친 모습이었다.

“그럼 내가 없는 동안, 영지를 부탁하겠다.”

“맡겨 두십시오.”

듬직한 대답에 씨익 웃어 보인 김선혁이 한켠에 서서 사내들의 대화를 듣고만 있던 줄리앙과 아샤 트레일을 돌아보았다.

“영지의 일을 거들어달라고 부탁한 주제에, 매번 혼자 돌아다녀 미안합니다.”

왕가 수호대에 있던 전도유망한 기사를 시골 영지에 불러다 놓고 정작 스스로는 주구장창 밖을 쏘다니고 있으니 미안한 마음이 컸다.

“별말씀을.”

아샤 트레일은 평소처럼 담백하게 그의 사과를 받아들였고, 짧게 작별 인사를 건네왔다.

“뜻 한 바 이루시고 무사히 돌아오시기를 바라겠습니다.”

제 스승이나 다름이 없는 여기사와 김선혁이 인사를 나누는 것을 보고 있던 줄리앙이 다가와 그의 소맷자락을 꼭 붙잡았다.

“다음에는 반드시 저도.”

“그래. 넌 몸도 가벼우니 레드번에 태우기에 부담이 없겠다.”

근래 들어 눈물만 많아진 어린 종자에게 농담처럼 인사를 건넨 그가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모두 다시 만날 때까지….”

“영주님의 무사 귀환을 바라며!”

척.

기병들이 절도 있게 경례를 하고, 아샤 트레일과 줄리앙 역시 가슴께에 손을 얹고는 기사의 예를 취해 보였다.

**

“안내하겠습니다.”

어디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인지 불쑥 다가온 시종이 김선혁을 왕성의 공터로 안내했다. 공터에 도착하니 화려한 갑주를 입은 두 기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오오. 전승공이시여.”

“오랜만에 뵙습니다.”

라파예트와 롤랑, 한때 그리핀도르 소속 창공의 기사라 불렸지만 이제는 아덴버그로 전향하여 왕실의 기사가 된 사내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오필리아가 먼 길을 떠나는 제 배우자의 안위를 염려하여 붙여준 호위이기도 했다.

“신색이 좋아 보이는 걸 보니 잘 지낸 모양이다.”

“소속이 애매해 하는 일도 없이 빈둥대다 보니, 군살만 붙던 참입니다.”

라파예트는 좀이 쑤시던 차에 먼 길을 떠나게 된 게 차라리 반가운 눈치였다.

“시간이 많이 지체됐다. 바로 출발하도록 하지.”

인사만 하다 하루를 다 보낼 판국이라 그는 곧장 레드번을 타고 날아올랐다. 그리고 왕성 위를 몇 바퀴 선회하다 곧장 서쪽을 향해 쏜살같이 쏘아져 나갔다.

**

그리핀 라이더들과의 이동은 쾌속 그 자체였다. 단 사흘 만에 아덴버그의 영역을 완전히 벗어났고, 녹테인을 지나는 데는 채 2주가 걸리지 않았다.

그마저도 분쟁을 피하기 위해 조심하며 이동하지 않았다면, 훨씬 시간이 단축되었을 것이다. 그만큼 김선혁과 그리핀 라이더들의 이동은 신속했다.

[방향은 맞지만, 거리는 아직 정확하게 알 수가 없구나.]

페어리 드래곤의 말에 김선혁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조금이라도 가까운 곳에 용의 아종이 있기를 바랐건만, 아무래도 헛된 기대였던 모양이다. 이대로라면 중부를 지나 서부에 도착해야 게하임니스가 정확한 위치를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여기서부터는 저희가 앞장서도록 하겠습니다!”

녹테인을 지나 그리핀도르의 영공에 진입하자 라파예트가 앞으로 치고 나왔다.

“주요 도시들과 거점은 최대한 피해야 합니다!”

과연 드라흔이라는 이름이 알려지기 전까지 대륙에서 유일무이한 공중 전력을 자랑해왔던 그리핀도르답게 대공에 대한 대비가 어느 정도 되어 있었던 모양이다. 다른 나라들과는 다르게 주요 거점들이 저마다 제 나름대로 창공에 대한 감시 수단이 있다는 라파예트의 설명에 김선혁은 말없이 선두를 내어주었다.

“음….”

그렇게 라파예트의 뒤를 따라 이동하던 그는 이제껏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광경을 보고는 신음을 내뱉고 말았다.

까맣게 변색되어버린, 마치 온통 부패한 듯 악취가 나는 대지가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다.

“여기가 마수의 공격을 받은 지점인가 봅니다.”

스멀스멀 올라오는 거북스러운 기운이 대지와 한참이나 떨어진 하늘까지 뻗어왔다.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른 불길한 기운에 맞닿은 그리핀들이 여정에 나선 이후 처음으로 힘에 겨운 모습을 보였다.

“어? 드본이 이상합니다!”

“미온테도 상태가 좋지 않아!”

그리핀들이 비척거리며 날개를 허우적거리자 깜짝 놀란 라파예트와 롤랑이 비명을 질렀다.

“내려가서 상태를 확인해야 할….”

“멈춰!”

고삐를 잡고 하강하려는 두 라이더를 김선혁이 만류했다.

[마기(魔氣)야. 직접 닿았다간 너는 몰라도 저 둘은 정신이 오염되어 견딜 수 없게 될 거야.]

“빨리도 이야기 해준다.”

한발 늦은 게하임니스의 경고에 인상을 찌푸린 그가 두 그리핀의 상태를 살폈다. 드본과 미온테는 당장 추락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힘겨워하는 모습이었다.

그리핀들뿐만이 아니었다.

중심부에 다가설수록 불길한 기운은 더욱 더 강렬해졌고, 이제는 레드번마저도 거북스러운 신음을 내뱉으며 날개를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서쪽에 도착하기도 전에 단체로 추락할 판국이었다.

“내가 선두를 잡는다! 둘은 내 뒤를 바짝 따르도록!”

김선혁은 아티야를 불러 세 날짐승들을 돕도록 했다.

‘으으. 주인님. 여기 있기 싫어요.’

평소였다면 제 몸이 흩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주인의 명부터 따랐을 아티야가 오늘은 나타나자마자 죽는 소리를 내뱉었다.

“부탁할게. 조금만 참고 도와줘.”

아티야마저도 맥을 못 추는 모습을 본 그는 더없이 심각한 얼굴이 되었다.

‘오래는 못 버텨요.’

“잠깐이면 돼.”

바람의 정령이 거들고 나서야 김선혁과 그리핀 라이더들은 하강을 멈출 수 있었다.

“이대로 이 자리를 벗어난다!”

아티야를 통해 빠르게 소모되는 기력을 느낀 그가 황급히 두 라이더들을 이끌고 오염된 대지를 벗어났다.

“휴우.”

검게 썩어버린 땅을 한참이나 벗어나고 나서야 겨우 사라진 마기의 거북스러운 영향, 김선혁과 그리핀 라이더들이 땅에 내려섰다.

“저건 대체 뭐였을까요.”

바닥에 내려서기가 무섭게 완전히 퍼져버린 그리핀들을 걱정스레 바라보던 라파예트가 물었다.

“마기. 마수로 인해 오염된 대지가 뿜어대는 죽음의 기운이다. 산 자를 더럽히고, 죽은 자를 일으키는 끔찍한 저주다.”

마기의 영향권을 벗어나는 동안 게하임니스를 통해 마기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이 들은 것들을 그대로 라파예트와 롤랑에게 설명해주었고, 그들은 금세 심각한 얼굴이 되었다.

“분명히 격퇴했다고 들었는데.”

아무리 등을 돌리고 떠났다고 하지만 자신들의 고향이 끔찍하게 변해버린 모습을 보고도 마음이 편할 리가 없었다.

“가장 처음에 나타난 놈은 퇴치했지만, 그 이후로도 계속해서 마수들이 나타나고 있다더군.”

[마왕의 군대가 무서운 점이 바로 그 때문이야. 마수는 퇴치할 수 있어도 마기에 노출된 대지를 정화하는 것은 꽤나 힘든 일이지. 그렇다고 그대로 방치해두었다간 마기에 노출된 대지가 완전히 오염되니 당하는 이의 입장에서는 마왕과 싸운다는 건 이겨도 얻는 게 없는 끔찍한 일이란다.]

이제야 김선혁은 노르딕의 초인들이 왜 마왕 하나를 막아내지 못한 것인지 실감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내가 보기에 방금 지나온 대지는 이미 충분히 오염되었어. 아마 저 안에 살아 움직이는 건 마기에 오염되어 마물이나 다름없게 변해버린 존재들뿐일 거야.]

“다음에는 조금 일찍 말해줘.”

[직접 눈으로 확인해보는 게 훨씬 나을 거라 판단했을 뿐이야.]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직접 확인하지 않았다면 아무리 게하임니스가 마기의 위험성을 말했다 한들 그 위험성을 체감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마터면 단체로 오염된 땅에 추락할 뻔했지만, 그 덕에 교훈을 얻은 것이다.

“이건 예상을 아득히 넘어가는구만.”

혀를 빼물고 숨을 몰아쉬는 레드번을 본 김선혁이 탄식을 내뱉었다.

직접 마왕과 만난 것도 아니다. 그저 마왕이 불러낸 마수가 남긴 흔적을 보았을 뿐이다. 그것도 아주 멀리 떨어진 하늘에서 내려다보았다.

그것만으로도 그리핀 두 마리가 추락할 뻔했고, 레드번이 타격을 입고 말았다.

상태가 좋지 않은 건 기수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잠깐 사이에 극심한 심력을 소모한 두 라이더들은 말할 것도 없었고, 그 역시 아직까지 울렁거리는 속을 진정시키느라 애를 먹어야 했다.

하지만 그의 울렁거림은 고통보다는 차라리 강렬한 적개심에 가까웠다.

[어쩔래? 만약 그녀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절대로 그냥 지나치지 않았을 거야. 누가 뭐라고 해도 그녀는 광명에 속한 존재, 마기와는 상극에 있으니까.]

게하임니스의 말을 듣고 나서야 솟구치는 적개심의 근원을 알게 되었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

김선혁은 잠시 게하임니스의 입을 막고는 생각에 잠겼다.

이걸 창공의 기사들이 막았다고?

직접 닿은 것도 아닌데 힘을 잃고 추락할 뻔했던 그리핀들이다. 그런데 다른 그리핀 라이더들이 마기의 주인과 싸워 승리를 거뒀다는 게 영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는 라파예트와 롤랑에게 다른 창공의 기사들이 지닌 기량이 어떤지를 물었다. 그리고 그들의 실력이 두 라이더들과 대동소이함을 알게 되었고, 더욱더 강한 의문을 느꼈다.

대체 그리핀도르는 이 끔찍한 마기를 상대로 어떻게 승리한 것일까.

[거짓말.]

“뭐?”

게하임니스가 오염된 대지가 있는 방향을 바라보며 말했다.

[애초에 마수는 죽지 않았단다.]

김선혁은 단번에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핀도르의 거짓말쟁이가 거짓 전보를 보냈군.”

아무래도 그리핀도르의 군주는 자국 내에 일어난 소란이 여전함을 알려 약점을 잡히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다. 하기야 아직까지 동부 왕국들에게 있어 마왕은 합심하여 몰아내야 하는 끔찍한 존재라기보다는 그저 북서부에 일어난 반란의 수괴에 불과했다.

[어떻게 할 거야? 이대로 두었다간 이 일대가 완전히 마기에 오염되어 정화조차 불가능하게 될 거야. 그리고 그렇게 한 번 자리를 잡은 마왕의 권역은 계속해서 세를 불려가겠지. 어쩌면 네가 사랑하는 왕녀의 나라도 난리에 휘말릴지도 몰라.]

물론 게하임니스의 말은 상당히 과장되어 있었다. 방금 전에 겪은 일이 끔찍하다고는 하지만 각 왕국에 웅크린 채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진짜 초인들이 위기를 극복하지 못할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그들이 나서서 해결하지 못할 일이라면 자신이 해결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너, 내가 마수와 싸우길 바라는구나.”

자꾸만 자신을 부추기며 의뭉을 떠는 작은 아룡을 보며 김선혁이 눈을 치떴다.

[서쪽으로 향하면 이것보다 몇 배는 끔찍한 꼴을 볼 거야. 어차피 겪을 거라면 비교적 마왕과 멀리 떨어진 곳에서 그 힘을 겪어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어.”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지금 그가 향하는 곳은 마왕의 군대가 또아리를 튼 대륙의 서부였다. 언제 마주쳐도 한 번쯤은 마수와 마주칠 수밖에 없는 곳이었다.

기왕 그렇게 될 거라면, 게하임니스의 말대로 비교적 마왕의 영향력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그리핀도르에서 마수를 겪어보는 것도 나쁜 생각은 아니었다.

[그리고 내가 깜빡하고 말해주지 않은 게 있단다.]

“뭔데?”

[너와 그녀가 마기를 적대하듯.]

게하임니스가 입을 쭉 찢으며 웃어 보였다.

[마수 역시 너를 적대할 거라는 사실 말이야.]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저 멀리서 끔찍한 포효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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