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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왕실비고 (2)
김선혁이 비고의 문을 열고 들어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오필리아가 나타났다.
“그이는 들어갔는가.”
너무도 자연스러운 ‘그이’라는 호칭에 레인하르트 후작이 흠칫 그녀를 바라보더니 이내 감회가 새로운 얼굴을 해 보였다. 어려서부터 보아온 왕녀가 장성하여 혼인까지 했다는 사실에 미묘하게 감동을 한 것이다.
복잡한 감정이 떠오른 후작과는 달리 오필리아는 무표정하기만 했다. 김선혁을 대할 때면 시시때때로 드러나는 수줍음도 지금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감정이 바싹 메마르기라도 한 듯 건조하기만 한 표정이었다.
“이제 막 들어간 참입니다.”
하지만 레인하르트 후작은 이를 조금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고, 너무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아데스덴의 혈족들이 성인식을 치른 직후 유달리 감정변화가 드러나지 않게 변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탓이었다.
후작은 그녀의 아비, 테오도르 국왕이 철(鐵)의 왕자라 불리던 시기를 생생하게 기억했다.
지금에야 세월이 흘러 많이 부드러워져 웃기도 하고 화를 내기도 한다지만, 예전의 국왕은 감정을 일절 내비치지 않는 건조한 존재였다. 오죽하면 왕도의 교활한 귀족들마저 속을 알 수 없는 국왕과의 대면 자체를 꺼렸었을 정도였다.
그렇게 보면 오히려 지금의 오필리아는 차라리 부드러운 편이었다. 최소한 그녀는 선이 가는 청초한 외모 탓에 제 아비보다는 온화해 보였으니까.
“비고의 문이 다시 열리면, 나에게 기별하도록 하라.”
아무래도 김선혁이 다시 나오기까지 시간이 걸릴 거라 생각한 모양인지, 오필리아가 몸을 돌렸다.
“섭정 폐하.”
그런 그녀를 후작이 잡았다.
“굳이 비고까지 허락하셔야 하셨는지, 이 늙은이는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한 시대에 단 한 번밖에 주어지지 않는 기회, 아무리 배우자라고 하나 정치적인 계산을 기반으로 맞이한 배우자에게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의문이 들었다.
“귀물에 의존해야 할 정도로 나는 무능하지 않느니라.”
아데스덴의 혈족다운 긍지가 드러나는 대답, 하지만 여전히 후작은 납득할 수 없었다.
“전승공 또한 유능하지요. 비록 그 능력이 전장에서만 발휘될 뿐이지만.”
단지 자긍심만으로 포기하기에는 비고에 잠들어 있는 귀물들의 가치가 너무도 컸다. 실제로 아데스덴의 수장들 중에 비고를 들어갔다 나온 후로 큰 업적을 남긴 이들이 있었다.
그들이 비고에서 무엇을 얻었는지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오필리아 또한 그들에 못지않은 업적을 남길 만큼 능력이 출중하다는 사실 정도는 그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가 비고의 개방을 다른 이에게 양보한 것이 더욱 아쉬웠다.
“후작은 왜 선대 군왕들께서 비고의 개방을 한 시대에 한 번으로 제한하신지 알고 있는가.”
“귀물에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를 정련하여 진정한 군주가 되라는 선대 폐하의 뜻이 아닌지요.”
왕가 수호대의 수장들은 왕실과 밀접한 존재들이었고, 그렇기에 역대 왕가 수호대의 수장들에게는 많은 이야기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왕가 수호대의 수장들에게도 전해지지 않았던 비고의 비밀이 있었으니.
“힘에는 항상 대가가 따르는 법, 비고의 귀물들은 양날의 칼이다.”
귀물들이 지닌 어두운 일면이었다.
“특히 아데스덴의 혈족에게는 말이지.”
단순무식해 보이는 후작이었지만 속까지 그런 것은 아니었다. 호쾌하고 사내다운 인상은 그 스스로가 만들어낸 가면에 불과할 뿐, 그 속내는 음흉한 귀족들의 암수를 사전에 차단할 정도로 심유하기만 했다.
그런 후작이기에 오필리아의 말을 단 번에 알아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의문은 여전했다.
“허면 전승공에게도 해가 미칠 수도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순간적으로 지닌바 능력과 위치에 비해 순박하기만 한 드라흔의 얼굴이 떠올라 후작의 표정이 굳었다.
“전승공을 염려하는 것인가.”
“죄송합니다.”
혹시나 그녀가 제 반려의 안위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것은 아닌지, 순간적으로 의심하고 말았다. 왕족을 최우선으로 생각해야 하는 왕가 수호대의 수장으로서 불충이라면 불충이었다.
“전승공 역시 왕가의 일원이니, 후작이 그 안위를 살피는 것은 잘못된 일이 아니리라.”
하지만 그녀는 후작을 나무라지 않았다.
“내가 비고의 열람을 허락한 것은….”
오필리아의 금빛 눈동자가 잠시 비고의 문 너머를 들여다보듯 투명하게 빛났다.
“그가 위해를 입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확신에 찬 음성, 그제야 후작은 비고에 들어간 드라흔에 대한 걱정을 덜 수 있었다.
“전승공이 비고에서 나오거들랑 바로 나에게 기별하도록 하라.”
“섭정 폐하의 뜻대로.”
**
[놀랍구나. 놀라워. 이 정도의 물건들이 아직까지 남아있다니.]
비고 안에 들어서자마자 게하임니스가 감탄을 토해냈다.
[하지만 더욱 놀라운 것은 이토록 대단한 물건들이 있음에도 그 기운이 저 문 너머로 새어나가지 않는다는 거야.]
김선혁이 보기에는 먼지 쌓인 창고와 그다지 다를 바가 없는 왕실의 비고, 그런데 자꾸만 게하임니스가 감탄을 토하니 눈에 더욱더 힘이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눈에 불을 켜고 둘러봐도 먼지가 뽀얗게 쌓인 물건들 중에 특별해 보이는 걸 찾을 수가 없었다. 그의 눈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쓰다 처박아둔 골동품처럼 방치된 잡동사니들뿐이었다.
[여기 있는 것들 중 태반이 마법이 걸린 물건들이란다. 그것도 흉내만 낸 가짜가 아니라, 진짜 옛 시대의 마법들 말이야.]
“오오!”
역시나 게하임니스를 데리고 비고에 들어오길 잘했다며, 김선혁은 환호했다.
“어떤 놈이 마법이 걸린 물건이고, 어떤 마법이 걸렸는지 알려줄 수 있어?”
[알려주는 건 어렵지 않아.]
어쩐지 아쉬움이 가득한 음성으로 작은 아룡이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어차피 너는 쓰지 못할 물건들인데.]
이건 또 무슨 소리인지 그는 게하임니스에게 이유를 물었다.
[내가 말했지? 여기에 있는 물건들 중 태반이 옛 시대의 진짜 마법들이 걸린 물건들이라고. 그리고 그런 물건들 중에 네가 쓸 수 있는 게 있었다면 넌 아마 이곳에 들어오자마자 알아봤을 거야.]
작은 아룡이 안타까움에 입맛을 다시며 그에게 말했다.
[그 시대에 만들어진 마법구(魔法具)들은 직접 주인을 선택하거든.]
정령도 있고 마법도 있고 용도 있는 세상에 주인을 선택하는 무기가 있다 한들 놀랄 일은 아니었다. 그저 자신을 주인으로 선택한 무기가 없다는 사실이 아쉬울 뿐이었다.
“끄응. 오필리아한테 괜히 미안해지네.”
한 번 뿐인 기회를 양보했는데, 정작 자신이 얻는 게 없다면 얼마나 허탈할까. 벌써부터 마음이 무거워지는 김선혁이었다.
[그냥 나가자. 여기 물건들 중에 절반은 이미 주인의 피 맛을 본 놈들이야. 주인으로 선택받았다면 모를까. 그것도 아닌 이상 여기 있는 물건들은 너에게 있어 귀물이 아니라 마물에 불과하단다. 괜히 어쭙잖게 욕심 부렸다간 손해만 보고 말 거야.]
“음.”
그러고 보니 아까 전부터 등골이 서늘한 것이 기분이 영 좋지 않았다. 마치 누군가의 보이지 않는 시선들이 자신을 지켜보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래. 나가자.”
이대로 돌아서기에는 아쉬운 마음이 컸지만, 게하임니스의 말을 따른 수밖에 없었다.
[잘 생각했어. 네 가장 큰 무기는 그녀와 원천을 함께한다는 것, 이런 신외지물들이 아니니까.]
작은 아룡이 날개를 퍼덕거리며 비고를 벗어나려다 뒤를 돌아보았다.
[안 가?]
김선혁은 대답이 없었다. 그저 우두커니 비고에서도 가장 구석진 어딘가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을 뿐이었다.
[피 맛을 본 마법구들이 찾는 건 주인이 아니라 숙주! 정신을 집중해 스스로를 보호하도록 해!]
한참이나 늦은 경고였다.
[이런!]
여전히 미동도 없는 그를 본 페어리 드래곤이 날개를 활짝 펼치고 그의 앞을 막아섰다. 여차하면 신비마법이라도 부릴 듯한 모습이었다.
[어?]
당장에라도 마법을 발현할 것 같았던 게하임니스가 얼빠진 소리를 내뱉었다.
그도 그럴 것이 마물에게 홀려 정신을 놓은 게 아닐까 싶었던 김선혁의 눈빛이 그 어느 때보다 더 반짝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게하임니스.”
한참 만에 입을 연 김선혁이 작은 아룡의 이름을 불렀다.
“내가 마법구의 주인인지는 어떻게 알아?”
[마법구가 널 선택하면 너는 그냥 알 수 있어. 그건 원래 그런 거거든.]
게하임니스의 대답에 그가 손가락을 들어 비고의 구석 자리를 가리켰다.
“그럼 나 찾은 거 같은데.”
**
벌컥.
비고의 문이 다시 열리고 김선혁이 모습을 드러냈다.
“음?”
문을 등지고 서 있다 드라흔을 발견한 레인하르트 후작의 시선이 그의 손에 들려 있는 물건을 향했다. 그리고 다시 그의 얼굴로 향했다.
비고에 들어갈 때만 해도 기대에 차 있었던 그는 어쩐 일인지 잔뜩 실망한 얼굴이었다.
“음. 뭔가 잘 안 된 모양이군.”
비고에 들어갔다고 해서 꼭 쓸 만한 뭔가를 발견하란 법은 없었다. 애초에 정보도 없이 쓸만한 물건들을 찾아낸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으니까.
“뭐, 내가 상관할 일은 아니지.”
덩달아 실망한 얼굴을 해 보였던 후작이 이내 시큰둥하게 한마디를 내뱉고는 오필리아가 기다리고 있다는 말을 전해주었다.
“가보게. 지금쯤이면 내원에서 잠깐 쉬고 계실 터이니.”
후작의 말에 그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내원으로 향했다.
“쯧. 섭정 폐하께서 기대가 크셨을 텐데.”
어쩐지 터덜거리는 발걸음에서마저 실의에 찬 드라흔의 마음이 느껴져 레인하르트 후작은 혀를 차고 말았다.
**
레인하르트 후작의 말대로 오필리아는 내원에 앉아 눈을 감은 채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오필리아.”
조심스럽게 김선혁이 그녀의 이름을 부르자, 그녀가 감았던 눈을 번쩍 떴다.
그녀의 시선이 자신의 손에 들린 무언가를 향하는 것을 느낀 그가 죄스러운 얼굴로 사과했다.
“미안해요. 아무래도 나 이상한 물건을 선택한 것 같아요.”
하고 많은 무구들 중에 하필이면 선택을 받은 게 하자품이라니, 그로서는 그녀에게 할 말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손에 들려있는 물건은 정상적이지 않았다.
손잡이를 감은 가죽은 잔뜩 헤져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 같았고, 원뿔 모양으로 넓게 펼쳐진 챙은 군데군데 이가 나가 있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가장 끔찍한 것은 무언가에 뜯겨나간 듯 뭉텅이로 잘려나간 몸뚱어리였다.
그가 비고에서 얻은 물건은 중간에서부터 잘려져 나간 창이었다.
오죽하면 어지간해서는 말끝을 흐리는 법이 없는 오필리아마저 할 말을 잊은 듯한 얼굴을 해 보였을까.
“왜 그걸 선택했는지 물어도 되겠느냐.”
한참 만에 입을 연 그녀가 선택의 이유를 물었다.
“이것밖에 선택권이 없었으니까요.”
생명을 갉아먹기 위해 혀를 날름거리는 마물들 틈에서 오직 이 부러진 창만이 자신을 주인으로 인정하고 스스로를 드러냈다.
‘마법 무구인 건 확실한데, 중간에 훼손이 됐는지 무슨 마법이 걸려있는지 도통 알 수가 없네. 그래도 다른 마법 무구들의 선택을 받지 못한 이상, 어쩔 수 없어.’
게하임니스는 선택받지도 못한 물건을 가지고 나가 해를 입느니, 이 쓸모없어 보이는 창이라도 가지고 나갈 것을 권유했다.
그게 그가 이 창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였다.
“만약 그대의 말대로라면 그대의 선택은 틀리지 않았을 것이다.”
오필리아가 근엄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녀의 음성에는 평소와 드물게 확신이 없었다. 아무래도 실망한 배우자를 위로하려는 내뱉은, 마음에도 없는 말이 분명했다.
“끄응.”
저도 모르게 앓는 소리를 내뱉은 그는 다시 한 번 제 손에 쥐어진 창을 바라보았다.
창은 부러져나간 절단면 안쪽의 텅 빈 속이 마치 입을 벌린 짐승의 주둥이처럼 보여 꽤나 위협적으로 보였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중간에서부터 잘려져 나간 창을 어디에 쓸까.
그는 다시 한 번 한숨을 내뱉었다.
“그리핀 라이더들이 준비를 끝마쳤노라.”
그런 그에게 오필리아가 그리핀 라이더들의 준비가 끝이 났다며 말했다.
“나로 인해 3일이란 시간을 허비했으니, 그대는 언제든 왕성을 떠나도 좋다.”
시간을 허비했다는 그녀의 말이 유달리 귀에 박혀드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김선혁은 시일이 지체되었음을 느끼고는 오필리아에게 작별인사를 건넸다.
“최대한 빨리 돌아올게요.”
“떠나는 오늘과 같이 돌아올 때도 여전하기를 바라노라.”
그녀는 의연한 표정으로 그를 배웅해주었고, 한마디 덧붙여 당부했다.
“일견 쓸모가 없어 보이나 혹시 모르니 그 부러진 창 또한 가져가도록 하라. 진정으로 그대에게 필요한 것이라면 필요한 순간 그 효용을 드러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