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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왕실비고 (1)
이곳은 용과 대화를 나누기에 좋은 장소가 아니었다.
“잠깐.”
김선혁은 격앙된 용을 진정시켜두고는 잠시 오필리아에게 시선을 건넸다. 좀처럼 진전을 보이지 않는 귀족들의 토론을 무표정하게 바라보고 있던 그녀가 언뜻 그의 시선을 느끼고는 고개를 돌렸다.
“왕국의 미래를 두고 갑론을박하는 경들의 충정과 열정은 이해하나, 의견을 개진함에 있어 각자가 지나치게 과열되어 있으니 이로 인해 왕국을 떠받드는 귀한 이들의 의가 상하지는 않을까 염려가 되는구나.”
눈이 마주친 오필리아가 그의 표정을 보더니, 회의의 중단을 선언했다.
“뭔가 할 말이라도 있는가.”
그녀는 지루한 회의에 그가 지친 것은 아닌지 세심하게 살피다 휴식을 권했다.
“잠시 바람이라도 쐬고 오도록 하라.”
그는 그녀의 권유를 거부하지 않았다.
“그럼 잠시 다녀오도록 하겠습니다.”
회의실을 나선 그는 곧장 용과 대화를 할 만한 인적이 드문 장소를 찾았다. 때마침 회의에 참석한 귀족들이 중간 중간 쉴 수 있도록 마련된 밀실이 몇 개나 남아 있었고, 그는 그중 하나를 골라 자리를 잡았다.
“무슨 일 있어?”
[저주스러운 존재.]
그 사이에 감정을 추스른 것인지 용의 음성은 한결 차분해져 있었다.
[혼돈의 파편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노라.]
용이 이렇게까지 격앙된 어조를 보인 건 마왕의 존재를 알았을 때뿐이었다. 역시나 이번 일도 마왕과 관계가 있었던 모양이다.
“마왕이라면 한참 전부터 있었잖아.”
하지만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제 와서 새삼 마왕의 인도자인 혼돈의 파편을 언급하며 호들갑을 떨 이유가 있나 싶었을 뿐이었다.
[마왕을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용은 태평스러운 그를 꾸짖듯 근엄하게 말했다.
[혼돈의 파편이 직접 모습을 드러냈다는 말이다.]
용이 거듭 강조를 했지만, 애초에 혼돈의 파편을 마왕의 인도자 정도로밖에 생각하지 않았던 김선혁으로서는 조금도 상황의 심각성이 그다지 와 닿지 않았다.
[마왕이 혼돈의 파편으로부터 힘을 끌어내 쓰는 존재라면, 혼돈의 파편은 그야말로 부정한 것들의 정수와도 같은 것이다.]
멀뚱멀뚱 가만히 서서 가만히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자니, 용이 한숨을 내쉬었다.
[답답한지고…]
답답하니 뭐니 해도 그로서는 딱히 할 말이 없었다. 뭘 아는 게 있어야 대꾸를 하지, 파편이니 정수니 그에게는 너무도 생소한 이야기들이었다.
[그대의 자격이 부족하여 내가 그 앞에 나설 수 없듯, 혼돈의 파편 또한 마왕이 자격을 갖추기 전까지는 모습을 드러낼 수 없노라. 그런 혼돈의 파편이 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은…]
“마왕이 자격을 갖췄다는 뜻이겠군.”
[만약 그것뿐이었다면, 이리 다급히 그대를 찾지 않았을 것이다.]
한때 마왕의 등장에 격분하여 당장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날뛰었던 용이 마왕을 지켜보기로 한 것은 단순히 병과보다는 ‘인간’을 믿어보라는 그의 말을 존중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용이 자신의 말을 번복하며 다시 한 번 마왕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것은 더 이상 사태를 관망할 수 없는 변수가 생겼다는 뜻이나 다름이 없었다.
[혼돈의 파편이 용의 아종들 중 하나를 굴복시켰다.]
“뭐?”
막연히 이유가 있겠거니 하고 생각했던 김선혁은 생각지도 못한 용의 말에 경악하고 말았다.
“그게 무슨…”
[천년의 맹약도 모든 것을 부정하는 큰 혼돈 앞에서는 부질없었으니, 용의 아종은 타락하여 혼돈의 하수인이 되었노라.]
용은 천년을 이어온 맹약이 무엇인지까지는 알려주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것쯤은 아무래도 좋았다. 지금 중요한 것은 그가 테이밍해야 할 용의 아종들 중 하나가 마왕의 손에 들어갔다는 것뿐이었다.
[시간을 지체했다가는 남아있는 용의 아종들도 위험하다. 억압된 그들의 힘으로는 혼돈에 저항할 수 없나니, 서둘러 그들을 찾는 것만이 그들의 타락을 막는 길이리라.]
혼돈의 파편이 앞으로도 계속해서 남아있는 용의 아종들에게 마수를 뻗을 것이라는 용의 말은 그를 더 이상 태평할 수 없게 만들었다.
“타락한 용의 아종이 어디에 있던 놈이지?”
[북쪽, 그리고 다시 서쪽.]
게하임니스가 북서쪽에 활동 중인 용의 아종이 있다고 하더니, 하필이면 노르딕의 영역에 아룡이 있었던 모양이다.
“서쪽으로 가야겠군.”
북서쪽의 아룡이 당했으니, 현재 그가 행방을 알 수 있는 아룡은 서쪽 어딘가에 있을 용의 아종뿐이었다.
[조심하고 또 조심하라.]
나직하게 중얼거리는 그에게 용이 몇 번이나 조심할 것을 당부했다.
[혼돈의 파편이 깨어난 이상 그대는 마왕의 상대가 될 수 없으니, 행여 그 사악한 종자와 만날 경우 지금의 그대로서는 죽음을 면치 못하리라.]
**
회의실로 돌아간 김선혁은 곧장 오필리아를 찾았다.
“아무래도 잠시 떠나야 할 것 같습니다.”
곁을 지키겠다며 그녀와 약속을 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아 말을 번복하게 되었다. 미안함이 없다면 그게 도리어 이상한 일이었다.
“고개를 들라. 그런 표정 지을 것 없다.”
하지만 오필리아는 그를 탓하지도 붙잡지도 않았다.
“그대가 이렇게까지 하는 것을 보아 필시 화급을 다투는 일이 생긴 것이겠지.”
김선혁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렇다면 가거라.”
“괜찮으시겠습니까.”
걱정스레 물었더니, 오필리아가 턱을 치켜들고는 오만하게 대답했다.
“나는 그대를 만나기 이전에도 아덴버그의 차기 여왕으로 맡은 바 소임을 다 해왔으며, 그대를 만난 이후에도 본분에 소홀했던 적이 없노라. 이는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것이니 그대는 나를 여염집 여인 대하듯 하지 말라.”
이제 막 식을 치른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배우자의 입에서 듣기에는 꽤나 냉정하게 들리는 말이었다.
하지만 김선혁은 그런 오필리아의 대답이 전혀 서운하지 않았다. 어차피 떠나야 할 상황이라면 차라리 그녀가 의연한 것이 마음이 편했던 탓이었다.
“그대는 걱정하지 말고 해야 할 일을 하라.”
조금의 흔들림도 보이지 않는 표정과 음성, 그는 마음속에 남아있던 마지막 염려를 덜어낼 수 있었다.
“언제 떠날 생각인가.”
“채비만 갖춰진다면 당장 내일이라도 떠나야 합니다.”
이미 아룡 하나가 마왕에게 굴복한 상황, 남은 아룡마저 마왕에게 빼앗기지 않으려면 최대한 서둘러야 했다.
“행선지를 알려줄 수 있겠는가.”
“서쪽, 서쪽으로 향할 생각입니다.”
그의 대답에 잠시 생각하는 시늉을 해 보이던 오필리아가 손가락 세 개를 펼쳐 보였다.
“3일 뒤에 떠나거라.”
할 수만 있다면 당장에라도 레드번을 타고 서쪽으로 날아가고 싶었지만, 오필리아의 표정이 너무도 단호하여 거절할 수 없었다.
“알겠습니다.”
이제 와서 새삼 억지를 부릴 것이었다면 3일의 시간을 달라 하는 대신, 처음부터 떠나지 못하도록 막았을 것이다.
뭔가 이유라도 있겠지.
그는 오필리아를 믿었고, 역시나 그녀는 그의 기대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그리핀 라이더들을 데려가도록 하라.”
생각지도 못한 오필리아의 배려에 그가 멍한 얼굴을 해 보이니, 그녀가 혀를 차며 말했다.
“그대는 아직도 스스로의 위치에 대한 자각이 없구나.”
그녀는 세상천지에 왕위 계승자의 배우자가 혼자 세상을 떠도는 법은 없다며, 만일을 대비해 그리핀 라이더들을 꼭 데려갈 것을 당부했다.
“상급 기사의 능력을 지닌 그들이 타국을 오가는 것은 자칫 외교적 분쟁이 될 소지가 있으나, 나는 그대에게 특사의 임무를 주는 것으로 분란을 피하고자 한다. 공식적으로 그대는 전란에 휩싸인 중부와 서부 왕국들의 상황을 살피기 위해 파견된 특사이며, 다른 이들 역시 그에 합당한 대우를 하게 될 것이다.”
한참 앞을 내다보는 오필리아의 현명함에 그는 진심으로 감탄하고 말았다.
“허나 이는 어디까지나 대외적인 명분일 뿐, 시절이 하 수상하니 나는 여전히 안심이 되지 않는구나.”
그리핀 라이더들을 붙여주고 특사의 자리까지 내주고도 아직도 성에 차지 않는 것인지 그녀가 한마디 말을 덧붙였다.
“하여 고심 끝에 나는 그대에게 왕실의 비고(祕庫)를 개방할 것을 결정했노라.”
왕실의 비밀 창고라니, 그 거창한 이름만 들어도 얼마나 대단한 보물들이 보관되어 있을지 상상이 갔다. 아마 다른 때였다면 꽤나 흥미를 느꼈을 법한 이름이었다.
하지만 이 순간 김선혁은 왜 하필 지금 같은 상황에 비고를 개방하겠다는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유구한 세월을 존재해왔던 왕실의 비고는 지금에 이르러서는 그 기록마저 유실되어 그 안에 정확하게 어떤 물건이 보관되어 있는지조차 알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기록이 없다고 해서 귀물들이 지닌 가치가 변하는 것은 아니니…”
오필리아가 가만히 그를 바라보다 마지막 한마디를 내뱉었다.
“어쩌면 그대가 쓸 만한 무기 하나쯤 있을지도 모르리라.”
무기라는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일전에 클라크를 통해 마법이 걸린 무기가 있다는 사실을 들었던 바가 있었다. 당시의 김선혁은 말단 기병에 불과했던지라 눈이 튀어나올 만큼 값이 비싸고 희귀한 마법 무기에 대한 흥미를 금세 잃었었다. 그리고 까맣게 잊어먹고 말았다.
그런데 왜 오필리아의 말에서 갑작스레 잊고 있었던 마법 무기의 존재가 떠오른 것일까.
알 수 없었다. 지금은 단지 짐작할 뿐이었다.
그냥 창고도 아니고 왕실의 비밀 창고씩이나 되는 곳이라면 마법 무기가 있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는 것뿐이었다.
“내일 동이 트거들랑 레인하르트 후작을 찾아 내가 비고의 개방을 허락했노라 전하거라. 그리하면 그가 그대를 비고로 안내해줄 것이다.”
**
아침이 되자 김선혁은 침소를 나섰다. 그런 그를 작은 아룡이 뒤따랐다.
“왜 따라와.”
[나도 같이 가겠어. 재미있을 거 같거든.]
“마음대로 해.”
그 수다스러움 만큼이나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는 게하임니스를 굳이 떨쳐낼 이유가 없었다. 어쩌면 그 방대한 지식의 도움을 받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비고를 열어주십시오.”
후작을 찾은 그는 곧장 비고의 개방을 요청했다.
“혹시 알고 있는가.”
설마 그가 비고에 대해 언급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는지 레인하르트 후작은 감회가 복잡한 얼굴로 그에게 물었다.
“한 시대에 비고에 들어설 수 있는 이는 단 한 명뿐이네.”
뜬금없는 말에 그가 이유를 설명해달라 말하자 후작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현명하고 지혜로운 아데스덴 왕실의 선대 왕들께서는 귀물에 의지하여 스스로를 단련하는 데 게을러지는 것을 우려하셨고, 이를 유지로 남겨 한 시대에 비고에 들어설 수 있는 기회를 단 한 번으로 제한하셨다네.”
과연 아데스덴의 선대 군왕들이라면 그런 유지를 남길 법도 했다. 그들은 자신의 생명을 불사를 정도로 스스로에게 엄격한 이들이었으니까.
“그리고 섭정 폐하께서는 성인식 이후에 비고를 찾기로 계획하셨었지. 하지만 아무래도 자네에게 그 기회를 양보하기로 마음먹으신 모양이야.”
“설마…”
“맞네. 자네의 짐작대로지.”
레인하르트 후작이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섭정 폐하께서는 앞으로 영영 비고에 들어설 수 없다네.”
설마 이런 제약이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던 그로서는 오필리아의 결단에 심사가 복잡해지고 말았다.
“그럼 차라리 제가 들어가지 않겠….”
“그 외모가 가녀리다 하여 그 속내까지 무른 것은 아닐세. 한 번 결정을 내리신 이상 섭정 폐하께서는 절대로 스스로의 말을 번복하지 않을 거야. 만약 자네가 이 자리에서 돌아간다고 해도 섭정 폐하께서 비고를 찾을 일은 없을 거라 장담하지.”
후작의 말 대로였다. 김선혁이 아는 아데스덴의 혈족들은 강박적일 정도로 스스로의 말을 실천해왔다. 그리고 오필리아 역시 그런 아데스덴의 혈족이었다.
끄응. 이렇게까지 할 건 없는데…
이런 제약이 있는 줄 알았다면 그 자리에서 오필리아의 제안을 거절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미 늦어버렸다.
“따라오게.”
그는 하는 수 없이 어디론가 향하는 레인하르트 후작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여길세.”
왕실의 비고는 겉만 봐서는 크게 특별해 보이지 않았다. 그저 내성 이곳저곳에 있는 수많은 문들 중 하나처럼 보였을 뿐이었다.
“비고에 얼마를 머물든 간에 그건 자네의 자유이나, 한 번 들어갔다 나오면 다시 비고에 들어갈 수 없네. 그리고 가지고 나올 수 있는 물건은 단 하나, 절대 명심하게.”
후작의 당부를 몇 번이나 곱씹어보던 그가 알았노라 대답하고는 비고의 문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