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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 전란의 불길
공식적으로 왕녀 오필리아의 배우자가 된 김선혁은 이제까지 지니고 있던 서부군 소속 기병 연대장의 직위를 잃고, 변경 수호를 위한 모든 임무로부터 해방되었다.
그에게 남은 것은 오직 자신의 영지인 라인펄에 대한 권리와 의무뿐이었다.
“나 오필리아 라우렐 로 아데스덴은 테오도르 티베리우스 로 아데스덴 페하의 적법한 섭정으로서 라인펄의 백작, 선혁 라인펄 김 드라흔에게 전승공(戰勝公, Herzog Unbesiegt)의 작위를 하사하노라.”
아직 정식으로 왕위를 양위 받지 못한 섭정이 내리기에는 공작의 작위는 지나치게 강대한 것이었다. 하지만 왕도의 귀족들 중 어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 굳이 섭정의 배우자를 건드려 차기 여왕의 미움을 사고 싶지 않았던 탓이었다.
그 덕분에 김선혁은 큰 잡음 없이 공작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물론 당장 공작의 자리에 올랐다고 해서 갑작스레 그의 권력이 강해지는 일은 없었다.
전승공이라는 거창한 작위는 어디까지나 차기 여왕의 반려에 대한 예우 차원으로 주어진 작위에 불과했다. 실질적으로 권력의 기반이라 할 수 있는 그의 영지는 아직까지 공작령은커녕 백작령에도 미치지 못했다.
단순히 기반만 따지면 공이라는 작위가 우스운 상황이었다.
하지만 누가 있어 기반의 부족함을 트집 잡아 수도 없이 전공을 쌓아올린 왕국의 영웅이자 차기 여왕의 배우자를 무시할 수 있을까.
귀족들은 그와 마주칠 때면 진짜 공작들에 못지않은 대접을 해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당사자는 하루아침에 위상이 달라진 자신의 위치를 크게 체감할 수 없었다.
애초에 지닌바 권력을 휘두르며 만끽하기에는 스스로가 지닌 성정이 지나치게 소시민적인 면모가 있었던 데다가, 왕녀로부터 최소한의 행사에만 참석하고 가급적이면 귀족들과의 접촉을 자제할 것을 부탁받은 바가 있었던 탓이다.
“그거야말로 내가 원하던 거지.”
그는 차라리 왕녀의 부탁이 반가웠다.
테오도르 국왕으로부터 강제로 주입받은 최소한의 정치적 식견을 믿고 뛰어들기에는 왕도의 정치판이 너무도 혼잡했다. 괜히 어설프게 나섰다가는 이용만 당하기 십상이었다.
“볼 때마다 그러고 있으니, 보는 내가 좀이 쑤시는구만.”
악의 없는 핀잔에 고개를 돌린 김선혁은 레인하르트 후작을 보고는 반가운 얼굴을 해보였다.
“오셨습니까.”
딱히 지인이라고 할 사람도 없는 왕도에서의 생활, 왕녀 오필리아마저도 섭정의 업무가 바빠 얼굴을 보기가 힘든 상황이었다. 그나마 내성의 경비를 책임진 레인하르트 후작이라도 만날 수 있는 게 다행이었다.
“왕도의 귀족들이 전승공을 가리켜 뭐라고 부르는지 아는가.”
오늘은 또 어디서 그에 대한 험담이라도 들은 모양이다.
“한량공(閑良公)이라 부르고 있다네. 한량공.”
“오! 그거 참 좋군요. 한량공이라니.”
한바탕 잔소리라도 할 것처럼 마뜩찮은 후작의 얼굴을 보며 그는 도리어 히죽 웃어 보였다.
“제발 왕실의 체통을 생각하게.”
후작은 왕실의 위신이 떨어진다며 노발대발했지만, 그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제가 대외적인 활동을 자제하고 있는 건 섭정 폐하의 부탁이기도 합니다.”
오히려 자신이 이렇게 빈둥거리는 것은 왕녀의 지시 때문이라며 의뭉을 떨었다.
하지만 진지한 어투로 말해봐야 설득력이 있을 리가 없었다. 축 늘어진 어깨와 수시로 하품을 늘어놓는 그의 모습은 누가 봐도 왕녀의 부탁 때문이 아니라 그냥 의욕이 없어 빈둥거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섭정 폐하께서도 자네가 이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을 걸세.”
“최선을 다해 지시를 이행하고 있습니다.”
말해봐야 통하지 않으니 후작도 날이 갈수록 능청만 늘어가는 그를 보며 화도 더 내지 못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자네는 날이 갈수록 영 못쓰게 되는 것 같아. 처음 봤을 때까지만 해도 전도가 유망한 기사였는데.”
“왕성에서는 제가 할 수 있는 게 없으니까요.”
거짓이 아니었다. 전장에서 날뛰어대던 폭풍의 기사 드라흔은 이 왕도 아데스덴에 필요하지 않았다. 왕도에 필요한 것은 교활한 정치가였지, 용맹무쌍한 기사가 아니었다.
“뭐, 저라고 좋아서 이러고 있겠습니까.”
만약 할 수만 있었다면 진즉에 왕도를 떴을 것이다. 마음만큼은 벌써 용의 아종을 찾으러 왕도를 떠난 김선혁이었다.
그런 그가 왕성을 떠나지 못한 것은 테오도르 국왕의 부탁 때문이었다.
“왕녀는 지금의 상황에 익숙해질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
근래 들어 부쩍 쇠약해진 테오도르 국왕은 몇 번이나 왕성을 떠나려는 그를 붙잡았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왕녀의 곁에 있어주겠는가.”
김선혁은 그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는 국왕의 부탁과는 별개로 왕국의 크고 작은 일을 처리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얼굴을 보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그나마 저녁 늦게라도 왕녀가 부부의 침실을 찾아오지 않았다면, 그는 자신이 결혼을 했다는 사실조차 실감하지 못했을 것이다.
“음….”
실크 재질의 침의(寢衣)를 입은 오필리아가 그의 곁에 누웠다.
꿀꺽.
김선혁은 그 옷감 스치는 소리에 저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키고 말았다.
이미 그에게 있어 오필리아는 어린 소녀가 아니었다.
물론 왕족의 각성이 모든 것을 해결해주지는 않았다. 오필리아는 나무랄 곳 없는 미녀가 되었지만, 모든 것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
오필리아는 여전히 소녀적인 부분이 남아 있었고, 그래서 그녀는 농염하다기보다는 청초한 느낌이 강했다.
하지만 신체의 일부가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어른이 아닌 것은 아니었다.
물론 그녀가 단지 신체적으로 이미 훌륭한(?) 어른이 되었다는 것만으로 그의 생각이 변한 것은 아니었다.
‘단명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닌 자들이 스스로 시간을 앞당겨 사용한다고 생각하라.’
테오도르 국왕은 아데스덴 혈족의 시간이 범인의 그것과 사뭇 다름을 몇 번이나 강조했다. 또한 각성으로 인해 성장하는 것이 단지 육신의 나이뿐만이 아님을 알려주었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아데스덴의 혈족은 아예 다른 종의 인류라고 보아도 무방했다. 살아온 햇수를 따져 나이를 셈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것이다.
거의 세뇌에 가깝게 두 부녀에게 그 사실을 들었던 덕에 이제는 김선혁도 오필리아를 어엿한 성인으로 대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녀를 아내로 대하는 것은 완전히 별개의 문제였다.
“자는 것이냐.”
각성 이후 제 아비에 못지않은 군왕의 풍모를 지니게 된 오필리아는 침실에서조차 여왕으로서의 기품을 잃지 않았고, 위엄이 넘쳤다.
“안 잡니다.”
“다행이로구나.”
대체 뭐가 다행이라는 것인지, 뻔뻔스러운 오필리아의 말에 그가 뜨악한 표정을 지어 보이니, 그녀가 상황에 맞지 않는 일장 연설을 늘어놓았다.
“무릇 군왕은 아래로는 백성들의 삶을 보살피고, 그 위로는 귀족들을 이끌어야 하는 법이다. 허나 이보다 더욱 중요한 것이 있으니 왕실의 혈통을 이어 왕국이 흔들리지 않게 하는 것이니라.”
대체 세상천지에 어느 부부가 침실에서 이런 대화를 나눌까. 들을수록 가관이었다.
“그러니 그대는 남편으로서 그 맡은바 소임에 충실해야 할지어다.”
왕족으로서의 의무와 그 반려의 소임을 논하는 오필리아, 하지만 김선혁은 그녀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자. 나는 준비가 되었노라.”
유달리 말이 많은 듯한 그녀의 태도가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뒤늦게나마 알게 된 김선혁은 그제야 여왕의 위엄을 떨쳐낼 수 있었다.
“부부의 행위는 부끄러운 것이 아닌 거룩하고 신성한 것이니….”
그대로 두었다가는 상황과 맞지 않은 부부의 법도를 일장 연설할 오필리아를 보며, 김선혁은 나직하게 말했다.
“오필리아.”
쉬지 않고 입을 놀려대던 그녀가 그 어느 때보다 붉어진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뭐, 뭐라 했느냐.”
“오필리아.”
왕녀는 몇 번이나 그에게 같은 것을 물었고, 그는 그때마다 그녀의 이름을 불러주었다.
“조, 좋구나….”
아무래도 각성의 효과가 과했던 모양이다. 그녀의 노숙한 말투에 김선혁은 참았던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둘이 있을 때만큼은 좀.”
“내 말투가 그리도 이상하더냐.”
이상했다. 그것도 아주 많이 이상했다.
“노력해보마.”
오필리아가 제 딴에는 다부진 얼굴로 각오를 다졌다. 그것조차 괴상하기만 했지만, 그는 굳이 그것까지 지적하지는 않았다.
“부끄러우면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말아요.”
지금은 그녀의 말투를 교정하는 것보다 다른 것에 노력을 쏟아부어야 할 때였다.
**
“그대는 왕도를 떠나도 좋다.”
품에 안겨 고개를 파묻은 채 왕녀가 말했다.
“나와의 관계로 인해 그대의 자유로움을 구속하지 않겠노라 약속한 바가 있느니, 나는 추호도 그 약속을 어길 생각이 없다.”
아무래도 레인하르트 후작에게 뭔가 언질이라도 받은 모양이다.
“약속이라….”
김선혁은 가만히 오필리아의 말을 곱씹다 물었다.
“제가 떠나길 바라십니까.”
그녀는 한참 만에야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럴 리가 있겠느냐.”
“그럼 조금 더 남아있겠습니다.”
그냥 떠나기에는 전날 밤에 오필리아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마음에 걸렸다.
‘혈족에게 대대로 내려오는 능력 중 지금의 나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능력이 있다. 이는 분명 통치자에게 있어 더 없이 유용한 능력이나 당사자에게는 꽤나 끔찍한 힘이기도 하노라. 그런데 오직 그대에게만 이 능력이 닿지 않으니, 그것만이 내 유일한 안식처로다.’
단명의 운명조차 겸허히 받아들이는 그녀가 감당할 수 없는 능력이라는 게 어떤 것인지 그로서는 짐작할 수 없었다. 하지만 자신이 도움이 된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테오도르 국왕이 그리 거듭 부탁을 했을 리가 없었고, 그녀 스스로도 자신을 안식처라 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의 대답이 꽤나 의외였는지 오필리아가 한참이나 말문을 잇지 못하다 간신히 한마디를 내뱉었다.
“고맙구나.”
**
대륙 북서부에서 일어난 반란의 불길은 좀처럼 꺼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아니, 꺼지기는커녕 도리어 더욱더 번져나가기만 했다.
노르딕을 기점으로 인접한 왕국의 정예들과 일진일퇴를 거듭할 뿐이었던 이방인들의 군대가 갑작스레 사방으로 진격을 시작한 것이다.
반란군에 합류한 이방인들의 수는 그간 꾸준하게 늘어나 이제는 물경 1천에 달할 정도가 되었다. 거기에 마왕이 일으켜 세운 죽음의 군대가 더해지니 어지간한 왕국들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전력이 되어버렸다.
그런 강대한 군세가 일시에 사방으로 뛰쳐나왔으니 인접 왕국들이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는 게 당연했다. 그들이 필사적으로 틀어막았던 국경이 삽시간에 뚫려 버리고, 순식간에 전선이 확대되었다.
더욱 끔찍한 것은 따로 있었다.
이제껏 동부의 수많은 왕국들이 강 건너 불구경하듯 대륙 북서부의 전쟁을 지켜볼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전선이 멀리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안전하다 믿었던 중부와 동부의 왕국들이 마왕으로부터 공격을 받은 것이다.
처음 시작은 중부에 위치한 신성 교국 아스토리아였다.
아스토리아의 교황이자 세속의 왕이기도 멜키아데 2세가 노르딕의 마왕이 보낸 암살자에게 암살당했다. 신성 교국은 그로 인해 극심한 혼란에 빠졌고, 덩달아 인접 국가들마저 초긴장상태에 빠져들어야만 했다.
그리고 연이어 몇 개인가의 왕국이 마수의 공격을 받았다.
언젠가 환수사 최민영이 환수를 감당하지 못해 일어났던 난리를 은폐하기 위해 노르딕의 마왕이 보낸 마수를 핑계로 삼은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게 머나먼 타국에서 현실이 된 것이다.
몇 개인가의 왕국이 추가적으로 공격을 받았다. 신성 교국처럼 최고 지배자가 변을 당하는 일은 없었지만, 주요 귀족들이 암살당하는 피해만큼은 그들도 피할 수가 없었다.
한 번 출몰하기 시작한 마수들은 금방 퇴치되지 않았다. 그들은 계속해서 소란을 일으켰고 그로 인해 비교적 안전하다 여겼던 왕국들마저도 전란에 휩쓸리고 말았다.
“그리핀도르도 공격을 당했습니다! 창공의 기사들과 마법사들이 나서 빠르게 진압을 했지만, 마수들이 계속해서 불어나고 있답니다!”
마법 전보를 통해 아덴버그에까지 그 소식이 전해졌다.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이제껏 노르딕의 마왕은 스스로가 추구하는 ‘공화국’의 입지를 다지기 위해 움직여왔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목적성이 전혀 보이지가 않습니다.”
관망하던 태도를 보이던 왕국들을 산발적으로 자극해봐야 노르딕의 이방인들에게 돌아오는 건 이득은 없었다. 아무리 죽음의 군세가 강력하다고 해도 수십 개의 왕국을 상대로 전쟁을 벌인다는 건 미친 짓이었으니까.
예상대로 아스토리아 신성 교국을 중심으로 연합군이 결성될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교국의 요청은 전대륙에 걸쳐 전해졌고, 심지어 동부에 위치한 아덴버그에게까지 전문이 도착했다.
“신성 교국의 신임 교황이 성전을 부르짖으며 참전을 요청하는 마법 전문을 보내왔습니다!”
빗발치는 비보와 전쟁 소식 속에서 왕도 아데스덴에 연일 회의가 열렸다.
김선혁 역시 회의에 참석하여 귀족들이 각기 참전을 주장하는 이들과 관망을 주장하는 이들로 갈려 목에 핏대를 세우는 것을 지켜보아야만 했다.
“그러니까 그리핀도르도 공격당했는데, 우리라고 안전하겠소! 차라리 이 기회에 싹을 잘라내야 한다는 말이오!”
“여기서 노르딕까지 얼마나 걸리는 줄은 알고나 하는 말이오! 폐하께서도 원정의 지난함을 몇 번이나 이야기하신 바가 있다는 걸 잊은 거요!”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귀족들의 갑론을박을 지켜보고 있는 오필리아, 그런 그녀를 걱정스레 바라보던 김선혁은 갑작스레 머릿속을 파고드는 음성에 그대로 굳어버렸다.
[반려여!]
늘 여유를 잃지 않던 용의 목소리가 오늘만큼은 잔뜩 격앙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