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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 미운 오리 새끼 (4)
[손님부터 맞아야지.]
“손님?”
찾아올 사람도 없는 영지에 갑자기 무슨 손님이라는 건지, 김선혁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음?”
페어리 드래곤은 손님이 누구인지 알려주지 않았지만, 그는 어렵지 않게 게하임니스가 말한 손님이 누구인지 알게 되었다.
“뭐, 뭐야!”
창밖을 가득 채운 금빛 괴수의 머리통을 본 그는 기겁을 하고 말았다.
크르릉.
도대체 언제부터 그러고 있었던 것인지 골드레이크가 머리통을 밀어 넣을 것처럼 바짝 붙이고 창 안쪽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빼애애액!
바로 근처에서 들려오는 날카로운 울음소리는 레드번의 것이었고, 요란하지만 텀이 긴 굉음은 블루곤의 발소리가 분명했다.
“대체 뭔 일이래.”
게하임니스에게 너무 집중한 나머지 미처 눈치채지 못했던 아룡들의 접근에 김선혁은 도통 영문을 알 길이 없었다.
[놀라지 말렴. 저들은 단지 나의 존재를 느끼고 찾아온 것일 뿐이니까.]
“놀라고 나발이고. 너 그 답답한 말투부터 어떻게 좀 할래? 듣다가 숨넘어가겠네.”
우아하게 허공을 유영하는 게하임니스를 보며 김선혁이 버럭 짜증을 부렸다. 말이 통하는 아룡이 있어 의문이 풀리는가 싶었더니 뭐 하나 명확하게 말해주는 게 없었다. 어지간한 그도 슬슬 짜증이 날 지경이었다.
[보기와는 달리 성급하구….]
“신비로운 척은 작작 좀 하고, 아룡들이 갑자기 몰려든 이유나 말해.”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가는 또 뜬구름 잡는 이야기를 한참이나 늘어놓을 판국이라 그는 게하임니스의 말을 툭, 하고 잘라버렸다.
[너 설마, 그녀에게도 이런 식으로 말하는 거야?]
“아 좀!”
이 신비주의에 절은 아룡과 대화를 더 나누다가는 정말 화병으로 죽어버릴 것만 같았다.
“대체 몇 번을 말해야 하는데. 쟤들이 여기까지 왜 왔냐고!”
그의 진심 어린 짜증에 게하임니스가 찔끔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나한테 받을 게 있거든.]
조금이지만 게하임니스의 말이 빨라졌다.
“그게 뭔데.”
김선혁은 틈을 주지 않고 캐물었다. 더 이상 이 성격 이상한 아룡의 장단에 놀아날 마음은 요만큼도 들지 않았다.
[저들이 받은 수백 가지의 형벌 중에서도 가장 가혹한 형벌, 저들은 가장 소중한 것을 잃고 말았지.]
“그러니까 그게 뭐냐고.”
대답은 꼬박꼬박 잘 하는데, 정작 듣는 사람은 더욱 더 답답해진다. 페어리 드래곤은 참으로 신기한 재주를 갖고 있었다.
[뿔.]
다행스럽게도 이번에는 게하임니스도 그를 애태울 생각이 없었던 모양이다.
[저들이 바라는 것은 무참히 잘려졌던 뿔을 되찾는 것이란다.]
김선혁은 골드레이크의 머리통에 돋아난 거대한 뿔을 가리켰다.
“그럼 저건 뭔데.”
[한낱 미물이나 지닐 법한 각질 굳어 돋아난 뿔은 진짜가 아니야.]
게하임니스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골드레이크의 머리에 돋아난 뿔은 그저 형상에 불과하다 말했다.
[그것은 보다 존재의 근원에 가까운 것, 그들이 지닌 힘의 원천이자 존재 그 자체란다.]
한창 말을 이어가던 게하임니스가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이제 네가 선택할 차례야.]
“무슨 선택?”
[네 대답 여하에 따라 저들은 잃어버린 것을 되찾을 수도 있고 못 찾을 수도 있어. 너는 저들이 뿔을 돌려받기를 원해?]
김선혁은 피식 웃었다. 뭔가 대단한 것을 물어볼 것처럼 굴더니 정작 질문은 시시하기만 했다.
온갖 고생 끝에 각기 산과 바다, 그리고 하늘에서 찾은 아룡들은 지금의 그에게 있어 가장 믿을 수 있는 조력자이자 강력한 힘이었다.
“그걸 말이라고.”
만약 저들이 무언가를 되찾아 더욱 강력해질 수 있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당장 돌려줘. 뿔이든 뭐든 간에.”
김선혁은 생각해볼 것도 없다는 투로 대답했다.
[반려의 선택은 곧 그녀의 선택일 터.]
마치 그의 허락이라도 기다리듯 가만히 기다리고 있던 게하임니스가 세차게 날갯짓을 시작했다.
[그녀의 의지가 너와 함께 함을 의심할 여지는 없을 테지.]
서서히 빛을 발하는 작은 아룡의 몸이 형형색색으로 찬란히 빛나는 빛무리 속으로 사라졌다.
화악!
사방으로 퍼져나간 섬광이 이윽고 아룡들에게 닿았다. 그리고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음?”
기대감이 가득한 얼굴로 게하임니스가 하는 양을 지켜보고 있던 김선혁은 저도 모르게 맥 빠진 소리를 내뱉고 말았다.
금방이라도 거대한 뿔이 생겨날 것 같더니, 정작 빛이 걷히고 드러난 아룡들의 모습은 조금도 변화가 없었다.
“뿔은?”
[잃었던 근원이 다시 자리를 완벽하게 잡는 데는 다소 시간이 필요해. 하지만 그 시간은 결코 오래 걸리지 않을 테니, 벌써부터 실망할 필요는 없단다.]
하기야 변태를 끝내는 데만 해도 몇 주에서 몇 달씩 시간이 걸리는 아룡들이 순식간에 변화하기를 기대하는 건 스스로가 생각해도 무리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심코 기대하고 만 것은 게하임니스의 존재감이 워낙에 컸던 탓이었다.
“뿔이 완전히 자라나면 뭐가 달라지지?”
존재의 근원이니 힘의 원천이니 김선혁의 입장에서는 온통 뜬구름 잡는 소리로 들릴 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고, 다행스럽게도 이번만큼은 게하임니스도 말을 빙빙 돌리거나 하지 않았다.
[오랜 옥살이 끝에 저들은 미천한 짐승이나 다름없이 변해버렸어. 뿔은 그들이 본디 지녔던 지성을 되찾을 수 있게 해줄 거야.]
“오오!”
하는 짓이 꼭 세 살배기 아이만도 못한 레드번 때문에 특히나 더 속을 썩어야 했던 그에게는 더없이 반가운 소식이었다.
머리가 좋아지면 레드번도 더 이상 전처럼 아무거나 집어먹다가 사고를 치는 일은 생기지 않을 테니까.
[물론 뿔이 우둔한 아룡을 갑자기 현명하게 만들지는 않아. 뿔은 단지 그들이 잃었던 것 중 하나일 뿐, 애초부터 없었던 것을 만들어주지는 않는단다.]
“아….”
좋다가 말았다.
당장 스테이터스 창만 열어 확인해보아도 알 수 있는 유난스레 낮은 레드번의 지능 수치, 아무래도 그의 기대는 헛된 기대에 불과했던 모양이다.
“자, 그럼 이제 손님맞이도 끝났으니까.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야지?”
당장 안달 낸다고 해서 아룡들의 뿔이 갑자기 돋아날 리 없다. 그래서 그는 차라리 방금 전에 미처 듣지 못했던 질문의 대답을 다시 묻기로 했다.
“다른 아룡은 어디 있지?”
[아주 먼 서쪽.]
게하임니스의 시선이 짙게 노을 진 하늘을 향했다.
[그리고 그보다 조금 북쪽.]
**
“흠….”
대략적이나마 아룡들의 위치를 알았지만, 김선혁은 선뜻 영지를 비울 수가 없었다.
“고민되네.”
당장 왕녀의 성인식이 멀지 않은 상황에서 먼 길을 떠나도 될지 확신이 서지 않았던 것이다.
“얼마나 걸릴 거 같아?”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단다.]
며칠 거리인지라도 알 수 있다면 판단을 하는 데 도움이 되련만, 안타깝게도 게하임니스도 정확한 거리까지는 알지 못했다.
“끄응.”
아무래도 새로운 용의 아종을 만나는 것은 잠시 미루어두어야 할 것 같았다.
아룡과의 만남도 중요했지만, 왕녀의 성인식 역시 중요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잘 생각했어. 너무 서두르는 건 너에게 득이 되지 않을 거야.]
그런 그를 보며 게하임니스가 당부했다.
[용의 아종들이 모두 너와의 만남을 기다리고 있을 거라 생각하지는 않는 게 좋아.]
골드레이크는 자신을 잡아먹으려고 했고, 블루곤은 실제로 입안에 넣고 삼키기까지 했다. 레드번 역시 그를 사냥감으로만 여긴 적이 있었다.
북쪽과 북서쪽에 있을 아룡들이라고 협조적일 리가 없었다.
“알고 있어.”
그 정도는 알고 있다며 대답했더니, 작은 아룡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너는 모른단다.]
게하임니스는 그 정도의 경각심정도로는 부족하다고 그를 꾸짖기까지 했다.
[너와 함께 하는 용의 아종들이 너를 적대했던 것은 단지 그들이 야성에 잠식되었기 때문이었단다.]
맞는 말이었다. 실제로 골드레이크가 자신을 잡아먹으려고 한 것은 굶주림에 지친 나머지 벌인 일이었고, 레드번 역시 마찬가지였다.
달랐던 건 오직 블루곤뿐이었다.
하지만 그런 블루곤조차도 스스로가 미물로 돌아가는 것보다는 용기병과 관계를 맺는 것을 선택하고 스스로 굴종한 경우였다.
[남아있는 용의 아종들 중에는 야성이 아닌 증오와 분노에 잠식된 이들도 있단다. 그리고 그들은 아마 너를 다시없을 원수처럼 여기고 달려들 거야.]
생각지도 못한 말에 김선혁은 인상을 찌푸렸다. 아직 얼굴도 보지 못한 아룡들이 자신을 증오할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의문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게하임니스가 말한 아룡들의 증오와 분노가 자신을 향한 것이 아님을 깨달았던 탓이다.
그들의 증오와 분노가 향할 만한 존재는 용밖에 없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대답하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그는 물을 수밖에 없었고, 역시나 게하임니스는 대답해주지 않았다.
**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갔고, 왕녀의 성인식은 금세 코앞까지 다가왔다.
“기왕이면 뿔이 다 자라는 걸 보고 떠나려 했는데.”
뿔이 자라기는 했다. 단지 혹처럼 튀어나온 돌기의 모양새가 아직은 뿔이라고 하기에 민망한 수준이었을 뿐이었다.
[서두르든 서두르지 않든,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흘러간단다.]
게하임니스가 위로인지 뭔지 모를 말을 건넸지만, 김선혁은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는 이 작고 아름다운 아룡이 사실은 지독스러운 수다쟁이이며, 지독스러울 정도로 수수께끼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한 번 장단을 맞춰주면 재미도 없고 영양가도 없는 이야기를 한참이나 들어주어야 한다는 사실 역시 파악한 상태였다.
역시나 이번에도 뭔가 뜬구름 잡는 이야기를 늘어놓으려고 했는지, 게하임니스는 그가 대답을 하지 않자 눈에 띄게 실망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너는 진리에 대한 탐구욕도, 신비에 대한 갈망도 없구나.]
“그거라면 좋아하는 사람을 하나 알고 있는데, 소개시켜줄까?”
아리아 아이젠이라면 필시 이 성격 이상한 페어리 드래곤과 좋은 대화 상태가 될 터였다. 단지 문제가 있다면 아룡과 대화할 수 있는 게 오직 용기병뿐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런 이가 아직까지 남아있다니….]
남아있다 뿐이겠는가. 왕도에 가면 아리아 아이젠만큼이나 탐구욕이 넘쳐 미쳐버린 마법사들이 한 무더기는 넘게 있었다.
[하기야 마법사들이라는 자들은 예전에도 제법 생각이 트인 자들이었지.]
게하임니스는 진심으로 안타까워했고, 그 역시 똑같이 안타까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마법사들과 이 말 많은 아룡을 소개시켜주고 싶다는 말은 진심이었다.
그만큼 그는 수다스럽고 잘난 척 심한 게하임니스에게 지쳐 있었다.
설마 다른 아룡들도 말을 할 수 있게 되면 이러는 건 아니겠지.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하지만 더욱 끔찍한 것은 따로 있었다. 게하임니스가 한시도 그와 떨어지기를 원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사명이 완수되는 그날까지는 어쩔 수가 없단다.]
이유야 어찌 됐건 간에 이번 왕도행에도 게하임니스가 함께 하게 되었다는 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다.
“그 사명인지 뭔지 제발 빨리 끝 났으면 좋겠네.”
진심이 듬뿍 담긴 말에 아룡은 속도 없이 자신도 마찬가지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후우. 가자.”
짧았던 영지에서의 휴식, 수다쟁이 아룡이라는 혹덩이를 달고서 김선혁은 왕도로 다시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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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도 수행원의 구성은 전과 다르지 않았지만 규모만큼은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일단 영지의 기병대 전원이 수행인단에 포함되었고, 아샤 트레일과 잭슨, 줄리앙 등의 핵심 인사들이 전부 김선혁을 따라나섰다.
영지에는 최소한의 병력만을 남겨둔 채였다.
“뭐, 블루곤도 있고, 레드번도 있는데 별 일이야 있겠습니까.”
클라크의 느긋한 태도, 다른 이들도 영지는 그다지 걱정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하기야 사나운 괴수가 둘씩이나 버티고 있는 영지에 무슨 일이 생길 거라 생각하는 게 도리어 이상한 일이었다.
“그나저나 아무리 봐도 신기하다는 말입니다. 진짜 페어리 드래곤이라는 존재가 있었다니.”
영지에 머무는 동안 몇 번이나 봤으면서도 클라크를 비롯한 기병들은 좀처럼 게하임니스가 익숙해지지 않는지,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꼭 눈으로 확인해야 아는 우둔한 자들이 있….]
또다시 기회를 포착하고 머릿속으로 주절주절 말을 걸어오는 게하임니스, 하지만 김선혁은 대답 대신 제 할 일을 했을 뿐이었다.
“전원 속도 올려! 왕도가 코앞이다!”
골드레이크에 올라탄 그가 쿵쾅거리며 앞장을 서자, 쉬지 않고 입을 놀리던 페어리 드래곤도 입을 다물고는 뒤를 따랐다.
이제 좀 살 것 같네.
달릴 때만큼은 잠잠한 게하임니스를 힐끗 바라본 그는 그대로 멈추지 않고 왕도로 내달렸다. 부디 도착할 때까지라도 저 수다스러운 주둥이가 조용하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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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녀의 성인식도 성인식이었지만, 곧이어 치러질 드라흔 백작과의 결혼식 역시 중요한 행사였다. 그리고 그 주인공이 왕도에 도착했다는 소식에 왕도의 시민들과 귀족들은 더욱 열광했다.
환호하는 시민들을 지나 왕성에 도착한 김선혁은 곧장 테오도르 국왕을 찾았다.
“언제 오나 기다리고 있었노라.”
국왕은 전에 없이 환하게 웃으며 그를 반겨주었고, 심지어 그를 포옹해주기까지 했다.
“폐하….”
예상 이상의 환대에 그가 민망한 표정을 지어 보이니, 국왕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제 곧 한 식구가 될 텐데 조금쯤은 격의가 없어도 되겠지.”
그렇게 말한 테오도르 국왕이 그의 뒤편을 바라보았다.
“올 때마다 신기한 놈들을 데려오는구나.”
국왕은 페어리 드래곤의 신비스러운 모습에 흥미를 보였지만, 금세 고개를 돌리고는 제자리로 돌아갔다.
오히려 관심을 보인 것은 국왕이 아닌 게하임니스 쪽이었다.
[놀라운 일이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