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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 미운 오리 새끼 (3)
메시지가 채 끝이 나기도 전에 김선혁은 이미 달리고 있었다.
“영주님?”
“이따가! 이야기는 이따가!”
영문을 몰라 자신을 붙잡는 클라크의 목소리를 뒤로 하고 그는 침실을 향해 냅다 뛰었다.
팟.
벌컥, 침실의 문을 열기가 무섭게 문틈으로 섬광이 터져 나왔다.
“억!”
반사적으로 눈을 가리며 물러섰던 그는 뒤늦게 망막을 태울 것처럼 강렬한 섬광이 사실은 하나도 뜨겁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빛은 뜨겁다기보다는 차라리 따뜻했다. 언제까지고 바라만 보고 싶어지는 순백의 섬광에 김선혁은 넋을 잃고 말았다.
하지만 그 따뜻한 섬광마저도 이내 사그라들었고, 그는 저도 모르게 탄식을 내뱉고 말았다.
“아….”
하얗게 바래 순백으로 변했던 문 너머의 세상은 다시 원래의 색을 되찾았다. 그렇게 되돌아온 총천연색의 세상에 유독 도드라지는 빛깔을 한 생경한 존재가 있었다.
“페어리 드래곤?”
- 페어리 드래곤이 완전히 깨어났습니다.
- 각인을 마친 페어리 드래곤은 테이밍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메시지는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김선혁은 멍하니 붉은빛 보석을 깨고 나온 작고 아름다운 요정용(妖精龍)을 바라보고 말았다.
신비롭다. 페어리 드래곤은 그가 이제껏 봐왔던 이 세상의 존재들 중에서 가장 비현실적이었다.
고래 주제에 허공을 부유하던 마운틴 웨일도, 투명한 몸을 흐느적거리며 헤매던 기간티아도 이 세상의 것 같지 않은 비현실적인 느낌이 강했지만, 페어리 드래곤에 비교할 수는 없었다.
레드번보다 우아하고 골드레이크보다 찬란하다. 그리고 블루곤보다 훨씬 더 고고하다.
반투명한 나비의 날개는 알록달록 기하학적인 얼룩이 아로새겨져 있었고, 앙증맞은 몸을 감싼 촘촘한 비늘은 공들여 세공한 보석처럼 영롱하기만 했다.
한낱 짐승이라고는 볼 수 없는 섬세한 얼굴 역시 김선혁이 전에 보지 못한 미의 극치 그 자체였다.
또르르.
이름난 장인이 평생을 바쳐 만들어낸 보석처럼 영롱한 보랏빛 눈동자가 떼구르 구르더니, 말간 시선이 마침내 그와 마주쳐버렸다.
[너로구나.]
“아….”
마치 꿈결 속에서 들려오는 속삭임처럼 달콤한 음성, 페어리 드래곤은 목소리마저 신비로웠다.
[나를 오랜 잠에서 깨운 그녀의 반려가.]
페어리 드래곤이 입가를 치켜 올렸다. 기다란 주둥이는 인간의 그것과 명백하게 다른 모양을 하고 있었지만, 김선혁은 분명 페어리 드래곤이 웃고 있다고 느꼈다.
그리고 그건 사실이었다.
[반가워.]
머릿속을 파고드는 음성에 친근함이 가득했다. 이제껏 만났던 아룡들이 첫 만남에서 죽일 듯이 달려들었던 걸 생각해보면 이 작은 아룡이 보이는 반가움은 이례적인 것이었다.
[나는 게하임니스(Geheimnis).]
놀랍게도 페어리 드래곤은 스스로 제 이름을 밝혔다.
“게하임니스….”
페어리 드래곤이 깨어난 후로 뭐 하나 예상대로 맞아 떨어지는 게 없었다. 그는 놀란 머릿속을 정리하며 가만히 페어리 드래곤의 이름을 되뇌었다.
[형벌 받아 유배당한 죄수들의 간수이자, 감시자지.]
“형벌 받은 죄수들? 그건 또 뭐지?”
뜻 모를 페어리 드래곤, 게하임니스의 말에 김선혁은 인상을 찌푸리며 반문했다.
[안타깝게도 지금의 너에게는 말해줄 수 있는 게 그다지 많지 않아. 내가 할 수 있는 건….]
게하임니스는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너를 여왕에게 안내하는 것뿐이란다.]
“여왕?”
자꾸만 튀어나오는 예상치 못한 단어들, 이제껏 만났던 그 어떤 아룡과도 다른 페어리 드래곤의 태도에 관자놀이가 지끈거려왔다.
마치 머릿속이 엉망진창으로 뒤엉키는 듯한 기분이었다.
“알아듣게 좀 설명해줘. 너희들의 말은 항상 알아먹기가 힘들다고.”
무엇하나 확실하게 말해주는 것이 없는 용의 말투도, 지독스러울 정도로 느긋한 게하임니스의 말투도 그에게는 답답하기만 한 것이었다.
[서두르지 말렴. 나는 오랫동안 잠에 빠져 있었지만, 주어진 사명을 잊지는 않았단다.]
게하임니스는 그런 그를 타이르듯 온화하게 말했다.
“네 사명이 뭐길래….”
김선혁은 무심코 묻다 도로 입을 다물었다.
‘형상(形狀)을 버리고 신비(神祕)를 지켜낸 가장 작고 나약한 용의 아종을 찾아라.’
‘페어리 드래곤, 그게 바로 그대가 가장 먼저 찾아야 할 안내자의 이름이니라.’
언젠가 용이 했던 말이 머릿속에 선명하게 떠올라 저도 모르게 입을 다문 것이다.
[네가 온전히 여왕에게 이르도록 돕는 것, 그것이 나의 유일한 사명이야.]
안내자라고 하여 다른 용의 아종들을 찾아주는 레이더 같은 존재인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페어리 드래곤은 안내자이자 인도자 그 자체였다.
[너무 늦지도 빠르지도 않게 찾아올 그날, 나의 사명은 마침내 끝이 날 거야.]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다시 한 번 방안에 섬광이 가득 차오르기 시작했다.
- 오랜 잠에서 깨어난 안내자, 게하임니스와 계약을 맺었습니다.
- 계약의 종료는 게하임니스의 사명이 끝이 나는 그때까지입니다.
- 게하임니스와의 관계는 다른 용의 아종들과는 달리 주종의 관계라기보다는 조력자에 가깝습니다. 따라서 복종도 수치는 그녀와의 관계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 속성 창에 새로운 항목이 생성되었습니다.
- 스테이터스에 ‘신비(神祕)’ 속성이 추가되었습니다.
- 기존의 마법 저항력의 효과가 배 이상 강력해집니다.
**
빛이 다시 가셨을 때 게하임니스가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잠시 쉬어야겠어.]
“잠깐만!”
김선혁은 졸림이 가득한 눈을 껌벅이는 작은 아룡을 보며 다급하게 외쳤다.
“물어볼 게 많아. 네가 말하는 여왕이 용인가? 그리고 다른 아룡들은 어디에 있지?”
그는 다른 용의 아종들이 그랬듯이 그녀 역시 금세 지성을 잃고 말이 통하지 않는 짐승처럼 변할까 봐 조바심이 났다.
테이밍 직후에만 말이 통했던 블루곤과 골드레이크가 떠오른 것이다.
“너는 어째서 처음부터 이름을 갖고 있었던 거지?”
지금 묻지 않으면 수많은 의문에 대한 대답을 들을 수 없을 것만 같아 그는 계속해서 질문을 쏟아냈다.
하지만 게하임니스는 당장 그의 말에 대답해줄 마음이 없어 보였다.
[걱정 말렴. 잠깐의 휴식이 너와 나의 관계를 온데간데없이 만들지는 않을 테니까. 나는 이후에도 얼마든지 너의 질문에 대답해줄 수 있단다.]
미처 말릴 새도 없었다.
고개를 꾸벅거리기 시작한다 싶더니, 게하임니스는 금세 앙증맞은 앞발을 꺼내 제 코와 눈을 가리고는 도로롱거리며 숨을 내쉬었다. 쉴새 없이 하늘거리던 고운 날개가 살포시 접혀 작은 몸을 감싸고, 작고 아름다운 아룡은 그렇게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뭐가 어떻게 되는 거야….”
이제야 겨우 용에 대해 말해줄 만한 존재를 찾고도 대답을 들을 수가 없으니, 조바심이 나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대답을 해줄 게하임니스는 당장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결국 그는 미동도 없는 요정용을 바라보다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잠깐. 용이 정말로 게하임니스가 말한 여왕이라면….”
게하임니스와의 대화를 가만히 곱씹어보던 김선혁은 와락 인상을 찌푸렸다.
용은 예상대로 암컷이었고, 거창하게도 여왕이라는 칭호를 갖고 있었다.
용, 여왕의 반려.
그리고 그는 왕녀의 약혼자이자 아데스덴의 차기 여왕의 반려이기도 했다.
‘축첩은 꿈에도 생각지 말라.’
오래전도 아닌 바로 얼마 전, 굳이 자신을 따로 불러내 눈을 부라리며 경고하던 테오도르 국왕의 모습이 언뜻 머릿속에 스쳐갔다.
본의 아니었지만 무시무시한 존재들과 두집살림(?)을 차리게 되었다. 그는 뜻 모를 죄책감과 불길함에 몸을 떨었다.
“아니겠지. 아마 아닐 거야.”
김선혁은 부디 용이 말하는 반려라는 것이 인간의 기준과는 다른 것이기만을 간절히 바랐다.
**
게하임니스는 김선혁의 염려와는 달리 오래지 않아 깨어났다. 그리고 조금 늦은 대답이었지만, 잠이 들기 전에 그가 물었던 모든 질문에 성심성의껏 대답을 해주었다.
[그녀는 이 세상에 하나뿐인 마지막 용이란다.]
역시나 예상대로 여왕은 용을 지칭하는 단어였다.
“끄응.”
자신의 예상이 맞았지만, 그는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용과 왕녀를 두고 했던 망상이 한층 더 선명해진 듯한 느낌이 들었던 탓이다.
[네 생각과는 다르게 드레이크와 서펜트, 와이번 모두 제각각 이름을 갖고 있단다. 단지 그들이 너에게 새로운 이름을 받아야 했던 것은 그들이 과거를 잊으며 스스로의 이름 역시 잊었기 때문이지.]
걱정 가득한 그의 기색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인지, 게하임니스는 계속해서 그의 의문에 대한 대답을 들려주었다.
“그게 아까 말한 형벌 때문이라는 건가?”
게하임니스의 작은 머리통이 끄덕여졌다.
“혹시 용의 아종들도 원래는 용이었고, 여왕의 신하 같은 거였는데, 죄를 지어서 쫓겨나고. 뭐 그런 거야?”
예전부터 생각해오던 의문이었다.
어쩌면 골드레이크도, 블루곤도, 레드번도 모두 원래는 용이 아니었을까.
하늘에서 땅으로 그리고 바다로 추방당한 골드레이크와 블루곤, 그리고 날개는 있었지만, 다른 어떤 용의 아종들보다 짐승에 가까운 존재가 되어버린 레드번. 모두 정상적이지 않았다.
‘지금의 나는 너무나 작고 하찮다. 하지만 그대로 말미암아 많은 것이 달라질 것이다. 그 과정에서 어쩌면 내가 잃어버린 것들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리라.’
블루곤이 언젠가 그에게 했던 말이 그를 더욱더 용의 아종이라는 존재에 대해 의심하게 만들었다.
[너의 의구심은 제법 합당해. 하지만 안타깝게도 네 생각과 진실은 아득히 다르단다.]
“그럼 대체 뭐야.”
이제까지 선선히 대답을 해주던 게하임니스도 이번에는 그의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
[그게 지금의 네가 가장 알고 싶은 것들이야?]
“뭐?”
[드레이크와 씨 서펜트, 그리고 와이번. 다른 용의 아종들은 어떤 존재들인지.]
게하임니스가 뾰족한 주둥이를 길게 끌어올리며 물었다.
[그들이 어디에 있는지. 궁금하지 않아?]
화제를 돌리려는 게하임니스의 의도가 빤히 보였다. 하지만 알면서도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알고 있어?”
[당연히 알고 있지.]
요정용의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 사람도 아닌 주제에 어찌 저리 표정이 풍부한 것인지 놀라울 지경이었다.
“어디 있는데?”
지금 중요한 건 게하임니스의 말마따나 아룡들의 정체나, 작고 아름다운 아룡의 풍부한 표정이 아니었다.
[안타깝게도 이 근방에는 더 이상 용의 아종들이 느껴지지 않아. 하지만 저 먼 곳이라면 하나 느껴지는 존재가 있어.]
김선혁은 가만히 게하임니스가 말을 잇기를 기다렸다.
[꽤 멀지만, 너라면 금방 갈 수도 있을 거야.]
왕녀의 성인식까지 그다지 시간이 많지 않았지만, 레드번이 있는 이상 어지간한 거리 정도는 단숨에 다녀올 수 있었다.
“그래서 그게 어디냐고.”
몸이 달아 그렇게 물었더니, 게하임니스가 또 웃었다.
[알려주는 건 어렵지 않아. 하지만 그 전에 더 급한 게 있는 것 같은데.]
게하임니스가 나비의 그것을 닮은 날개를 펼치며 훌쩍 날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