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래곤 푸어-166화 (166/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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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 미운 오리 새끼 (2)

왕도에서의 행사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돌아갈 수 없는 머나먼 땅에서 온 이방인이여, 이름과 그대가 평생동안 지키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말하라.”

“이수혁, 선의(善意)에는 신의(信義)로, 악의(惡意)에는 정의(正意)로.”

언젠가 김선혁이 기사로 서임을 받던 날, 그때 그가 했던 말과 토씨 하나 틀리지 않은 이수혁의 대답에 테오도르 국왕이 미미하게 웃었다.

“그 올곧은 마음을 눈 감는 그날까지 지킬 것을 맹세하겠는가.”

“맹세합니다.”

국왕이 이수혁의 양쪽 어깨와 목 뒤를 두들겨주고는 선언했다.

“아데스덴의 첫 번째 기사, 나 테오도르 티베리우스 로 아데스덴의 이름으로 그대를 기사로 만드오니, 용감하고 예절 바르고 충성스러울지어다.”

바라마지 않던 순간, 이수혁은 격정을 참느라 한참이나 일어나지 못했고, 국왕은 인자한 얼굴로 새롭게 기사로 거듭난 사내를 일으켜주었다.

“이방인이여. 그대가 지키고자 하는 정의는 무엇인가.”

“선의에는 신의로, 악의에는 정의로.”

다음 차례가 되어 거검병 하나가 국왕 앞에 섰다. 거검병의 대답 역시 이수혁과 마찬가지로 김선혁의 맹세와 다르지 않은 것이었다.

순간적으로 서임식에 참석했던 귀족들이 웅성거렸다. 이제껏 전례가 없었던 상황, 하지만 국왕은 태연하게 식을 진행했다.

“선의에는 신의로, 악의에는 정의로….”

또 다른 이방인 하나가 똑같은 맹세를 말했을 때, 영악한 귀족들은 그들이 누구의 흉내를 내는 것인지 알아챌 수 있었다.

그게 시작이었다. 쉰 명이 넘는 이방인들의 맹세는 모두가 한결같았다.

“허어. 이런 일이 다 있나….”

기사의 맹세는 사회의 정의와 규범에 반하지 않는 이상 누구도 관여하지 않는 게 관례였고, 이방인들의 맹세는 정의로움을 추구하는 꽤나 모범적인 답안이었다. 새삼 귀족들이 트집을 잡고 나설 명분이 없었다.

결국 귀족들은 찝찝함이 가득한 표정으로 수여식을 지켜보아야 했다.

“망할 놈들….”

김선혁은 그 광경을 지켜보며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전날 자신이 서임을 받을 때의 상황을 꼬치꼬치 캐묻더니 이런 일을 꾸미고 있었을 줄은 생각도 못했다.

“작정하고 사고 쳤네. 아주.”

특정 개인에 대한 과도한 공경심의 표현은 자칫 잘못하면 강력한 초인 집단의 사유화로 보일 수가 있었다. 그건 그에게 결코 이로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결국 웃고 말았다.

내가 언제부터 귀족들 눈치를 살폈다고….

어차피 왕녀와 약혼을 한 이후로 귀족파의 귀족들과는 앙숙이 될 수밖에 없었다. 새삼 저들의 견제가 더해진다고 해서 변하는 것은 없었다.

지금은 부모의 마음으로 대견하게 수여식에 참여한 이방인들을 지켜볼 뿐이었다.

“이방인 최민영이여.”

중급에 오른 이방인들 전원이 기사의 작위와 훈작사의 훈장을 받고, 마침내 최민영이 테오도르 국왕의 앞에 섰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최민영이 국왕 앞에 섰다.

“왕도 아데스덴의 적법한 통치자이자, 왕국의 하나뿐인 지배자가 지닌 온당한 권리로 그대에게 왕국의 자작위와 티어휘터(Torhüter)의 성을 하사하노라. 그대는 왕국의 귀족으로서 왕실에 충성을 다하고 백성들에게 모범을 보일 것을 다짐하겠는가.

국왕이 말을 잇는 내내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억누르느라 얼굴을 일그러트린 그녀는 무엄하게도 입을 꾹 다문 채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귀족으로서의 정의로움과 품위를 잊지 않을 거라 맹세하는가.”

국왕은 참을성 있게 그녀의 대답을 기다려주었고, 겨우 감정을 추스른 그녀가 울먹거리며 대답했다.

“맹세하겠습니다.”

“그대는 매사에 티어휘터의 이름이 욕되지 않도록 신중하고 사려 깊고 공평할지어다.”

국왕의 선언을 끝으로 그녀는 자작이 되었다. 변방에서 떠돌던 아무짝에도 쓸모없던 천덕꾸러기가 마침내 왕국의 당당한 귀족이 된 것이다.

“뜻깊은 날을 기념하기 위해 자리를 마련했으니, 모두 참석하여 축하할 수 있도록 하라.”

국왕이 먼저 자리를 뜨자 귀족들이 삼삼오오 모여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허어. 드라흔에 대한 저들의 존경심이 어쩌면 왕실에 대한 충성심을 넘어설까 염려되오.”

“아무래도 동향이라 할 수 있는 이들이니, 저들이 느끼는 끈끈함을 우리가 어찌 알겠소.”

제 딴에는 한껏 낮춘 목소리였지만 귀가 밝은 김선혁에게는 마치 자신에게 하는 듯 선명한 음성이기도 했다.

“저놈의 염려, 염려.”

자신을 힐끗거리는 귀족들의 거북스러운 시선에 그는 도리어 뻔뻔스럽게 나갔다. 그는 시선을 피하는 대신 자신을 험담하는 귀족파의 귀족들을 하나하나 노려봐주었고, 그 서슬에 놀란 귀족들이 황급히 자리를 빠져나갔다.

“쯧.”

그 모습을 보며 김선혁은 혀를 찼다.

뒤에서 험담할 뿐, 앞에서는 한마디도 못하는 귀족들의 모습이 한결같았다. 저들끼리는 그것이야말로 불필요한 논쟁을 피하는 귀족만의 세련된 매너라고 말하지만, 그가 보기에는 영락없는 소인배들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귀족들의 소심한 태도가 마냥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자신은 이미 귀족들이 건드리기에는 지나치게 거물이 되어 있었다. 아니, 그가 지닌 명성과 배경을 배제한다고 해도 귀족들이 대놓고 오늘의 일을 비판하는 건 쉽지 않았다.

최소 평기사 이상의 힘을 지닌 초인 오십여 명이 한꺼번에 그와의 특별한 인연을 과시했다.

차라리 수가 한둘이었다면 물고 뜯었겠지만, 수가 이쯤 되면 귀족들도 함부로 그를 건드리는 게 두려울 수밖에 없었다.

정규 기사단의 정원이 일백 명이다. 그중 진짜 서임을 받은 기사들의 수는 고작 해야 스물다섯에서 서른 명에 지나지 않는다. 단순 계산만으로도 최소한 정규 기사단 하나 이상의 세력이 그를 지지하고 나선 것이다.

간이 배 밖으로 나오지 않은 이상 드러내놓고 그를 비난할 수 없는 게 당연한 상황이었다.

“설마 이제 와서 뭐라 하는 건 아니겠지.”

문제는 귀족들의 견제가 아니었다. 아데스덴 왕실이 과연 이번 일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가 문제였다.

하지만 그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만약 왕실이 그를 견제할 생각이었다면 처음부터 그에게 이방인들을 맡기지 않았을 거라 여겼던 탓이다.

“결혼식을 서둘러야겠구나.”

김선혁의 예상대로였다. 아데스덴의 담대한 지배자는 서임식에서 있었던 일을 책잡지 않았다. 다만 한 시라도 빨리 그가 왕녀와 결혼식을 치를 것을 권유했을 뿐이었다.

“그대에 대한 왕실의 신뢰는 변함이 없으나, 상황이 이렇게 되었으니 그대와의 관계를 더욱 공고히 할 필요가 있도다.”

그렇지 않아도 빨리 맺어주지 못해 안달이던 국왕에게 이수혁을 비롯한 이방인들이 구실을 준 꼴이었다. 김선혁으로서도 더 이상 시기를 미룰 명분이 없었다.

“오필리아의 성인식이 끝이 나는 대로 바로 식을 거행하겠다. 물론 이견은 받지 않겠다.”

구실을 찾은 테오도르 국왕은 여지를 주지 않았다. 물론 여느 때와 같이 그가 거부할 수 없는 보상도 함께 제안하는 수완을 보였다.

“오늘 서임을 받은 이방인들을 한데 모아 새로운 기사단을 창설할 생각이노라.”

이미 약속한 바를 새삼 다시 언급하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지만, 김선혁은 복잡한 심경에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그대가 그들을 이끌게 될 것이다.”

“네?”

생각지도 못한 말에 무심코 반문하니, 테오도르 국왕이 씩 웃으며 미끼를 던졌다.

“물론 모든 절차는 식이 끝이 난 후가 되리라.”

**

왕도에서의 행사는 금세 끝이 났다. 이수혁을 비롯한 이방인들은 전원이 왕도에 남겨졌고, 중앙 기사단에서 잠시간 복무하며 기사로서의 규율과 기본소양을 익히게 되었다.

“금방 다시 뵙겠습니다.”

그들은 이별을 아쉬워했지만, 따로 언질 받은 것이 있는지 곧 다시 만나게 될 것을 확신하는 모습이었다.

“오냐. 그날이 빨리 오기를 바라지.”

적당히 인사를 남긴 김선혁은 최민영을 찾았다.

이번에 그녀는 왕도에 남는 대신 북부로 떠나게 되었다. 그녀에게 절대적으로 부족한 환수를 통제하는 능력을 가다듬기 위해서였다.

“자신이 없어요. 판도 그랬는걸요. 백작님 없이 환계의 문을 여는 건 너무 위험한 일이라고.”

테오도르 국왕은 최민영이 과도할 정도로 그에게 의지하는 면모를 잘 알고 있었기에 따로 불러 그녀를 다독일 것을 당부했다.

역시나 그녀는 필요 이상으로 불안한 모습을 보였고, 그는 시간을 두고 그녀를 안심시켰다.

“걱정 마. 그 정도도 생각 못하고 일을 벌일 정도로 왕실은 호락호락하지 않아.”

“그래도….”

최민영은 내키지 않는 기색이었지만, 스스로의 부족함으로 인해 얼마나 큰 참사가 일어날 뻔 했는지 잘 알고 있었던지라 끝까지 고집을 피우지는 않았다.

“후작님께서 직접 나서시는 겁니까?”

그녀를 안심시키는 했지만, 그도 그녀를 도울 인선이 어떻게 꾸려졌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런 그에게 레인하르트 후작의 등장은 예상하지 못했던 부분이었다.

“왕녀께서 두문불출하시는 지금, 딱히 할 일이 없기도 하고 나 말고는 따로 맡길 만한 사람도 없어서 말이지.”

3차 각성까지 마치고도 여전히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괴물이 바로 레인하르트 후작이었으니, 왕실로서는 최고의 패를 준비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내가 처리 못하는 건 마법사들이 처리할 거다. 환수라는 말에 눈이 회까닥 뒤집어져서 평소 코빼기도 보이지 않던 놈들까지 죄 지원을 했다더구나.”

왕실의 조치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물리적인 내성이 강력한 환수의 등장을 대비해 고위 마법사들까지 인선에 포함시킨 것이다.

“그중에는 자칭 대마법사, 쾨니히라는 자도 있다. 지극히 오만한 인사긴 하지만, 세간에서도 그라두스 넘버 5니 뭐니 떠들어대는 자니 실력은 보증됐다고 봐야지.”

“그라두스 넘버 5의 마법사라니. 얼마나 괴물일지 상상도 안 가는군요.”

“그 말은 나도 괴물이라는 말처럼 들리는구나.”

장난스러운 후작의 대꾸에도 김선혁은 심각하기만 했다.

테오도르 국왕이 환수사의 존재를 꽤나 중히 여긴다는 사실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왕도에서도 손꼽히는 강자들을 둘씩이나 단순한 호위로 둘 정도인지는 그도 예상하지 못했다.

도대체 국왕이 환수사를 어떤 용도로 쓰려는 것인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어련히 알아서 잘 하시려고.”

“끄응. 그거야 그렇지만.”

김선혁은 한숨을 내쉬고는 후작에게 고개 숙여 부탁했다.

“어쨌건 잘 부탁드립니다. 아직 불안정한 면이 많은 친구니, 곁에서 잘 이끌어주시리라 믿습니다.”

“걱정 붙들어 매라.”

그렇게 레인하르트 후작을 비롯한 초인들과 최민영은 북부 어딘가를 향해 출발했다.

김선혁은 왕도를 떠나기 전 왕도의 최고 귀족 회의에 참석해야 했다.

“노르딕의 불온한 종자들에게 이번 일의 대가를 톡톡히 받아내야 합니다!”

“감히 왕국의 동량들을 빼간 것도 모자라 마수를 풀어두다니요. 그 천인공노할 자들에게 합당한 벌을 내려야 합니다.”

토르고스의 난동이 노르딕의 공작이라 공표한 마당이라, 이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는 시늉이라도 해야 했다.

“경들의 말이 실로 옳다. 왕국의 정기를 훼손하려고 했던 노르딕의 마왕이라는 자는 벌을 받아 마땅하다. 그래서 묻노니 적당한 방법이 있는가?”

국왕의 질문에 귀족들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군대를 파견하자니 노르딕에 이르기까지 통과해야 하는 왕국의 수가 무려 아홉이 넘는다. 그들이 선선히 길을 내줄 지도 알 수 없을뿐더러, 설령 무사히 통과한다고 해도 보급은 어떻게 할 것이며, 그들이 제대로 된 힘을 쓸 수나 있겠는가.”

“인근 왕국들과 협력하여 싸운다면….”

“칼받이로나 쓰이지 않으면 다행일 터, 경들은 왕국의 귀한 기사와 마법사들이 그렇게 허무하게 이용당하기를 바라는가.”

거리가 문제였다. 당장 손을 쓰기에는 노르딕과 아덴버그의 거리가 지나치게 멀었다.

예견된 수순이었다. 애초에 강성 귀족들이 들고 일어날 것을 뻔히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토르고스의 난동을 타국의 공작이라 공표한 것 역시 이러한 상황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었다.

“나 역시 마왕이라는 자의 음험함에 분노를 참을 수 없으나, 격동하는 대륙 정세에 비추어 봤을 때 지금은 경거망동할 때가 아니라 생각하노라. 그러니 경들 역시 잠시 동안 분노를 미루어두도록 하라. 언제고 꼭 지난 일을 청산할 기회가 오리라.”

결국 회의는 흐지부지 끝이 나고 말았다. 아무리 궁리해봐야 대륙 반대편에 있는 노르딕까지 영향력을 발휘하기가 마땅치 않았던 탓이다.

“이제 가려는가.”

“네. 왕녀께서 성년이 되시는 그날, 다시 돌아오도록 하겠습니다.”

어차피 왕녀의 성년식이라고 해봐야 그리 오래 남은 것도 아니었다. 테오도르 국왕은 그를 선선히 보내주었고, 그는 아샤 트레일과 클라크를 비롯한 일행과 함께 영지로 향했다.

그가 영지에 도착했을 때, 그토록이나 기다려왔던 소식이 들려왔다.

- 페어리 드래곤이 오랜 수면 끝에 마침내 깨어나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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