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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 미운 오리 새끼 (1)
토르고스가 난동을 부리는 바람에 이방인들이 머물던 요새가 사라져 버렸다. 그 김에 김선혁과 이방인들은 왕도로 향했다.
왕실 기사단과 마법사단 틈에 섞여 귀환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환호하는 왕도의 시민들이었다.
“드라흔이 또 한 번 왕국을 위기에서 구했다!”
시민들이 가장 많이 연호한 것은 몇 번이나 나라를 위기에서 구한 드라흔의 이름이었고, 그 다음이 왕실 기사단과 마법사단의 이름이었다.
하지만 이수혁을 비롯한 이방인들은 실망하지 않았다.
하급 병과로 변방을 전전하던 그들이 언제 왕도 땅을 밟아보았겠는가. 그들은 위세 높은 왕실의 초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걷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동을 받은 상태였다.
마치 금의환향이라도 한 듯한 기분이었다.
다음에는 내 이름을, 우리 이름을 부르게 만들겠다.
이수혁은 새롭게 각오를 다졌고, 다른 이방인들 역시 언젠가는 당당하게 저들 곁에서 이름이 불리겠노라며 다짐했다.
“당신들 역시 최고요!”
그들의 바람은 생각보다 빠르게 이루어졌다.
왕도의 시민들은 이방인들을 무시한 것이 아니었다. 다만 좀처럼 요새 밖을 나서지 않는 기사단과 마법사단의 존재를 신기하게 여기고 관심을 두었을 뿐이었다.
“다른 나라의 이방인들이 어떻든 간에, 우리는 당신들을 아덴버그인이라 생각한다오!”
“당신들은 우리와 한 동포요!”
“잘 싸웠소! 고맙소!”
열광적인 환호 사이로 간간이 이방인들을 격려하는 소리가 튀어 나왔다. 비록 그 수도 적고 미약하기만 한 외침이었지만 이방인들에게는 그 어떤 환호보다 훨씬 더 크게 다가오는 말들이었다.
“이익!”
아무것도 모른 채 이 세상에 끌려와 변방을 전전해야 했던 설움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이수혁은 저도 모르게 눈시울을 붉혔고, 다른 이들 역시 그와 꼭 같은 표정으로 눈에 힘을 주었다.
“어깨 펴.”
그런 그들의 심정을 어느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던 김선혁은 흡족한 얼굴로 격려해주었다.
“너희들은 더 이상 천대 받던 하급 병과가 아니다.”
아직 기사 서임을 받은 것은 아니었지만, 이미 능력을 차고 넘칠 정도로 입증했다. 꿇릴 게 없었다.
“네.”
이수혁이 끄윽, 하고 기이한 소리를 삼키더니 금세 다부진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하지만 감정을 억누르지 못해 빨갛게 상기된 얼굴만큼은 숨기지 못했다.
“구국의 영웅들이여!”
왕도 아데스덴을 가로지르는 중앙대로를 지나자, 왕실 기사단에게 둘러싸인 테오도르 국왕이 있었다.
“그대들의 영웅적인 분투에 경의를 표하는 바이다!”
언제나처럼 카리스마가 넘치는 국왕은 친히 이방인들과 기사단의 공을 치하해주었다.
“처음 그대들이 이 땅에 왔을 때, 나는 든든한 배경이 되어주리라 약속했다. 그리고 그대들은 스스로의 가치를 입증했고, 나 또한 약속을 지키리라.”
나직한 음성이었지만, 테오도르 국왕의 음성은 마법처럼 구석구석 퍼져나갔고 이방인들은 처음 보는 군왕의 위엄에 더욱더 깊이 고개를 숙였다.
“끔찍한 마수들을 상대로 용전(勇戰)을 보인 그대들에게 각각 1백 골드의 포상을 내리며, 훈작사의 훈장을 수여하노라!”
“와!”
그 자리에서 내려진 화끈한 포상에 이방인들이 저도 모르게 환호했다가 이내 실책을 깨닫고는 굳은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공을 세운 이들에게만큼은 누구보다 관대한 테오도르 국왕은 그들을 탓하는 대신 도리어 격려해주었다.
“그대들이 승리의 함성을 지를 것을 허락하노라! 그러니 영웅들이여! 마음껏 환호하고 포효하라! 왕도의 모든 시민들이 그대들의 용맹무쌍함을 알 수 있도록 하라!”
허락이 떨어지자 이방인들이 참았던 함성을 내질렀다. 그간 쌓아두었던 설움과 박탈감이 힘껏 내지른 함성과 함께 흩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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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언제나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는 성과를 보여주는구나.”
개선식이 끝이 나고 김선혁은 테오도르 국왕과 따로 자리를 갖게 되었다. 국왕은 성장한 이방인들의 모습에 몹시 흡족해 했고, 그 어디에도 토르고스의 난동을 탓하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조만간 날을 잡아 내 그들에게 모두 기사의 작위를 내릴 것이다. 그들은 그만한 자격이 있음이니….”
“모두 기뻐할 겁니다.”
담백한 그의 대답에 테오도르 국왕이 피식 웃어 보이고는 말을 이어갔다.
“면밀히 검토해본 바, 저들의 힘이 상호보완적이라는 그대의 보고가 일리가 있다 판단했노라. 하여 그대의 청대로 저들을 모두 하나의 소속으로 묶어 함께 하도록 할 테니, 그대는 염려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요새에서부터 내내 고민해왔던 문제, 하지만 테오도르 국왕은 너무도 쉽게 그의 고민을 해결해주었다. 언제나처럼 시원시원한 태도였다.
“걱정이 또 있는가? 표정이 여전히 좋지 않구나.”
일견 기뻐하는 듯 보이는 김선혁의 표정은 미묘하게 경직되어 있었고, 테오도르 국왕의 눈을 피하지 못했다.
“혹시 환수를 마수라 지칭하여 노르딕의 이방인 무리에게 덮어씌운 것이 마음에 걸리는 것인가.”
“아닙니다.”
노르딕의 이방인들에게는 미안하지만, 김선혁은 그 점에 대해 그다지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다. 어차피 라인펄을 방문했다는 소문을 스스로 퍼트리며 그를 곤경에 빠트렸던 마왕과 그 동료였다.
굳이 따지자면 한 번씩 주고받은 셈이니 새삼 미안할 이유가 없었다.
그가 표정이 좋지 못한 것은 노르딕에서 일어난 반란이 예상보다 훨씬 격렬하게 세상을 변화시키고 있었던 탓이었다.
이제 반란은 노르딕이라는 한 국가에 국한된 일이 아니었고, 대륙 서부 전체를 아우를 정도로 큰 소란이 되었다.
하지만 반란은 대부분 미수에 끝이 났고, 수많은 이방인들이 처형당하거나 전투에서 처형당했다. 그 처참한 실패에도 불구하고 반란의 불길은 계속해서 퍼져나가고 있었다.
더욱 끔찍한 것은 서부에 위치한 몇몇 왕국들이 자국 내에 존재하는 이방인들을 잠재적인 반란군으로 규정하고 본보기식으로 처형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노르딕에서 일어난 반란의 이유를 전혀 헤아리지 않은 처사였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그런 그들의 조치는 대륙 서부의 이방인들을 움츠려 들게 하기는커녕 도리어 더욱 반발하게 만들었다.
노르딕에서 시작된 전쟁은 계속해서 확전되고 있었다.
김선혁으로서는 이러다가 대륙 전체가 전란에 휩싸이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될 지경이었다.
차라리 동부 어딘가로 망명을 선택했다면 이다지도 많은 이들이 죽지는 않았을 텐데, 이방인들의 죽음이 너무도 덧없게만 느껴졌다.
그게 그는 너무도 안타까웠다.
하지만 굳이 그러한 내심을 전부 설명해줄 필요는 없었다.
“그냥 조금 피곤했던 모양입니다. 아무래도 10일을 꼬박 싸웠으니까요.”
김선혁은 적당히 말을 얼버무렸다.
“그보다 궁금하구나. 이 큰 사달을 일으킨 환수사라는 자가 대체 어떤 존재인지.”
다행스럽게도 테오도르 국왕은 꼬치꼬치 캐묻지 않고, 다른 이야기를 꺼내 들었다.
“얼마나 대단한 존재길래 엉덩이 무거운 마법사들을 일백이나 움직이게 만든 것인지, 진즉부터 궁금했다.”
국왕은 토르고스라는 무지막지한 환수를 소환해낸 환수사의 능력에 상당한 흥미를 보였다.
“그렇지 않아도 소환사에 관해 따로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말하라.”
테오도르 국왕의 재촉에 그는 잠시 망설였다.
“그 토르고스라는 환수 말입니다.”
“토르고스… 그래. 그런 이름이었지.”
하지만 망설임은 길지 않았고, 그는 모든 사실들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아직 살아있습니다.”
국왕은 놀라지 않았다.
“혹시 환수사가 그 토르고스라는 존재를 길들이는 데 성공한 것인가.”
마치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한 국왕의 태도에 그는 차라리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그대가 염려하는 건 마수라고 규정한 존재로 말미암아 환수사라는 이가 곤란에 처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렷다.”
김선혁은 부정하지 않았다.
“일단은 먼저 그 자를 보고 판단하겠다. 과연 내가 감싸줄 가치가 있는 자인지 직접 보아야겠구나.”
국왕은 지금 당장 최민영을 불러들일 것을 명령했다.
“구, 국왕폐하를 봬, 뵙습니다.”
휴식을 취하던 중에 불려온 최민영이 더듬거리며 예를 표했다.
아덴버그의 지배자와 마주하게 되었다는 사실 때문인지, 그도 아니면 지은 죄가 있었던 탓인지, 최민영은 엄청나게 떨어댔다.
“흠.”
테오도르 국왕은 그런 최민영을 한참이나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특유의 속을 들여다보는 듯한 투명한 눈빛이었다.
“되었다. 그대는 이만 돌아가도 좋다.”
“네? 네.”
잔뜩 긴장하고 있던 최민영은 그 어떤 질문도 없이 물러가라 명령하는 국왕의 태도에 허둥지둥댔다.
“돌아가 있어.”
명령이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뭉그적거리는 그녀의 모습에 김선혁이 눈치를 주었다.
“그, 그럼 부디 다시 뵐 때까지 평안하시옵소서.”
예법에도 맞지 않는 엉망진창의 인사를 남기고 최민영은 자리를 떠났다.
“따로 물어볼 것이 있으셨던 게 아니신지요.”
“직접 보기를 원했고, 내 눈으로 보았다. 그거면 충분하리라.”
이해할 수 없는 태도였다. 하지만 테오도르 국왕은 자신의 행동에 대해 가타부타 설명해주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녀는 자작위에 봉해질 것이다.”
자작의 작위를 내린다는 말은 그녀가 온전한 상급 병과로 왕실의 인정을 받았다는 말이나 다름이 없었다.
김선혁은 그러한 조치가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비록 토르고스가 대부분의 힘을 잃은 채로 테이밍되었다고는 하지만, 그녀는 충분한 잠재력이 있었다. 환수만 잘 만나면 어지간한 군대 정도는 홀로 상대할 정도의 능력이 있는 것이다.
“환수사라, 꽤나 재미있는 존재구나.”
테오도르 국왕 역시 그러한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 토르고스가 부린 난리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모습이었다.
“만약 그 토르고스라는 환수가 적국의 한가운데에서 소환되었다면, 꽤나 재미있는 광경이 벌어졌을 테지.”
벌써 최민영을 어찌 활용해야 할지, 궁리까지 끝낸 국왕의 말에 그는 작게 감탄하고 말았다.
아데스덴의 혈족들은 정말이지 상황판단 능력이 끔찍할 정도로 좋았다. 적으로 만나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이번 일을 통해 보건대 그녀의 능력은 아직 불완전한 것.”
국왕의 말 대로였다. 환수사의 소환 능력은 경우에 따라 일개 연대를 홀로 상대하고도 남을 정도로 강력했지만, 지독스러울 정도로 제약이 많았고 행운이 필요한 힘이었다.
“허나 더욱 우려스러운 것은 나약한 그녀의 정신 쪽이리라.”
대화라고 할 것도 없이 얼굴만 보고 내쫓은 것에 비하면 국왕은 꽤나 최민영에게 대해 잘 파악하고 있었다.
“하여 나는 그녀의 관리와 통제를 그대에게 일임하려 한다.”
“네?”
설마 강력한 환수사를 자신에게 붙여줄 것까지는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이걸 왕실의 신뢰라고 해야 할지, 그도 아니면 또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인지 김선혁은 좀처럼 판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다만 한 가지 그대에게 당부하겠노라.”
테오도르 국왕은 그런 그의 반응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제 할 말만 늘어놓았다.
“그녀의 한을 가벼이 여기지 말라.”
이번에도 예상하지 못했던 말이었다.
“그녀가 겪은 설움과 박탈감은 그대가 생각하는 것보다 몇 곱절은 깊고 짙은 것이니 그대는 부디 그녀의 마음을 헤아려 어긋남 없이 잘 이끌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정작 그렇게 말하는 국왕의 표정에는 그다지 걱정하는 기색이 없었다.
“허나 그녀가 보이는 그대에 대한 맹목적인 신뢰가 나의 염려를 무색하게 하는구나.”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처음으로 자신의 존재를 인정해준 그대에 대한 마음이 마치 알에서 깨어난 새끼 오리가 어미 오리를 따르는 것과 같다는 말이다.”
그제야 테오도르 국왕의 말이 아직 그녀가 왕국의 어느 누군가를 신뢰할 정도로 마음의 상처가 치유된 것이 아니니 잘 보듬어주라는 말임을 깨달았다.
“최선을 다 하겠습니다.”
국왕이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어보이더니 한마디를 덧붙였다.
“왕실의 법도는 잘 알고 있으리라 믿는다.”
이번에는 또 무슨 소리인지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축첩은 꿈에도 생각지 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