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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 전화위복 (3)
“나, 나도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고!”
판이 변명처럼 외쳤지만, 김선혁의 분노는 조금도 가라앉지 않았다.
“퍽도 몰랐겠다. 이 염소 새끼야.”
어쩌다 불운이 겹쳐 일이 이 지경이 되었다고 하기에는 판이 감추고 있는 것이 너무도 많았다. 만약 처음부터 판이 솔직하게 모든 사실을 털어놓았다면, 일이 이 지경까지 오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당장 깁슨만 해도 판이 환계의 문이 가진 위험성을 미리 말해주지 않는 바람에 하마터면 환계로 넘어갈 뻔하지 않았던가.
“솔직히 말해봐. 너 처음부터 노린 거 아냐?”
“내가 왜 그런 짓을 하겠어!”
판은 억울한 듯 떠들어댔지만, 교활하게 굴러가는 눈동자를 보니 꿍꿍이가 있었던 게 틀림이 없었다.
“어쩌면 네가 말한 제물이라는 게 꼭 뿔 달린 짐승뿐이 아니었을 수도 있지. 그도 아니면 인간들 따위 어떻게 되든 네 소환자만 무사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든가.”
김선혁이 가장 크게 분노한 게 바로 그 점이었다.
판은 분명 장담했다. 그 어떤 환수도 용의 반려를 앞에 두고 경거망동하지 못할 거라 그를 안심시켰고, 이를 무시할 수 있는 존재가 문 너머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경고해주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몇 번이나 용을 언급하며 그의 주의를 돌리기까지 했다.
다분히 의도적이라고밖에 볼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아니라고! 정말 아니라고!”
판은 손을 마구 휘저어대며 뒷걸음질을 쳤다.
“난 단지, 이 정도로 강한 인간들이 모여 있으면 소환자도 안전할 거라 생각했을 뿐이야. 만약 소환된 게 토르고스가 아닌 다른 놈이었다면, 너희들도 이렇게까지 애를 먹지는 않았을 거라고!”
제 딴에는 그게 변명이 될 거라 여긴 모양이다.
하지만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더욱더 화가 날 수밖에 없었다. 판의 말은 애초에 용기병의 힘뿐만이 아니라 다른 이방인 전력까지 염두에 두고 일을 벌였다고 시인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 무책임한 환수는 애초부터 다른 이들을 끌어들일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판의 음험한 잔꾀가 하마터면 고생 끝에 겨우 중급에 오른 이방인들이 그 결실을 채 맛보기도 전에 죄다 희생될 뻔하게 만들었다.
“이거나 저거나, 네가 우리를 이용하려고 했다는 건 변하지 않아.”
김선혁의 몸에서는 이제 드래곤 피어의 기세마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만큼 그는 판의 무책임하고 이기적인 태도에 화가 났다.
펑!
그가 주먹을 움켜쥐고 다가서니, 약삭빠른 판이 방정맞은 소리와 함께 사라졌다.
“하. 이 새끼, 이거.”
대상을 잃은 분노, 하지만 그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아티야.”
그의 부름에 이끌린 바람의 정령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 주변에 쥐새끼 한 마리가 있어. 좀 찾아줄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아티야가 훌쩍 날아오르더니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손가락을 가리켰다.
꿈틀.
그녀의 손이 가리킨 곳, 최민영의 발아래 그림자가 파르르 몸을 떨었다.
신경 쓰고 지켜보지 않으면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소소한 움직임, 하지만 진즉부터 눈을 부릅뜨고 있던 김선혁은 그 부자연스러운 파동을 발견할 수 있었다.
“흐읍.”
짧게 숨을 들이킨 김선혁이 성큼성큼 다가가 그림자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당연히 맨땅을 어루만지는 것으로 끝났어야 할 그의 손길이 쑥, 하고 그림자 속으로 빨려든 것이었다.
“잡았다.”
회심의 미소를 지은 그가 그림자 속에서 손을 꺼냈다.
“아악!”
그렇게 다시 나타난 그의 손에 머리채를 잡힌 판이 있었다.
“놔! 놔줘!”
마구잡이로 발버둥치는 반인반수의 힘은 강력했지만, 김선혁은 아귀에 힘을 주고 놓아주지 않았다.
“너….”
반쯤 그림자 속에 몸을 걸치고 있던 판이 우악스러운 손길에 완전히 끌려 나왔다.
“환계로 못 돌아가지?”
난리를 피워대던 판의 몸동작이 뚝, 하고 멈췄다.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환수가 환계로 못 돌아가는 게 말이 돼?”
필요 이상으로 주절주절 떠들어대는 판을 보며 그는 확신했다.
“못 돌아가잖아.”
처음부터 의심스러웠다.
최민영은 판을 소환하거나 돌려보낸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판은 마치 처음부터 이 세상에 존재했던 것처럼 그녀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판이 어쩌면 환계가 아닌 이 세상에 머무르는 존재가 아닐까 생각했다. 그게 아니고서야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나타나고 사라지고를 반복하는 판의 행동을 설명할 수 없었다.
게다가 판은 자신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동안에 일어났던 일들을 마치 직접 보고 들은 것인 양 행동했다.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가 맞았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그럼 돌아가 봐.”
머리채를 잡은 손에 더욱더 힘을 주며 그가 말했더니, 판이 아프다고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판은 끝까지 환계로 돌아간다거나 모습을 감추지 않았다.
“자, 잠깐 내 말 좀….”
“시끄러워.”
또 무슨 변명을 하려는 건지, 필사적으로 입을 나불거리는 환수의 입을 막았다.
“관심 없어. 네가 왜 환계에 못 돌아가는지.”
무슨 사정이 있어 환계의 주민이 환계가 아닌 이 세상에 머무는 것인지는 그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그에게 중요한 것은 이 버릇없고 무책임하고 얄미운 환수를 직접 손 봐줄 기회가 생겼다는 것뿐이었다.
김선혁은 눈짓으로 최민영에게 양해를 구했다. 그냥 덮어놓고 두들겨 패자니, 그녀가 신경 쓰였던 탓이다.
“네. 저도 속은 게 괘씸하긴 마찬가지예요.”
그녀는 그를 말리지 않았다. 소환의 주최가 되는 자신에게마저 판이 모든 사실을 털어놓지 않았다는 사실에 그녀도 꽤나 화가 난 모양이었다.
“그럼 허락도 받았겠다….”
“자, 잠깐!”
판은 애원의 눈초리를 보내왔지만, 김선혁은 조금도 사정을 봐줄 생각이 없었다.
“악!”
판의 비명이 너른 공터에 울려 퍼졌다.
**
판은 순순히 두들겨 맞고만 있지 않았다. 자신이 가진 공포를 조절하는 능력을 통해 힘껏 저항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오히려 드래곤 피어의 공포에 본인 스스로가 무릎 꿇고 나중에는 잘못했다며 울어 대기까지 했다.
꺼이, 꺼이 울어대는 판의 모습이 얼마나 애처로운지 하마터면 김선혁도 마음이 약해질 뻔했다. 하지만 그렁그렁 매달린 눈물 뒤로 바쁘게 움직이는 눈동자를 보고는 그 철없는 어린아이와도 같은 모습에 생겨났던 좁쌀만큼의 연민마저도 사라지고 말았다.
“넌 진짜 그대로 두면 크게 한 번 사고 치겠다.”
김선혁은 더욱 더 가열차게 손을 썼다.
결국 판은 잔꾀의 대가를 지나칠 정도로 혹독하게 치러야 했고, 다시 교육이 끝이 났을 때는 처음의 그 건방진 태도는 온데간데없이 온순한 모습이 되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게 뭐가 있지?”
“마, 말할게요! 전부! 전부 말하겠습니다!”
퉁퉁 불어터진 얼굴로 판이 필사적으로 외쳤다.
“사실 저는 환계에서 쫓겨난….”
“잠깐.”
김선혁은 이제 막 입을 열고 사정을 털어놓으려는 판의 입을 막았다.
“이게 무슨 소리지?”
그는 한참 떨어진 곳에서부터 들려오는 미세한 소란을 감지하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전원 전투 대형!”
미처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세쿤두스 기사단의 단장 리히텐 루드베히가 다급히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법사들을 최우선적으로 보호하라!”
**
“이 빌어먹을 마수 같으니!”
리히텐 루드베히는 사방으로 흩어진 마법사들을 보호하기 위해 대열을 튀어나가는 기사들을 보며 이를 갈아붙였다.
전장 정리라면 진즉에 끝났어야 했다. 거대한 괴수는 마법사들의 공격에 완전히 박살이 났고, 남은 것은 그저 조각조각 나서 꿈틀거리는 잔류물들을 처리하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상황이 바뀌어버렸다.
완전히 소멸되어 마무리만 남았다 여겼던 마수가 갑작스레 되살아난 것이다.
이제껏 마법사들이 마수의 잔해를 빠르게 처리할 수 있었던 이유는 마수가 오직 하나의 덩어리로 뭉치는 데 혈안이 되었던 탓이다.
그런데 마수의 행동이 변화했다. 하나로 뭉치는 대신 여기저기 흩어진 점액질들이 비교적 커다란 덩어리들에 들러붙어 수백의 작은 마수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렇게 불에 타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점액질 덩어리는 아직도 많이 남아있었고, 분열되어버린 수백의 마수는 어지간한 성인 이상의 덩치를 자랑했다.
“사방이 적입니다!”
사방으로 흩어져 꿈틀거리는 점액질 덩어리들을 불로 태우거나 얼려버리고 있던 마법사들은 혼비백산하여 비명을 지르며 사방으로 뛰어다니고 있었다. 그런 마법사들을 보호하겠다고 기사들은 뿔뿔이 흩어져 검력을 줄기줄기 뽑아대며 분투했다.
하지만 상황이 좋지 않았다. 드라흔과 이방인들이 그랬듯이 기사들 역시 날붙이에 제대로 베이지 않는 마수를 상대로 악전고투를 해야 했다.
마수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마법사단의 마법뿐이었다. 하지만 아군은 사방에 흩어졌고 마법을 난사하기에는 아군의 피해가 우려되었다.
“일단 마법사들을 한데 모아라! 마수의 처리는 그 다음에 해도 늦지 않아!”
일이 꼬여버렸지만, 이미 한 번 처리했던 마수다. 다시 상대하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리히텐 루드베히의 지시에 곳곳에 흩어져 성과 없는 싸움을 하고 있던 기사들이 마법사들을 한 곳에 모았다.
“다시는 재생할 수 없게 남김없이 태워버려라!”
그들이 마침내 한 자리에 모였을 때, 다시금 마법사단의 마법이 쏟아져 나왔다.
마수는 다시 끔찍한 마법 폭격에 흩어져버렸다.
“단 한 덩어리도 남겨두지 마라!”
마법사들은 방금 전의 일을 교훈 삼아 더욱 철저하게 마수의 파편들을 불태웠다. 그렇게 마수는 기습적인 발악을 끝으로 완전히 소멸되었다.
아니. 소멸되는 것처럼 보였다.
“어?”
세쿤두스 기사단과 마법사단과 다소 떨어진 곳에 있던 김선혁은 꾸물거리며 기어온 작은 점액질 덩어리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마법사들이 못 본 건가.”
방금 전에 한바탕 소란이 있더니, 아무래도 황망한 와중에 마법사단의 마법사들이 흘린 놈이 여기까지 기어왔던 모양이다.
일단 흙으로 덮어 토르고스의 덩어리가 다른 곳으로 가지 못하도록 한 김선혁이 화염 마법에 능한 마법사라도 불러올 요량으로 자리를 뜨려는데, 최민영이 손을 뻗어 옷깃을 잡았다.
“왜?”
그의 질문에 최민영이 말했다.
“모, 목소리가 들려요.”
“무슨 목소리?”
이건 또 무슨 소리인지 그가 영문을 몰라 되물으니, 그녀가 흙더미에 갇혀버린 토르고스의 마지막 남은 한 조각을 보며 말했다.
“계약! 계약을 하자고!”
**
상황은 금세 정리되었다. 그 다급한 와중에도 마법사들의 피해는 생겨나지 않았다. 마법사단의 호위를 맡았던 세쿤두스 기사단에게는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잠깐 소란이 있었지만, 그래도 무사히 임무를 완수할 수 있었소.”
마지막 마수의 조각이 완전히 불에 타버리는 것을 확인한 리히텐 루드베히가 김선혁에게 말했다.
“아. 수고하셨습니다.”
“끄응. 원래대로라면 이런 일도 없었을 텐데, 마법사들이 또 사고를 쳤지 뭐요.”
리히텐 루드베히 단장은 마법사들이 마수의 잔해를 연구할 작정으로 빼돌리려고 적당히 손을 쓰다 이 사달이 벌어졌다며 불만을 토로했다.
“아무리 폐하게서 명령하셨다지만, 제멋대로인 마법사들이 일개 사단도 아니고 일백이나 몰려들었을 때부터 내 수상하다 싶었지.”
리히텐 루드베히는 도무지 마법사들의 사고를 이해할 수 없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댔다.
“저런 끔찍한 마수를 살려둘 생각을 하다니, 진짜 마법사라는 족속들은 뭐가 우선인지를 모른다는 말이지. 드라흔 백작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소?”
“그러게 말입니다.”
그런데 어쩐지 대답을 하는 드라흔의 태도가 미적지근했다. 리히텐 루드베히는 그게 밤낮없이 치러온 격전으로 지친 탓이라 여기고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만약을 대비해 하루 정도 더 수색을 하겠지만, 아마 큰 이변이 없다면 이대로 정리가 될 테니 고단하겠지만 조금만 참으시오.”
리히텐 루드베히는 그렇게 드라흔, 김선혁을 위로하고는 다시 제 위치로 사라졌다.
“민영아.”
“네?”
장년의 기사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질 때쯤, 김선혁이 최민영을 불렀다.
“절대로 걸리지 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