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64 =========================================================================
164. 전화위복 (2)
“자격이 부족하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랬지.’
누다르와 김선혁의 관계는 공고하지도 친밀하지도 않았다. 서로에게 아무런 영향력도 없는 가계약을 맺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나마 봐줄 만하군.’
그런데 누다르가 생각지도 못하게 먼저 말을 걸어왔다. 그것도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게 힘이 필요한 순간에 말이다.
“도와줄 거야?”
‘이번에는.’
누다르의 심드렁한 음성에 그는 웃었다.
“부탁할게.”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전장 한 가운데에서 십여 미터에 달하는 흙으로 빚은 거인이 솟아났다.
거대한 토르고스에 비하면 초라할 정도지만, 기세만큼은 못지않은 누다르의 등장에 모두가 환호했다.
하지만 김선혁은 마냥 좋아할 수가 없었다.
“넌 또 왜!”
치렁치렁한 로브를 재현한 거인의 육신은 차라리 꾀죄죄하기까지 했는데, 그 모습이 그가 아는 누군가와 꼭 닮아 있었다.
아리아 아이젠.
당시 계약을 맺었던 땅의 정령들이 하나같이 그 정신 나간 마법사를 닮아 있었다고 하지만, 설마 최상급 정령인 누다르까지는 그럴 줄 몰랐던 그로서는 울고 싶어질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가 그 위용에 걸맞지 않는 치렁치렁한 생김새에 놀라거나 말거나, 누다르의 활약은 무지막지했다.
쾅!
누다르는 토르고스의 몸을 쥐어뜯고 짓밟고 분해해버렸다. 이제껏 어느 누구도 감히 막아서지 못했던 탐식의 환수를 홀로 막아내는 데 성공한 것이다.
눈에 띄게 위축된 토르고스가 꿀렁거리며 흩어진 몸을 도로 원상 복구시켰다. 하지만 흙으로 만들어진 거인은 그걸 그대로 두고 보지 않았다.
찢고 분해하고, 그리고 다시 재생한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싸움, 하지만 끝은 있었다.
핑.
김선혁은 갑작스레 찾아온 현기증과 두통에 휘청거렸다. 순식간에 시야가 노랗게 변하며, 의식이 아득하게 멀어졌다.
‘여기까지군.’
의식이 완전히 날아가기 직전, 누다르의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아윽…”
그리고 아득해졌던 의식이 다시 온전하게 돌아왔다.
다시 돌아온 시야, 그 너머로 누다르가 허물어져 내리는 것이 보였다.
“아….”
아무래도 최상급 정령을 오래도록 부리기에는 스스로의 힘이 아직 부족했던 모양이다.
가장 강력한 조력자는 생각보다 이르게 사라졌지만, 제 역할 만큼은 톡톡히 해냈다. 엉망진창으로 찢겨 나가고 짓밟힌 토르고스의 육신은 아직도 다 회복이 되지 않은 모습이었고, 제 몸을 원상태로 돌리는 데만 한참의 시간을 들였다.
그 덕분에 김선혁과 이방인들은 또 하루를 벌 수 있었다.
다음 날에도 격전이 일어났다. 비록 최상급 정령의 조력은 없었지만, 김선혁과 이방인들은 필사적으로 토르고스의 길을 막고 버텨댔다.
하지만 역부족이었다.
베고 찌르는 공격에 유난히 강한 면모를 보이는 토르고스는 창칼을 주 무기로 삼은 그들에게 있어 천적이나 다름이 없었다.
오히려 그들이 그런 불리함을 딛고 이만큼이나 토르고스의 걸음을 지연시킨 것이 용한 것이었다. 그만큼 탐식의 환수는 물리적인 공격에 강한 내성을 지니고 있었고, 끔찍할 정도로 강한 회복력을 갖고 있었다.
“빌어먹을.”
이수혁을 비롯한 거검병들과 수호병들, 그리고 저격병들은 최선을 다했지만 작정하고 꾸역꾸역 이동하는 이 거대한 환수를 막는 것은 쉽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김선혁은 소환할 수 있는 정령들은 모조리 불러내어 다른 사람들을 보조했고, 레드번과 골드레이크에 번갈아 올라타며 토르고스와 싸워댔다.
이방인들 역시 놀라울 정도의 분전을 보이며 그를 거들었다.
그들은 공포에 잡아먹혀 손발이 굳지도 않았으며, 투지를 잃고 제 기량을 발휘 못하지도 않았다.
커다란 요새 하나를 통째로 집어삼킨 끔찍한 괴물을 상대로 첫 실전을 치르면서도 놀랍게도 이방인들 중에 희생된 자는 한 명도 없었다.
김선혁은 두 번째 전투가 끝이 나고서야 그 모든 게 최민영의 힘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너 이 망할 염소 새끼!”
그는 뻔뻔스럽게 모습을 드러낸 판을 보며 이를 갈아붙였다. 하지만 이 약삭빠른 환수는 그와 눈이 마주치기가 무섭게 사라져 버리더니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그런 판이 다시 나타난 것은 다음날 토르고스와 전투가 시작되었을 무렵이었다.
눈에 거슬리는 반인반수를 보면서도 김선혁은 애써 모른 척 했다. 강대한 적을 상대해야 하는 지금, 판의 능력이 절실하게 필요했던 탓이었다.
일단 급한 불부터 끄고 보자.
그는 나중을 기약했다. 어차피 판을 손보는 것은 저 끔찍한 환수를 처리하고 난 뒤라도 늦지 않는다.
전투는 계속되었다.
김선혁과 이방인들은 놀라울 정도로 분전했다. 하지만 역부족이었다.
상성이 맞지 않는 적을 억지로 상대하느라 매 순간이 위기였다. 그래도 그들은 싸웠고, 끊임없이 환수의 주의를 끌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환수가 돌아가기까지 이틀이 남았다.
“여기까진가…”
정신없이 싸우다 보니 인근을 다스리는 귀족의 영지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왕실이 소개령을 내린 것인지 중간에 지나쳐온 마을에 개미 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여기까지였다.
“왜 아직까지!”
영지의 외곽에 도달했을 무렵, 저 멀리서 흙먼지가 피어오르며 군대가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돌아가! 돌아가라고!”
며칠 내내 어느 누구보다도 열심히 싸웠다. 토르고스의 육신을 조각내는 것 이상으로 다른 이들이 희생되지 않도록 신경을 써왔고, 그 과정에서 끔찍할 정도로 정신력이 소모되었다. 그 결과 지금 그의 주변에 소환된 정령은 하나도 없었다.
“클라크! 이들을 부탁해!”
“최선을 다 하겠습니다!”
결국 보다 못한 그가 클라크에게 이방인들을 맡기고는 전장을 이탈했다.
멍청하기는.
어지간한 기사단 이상의 힘을 보이는 이방인들마저도 매 순간이 위기였다. 평범한 영주의 사병들이 저 괴물의 상대가 될 리가 없었다. 일반 병사들이 끼어 들어봐야 희생만 늘 뿐이었다.
공명심에 눈이 먼 것인지, 거대한 괴물을 보고도 멈추지 않고 달려오는 군대를 향해 그는 빠르게 나아갔다.
“어라?”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멀리서 보기에도 군대의 무장과 기세가 범상치 않았다. 일개 영지의 병사들이라고 하기에는 중갑을 잘 차려입은 기병들의 숫자가 너무도 많았다.
“설마?”
저렇게까지 무장이 충실한 기병은 아덴버그에 존재하지 않았다. 있다면 오직 기사단뿐이었다.
쐬에에엑!
그가 갑작스레 나타난 기사단 탓에 혼란스러워하는 사이, 허공을 가로지르는 붉은 궤적이 생겨났다.
콰아앙!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 무언가가 괴수의 몸통을 박살 내며 폭발했다.
쐬엑!
콰아아아아!
그게 시작이었다. 기사단으로 보이는 무리 뒤로 붉고 푸른 덩어리들이 솟아나더니, 귀청을 찢는 소음과 함께 토르고스를 향해 쏟아져 내렸다.
그제야 김선혁은 기사단 뒤로 금빛 로브를 뒤집어쓴 일단의 무리가 몰려있는 것을 발견했다.
“왕실 마법사단?”
생각지도 못한 존재들의 등장에 그가 멍하니 있는 사이에 기사단의 선두를 지키고 있던 사내 하나가 하늘을 보며 외쳤다.
“드라흔 백작! 국왕 폐하의 명령을 받아 그대를 도우러 이곳에 왔소!”
그 웅혼한 포효를 듣는 순간 김선혁은 선두의 기사가 상급 기사들 중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로 강력한 존재임을 알 수 있었다.
“수하들에게 일러 물러나라 하시오! 곧 마법사단의 공격이 본격적으로 시작될 거요!”
김선혁은 당장 몸을 돌려 여전히 근거리에서 위험천만한 싸움을 이어가고 있던 이방인들에게 향했다.
저들이 왜 이곳에 있는지, 또 정체가 무엇인지는 조금도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은 그저 지원군이 왔다는 사실만이 중요했을 뿐이었다.
“지원군이다! 퇴각해!”
“물러나랍신다!”
그렇지 않아도 갑작스레 쏟아진 마법 공격에 몸을 빼낼 시기를 재고 있던 이방인들이 그의 명령을 듣고는 순식간에 몸을 빼냈다.
“더! 더 물러나시오!”
멀리서 들려오는 우렁찬 포효에 김선혁과 이방인들이 더욱더 거리를 벌렸다.
“충격에 대비하시오!”
경고가 떨어진 순간 왕실 마법사단의 무자비한 마법 포격이 시작되었다.
“아….”
붉고 푸르고 하얀 섬광을 꼬리처럼 매달고 날아가는 수백 가닥의 궤적은 그 자체로 하나의 장관이었다.
콰앙!
눈이 타들어갈 듯 강렬한 섬광, 단지 바라보는 것만 해도 고통스러울 지경인데 마법에 직격당한 토르고스가 온전할 리가 없었다.
뜨겁고 차가운 수백 번의 폭발에 휘말린 토르고스의 점액질 몸뚱이가 순식간에 만신창이가 되었다.
이게 진짜 마법사들의 힘….
자신들이 그토록이나 애를 먹고도 겨우 시간을 버는 게 고작이었던 환수가 단 두 번의 마법 포격에 갈기갈기 찢겨나가고 있었다.
김선혁은 왜 마법에 미친 미치광이들이 충성스럽고 용맹한 기사들 이상으로 중요한 취급을 받는지 처음으로 깨달았다.
온전히 전력을 집중한 마법사들의 마법은 차라리 재앙에 가까웠고, 저쪽 세상의 전략 무기에 못지않은 위력을 갖고 있었다.
다행이라면 그 끔찍할 정도로 파괴적인 힘이 자신들을 향한 것이 아니라 토르고스를 향해 발휘되었다는 것이었다.
“중앙 기사단 세쿤두스(Secundus) 소속, 단장 리히텐 루드베히라고 하오.”
그가 넋을 잃고 마법의 위력을 바라보는 동안 가까이 다가온 장년의 기사 하나가 인사를 건네 왔다.
“백작의 분투와 이방인들의 희생정신에 경의를 표하는 바요.”
중앙 기사단에서도 두 번째로 서열이 높은 정예 기사단의 수장, 리히텐 루드베히의 어투는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호의적이었다.
“백작과 이방인들이 합심하여 저 괴물을 막아준 덕에, 왕국이 마왕의 마수로부터 무사할 수 있었소. 다시 한 번 그대들의 숭고한 용맹에 경의를 표하겠소.”
이건 또 무슨 소리인지, 뜬금없이 마왕을 언급하는 리히텐 루드베히의 태도에 김선혁은 어리둥절해지고 말았다.
“세쿤두스! 왕국을 위해 죽음을 불사하고 끔찍한 마물을 상대한 드라흔 백작에게 경례!”
“하아!”
미처 상황을 살필 새도 없이 도열해 있던 기사들이 가슴께에 검을 세워 보이며 경의를 표했다.
“백작께서는 이제 그만 물러나서 쉬시오. 저런 부정형의 괴물을 처리하는 데는 우리 같은 기사들보다는 마법사들이 제격이라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을 좀…”
“아흐레 전, 국왕폐하께서 긴급히 기사들을 모아 말씀하시기를…”
“그러니까 뭐를 말입니까?”
영문을 몰라 아직까지 얼이 빠진 얼굴을 하고 있던 그에게 리히텐 루드베히가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드라흔 백작을 도와 노르딕의 마왕이 보낸 마수를 처단하라 하셨소!”
**
전투는 그간 김선혁과 이방인들이 필사적으로 싸워왔던 것이 무색하게 너무도 일방적으로 끝이 났다.
창칼에 끄떡도 않던 토르고스는 황당할 정도로 마법사들의 마법에 취약했고, 거의 한 시간 동안 가해진 마법 포격 앞에 허무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하지만 끈질긴 생명력만큼은 어디 가지 않는지, 그렇게 수천수만 갈래로 쪼개지고 태워졌음에도 불구하고 토르고스는 꾸물거리며 제 몸을 이어붙이고 있었다.
“단 하나의 조각이라도 놓치지 마라!”
“화염에 능한 자들은 직접 소각하여 재생을 막고, 여의치 않다면 얼려두었다가 다른 이의 도움을 받으라!”
마법사단의 마법사들은 분주히 돌아다니며 아직까지 생명력을 잃지 않은 토르고스의 신체 일부를 불에 태우거나 얼려버렸다.
“음…”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김선혁은 허탈함에 앞서 감탄하고 말았다. 마법사단의 힘도 힘이었지만, 그보다 놀라운 것은 테오도르 국왕의 임기응변이었다.
국왕은 환수의 난동을 완벽하게 은폐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기가 무섭게 이 모든 것을 노르딕의 소행으로 덮어씌워 버렸다.
그 결과 탐식의 환수 토르고스는 노르딕의 마왕이 보낸 마수로 둔갑했고, 맞서 싸웠던 김선혁과 이방인들은 왕국을 지키기 위해 생명조차 내걸고 분투한 영웅이 되어 버렸다.
이 아무것도 아닌 선동과 날조에 언제 반란을 일으키고 외부 세력과 결탁할지 모른다 여기고 괄시했던 이방인들에 대한 여론이 단숨에 역전되었다.
왕실은 도리어 이번 소란을 통해 거북스럽던 여론을 잠재우는 데 성공했으니 전화위복이 따로 없었다.
진짜 머리 하나는 끔찍할 정도로 좋네.
그 짧은 시간에 어찌 그런 수를 생각해낸 것인지 김선혁은 다시 한 번 아데스덴 왕실의 수완에 감탄했다.
“백작님…”
분주하게 움직이며 토르고스의 조각들을 찾아 헤매는 마법사들과 기사들을 바라보고 있는데, 최민영이 다가왔다. 그런 그녀의 뒤에 잔뜩 겁을 집어먹은 판이 쭈뻣거리며 서 있었다.
“판, 너 이 새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