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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곤 푸어-162화 (162/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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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 전화위복 (1)

“통한 건가?”

아직은 알 수 없었다. 환수사라는 병과도 환수도 그에게는 생소한 존재들이었고,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것인지 파악하기에는 아는 바가 부족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지금 이 순간, 최민영이 토르고스와 교감을 시도하고 그게 어떤 식으로든 저 식욕뿐인 환수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 증거가 바로 고체처럼 굳어버린 채 움직이지 않는 토르고스였다.

“음.”

어쩌면 예상보다 훨씬 수월하게 일이 풀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요새 하나를 날려 먹었지만, 이 정도 힘을 지닌 환수를 테이밍하는 대가라면 왕실도 비싸게 대가를 들였다 여기지 않을 것이다.

시간이 계속해서 흘러갔다.

끔찍한 밤이 지나가고 동이 터 오고 있었다. 거대한 점액질 덩어리는 여전히 굳어버린 채 미동도 없었고, 최민영의 꼭 감긴 눈은 뜨일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방해가 되지 않기 위해 날갯짓마저 최소한으로 억제한 채 자리를 지키느라 지루했는지, 레드번은 좀이 쑤시는 기색이 역력했다.

삐이이익.

결국 참을성 없는 레드번이 짧게 울며 불만을 토해냈다.

“쉿.”

그는 황급히 괴수를 조용히 만들고는 최민영을 살펴보았다. 다행스럽게도 이변은 일어나지 않았다.

“착하지. 돌아가면 배불리 먹여줄 테니까, 조금만 참아.”

혹시라도 괴물을 자극할까 싶어 잔뜩 낮춘 음성, 레드번이 그 말을 알아듣고는 삐익 하고 울었다.

“쉿! 쉿!”

머리 나쁜 괴수의 조심성 없는 행등에 그는 몇 번이나 화들짝 놀라야 했다.

하지만 그가 그러거나 말거나 최민영은 여전히 눈을 뜰 줄 몰랐고, 토르고스는 그 어떤 변화도 보이지 않았다.

이건 좀 심한데….

환수사의 테이밍은 용기병의 그것과 다른 것일까. 거의 한나절이 다 지났지만,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삐이익.

레드번이 피로를 호소했다. 차라리 창공을 질주했다면 기류를 타기라도 했을 텐데, 제 자리를 지키느라 고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결국 버티고 버티던 레드번이 한계에 도달하고 말았다. 혀를 빼물고 힘겹게 날갯짓을 하는 것을 보니 더 이상의 비행은 무리로 보였다.

“천천히 내려가자.”

잠시 고민하던 그는 최대한 느린 속도로 바닥에 내려앉았다. 토르고스의 점액질로 번들거리는 영역과 그리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곳이었다.

끼우우우.

바닥에 내려서기가 무섭게 레드번이 바닥에 목을 깔고 철퍼덕 주저앉았다. 어지간히 힘이 들었던 모양이다.

진즉에 내릴걸.

덜컹거리는 레드번 위에서 여전히 정신을 차릴 기미가 보이지 않는 최민영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지금까지 해온 노력이 무색해지고 만다.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가만히 상황을 살펴보았다.

이거 끝이 나긴 하나?

이제는 어지간한 김선혁조차도 이 지루한 과정의 참관인으로 남는 것에 질려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그는 곧 자신의 생각을 후회해야 했다.

꿀럭.

굳어버린 듯 멈춰 있던 토르고스가 다시 요새 주변을 잠식하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최민영이 깨어났다.

“우웩!”

파리하게 질린 입술을 달싹였다. 하지만 뭐라 먼저 말을 꺼내기도 전에 한 움큼 핏물이 그녀의 입가로 울컥대며 쏟아져 나왔다.

“정신 차려!”

눈을 하얗게 까뒤집고 정신을 잃으려는 그녀를 보며 김선혁이 수 속성 지배력의 치유력을 발휘했다.

“으으….”

한결 나아지긴 했지만 여전히 창백한 안색, 그녀가 다급히 말했다.

“시, 실패했어요!”

“알았으니까. 정신 차리고 꽉 잡아!”

묻지 않아도 테이밍이 실패했다는 것은 김선혁도 알 수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저 점액질 덩어리가 저리 사납게 몸을 요동치며 난리를 피워댈 리가 없었으니까.

“레드번!”

진즉에 고개를 빳빳이 들고 있던, 괴수가 날개를 확, 펼치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콰르르르.

방금 전까지 괴수가 내려있던 자리에 토르고스가 토해낸 점액질 덩어리가 쏟아져 내렸다.

“싸우는 건 무리겠군.”

어차피 이제 와서 토르고스를 상대하기에는 레드번이 너무 지쳐있었다. 굳이 위험을 감수하고 이곳을 전장으로 삼을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시간이라면 충분히 벌었다. 비록 테이밍은 실패했지만, 그동안 환수는 하루 종일 움직이지 않았다. 환수가 이 세상에 머물 수 있는 십여 일의 시간 중 하루를 아무런 피해 없이 버틴 것이다.

“이탈한다!”

악취 나는 점액질 덩어리가 사방에서 날아오는 것을 보며, 김선혁은 빠르게 고도를 높였다.

**

그날 하루 동안 토르고스가 이동한 거리는 30킬로미터에 달했다. 어지간한 정예 보병 연대가 잠도 자지 않고 이동할 때에나 가능한 속도였다.

생각보다 빠른 환수의 이동속도, 하지만 미리 대피령이 전파되었던 터라 인명 피해는 생기지 않았다.

“하필 방향이 왕도라니….”

토르고스가 하필이면 왕도 아데스덴을 향해 방향을 잡는 바람에 상황이 악화되었다.

김선혁은 빠르게 왕실에 보고를 했다.

일이 커지는 것만큼은 그로서도 피하고 싶었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어쩌면 이 끔찍한 실패의 책임을 져야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최소한 인명피해가 생기는 것만큼은 막아야 한다는 생각에 그는 요새가 허물어졌던 그 끔찍했던 밤에 대해 낱낱이 보고했다.

[환수사라… 골치 아픈 병과군.]

“죄송합니다. 제가 부추기는 바람에.”

이 세상에 도착하고 처음으로 실패를 했다. 그것도 그냥 실패가 아니라 끔찍한 실패였다.

이게 다 자신의 오만이 부른 참사였다. 어떤 환수가 나타나도 용기병의 능력이라면 능히 대처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 거기에 더해 잘만 이용하면 그 어떤 상급 병과보다 막강한 힘을 발휘할 환수사의 능력에 욕심을 부렸다.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모든 게 제 불찰입니다.”

김선혁은 솔직하게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고 모든 책임을 지겠노라 말했다.

[탓할 생각은 없다. 어쨌건 간에 그대는 하급 병과의 이방인들을 성장시키겠다는 그대의 말을 지켰다. 단지 그것뿐이다.]

테오도르 국왕은 그를 탓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이 모든 일의 책임에서 자유로워진 것은 아니었다.

[이쪽에서도 나름대로 방책을 마련할 테니, 그대는 그대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라.]

“최대한 이동을 지연시켜보겠습니다.”

테오도르 국왕은 왕도에서도 방법을 강구하겠다며 그에게 최대한 시간을 벌 것을 당부했다.

[혹시 괴물의 정체에 대해 다른 이에게 말한 적이 있나?]

“요새에 있던 이들 정도는….”

[그들의 입을 단속하라. 절대로 괴물의 정체가 퍼져나가지 않도록 하라.]

영문 모를 지시였지만, 그는 반드시 그리하겠노라 대답했다.

팟.

통신 마법은 끝이 났고, 김선혁은 바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몸이 좋지 않겠지만, 반드시 해내야 한다.”

테이밍이 실패한 여파를 채 털어내지 못해 여전히 파리한 최민영의 안색, 하지만 그는 단호했다.

“알고 있어요. 이 모든 게 저로 인해 일어난 일이니까요.”

그녀 역시 스스로 책임감을 느끼는지 엄살을 피운다거나 그의 명령에 토를 달지 않았다.

최민영은 온전치 않은 몸으로나마 나서서 다시 테이밍을 시도했다. 토르고스를 길들일 수 있을 거라 기대하고 벌인 일은 아니었다.

전날 그러했던 것처럼 환수가 단 하루라도 더 발이 묶이기를 바라고 내린 조치였다.

그들의 계획은 절반의 성공을 거두었다. 하루를 꼬박 묶여 있던 첫 번째 테이밍 시도와는 달리 두 번째 시도는 고작 반나절을 겨우 버텼을 뿐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최민영은 피를 토하며 기절하고 말았다.

“판 이 새끼….”

김선혁은 기절한 그녀를 들쳐 엎고, 이를 갈아 붙였다.

그날 이후로 나타나지 않는 판의 행동이 지독스러울 정도로 무책임했다. 어쩌면 판은 그가 벼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고 몸을 사리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는 분노를 가슴 속 깊이 묻어두었다. 언제고 다시 그 무책임한 환수가 모습을 드러내는 날, 깊게 묻어두었던 분노를 다시 꺼내고 말리라.

**

최민영은 당장 죽어버릴 것처럼 쇠약해졌지만, 테이밍을 통해 토르고스의 발을 묶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녀는 몇 번이나 피를 토하며 혼절하고도 끝까지 스킬을 시도했다.

그 결과 다시 하루의 시간을 벌 수 있었다.

모자란 시간은 김선혁이 직접 나서서 벌었다. 그는 레드번을 타고 토르고스를 향해 풍아를 꽂아댔다. 하지만 늘상 그에게 승리를 가져다주었던 바람의 힘은 저 말캉거리는 환수를 상대로 큰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땅의 속성 역시 마찬가지였다.

“뭐 저딴 괴물이 다 있어.”

바람에 쪼개지고 땅에 파묻혀도 토르고스의 육신은 금세 원상태로 복구되었다.

“이제 5일.”

그래도 5일이라는 시간동안 토르고스의 이동을 비교적 지연시킬 수 있었으니, 소득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문제는 지금부터였다.

이제껏 토르고스가 지나온 경로에는 인적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부터는 아니었다.

이곳을 기준으로 하루 거리에 몇 개인가의 마을이 있었고, 다시 하루를 더 가면 중부 귀족들의 영지가 밀집해 있었다.

귀족들의 영지는 소속조차 불분명하던 이전의 마을들과는 다르게 김선혁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았다. 왕도에서 만났다면 모를까, 영지에서만큼은 영주들이 왕이었다.

그런 그들이 영지를 버리고 대피하라는 김선혁의 말을 제대로 들을 리가 없었다.

“결국 몸으로 때워야 하나….”

이미 왕실에 보고를 했으니, 현명한 아데스덴 왕실이라면 어떤 식으로든 피해를 최소화할 방법을 강구하여 조치할 것이다.

그가 할 수 있는 건, 이곳에서 토르고스를 막아서는 것뿐이었다.

“저희도 돕겠습니다!”

그들만이 정한 최종 방어선, 이방인들이 나서서 자신들도 싸우겠다고 말했다.

김선혁은 그들의 청을 일언지하에 거부했다. 하지만 그들은 완강했다.

“이럴 때를 대비해 한 훈련 아닙니까?”

“최소한 몸을 빼내지 못할 정도로 시시하게 단련해오지는 않았습니다!”

이수혁을 필두로 이방인들이 거듭 참전을 허락해달라며 고집을 피웠다.

그는 무시하고 혼자 토르고스를 막아섰다.

“빌어먹을. 뭐가 지능이 없어.”

토르고스는 더 이상 그를 상대하지 않았다. 풍아에 휩쓸리면 휩쓸리는 대로 조각난 몸을 꾸물거리며 계속해서 이동했고, 땅을 들어 올려 벽을 세우면 순식간에 허물어가며 나아갔다.

시간을 벌지 못했다.

그리고 그때 이방인들이 나섰다.

“물러나!”

“저희도 할 수 있습니다!”

명령을 무시하고 토르고스 앞에 나선 이방인들이 사방으로 흩어지며, 마구잡이로 토르고스를 공격했다.

“합!”

거검병의 참격이 환수의 거대한 육신을 조각내고, 수호병이 떨어져 내리는 점액질 덩어리로부터 아군을 지켜냈다.

“물러….”

그 위험천만한 모습에 나서서 만류하려던 김선혁은 입을 다물었다.

“이쪽으로!”

사전에 계획을 짜두었는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이방인들은 그의 생각 이상으로 잘 싸우고 있었다.

거검병의 참격은 안전한 거리에서 토르고스를 때려댔고, 간헐적으로 쏘아져 오는 덩어리들은 수호병들의 방패가 막아섰다. 저격병들은 넓은 시야로 그들이 환수의 몸에 둘러싸이지 않게 보조했다.

만약 토르고스와 맞서 싸우려고 했다면 저들은 금세 저 끔찍한 점액질 덩어리에 파묻혀 흔적도 없이 녹아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이방인들은 철저하게 토르고스의 진로를 바꾸는 데 집중했고, 환수는 창공을 날아다니는 귀찮은 용기병 대신 비교적 만만한 사냥감을 노리고 몸을 틀었다.

철저하게 역할을 분담하여 싸우는 이방인들의 모습은 그가 이제껏 해왔던 훈련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증거였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마냥 순탄하게 싸운 것은 아니었다. 형체가 고정되지 않은 토르고스의 공격은 불규칙적이었고, 때로는 예측할 수 없는 방향에서 그들을 몰아붙였다.

“하이야!”

그때 나선 것이 클라크를 비롯한 기병대원들이었다.

“저쪽에 뒤처진 놈이 있다!”

“내가 주워 온다!”

공격을 피하다 이리저리 몰려 고립되어버린 이방인들을 발견한 기병들이 목숨을 걸고 내달려 그들을 구해냈다.

“제가 말했잖습니까! 백작님은 항상 혼자 다 해결하려고 하는 게 문제라고!”

“한센, 이 멍청아! 뒤! 뒤!”

“으아아아! 언제 여기까지!”

한센이 기겁을 하며 말의 속도를 올렸다. 그런데 그 모습이 어쩐지 즐거워 보였다.

“이게 바로 사내가 사는 법이지!”

“아주 그냥 온몸이 짜릿짜릿!”

“후방에만 있느라 아주 좀이 쑤셔 죽는 줄 알았다고!”

기분만이 아니었다. 기병대원들은 오래간만의 실전에 진정으로 즐거워하고 있었다. 그들의 표정에는 그 어느 때보다 생기가 넘쳤다.

“아….”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괜스레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심장이 마구 뛰어대며 관자놀이가 불끈거리는데, 저 깊은 곳에서 투지가 솟아났다.

“아티야!”

김선혁은 레드번을 타고 토르고스의 위를 맴돌며 아티야를 소환했다.

‘네! 주인님!’

“저들에게 힘을!”

바람의 처녀가 날아올라 지쳐 있던 그들의 육신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었다. 이방인들의 움직임이 방금 전보다 한층 더 날렵하고 기민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르고스는 여전히 굳건했다.

하지만 김선혁은 아직 전력을 다 하지 않았다.

“이크람! 이즈디하르!”

왕녀를 닮은 외양 탓에 이제껏 단 한 번도 전장에서 소환하지 않았던 물의 정령들이 세상에 현현했다.

‘주인님, 우리를 잊지 않아 주셔서 감사해요.’

‘상황이 좋아 보이지 않는군요.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저 괴물을 막아야 해!”

이즈디하르와 이크람이 단숨에 날아가 이방인들의 대열 위로 각기 진하고 옅은 막을 씌웠다.

‘나는 왜 부르지 않지?’

김선혁의 소환은 아직 끝이 나지 않았다.

“너는….”

격전 중에 불쑥 들려온 음성에 김선혁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누다르?”

가계약을 맺었지만 부족한 자격을 탓하며 그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땅의 최상급 정령, 누다르가 그의 눈앞에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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