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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 불청객 (1)
“노크! 노크! 노크!”
최민영은 끊임없이 스킬을 실행했다. 그리고 그녀의 스킬이 거듭될수록 허공중에 생겨난 출렁임이 점점 커져만 갔다.
“흡.”
그렇게 커져버린 파동이 일정 이상이 되자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판이 피리를 입에 물었다.
판의 연주는 아무런 소리도 없었다. 그저 부풀어 오른 볼과 바삐 움직이는 손가락들을 보며 반인반수의 환수가 뭔가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짐작했을 뿐이었다.
“노크!”
최민영이 힘주어 스킬을 외쳤다. 이제까지 수도 없이 외쳤던 것과는 확연히 다른 음성, 그 순간 마구 요동을 치던 허공이 그대로 굳어버렸다.
쩌적.
어긋난 채로 굳어버린 허공이 스르륵 기울더니 툭, 하고 바닥에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그렇게 떨어져 나간 공간 너머로 보랏빛 광채가 흘러나왔다.
“정신 똑똑히 차리라고.”
잠시 피리에서 입을 뗀 판이 경고를 남기고는 다시 연주를 이어갔다. 그 모습에 이제껏 보여 왔던 방정맞은 태도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판은 땀까지 뻘뻘 흘려가며 끊임없이 피리를 불었고, 최민영은 문 너머를 보며 초조한 얼굴을 한 채 환수를 기다렸다.
“아아….”
가만히 소환의 의식을 지켜보던 김선혁은 탄식과도 같은 음성에 고개를 돌렸다가, 초점이 사라진 깁슨을 보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깁슨은 마치 뭔가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허공에 생겨난 환계의 문을 향해 다가가려 했다. 김선혁은 기겁을 하며 비척거리는 깁슨의 어깨를 잡아챘다.
“정신 차려!”
강력한 의지를 담은 그의 말에 깁슨이 멍한 얼굴을 해 보였다.
“아, 제가 왜….”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도 자꾸만 환계의 문을 바라보는 깁슨의 상태는 도무지 정상으로 보이지 않았다.
“끄응. 아무래도 저 문에 사람을 홀리는 힘이 있는 모양이다. 가급적이면 저쪽은 쳐다보지 말도록.”
자신의 눈에 그저 신기하게 비쳐질 뿐인 환계의 문이, 다른 이에게는 알 수 없는 영향력을 미친다는 사실을 알아챈 그는 슬쩍 깁슨의 앞을 막아섰다.
“네. 알겠습니다.”
깁슨도 방금 전의 기이한 경험으로 느낀 바가 있는지, 얌전히 그의 뒤에 숨어서 상황을 지켜보았다.
김선혁은 피리를 입에 물고 폴짝, 폴짝 제자리에서 뛰어대는 판을 노려보며 이를 갈아붙였다.
빌어먹을 판 놈. 그렇게 나불거리더니 이런 건 말도 안 해주는군.
그나마 다행이라면 소환의 주체인 최민영은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는 것이었다.
메에에에!
하지만 제물로 묶어두었던 양과 소들은 그녀와 다르게 문의 영향에 휩쓸리고 말았다.
메엑! 메에엑!
듣기 거북스러울 정도로 울부짖던 제물들 중, 몇 마리가 기어이 줄을 끊고 문을 향해 돌진했다.
“일부러 헐겁게 묶어둔 놈들이에요!”
최민영의 말에 나서려던 김선혁이 다시 물러났다.
메에에에.
문 너머로 양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왔어!”
피리를 입에서 떼어낸 판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메에!
문 너머로 사라졌던 양들의 비명소리가 새어나왔다. 구슬픈 비명에 이어 으적거리며 씹어대는 끔찍한 소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아그작, 아그작.
그 듣기 거북스러운 소음에 김선혁은 저도 모르게 꽉 움켜잡고 있던 거창을 세워 들었다.
툭.
환계의 문 너머에서 무언가가 툭, 하고 날아들었다.
“이런….”
반쯤 뜯어 먹힌 양의 다리 한 쪽, 김선혁은 날카로운 눈으로 이빨 자국을 살펴보며 저 너머에 있을 환수의 덩치를 가늠했다.
하지만 엉망으로 훼손된 흔적을 보고 환수의 크기를 가늠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경계할 거 없어. 별로 대단한 놈은 아니니까.”
판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문 너머에서 희끄무레한 덩어리들이 튀어나왔다.
“해파리?”
반투명한 몸체에 흐물거리는 다리들이 영락없는 해파리였다. 단지 보통의 해파리와 다른 것이 있었다면 바다가 아닌 허공을 떠다닌다는 것과 수 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덩치뿐이었다.
“환계의 청소부, 기간티아라는 놈들이야. 큰 덩치와는 다르게 그렇게 위험하지 않은 놈들이지.”
판의 말에 김선혁은 저도 모르게 기간티아라는 환수가 씹다 내뱉은 양의 다리를 쳐다보았다. 아무래도 판의 위험하다는 기준은 자신의 것과 아득하게 거리가 있는 모양이었다.
투명한 몸뚱이 내부에 비치는 촘촘하고 날카로운 이빨은 여지없는 맹수의 것이었다.
“그럼 저놈이 이번 소환에 응한 환순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물었더니, 판이 고개를 저었다.
“설마 저깟 놈을 부르려고 이 고생을 했을까.”
뭐든 한 번에 설명해주는 법이 없는 판의 화법은 사람의 신경을 건드리는 구석이 있었다. 그가 인상을 쓰며 다시 묻자, 판이 뒤늦게 대답해주었다.
“기간티아는 덩치가 크지. 그 말은 뜯어먹을 게 많다는 이야기이기도 해.”
김선혁은 그제야 판의 의도를 알아챌 수 있었다.
“그리고 환수 중에는 기간티아의 흐물흐물한 고기라면 환장을 하는 놈이 있거든… 오! 마침 도착한 모양이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환계와 연결된 문 너머에서 불쑥 뭉툭한 코를 지닌 거대한 물체가 튀어나왔다.
콰득.
등장과 동시에 기간티아를 한 입에 집어삼킨 거대한 환수는 윤기가 감도는 검은 몸통에 뭉툭한 코를 지닌 낯익은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마운틴 웨일(Mountain Whale)이라는 놈이야.”
새롭게 나타난 환수는 마운틴 웨일, 산 고래였다.
아우우우웅.
거대한 기간티아를 꿀떡 삼키고 기분 좋게 울어 젖히는 마운틴 웨일의 울음소리가 마치 뱃고동 소리처럼 길게 이어졌다.
“저것도 위험하지 않는 놈인가?”
도대체 저 작은 문에서 어떻게 빠져나온 것인지 의문이 들 정도로 거대한 환수는 골드레이크보다도 거대했고, 날개를 활짝 편 레드번만큼이나 커다란 몸통을 지니고 있었다.
“식탐을 부릴 때는 조심해야 하긴 하지만, 배만 채워주면 얼마든지 온순해질 수 있는 놈이야.”
판이 나서서 소 한 마리를 허공에 던져주자, 거대한 환수가 날름 삼켜버렸다. 그 모습이 마치 조련사의 양동이에서 꺼내진 생선 따위를 얻어먹는 돌고래와도 같아 보였다.
엉망진창이다. 환계도, 환수도.
그대로 보고 있다가는 현실감이 망가질 것 같은 광경에 김선혁은 차라리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어때? 무슨 느낌이 와?”
판의 질문에 최민영이 고개를 저었다.
“그래? 아쉽지만 이만 돌아가.”
판이 그렇게 말하며 소 한 마리를 환계의 문 너머로 던졌다. 마운틴 웨일은 주저 없이 소를 따라 문 너머로 사라졌고, 판은 최민영을 시켜 문을 닫도록 만들었다.
“다시 해보자.”
“잠깐.”
김선혁은 그런 판을 제지하고 깁슨을 돌아보았다.
“이 정도만으로는 부족한가.”
이제는 사라져버린 환계의 문이 있던 자리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깁슨이 그 말에 손사래를 쳤다.
“소환사는 사, 상급입니다!”
“환수사. 2차 전직을 했거든.”
“환수사고 소환사고 간에 무조건 상급입니다!”
“다행이군. 번거롭게 위력 시범을 보여야 하는 건 아닐까, 걱정했었다.”
물론 시범을 보여도 보여주는 건 최민영이었지만, 그로서도 번거로운 일을 덜 수 있으니 결정이 빨리 난 건 좋은 일이었다.
“그럼 돌아가 보도록. 자네가 있기에는 환계의 문이라는 게 그다지 안전하지 않아 보이더군.”
그의 말에 깁슨도 아쉬워하면서도 방금 전에 문에 홀려 끌려들어 갈 뻔한 경험을 했던지라, 곧장 알았노라 대답을 하고는 자리를 떴다.
“상급으로 등급이 재조정된 걸 축하한다.”
“가, 감사합니다. 이게 다 백작님 덕분입니다. 절대로 잊지 않을게요.”
최민영은 눈물을 흘리면서도 환하게 웃어 보였다.
“그깟 게 뭐가 중요하다고. 이해할 수가 없네.”
판이 투덜거리다가 다시 피리를 손에 꺼내 들었다.
“그럼 다시 시작하자. 아직 갈 길이 멀어.”
판은 기어이 환수사로 전직한 최민영에게 환수를 안겨줄 작정인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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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냐. 이놈도 아냐.”
“이놈은 너무 성질이 더러워.”
“이놈은 살이 너무 물렁해. 쓸 모가 없다고.”
“돌아가. 왜 부르지도 않은 놈들이 자꾸 나와.”
벌써 몇 번이나 소환이 시도되었고, 열린 문 너머로 얼마나 많은 환수들이 모습을 드러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을 지경이 되었다.
판은 그렇게 등장한 환수들을 모조리 문 너머로 돌려보냈다.
“아, 아직 감응력이 부족해서 그런가. 마운틴 웨일 말고는 쓸 만한 놈이 오지를 않네.”
판은 투덜거렸지만, 김선혁이 보기에는 그런 판이 도리어 이상해 보일 지경이었다.
적어도 그가 보기에는 이제껏 나타난 환수들 중에 대단해 보이지 않는 놈이 하나 없었다.
하늘을 유영하는 검은 고래, 꼬리가 셋 달린 가오리, 가시를 잔뜩 세운 고슴도치 같은 물고기까지. 어쩌면 환계라는 곳이 바다와 연결되지 않았나 싶을 정도로 나타나는 환수들마다 죄다 생선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는 게 문제였을 뿐이다.
“이제는 제물도 얼마 남지 않았네. 딱 두 번만 더 시도해보고, 소득이 없으면 문을 열어보는 데 익숙해졌다는 것에 의의를 두자고.”
그러고 보니 처음 소환 때까지만 해도 노크 스킬을 수도 없이 시도해야 열렸던 환계의 문이 어느 순간부터인가 한두 번의 시도만으로 열리기 시작했다. 나름대로 얻은 것이 없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래도….”
최민영은 여전히 포기를 모르듯 눈을 빛내고 있었다. 그녀는 어떻게든 환수를 얻어 김선혁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기대가 크면 실망이 큰 법이고, 욕심이 앞서면 몸이 고달픈 법이다.
“서두를 거 없다.”
그는 열의에 가득 찬 그녀를 달래주었다.
“이건 뭐….”
이번에는 웬 복어처럼 생긴 환수가 튀어나와 양 한 마리를 냅다 삼키고는 내쫓기도 전에 제 스스로 도망쳐 버렸다.
“끙. 이번에도 꽝이네.”
김선혁은 아무리 생각해도 소환술이라는 게 문방구 앞에 놓인 캡슐 뽑기와 비슷하게 느껴졌다. 제물을 걸고 환수를 뽑는 것이니 실제로 그리 다르지도 않았다.
그리고 놀라울 정도로 좋은 것이 안 뽑힌다는 것마저도 뽑기와 닮아 있었다.
“남은 건 소 한 마리, 양 두 마리. 정말 마지막 시도다.”
판의 말에 최민영이 주먹을 쥐어 보이며 입을 꾹 다물었다.
“노크.”
이제까지 읊어왔던 주문보다 몇 배는 간절함이 담긴 그녀의 낭랑한 음성에 또 한 번 세상의 일부가 일그러졌다.
“이번에는 아예 꼬인 놈도 없네.”
한참이나 기다려도 그 어떤 변화도 없는 환계의 문, 판이 심드렁한 얼굴로 입에서 피리를 떼어냈다.
“그냥 닫고 마무리하자.”
“조금만 더….”
최민영은 끝까지 기대를 놓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나타나는 환수는 없었고, 결국은 그녀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본딩(결합-Bonding).”
허공에 생겨난 틈을 메우는 주문이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음?”
그런데 뭔가가 이상했다. 어쩐 일인지 그녀의 주문에도 환계의 문이 닫히지 않은 것이다.
“본딩.”
최민영이 힘을 주어 다시 스킬을 발동시켰다. 하지만 여전히 문은 그대로였다.
“어?”
당황한 그녀가 몇 번이고 본딩 스킬을 시도했다.
“이, 이런!”
태평하게 있던 판이 사색이 돼서 나선 것도 그 때였다. 판은 자그마한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괴력으로 남아있는 소와 양들을 죄다 문 너머로 내던졌다.
“닫아! 빨리!”
“본딩! 본딩! 본딩! 아, 안 닫혀!”
그 다급한 외침에 최민영이 연달아 본딩 스킬을 시도해보았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허공에 생겨난 틈은 절대로 메워지지 않았다.
“아, 안 돼!”
판이 비명을 지르는 순간 환계의 문 너머에서 구슬프게 울어대던 양과 소의 울음소리가 뚝, 하고 멈췄다.
침묵은 길지 않았다.
꾸에에에엑!
문 너머에서 소와 양들의 비명소리가 울려 퍼진다 싶더니, 이내 무언가 찢겨 나가는 듯한 소리와 뼈가 바스러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닫아야 돼! 저 놈은 나오면 안 되는 놈이라고!”
판이 비명을 지르며 최민영을 다그쳐보았지만, 이미 몇 번이나 시도해봐도 문을 닫지 못한 그녀라고 뾰족한 수가 있을 리가 없었다.
“상황!”
김선혁은 단박에 뭔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투구의 얼굴 가리개를 내렸다.
“내, 내가 말했지? 용의 반려한테 달려들 정신 나간 환수는 없다고. 그 말은 만약 달려드는 놈이 있다면 앞뒤를 분간하지 못할 정도로 저능한 놈이거나, 또는 용을 두려워하지 않는 놈이라는 말이야.”
판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문 너머를 가리켰다.
“이번에는 어느 쪽이지?”
김선혁은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물었다.
“전자야.”
“그나마 다행이군.”
용을 두려워하지 않을 정도의 놈이라면 얼마나 강한 존재일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저 너머의 환수가 앞뒤를 분간하지 못할 정도로 머리가 나쁜 존재라는 사실에 안도했다.
그런데 그게 잘못된 생각이었던 모양이다.
“아니. 다행이 아니야. 차라리 후자가 나았을 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환계의 문을 비집고 무언가의 일부가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