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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 환계의 짐승 (2)
문 너머로 특정 환수들을 불러 모을 수는 있었지만, 그 틈에 변덕 심한 환수들이 끼어드는 것까지는 판도 어찌할 도리가 없노라 말했다.
“보통은 안 그렇지만, 가끔 가다가 유독 비협조적인 놈이 넘어오기도 하거든. 아니 그냥 말을 안 들으면 다행인데, 아주 드물게 소환사고 뭐고 눈에 보이는 족족 죽여야 직성이 풀리는 놈들이 있어서 말이야.”
고생이란 고생은 다 하고 겨우 발현에 성공한 능력, 그런데 기껏 얻은 힘이라는 게 제약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그냥 제약만 많으면 다행인데, 자칫 잘못하면 자신이 소환한 환수에게 살해당할 수도 있다니 뭐 이런 정신 나간 병과가 다 있나 싶을 지경이었다.
김선혁은 저도 모르게 최민영의 표정을 살펴보았다.
제발….
절실함 가득한 얼굴, 차라리 애원에 가까운 눈빛이 자신의 입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온갖 설움을 겪은 끝에 겨우 찾아낸 실마리다. 그녀가 지금 얼마나 절실하고 필사적일지는 그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 역시 용의 목소리를 듣기 전까지 딱 저러했었으니까.
“말해. 내가 뭘 하면 되는 건지.”
김선혁은 차마 그 눈빛을 외면할 수 없었다.
조마조마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던 최민영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판이 반색을 했다.
“오오! 도와줄 거야?”
김선혁이 고개를 끄덕여주자 판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그럼 일단 제물부터 부탁할게.”
결국은 물주가 필요했던 모양이다.
“어떤 제물?”
“뿔 달린 짐승, 그중에서도 아직 첫 출산을 하지 않은 암컷이 필요해.”
이번에도 가축이다. 자신의 아룡들을 먹이는 데 필요한 가축의 수만 해도 어마어마한 양이었다. 그런데 소환사의 소환에도 가축이 필요하다니, 이러다가 왕국 내의 가축을 자신이 다 없애는 건 아닌가 걱정이 될 지경이었다.
“얼마나?”
“많을수록 쓸 만한 놈이 나오겠지.”
김선혁은 한숨을 내쉬며 알겠노라 대답해주었다.
“날개 달린 짐승 몇 마리, 이건 많지 않아도 돼. 그리고 약간의 소금, 그리고 황금이랑….”
하지만 판의 부탁은 아직 끝이 나지 않았다. 판은 끊임없이 필요한 것을 늘어놓았다.
“일단은 이게 다야.”
한참이나 계속되던 요구가 겨우 끝이 났다.
“설마 매 소환마다 이 정도의 물품을 준비해야 하나?”
이 정도의 물품이라면 그녀가 귀족이 된다고 해서 당장 조달할 수 있는 양이 아니었다.
김선혁은 그게 걱정스러웠다.
한두 번쯤은 도와줄 수 있다. 하지만 이후에는 최민영 스스로가 제 능력을 감당해야만 했다. 자신이 언제까지고 그녀의 보호자 역할을 자처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럴 리가. 이번에는 어디까지나 첫 소환이라 그런 거야. 나중에는 약식으로 뿔 달린 짐승 한두 마리만 있어도 돼.”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그리고 말이야.”
끝난 줄 알았던 판의 요구가 또 있었다.
“또 있어?”
저도 모르게 물으니, 곁에 있던 최민영이 안절부절 못하는 얼굴로 그의 눈치를 살폈다.
“응. 있어. 제일 중요한 게 남았어.”
그에 반해 판은 뻔뻔해도 너무 뻔뻔했다.
“일단 말해봐.”
일단 들어나 보자는 심정으로 김선혁은 판을 재촉했다.
“소환이 시작될 때부터 무사히 끝이 날 때까지. 무조건 네가 곁에 있어야 돼.”
그렇지 않아도 환수라는 놈들이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 얼굴이라도 보고 싶던 차였다.
“도중에 이상한 놈이 튀어나오면 대신 처리해 달라는 건가?”
“아닌데?”
전투 능력이 없는 최민영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인가 싶어 물었더니, 판이 고개를 저었다.
“아냐? 어떤 놈이 튀어나올지 모른다며?”
“그거야 그렇지. 근데….”
모호한 대답이었다.
“아마 네가 직접 나서서 싸울 만한 일은 없을 걸?”
판이 한마디를 덧붙였다.
“과연 용의 반려에게 달려들 정도로 정신 나간 놈이 있을까?”
**
최민영은 당장에라도 소환술을 시도해보고 싶어 했지만, 판과 김선혁이 말렸다.
“필요한 물건을 구하려면 시간이 필요해. 여긴 물자가 풍족한 곳이 아니니까.”
김선혁은 물자를 조달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며 그녀를 달랬고, 판은 그녀가 지닌 감응력의 부족함을 이유로 시기를 뒤로 미루었다.
“원래 이런 건 첫 소환에서 제일 괜찮은 놈이 꼬이게 마련이거든. 그러니 기왕 제대로 하는 거, 조금 기다렸다가 하자고.”
최민영은 실망한 얼굴이었지만, 억지를 부리지는 않았다.
볼일을 마친 판은 인사도 없이 사라졌다. 어지간히 제멋대로인 환수였다.
“죄송해요.”
“신경 쓰지 않아.”
제멋대로인 환수를 대신해 하는 사과인가 하고 신경 쓰지 말라 답해주니,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니라, 너무 폐를 끼치는 것 같아서.”
아무래도 오해를 했던 모양이다. 그녀의 사과는 제멋대로인 판의 행동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그에게 지나칠 정도로 의존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상황에 대해 사과를 한 것이었다.
“백작님 말고는 다른 데 기댈 곳이 없어요. 그래서 더 죄송해요. 사실 이제까지 도와주신 것만 해도….”
“별소릴 다.”
김선혁은 대수롭지 않게 손을 흔들며 그녀의 말을 잘라냈다.
어차피 왕국 내의 소외받는 이방인들을 돕기로 작정하고 나섰을 때, 어느 정도 손해를 각오했던 그다. 게다가 돈이라면 왕실에서 하사받은 금과 재물만으로도 평생을 놀고먹을 정도로 쌓아둔 그에게 이 정도의 지출쯤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정 신경 쓰이면 나중에 갚든지.”
그의 말에 최민영이 다부진 눈빛을 해 보였다.
“이자까지 쳐서 꼭 갚을게요.”
그녀는 고마움을 넘어 반드시 보은하고 말리라는 사명감에 불타는 것처럼 보였다. 다시 나타난 판이 그런 그녀의 각오를 무색하게 만들었다.
“깜빡하고 말 안 했는데.”
불쑥 모습을 드러낸 판이 최민영과 김선혁을 묘한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과거의 소환사들은 소환사이기 이전에 강력한 마법사였어. 어떤 미치광이 환수가 튀어나와도 자신을 지키고 문 너머로 쫓아낼 능력이 있었다는 말이지.”
그 말에 김선혁이 설마, 하는 얼굴로 판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스스로를 지킬 능력이 없는 이상, 앞으로도 네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어.”
결국은 그의 생각과는 달리 최민영을 돕는 게 이번 한 번으로 끝날 가능성이 없다는 말이나 다름이 없었다.
“아….”
그녀의 눈동자가 마구 흔들리다 그에게 넘어왔다.
“음.”
그 눈빛을 마주 보며 김선혁은 싫든 좋든 앞으로도 그녀와 얽힐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결혼도 안 했는데 부양가족만 생기는 느낌이네.”
어찌 된 게 아룡들도 그렇고, 아리아 아이젠도 그렇고, 줍는 족족 유지비가 많이 나가는 족속들뿐이었다.
어쨌건 간에 최민영이 그에게 갚아야 할 빚은 앞으로도 더욱 늘어날 모양이었다.
**
이방인들의 훈련은 계속되었다. 그들은 시간이 갈수록 골드레이크와 레드번의 살기에 적응해갔고, 그럴수록 그는 훈련의 강도를 높였다.
그 동안 김선혁은 첫 소환에 필요한 물자를 요새로 조달해왔고, 마침내 필요한 모든 준비가 끝이 났다.
남은 것은 최민영이 10레벨에 도달하여 부족한 감응력을 조금이라도 끌어올리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그게 영 쉽지가 않았다. 9레벨에 오르고도 한참이나 시간이 지났건만, 도무지 레벨업의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럴수록 그녀는 더욱더 자신을 혹사시켰고, 어떻게든 성장하기 위해 몸부림을 쳤다.
그 결과 그녀는 마침내 레벨업을 이룰 수 있었다.
팟!
찬란한 빛무리가 터져 나와 그녀를 감싸 안았다.
단순한 레벨업은 이 정도로 극적인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 이런 오색찬란한 섬광은 오직 전직에서만 일어나는 현상이었다.
“역시….”
김선혁은 자신의 예상이 맞아떨어졌다는 생각에 회심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2차 전직을 축하한다.”
그는 여전히 멍한 얼굴로 허공을 훑어보는 최민영에게 축하의 말을 건넸다.
“가, 감사합니다.”
뒤늦게 그의 말에 답례를 하는 그녀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그는 가만히 그녀가 2차 전직이 주는 환희와 여운으로부터 정신을 차리고, 전직 병과를 알려주기를 기다렸다.
“환수사(Illusion Beast Tamer)….”
“엑! 이건 말도 안 돼. 감응력도 부족한 햇병아리가 어떻게!”
판은 그녀의 전직에 상당히 놀란 눈치였다.
“환수사라는 건 일정 수준에 오른 소환사들 중에서도 일부만이 얻을 수 있는 칭호였다고!”
환수는 그녀의 기형적인 성장에 정신없이 호들갑을 떨었다.
“안 좋은 거야?”
“그걸 말이라고!”
걱정스레 묻는 그녀를 보며 판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당연히 좋은 거지! 소환사가 단순히 문을 여는 존재라면, 환수사는 그렇게 열린 문 너머로 튀어나온 환수를 길들일 수 있는 대단한 존재라고!”
최민영은 기쁜 나머지 그 자리에 주저앉아 펑펑 울었고, 김선혁은 다시 한 번 그녀의 전직을 축하해주었다.
“물론 당장 환수사가 된다고 해서, 환수를 얻을 수 있는 건 아니야. 환수와 환수사는 어디까지나 궁합이 맞아야 하거든. 환수사라고 해서 아무 놈이나 길들일 수 있는 건 아니니까.”
판이 환수사의 어려움에 대해서 말해주었지만, 그녀는 그것만 해도 어디냐며 더욱더 펑펑 울어댔다.
“그럼 바로 시작하자. 감응력도 제법 올랐고, 환수사라면 최대한 자주 소환을 시도해봐야 해. 어떤 놈이 자신하고 맞는 놈인지 모르니까.”
여전히 주저앉아 흐느끼는 그녀를 판이 다그쳤다.
“빨리! 빨리!”
신이 나서 외쳐대는 판이나 울면서도 벌떡 몸을 일으키는 최민영이나 웃고 있는 건 매한가지였다.
“잠시만. 불러올 사람이 있어서.”
김선혁은 깁슨 교관을 불렀다.
“하급 병과, 소환사 최민영의 등급 재조정을 정식으로 요청하지.”
“드디어!”
진즉부터 그녀의 존재가 어쩌면 용기병처럼 특별한 존재가 아닌가 의심해왔던 깁슨이 그의 말에 반색을 했다.
“일단 저기 있는 저 이상하게 생긴 꼬맹이도 그녀의 소환수다.”
“꼬맹이라니! 너보다 훨씬 더 오래 살았다고!”
버럭 소리를 치는 환수의 모습에 깁슨이 얼빠진 표정을 해 보였다.
“뭐야, 그 건방진 눈빛은.”
사내아이도 염소도 아닌 반인반수의 모습, 깁슨이 판의 모습을 신기하다는 듯이 살펴봤다. 그런데 그게 판의 심기를 건드린 모양이다.
용기병의 위엄에 눌려 그간 내내 당하는 입장이었던 판의 표정이 살벌하게 변하더니, 갑작스레 깁슨이 바닥에 주저앉아 머리를 감싸 쥐었다.
“히익!”
바람 빠지는 듯한 신음소리와 함께 비명을 질러대며 버르적거리는 그의 모습이 흡사 귀신이라도 본 듯했다.
“적당히 해둬. 그녀의 미래에 중요한 친구니까.”
이미 판의 능력을 알고 있던 그는 단박에 상황을 알아차리고 판을 제지했다.
“흥!”
하지만 판은 그의 말을 모른척했고, 김선혁은 슬며시 드래곤 피어를 끌어올렸다.
약삭빠른 판은 그의 기세가 슬쩍 변하자 재빨리 깁슨을 원상태로 돌려냈다.
“괜찮나?”
“배, 백작님. 방금 그게 대체 무슨….”
정신을 차린 깁슨은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혼란스러운 얼굴이었다.
“그게 최민영의 환수가 지닌 힘이다. 적의 공포를 끌어내고, 아군의 두려움을 배제하는 능력이지.”
깁슨은 생전 듣도 보도 못한 능력에 얼떨떨한 가운데에도 상당히 놀라워했다.
“이 정도만 해도 중급으로의 등급 조정은 확실합니다!”
제 몸으로 직접 겪었으니 위력이야 의심할 나위가 없었을 것이다. 흥분해 떠들어대는 깁슨을 보며 김선혁이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중급 정도로 만족할 거였으면, 오늘 이 자리를 마련하지도 않았을 거다.”
전쟁의 판도 자체를 바꿀 수 있는 판의 능력은 고작 중급을 매기기에는 지나치게 훌륭했지만, 그는 그 사실을 지적하지 않았다.
입 아프게 설명해주지 않아도 새로운 환수를 보고 나면 깁슨도 그녀의 병과가 상급 이상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거라 여겼던 탓이다.
“그러니 똑똑히 지켜보도록.”
김선혁의 말에 깁슨이 입을 다물고 판과 최민영을 바라보았다.
“되게 말 많은 인간이네.”
말이 많은 걸로 치면 이 자리의 어느 누구보다 떠벌떠벌 거리기 좋아하는 판이었지만, 제 스스로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눈치였다.
“그럼 이제 시작해도 되는 거지?”
김선혁은 대답하는 대신 최민영을 바라보았다. 어차피 소환의 주체는 그녀이니 그녀의 의사가 중요했다.
“시작하자.”
비장한 얼굴을 한 최민영이 눈짓을 해주자 판이 피리를 꺼내 들었다.
“노크(Knock)!”
그녀가 스킬을 시행하자, 아무것도 없는 허공 너머가 출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