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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 환계의 짐승 (1)
골드레이크나 레드번에 올라탔다면 모를까. 홀로 오십 명이 넘는 중급 병과의 이방인들을 상대하는 것은 김선혁에게도 꽤나 버거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기세로 힘의 열세를 극복했다.
손이 모자랄 때면 어김없이 드래곤 피어를 발산했다.
“어으….”
그때마다 검을 쥐고 달려들던 거검병들은 기괴한 신음을 내뱉어댔다. 살기에 굳은 몸은 어정쩡하게 멈춰선 채였다.
김선혁은 그렇게 몸이 굳은 이들을 정리해나갔다. 그리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났을 때, 공터에는 그의 살기에 노출되어 넋을 놓아버린 이들과 광풍에 휘말려 혼절해버린 이들만이 남아있게 되었다.
“장담컨대 너희들이 전장에서 처음으로 마주할 적들의 살의와 악의는 방금 전에 나에게 느낀 공포 이상일 것이다. 그걸 넘어서지 못하면 결국 손발이 굳어 목이 베이고 사지가 절단 나게 되겠지.”
한참이나 시간이 흘러 겨우 정신을 차린 이방인들에게 김선혁은 경고했다.
“명심해라. 검력 가득한 검에 베이든, 겁먹은 창병이 내지른 창에 찔리든 죽는 건 마찬가지다. 너희들이 가장 먼저 극복해야 할 건, 두려움이다.”
실전과도 같은 훈련이라는 말은 말장난에 불과했다. 이 세상에 진짜 실전과 똑같은 훈련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가 아무리 드래곤 피어를 뿜어대며 살기에 적응을 시켜도, 저들 중 상당수는 실전에 들어가자마자 겁에 질려 제 기량의 반의반도 발휘하지 못할 게 분명했다.
그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날 때마다 드래곤 피어로 그들을 담금질했다.
이런 행위가 단 한 명의 사상자라도 줄일 수 있기를 그는 간절히 바라고 또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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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민영 역시 실전과도 같은 훈련에 참가했다. 다른 병과의 이방인들과는 달리 전투에 관련된 기술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그녀는 그저 살기를 체험해보는 게 고작이었다. 하지만 얻은 것이 적지는 않았다.
무능력한 덕분에 도리어 그 어떤 위협에도 노출되지 않았던 그녀는 난생 처음으로 죽음에 대한 공포를 느꼈다.
그리고 그 생경한 감정은 그녀의 내부에 깊게 잠들어 있었던 무언가를 깨워냈다.
[…만…….]
처음에는 그녀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작은 변화에 불과했다. 강도 높은 훈련과 극에 달한 스트레스로 일과가 끝이 나자마자 곯아떨어지기 바빴던 그녀는 스스로를 관조할 여유 따위는 갖고 있지 않았다.
[…발…….]
거듭 살기에 노출될수록 그녀의 내부에서 일어난 변화가 조금씩 선명해져 갔다. 하지만 여전히 그녀는 자신의 내부에서 일어난 변화에 무지했으며, 아무런 조짐을 발견하지 못했다.
“아까 넘어질 때 잘못 부딪혔나. 자꾸 이명이….”
그렇게 간절히 원하던 변화, 그 사실을 알아차리는 게 마냥 쉽지는 않았다.
하지만 변화는 마치 알아달라는 듯이 끊임없이 그녀에게 속삭였다. 그리고 그렇게 시작된 마음속의 울림이 마침내 그녀에게 닿았다.
[제발 날 좀 봐줘.]
“어?”
최민영은 선명한 속삭임에 순간적으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다들 고된 훈련에 지쳐 입을 꾹 다문 채 어느 하나 자신에게 관심을 두는 이가 없었다.
[멍청아! 날 보라고!]
버럭 소리를 질러오는 정체불명의 무언가, 그녀는 곧장 자신에게 일어난 기이한 변화를 김선혁에게 말해주었다.
“제가 둔해서 조금 늦게 알아차렸지만, 아무래도 살기에 적응하는 훈련을 시작하고 나서부터 뭔가가 변한 거 같아요.”
설명을 들은 김선혁은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래? 그럼 확인해보면 되겠네.”
최민영은 그의 말이 뭘 이해하는지 미처 깨닫지 못했다. 하지만 금세 피어오르는 끔찍한 기세에 그가 뭘 하려는지 알게 되었다.
“그게 뭔지 모르지만, 계속해서 자극하다 보면 기어 나오겠지.”
그렇게 말한 김선혁의 기세가 한층 더 살벌해졌다.
“어렵게 찾은 실마리다. 놓치고 싶지 않으면 견뎌내도록.”
경고라고 하기엔 너무 늦었다. 하지만 이미 기세를 끌어올린 그에게 그녀는 그 어떤 항변도 하지 못했다. 그저 그 압도적인 격의 차이에 무릎을 꿇고 억눌린 신음소리만을 내뱉었을 뿐이었다.
[제발 그만하라고! 이 무식한 놈아!]
그런 그녀를 대신해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 허약한 애를 죽일 참이야! 적당히 하라고!]
신경쇠약에라도 걸린 듯 히스테릭한 음성은 차라리 적대적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아무리 따져봐야 목소리는 그저 최민영의 머릿속에서 울려댔을 뿐, 김선혁에게 닿지 않았다.
결국 목소리의 주인은 직접 모습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펑!
방정맞은 소리와 함께 나타난 기괴한 생명체가 버럭 화를 냈다.
“그만 좀 해! 내 말 안 들려!”
검은 털이 수북한 하체는 두 발로 선 염소의 그것과 똑같았고, 상체는 어린 남자아이의 모습이다. 과격하게 휘어버린 두 개의 뿔은 마디가 빼곡해 마치 오래된 골동품을 보는 것 같았다.
어리고 오래된, 공존할 수 없는 느낌이 공존하는 괴 생명체는 앵앵대는 음성으로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도대체가 말이야! 왜 그렇게 애를 못 살게 굴어서 안달인데! 그냥 좀 내버려두면 어디가 덧나?”
김선혁은 염소도 아니고 그렇다고 인간도 아닌 반인반수(半人半獸)를 보며 회심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잡았다. 요놈.”
**
최민영이 정신을 차린 것은 반인반수가 모습을 드러내고도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아….”
드래곤 피어의 여파로 아직까지 멍한 기색이 남은 얼굴이었지만, 그녀는 제 몸을 추스르는 것보다 괴 생명체를 먼저 확인했다.
“아무래도 저 녀석이 네 환수인 모양이다.”
최민영을 다그쳤더니 나타난 기이한 생명체, 달리 다른 놈일 수가 없었다. 그는 저 염소를 닮은 남자아이야말로 그녀가 기다리던 환수라고 확신했다.
“아….”
최민영의 표정은 복잡했다.
그렇게 소환에 응답하기를 바랐던 환수를 마침내 만나고야 말았다는 기쁨과, 도대체 왜 이제야 모습을 드러낸 건지 원망이 엉망진창으로 얽힌 듯한 모습이었다.
“바, 반가워.”
환수는 가당치도 않게 몸을 비비 꼬며 어색하게 그녀에게 인사했다.
“너….”
그런 환수를 보며 최민영이 몇 번이나 입을 벙긋거리다 도로 다물었다. 아무래도 할 말이 쉬이 나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이름이 뭐야?”
한참 만에 겨우 입을 연 그녀의 질문에 환수가 힐끔거리며 김선혁을 곁눈질하더니 입술을 달싹거렸다.
소환사가 아닌 이에게 별로 이름을 밝히고 싶지 않았는지, 뭔가 그가 듣지 못하는 방식으로 의사를 전달하는 듯한 모양새였다. 텔레파시 같은 것이라도 보내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런 노력도 무색해지고 말았다.
“판? 그게 네 이름이야?”
최민영이 소리 내어 환수, 판의 이름을 언급한 것이다.
“아이씨! 환수의 이름을 그렇게 쉽게 다른 사람한테 밝히는 사람이 어딨어!”
판이 버럭 성질을 냈지만, 그녀는 그저 눈만 동그랗게 떴을 뿐이었다.
“그럼 안 되는 거야?”
“당연하지! 이름이 얼마나 중요한 건데!”
“나야 모르지. 너랑 만난 것도 오늘이 처음이고, 내가 소환사라는 걸 실감할 만한 일도 없었는걸.”
다소 뼈가 있는 최민영의 말에 판이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대체 이제까지 왜 안 나타났던 거야?”
그녀의 질문에 판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포기하지 않고 집요하게 이유를 캐물었다.
환수가 없는 소환사라 얼마나 무시를 당하고 서러움을 당했던가. 이유라도 듣지 않으면 성이 풀리지 않을 만도 했다.
“내가 일찍 모습을 드러냈다면, 너는 이용만 당했을 테니까.”
말투는 어린아이 같고, 하는 짓도 딱 앳된 얼굴만큼이나 철이 없어 보이는 환수였지만 이때만큼은 그 어조가 꽤나 진지하기만 했다.
하지만 김선혁은 코웃음을 쳤다.
“멍청하군. 그냥 아무에게도 네 존재를 말하지 말라고 했으면 그만이었을 텐데.”
진지한 것에 비해 영양가라고는 없는 멍청하기 짝이 없는 변명이었다.
“어?”
그 말에 판이 뒤통수라도 한 대 맞은 듯한 얼굴을 해 보였다. 정말로 그런 방법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 그게 아냐! 그때는 내가 모습을 드러내기에는 이 아가씨의 감응력이 너무 부족했다고!”
뒤늦게 입을 연 판이 떠들어댔지만, 그래봐야 이미 얄팍한 속내가 전부 들통이 난 뒤라 설득력이 조금도 없는 궁색한 변명일 뿐이었다.
“그럼 처음부터 그렇게 말을 하든가.”
“이익!”
김선혁이 비아냥거리자 판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숨을 몰아쉬었다.
환수라고 해서 기대했더니, 어디서 되다 만 놈이 나왔다.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최민영을 살펴보았다.
몇 년 동안이나 환수도 없이 허울뿐인 소환사로 갖은 설움을 당해야 했던 그녀는 그와는 다르게 전혀 실망하지 않은 기색이었다.
아무짝에도 쓸모없어 보일 뿐인, 심지어 멍청하기까지 한 환수라고 해도 그녀는 드디어 능력이 발현되었다는 사실에 고무되어 한껏 상기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마음에 안 들어. 저 사람이 있는 데서는 더 이상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을 거야.”
차라리 제 이름을 밝혔던 그때처럼 직접 그녀에게 의사를 전달하면 그만일 것을, 판은 굳이 그가 있는 곳에서는 말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말 그대로 심술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슬슬 비켜주려던 참이니까 환수 씩이나 돼서 그렇게 투정 부리지 마.”
“흥.”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홱, 하고 돌리는 환수의 행동이 영락없는 어린아이의 모습이었다. 다시 한 번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김선혁이 최민영에게 말했다.
“저 놈의 능력이 뭔지 잘 파악해보도록. 안타깝지만 지금으로서는 저놈이 네 유일한 희망일 거 같으니까.”
놀리는 기색이 역력한 그의 말에 최민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 가라고! 빨리!”
판이 그런 그를 보며 손까지 훠이훠이 흔들어대며 소리를 질러댔다.
**
환수라는 놈은 생각했던 것과 전혀 다른 존재였다. 뭔가 신비로운 존재를 떠올렸더니, 막상 모습을 드러낸 판은 차라리 인간에 가까웠다.
하지만 언행이 방정맞다고 해도 판의 외모는 결코 이 세상의 것과 닮지 않았고 이질적이었다. 염소와 사람이 합쳐진 듯한 모습은 그 자체로 기괴하고 비현실적인 것이었다.
판이 어떤 능력을 지니고 있을지, 지금의 김선혁으로서는 전혀 가늠할 수조차 없었다. 부디 최민영이 기다려온 몇 년간의 세월이 아깝지 않을 능력을 갖고 있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방정맞은 환수와의 대화가 끝이 났는지, 그를 찾아온 최민영이 판의 능력을 설명해주었다.
“판은 상대의 전의를 꺾고, 겁에 질리게 만드는 능력이 있는 환수예요. 반대로 같은 편에게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고 꺾이지 않는 투지를 전염시키는 능력이 있대요.”
다행스럽게도 그의 바람은 빗나가지 않았다.
실전에서 몸이 굳고 제 역량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이유는 살인에 대한 거부감도 있었지만, 결국은 제 스스로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가장 컸다.
그런데 판이 그 공포를 완화시켜줄 수 있다니 이보다 더 적절할 수가 없었다.
“지금 딱, 필요한 능력이군.”
화색을 띄는 그에게 최민영은 판의 능력이 비단 그것 하나뿐이 아님을 알려주었다.
“소환사는 저 너머에 존재하는 환계라는 세상과 이곳 세상을 연결하는 문을 열 수 있는 존재래요.”
그녀의 설명에 의하면 소환사는 환수들이 살아가는 환계와 이 세상을 연결하는 매개체였다.
하지만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그렇게 열어젖힌 문 너머로 도대체 어떤 환수가 뛰쳐나올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뭐, 그런 황당한 능력이….”
그녀의 말대로라면 소환사의 소환술은 그야말로 도박이나 다름이 없었다. 아니, 그보다는 차라리 무작위 뽑기에 가까웠다.
정령사의 정령술처럼 환수와 계약을 맺고 힘을 빌려 쓰는 개념일 거라 예상했던 그의 생각이 빗나가도 한참은 빗나가버렸다.
“그걸 이 몸이 해결할 수 있다는 말씀!”
또다시 방정맞은 펑, 소리와 함께 나타난 판이 거들먹거리며 말했다.
“이 피리만 있다면 말이지.”
방금 전에 멍청하다고 괄시받은 것이 마음에 걸렸는지 판은 김선혁을 똑바로 바라보며 보란 듯이 피리를 내보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변덕 심한 환수들을 완벽하게 유도할 수는 없다는 게 문제야. 그래서 말인데.”
판은 뻔뻔스러운 얼굴로 지껄여댔다.
“문 좀 여는 거 도와줄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