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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 각성의 조건
그간 당해온 차별과 서러움이 아직 완전히 가신 것은 아닌 모양이다. 이수혁은 자신들을 이끌어준 김선혁을 은인으로 떠받들었고, 기왕이면 그의 지휘를 받고 싶은 기색이 역력했다.
다른 이방인들 역시 이수혁과 크게 다르지 않은 얼굴이었다.
“그건 아무래도 힘들 것 같군.”
예순 명의 이방인의 수는 낙오된 일곱을 제외하면 쉰다섯에 달했다. 그들이 별다른 이변 없이 모두 2차 전직에 성공할 경우, 한데 모인 그들의 힘은 일백으로 구성된 기사단 이상이었다.
왕실이 그런 엄청난 힘이 개인에게 주어지는 것을 가만히 두고 볼 리가 없었다. 아무리 그가 왕녀의 약혼자이자 왕실의 신임을 두텁게 받는 이라고 해도 그건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었다.
하물며 지금 시기는 이방인들이 난을 일으켜 한창 여론이 좋지 않은 시기였다. 설령 왕실이 허락하더라도 귀족들이 기를 쓰고 딴지를 걸 게 분명했다.
“아….”
그의 말에 이수혁을 비롯한 이방인들이 눈에 띄게 실망을 한 얼굴이 되었다. 아무래도 밑바닥을 기던 자신들을 이끌어준 그에게 느끼는 고마움이 예상보다 훨씬 더 큰 모양이었다.
“되도록이면 다른 곳에서는 이런 이야기는 하지 않는 게 좋겠어.”
그의 말에 이방인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 역시 악화된 여론에 뭇매를 맞지 않았던가. 그가 우려하는 바가 무엇인지 모두가 아는 눈치였다.
“그래도 언젠가는 꼭 대장님 밑에서 싸우고 싶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포기하지 않았고, 다음을 기약했다.
“나도 부디 그런 날이 오기를 바라도록 하지.”
김선혁은 적당히 대답을 해주고는 자리를 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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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이방인들이 하나둘 2차 전직에 성공하고 있었지만, 소환사 최민영은 여전히 능력을 발현할 실마리조차 찾지 못한 상태였다.
다른 하급 병과의 이방인들은 훈련을 통해 비약적인 레벨업을 이루었고, 30레벨에 도달하는 순간 2차 전직을 했다. 그런 데 비하면 아직 10레벨에도 이르지 못한 그녀의 성장은 비정상적일 정도로 느린 편이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김선혁은 그녀의 병과가 평범한 하급 병과와 다른 것임을 확신했다.
용기병이 딱 그러했다. 강정태를 비롯한 이방인들이 쑥쑥 성장해 근 10레벨에 달하는 동안 그는 고작해야 3레벨이 되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느린 성장 끝에 얻은 능력은 다른 병과에 비할 바가 아니었고, 그때 그는 성장이 느릴수록 강력한 병과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다면….”
그런 면에서 최민영은 충분히 기대할 만했다. 어쩌면 그녀 역시 그가 그랬던 것처럼 10레벨에 2차 전직을 맞이하게 될지도 몰랐다.
“보일 때까지 굴리면 그만.”
김선혁은 지독스러울 정도로 그녀를 혹사시켰다.
1차 전직 상태에서 아무런 능력의 발현을 기대할 수 없다면, 강제로 2차 전직을 시켜버리면 그만이었다. 그때도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다면, 또 한 번 전직을 시키면 언젠가는 그녀 스스로 능력을 발현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단순한 신념이었지만, 그 스스로가 그렇게 성장해왔다. 수백 번 죽을 고비를 넘기며 가혹한 전장에서 성장한 그에 비하면 오히려 그녀의 상황은 나은 편이었다.
다만 그녀의 성장이 근력과 지구력과는 관계없는 감응력이라는 듣도 보도 못한 능력 위주였다는 게 문제였을 뿐이다.
하지만 그조차도 그는 수 속성 지배력을 통한 회복이라는 사기적인 방법을 통해 극복해냈다.
쓰러지면 다시 일으키고, 또 쓰러지면 다시 일으켰다.
다른 이들이 보기에는 그 모습이 끔찍하기만 했다. 어쩌면 김선혁이 최민영을 괴롭히기 위해 저러는 것은 아닐까 생각이 들 지경이었다.
“혹시 첫 만남에서 뭔가 실수한 건 아닐까?”
“뭔가 밉상 짓을 했겠지. 그렇지 않고서야 대장님이 저렇게 괴롭힐 리가 없어.”
차라리 형벌에 가까운 훈련, 하지만 최민영은 꿋꿋이 견뎌냈다. 여린 체구 그 어디에 그런 저력이 있었는지 지켜보던 교관들마저 혀를 내둘렀다.
“둘 다 독하다. 독해. 시키는 사람이나, 그걸 또 그대로 하는 사람이나.”
“저러다 원수지는 거 아닌가 몰라.”
심지어 최민영이 이 험악한 훈련에 앙심을 품는 건 아닌가 걱정하는 이마저 생겨났다. 하지만 이는 둘의 관계를 몰랐기에 생겨난 오해였다.
“우리 주둔지에 있었던 검병은 벌써 9레벨이 됐는데, 나만 3레벨이었다. 기분이 어땠을 거 같아? 가뜩이나 관련 병과도 아닌 기병대에 배속돼서 죽을 맛이었는데, 정말 기분 더러웠지.”
김선혁은 일과 시간이 끝이 난 뒤에는 늘 그녀에게 자신이 겪어온 고난을 이야기해주었다. 알맹이가 빠진 용기병과 소환사라는 공통분모 아래서 그녀는 그의 이야기에서 많은 위로를 얻는 듯 보였다.
훈련 중 보였던 독기도 이때만큼은 눈 녹듯이 녹아 보이지 않게 되었고, 그녀는 마치 침대맡에서 들려주는 옛날이야기라도 듣듯 평화로운 표정으로 그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저도 정말 그런 경우일까요?”
“장담하지. 이 정도로 레벨업이 느린 병과는 용기병 말고는 본 적이 없어.”
김선혁의 장담에 그녀는 안심한 얼굴로 잠이 들었다.
**
제 스스로 기회를 걷어찬 일곱의 열외자와 최민영을 제외한 모든 이방인들이 2차 전직을 끝마쳤다. 단기간 동안 얼마나 강도 높은 훈련을 해왔는지, 그때가 김선혁과 이방인들이 요새에 돌아오고 채 네 달이 되지 않았을 무렵이었다.
“하지만 아직 끝이 난 게 아니다. 오늘부터는 실전에 준하는 훈련을 하도록 하겠다.”
이제까지 해온 훈련의 강도만 해도 실전에 못지않았다. 그런데 김선혁의 말은 마치 이제부터가 시작이라는 투였다.
“많은 이방인들이 첫 실전에서 전사했다. 나는 너희들이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란다.”
실제로 많은 이방인들이 첫 실전을 넘기지 못했고, 김선혁 역시 사스테인 기병단과의 전투에서 돌격 직후 넋을 잃고 말았다.
“그러니 이번에도 군소리 없이 내 방식에 따라줬으면 한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그의 으름장에도 이방인들은 여전히 밝은 얼굴이었다. 하기야 전원이 2차 전직에 성공하여 중급으로 등급이 상향되었으니 사기가 최고조에 오른 그들에게 걸리는 게 뭐가 있겠는가.
“부디 그 마음 변치 않기를 바라지.”
하지만 그런 그들조차도 김선혁의 이어진 말에는 불안해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들의 불안감은 금세 현실이 되었다.
크아아아아아!
굳게 닫혀있던 요새의 문이 열리고, 금빛 괴수가 요새 내로 난입했다.
“으악! 괴물이다!”
“저, 저게 뭐야!”
성벽 너머로 이따금씩 보아왔던 괴수가 눈앞에 나타나 흉성을 터뜨리자 이방인들은 완전히 혼비백산하고 말았다.
이제껏 해온 강도 높은 훈련과 2차 전직을 하며 깨우친 스킬이 무색한 광경이었다.
갑작스레 달려드는 괴수를 피해 이리저리 도망을 다니는 이들로 소란이 벌어졌고, 공들여 연마했던 밀집대형은 금세 엉망이 되었다.
“쯧. 예상은 했지만, 가관이다. 가관이야.”
김선혁은 그 모습을 보며 혀를 찼다. 아무리 성장을 거듭해온 골드레이크가 과거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흉폭한 맹수가 되었다고 해도, 이건 해도 해도 너무했다.
“역시 실전을 겪기 전에는 풋내기일 수밖에 없군.”
강력한 스킬이 있으면 뭐 하나. 당장 써먹지를 못하는데.
김선혁은 실망한 기색이었지만, 마냥 저들을 탓할 수만도 없었다. 상급 병과인 마검사 김우영도 첫 실전에서는 창병 하나만도 못한 모습을 보였다. 아무리 강도 높은 훈련을 받았어도 훈련은 결국 훈련인 것이다.
게다가 골드레이크가 지금 보이는 살기는 거짓이 아니었다. 이 금빛 괴수는 기본적으로 포악하고 사나운 존재였고, 상대를 봐주는 법이 없었다.
만약 용기병대장에 오르며 얻은 지휘 능력이 아니었다면, 골드레이크는 진즉에 저들을 씹어먹었을 것이다. 실제로 레드번은 몇 번이나 골드레이크에게 살해당할 뻔하기도 했다.
골드레이크에게 ‘적당히’라는 말은 존재하지 않았다.
“수호병! 앞으로!”
누군가가 소리를 지르며 앞으로 나섰다.
“호오. 역시 그래도 참전 경험이 있는 놈이 개중 낫군.”
서부 전선 출신의 이방인 장태산이 혼란에 빠져든 동기들을 수습하고 나섰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이수혁이 새롭게 지급받은 양손대검을 들고 뛰쳐나왔다.
쾅!
“거검병이 나서서 견제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양손대검을 꽉 움켜잡은 거검병 몇이 튀어나와 골드레이크를 후려쳤다.
“시간 벌 동안 대열 정비하… 어?”
기특한 모습이었지만, 딱 그뿐이었다. 수많은 실전 끝에 완성된 골드레이크의 맷집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터프했다. 그중에서도 가슴과 목둘레를 둘러싼 돌기는 어지간한 기사들도 상처를 입힐 수 없는 단단한 것, 황급히 내지른 이수혁과 거검병들의 공격에 골드레이크가 물러날 리가 없었다.
“으악!”
거대한 머리통에 들이받힌 이수혁과 거검병들이 사방으로 날아갔다. 뒤늦게 대열 비슷하게나마 모여들었던 수호병들이 중앙으로 뛰어든 괴수의 몸짓에 이리저리 튕겨져 나갔다.
크아아아아아!
간신히 전열을 정비했던 이방인들을 도로 흩어놓은 골드레이크가 사납게 포효하며 다시 난동을 부리기 시작했다.
**
“완전히 엉망진창이야. 이게 정말 실전이었다면 전부 죽어 나자빠졌어도 할 말이 없다.”
만신창이가 된 오십여 명의 이방인들이 그의 말에 고개를 푹 꺾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밀집한 거지? 그깟 방패 하나로 저만한 괴수의 돌격을 막을 자신이 있다고 생각한 건가? 그리고 거검병들은 왜 이제껏 배운 대로 거리를 유지하지 않았지? 사방에서 둘러싸고 견제를 했다면 골디의 돌격력을 분산시킬 수 있었을 거라고 생각한 적 없나?”
“그, 그게 너무 갑작스러워서….”
모두가 중급 병과에 오른 뒤로 한동안 김선혁은 온화하게 그들을 대했다. 하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기습이라도 당하면 아주 난리 나겠어.”
그는 신랄하게 한마디를 쏴주고는 계속해서 지적을 이어갔다.
“저격병은 대체 뭐 하고 자빠져 있었는지, 화살 한 발 보이지 않더군. 방패병과 거검병이 정신을 못 차리면 니들이 나서서 견제를 해야 할 거 아냐!”
버럭 소리를 지르니 다른 병과에 비해 비교적 멀쩡한 모습을 하고 있던 저격병들이 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죄송할 거 없어. 실제 전투였다면 죽는 건 너희들이지, 내가 아닐 테니까.”
김선혁은 작정하고 쏘아붙였다.
“뭐? 이래가지고 언젠가 같이 싸우고 싶다고? 아서라, 아서. 너희들의 뭘 믿고 등을 맡기겠어.”
“다시 기회를 주십시오!”
그나마 선전했던 몇몇 이방인들이 나서서 다시 한 번 기회를 달라 했다.
김선혁은 당연히 그럴 생각이었다.
빼애애애액!
다만 이번에는 골드레이크가 아닌 레드번이 저들의 실전 교육을 담당했다는 것만이 달랐을 뿐이다.
캬아아아아악!
레드번은 신이 나서 이방인들을 하나씩 들어 올렸다가 저 멀리 내팽개쳤다. 이번에도 이방인들은 속수무책이었고, 저격병들만이 이따금씩 의미 없는 사격을 가했을 뿐이었다.
“다시 한 번만!”
김선혁은 또 기회를 주었다.
“어디 한 번 막아봐.”
이번에는 거창을 손에 거머쥔 그가 직접 나섰다.
“수호병! 앞으로!”
“거검병 산개!”
그래도 두 번이나 괴수의 공격을 경험하며 나름대로 실전감각을 익힌 것인지, 그도 아니면 이번에는 상대가 인간이었기에 비교적 만만하게 여긴 것인지. 아무리 봐도 후자 같았다.
“골디나 레드번보다는 내가 상대하기 낫다는 거군.”
김선혁은 거창 끝에 바람을 둘렀다. 그리고 동시에 아티야를 소환했다.
“합!”
이제는 완숙을 넘어 경지에 이른 그의 풍 속성 지배력이 사방에 퍼져 나가며 거검병들의 중심을 흐트러트리고, 방패를 세운 수호병들을 밀어냈다. 저격병들이 쏘아올린 화살 역시 바람에 휘날려 엉뚱한 곳으로 날아가 버렸다.
“안 들어오면.”
갑작스러운 광풍에 얼이 빠진 이방인들을 바라보던 김선혁이 씨익 웃어 보였다.
“내가 들어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