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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 특이 병과의 이방인 (2)
“손정태. 강호중, 박연성. 순서대로 4조에서 6조.”
호명을 받은 이방인들이 각자 자신에게 배정된 조를 찾아 이동하고, 이제 남은 것은 평범한 인상을 한 여인 하나였다.
“아….”
그녀는 마지막까지 자신의 이름이 호명되지 않자, 불안한 눈빛으로 주변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김선혁과 눈이 마주치자 푹, 하고 고개를 꺾었다.
다른 이방인들은 2차 전직이라는 새로운 목표를 부여받고 조금이나마 열의가 되살아난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아니었다.
축 늘어트린 어깨에는 패기라고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고, 눈빛은 썩은 동태의 그것처럼 빛이 돌지 않았다.
김선혁에게는 그런 그녀의 모습이 너무도 낯이 익었다. 과거 아무런 관련도 없는 기병대에 배치되었을 때의 자신이 딱 저런 모습이었다.
당장 써먹을 수 있는 스킬이라고는 하나도 없고, 몸을 의탁할 만한 병과 보정조차도 기대할 수 없는 상황, 그녀는 그 어떤 희망도 없이 언제 닥쳐올지 모를 실전에 불안감에 떨며 하루하루를 자괴감과 두려움 속에서 살아야 했을 것이다.
그런 세월이 3년을 넘어 4년에 가까웠다. 그녀의 좌절과 절망이 그가 과거에 느꼈던 그것보다 훨씬 더 오래되고 뿌리가 깊은 게 당연할 수밖에 없었다.
김선혁은 나직한 음성으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최민영.”
“네? 네.”
호명을 받은 이방인, 최민영이 힘없이 대답했다.
다른 이방인들이 진즉에 조를 배정받고도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최민영이 또 한 번 자신의 처지를 떠올리고 쓰디쓴 절망을 곱씹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끙. 본의 아니게 또 상처를 헤집은 건가.
필시 자신이 쓸모가 없어 또 혼자 버려졌다 여기고 있을 그녀를 보며 김선혁은 쓴웃음을 지었다.
“너는 7조다.”
아무런 기대감도 없이 멍하니 서 있던 최민영이 얼굴로 열 명씩 무리를 지은 이방인 무리를 바라보았다.
실전을 경험한 이방인들은 1조에 배치되었고, 나머지 이방인들은 다섯 개의 조에 배치되었다.
그곳에 그녀가 배정받은 7조는 없었다.
“아….”
이번에도 역시나, 하는 얼굴로 최민영이 낙담해 고개를 푹, 하고 숙였다.
“너는 내가 특별 관리한다.”
최민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스스로를 낙제생, 또는 열등생이라 여길 그녀에게 그의 조치는 어쩌면 격리와도 다름이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김선혁은 굳이 그녀에게 자신의 결정을 설명하지 않았다.
수년의 시간 동안 쌓아왔을 좌절과 절망은 입에 발린 몇 마디 말로 사라질 만큼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그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설명하는 대신 자신의 할 일을 했다.
“클라크.”
“네. 백작님.”
김선혁은 잠시 이방인들을 둘러보았다.
2차 전직이라는 새로운 목표를 부여받은 그들은 기대감에 가득 차 있었다. 아무래도 인생역전의 당사자가 눈앞에 있으니 꽤나 의욕이 생긴 모양이었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잘 알고 있겠지?”
클라크는 대답 대신 씨익 웃어 보였다. 이를 드러낸 그 미소는 절대로 온화하지도 친절하지도 않았다.
“그럼 시작해라.”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이제껏 무덤덤하게 이방인들을 바라보고 있던 기병들의 표정이 돌변했다.
“줄 맞춰!”
“자세 똑바로 잡아! 누가 짝다리 짚으라고 했어!”
“눈 굴리지 마! 네 교관은 네 바로 앞에 있는 나야! 엉뚱한 곳 보지 말라고!”
수많은 전장을 경험한 기병들의 포효는 늑대의 울부짖음처럼 사나웠고, 이방인들의 혼을 쏙 빼놓기에 충분했다.
“그럼 빡세게 굴리라고.”
처음 자신의 처지를 빗대 이방인들의 사기를 북돋워 주고, 친절하게 앞으로의 목표를 설명해주던 김선혁은 더 이상 그 자리에 존재하지 않았다.
“굴러라. 구르다 보면, 복이 올 것이니.”
2차 전직이라는 당근을 제시했으니, 이제는 채찍질을 해야 할 때였다.
**
교관들에게 이끌려 다른 이방인들이 공터를 벗어나고, 마지막까지 자리를 지키던 깁슨 교관마저도 사라졌다.
이제 남은 것은 김선혁과 최민영뿐이었다.
“최민영.”
김선혁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최민영의 이름을 불러 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마치 아무것도 듣지 못한 것처럼 미동도 하지 않았다.
“최민영.”
그는 다시 한 번 그녀를 불렀다. 이번에는 약간이나마 기세를 담아서였다.
“네….”
최민영이 화들짝, 고개를 들며 대답했다.
“병과.”
겨우 들었던 고개가 다시 숙어졌다. 그녀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그는 알 수 없었다. 그저 똑바로 들지 못한 얼굴 아래 일그러진 입매만이 보였을 뿐이었다.
“병과!”
김선혁은 그녀가 느낄 모멸감을 짐작하면서도 다그치듯 물었다.
“환사….”
“똑바로 말해. 병과가 뭐라고?”
거듭된 강요에 최민영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소환사! 소환사라고요!”
그간의 억울함과 서러움이 가득 담긴 음성에는 차라리 원망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하기야 그럴 만도 했다.
‘최민영의 병과는 소환삽니다. 그런데 이 소환사라는 게 도대체 무얼 소환하는지조차 알 수 없습니다. 그녀가 말하기를 환수(幻獸)를 소환하는 병과라는데, 이 환수가 뭔지를 아무도 모릅니다. 뭔가 보여주기라도 했다면 좋을텐데, 정작 그녀 스스로도 뭔가를 소환해내는데 성공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그러니 하급일 수밖에요.’
깁슨 교관의 설명은 김선혁으로 하여금 과거 자신의 처지를 떠올릴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용이 없는 세상의 용기병, 환수가 존재하지 않는 세상의 소환사.
완전히 똑같았다.
만약 다른 것이 있다면 그는 용의 존재를 일찍이 깨닫고 마주했다면, 그녀는 아직까지 자신의 반쪽을 만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소환산데 소환을 못하는군.”
그의 말은 확인사살에 가까웠고, 최민영의 표정이 단번에 비틀렸다.
“그런데 말이야.”
조롱당했다 여겨 표독한 눈빛을 보내오는 그녀를 보며 김선혁은 웃었다.
“내가 용기병으로 각성했을 때, 사람들이 그러더군.”
마법사도 있고, 정령사도 있는데 용만큼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단다. 그 말에 얼마나 좌절하고 절망해야 했던가.
“아무도 용의 존재를 믿지 않았어. 오히려 나를 비웃고 조롱했지.”
강정태를 비롯한 서부 전선의 이방인들은 용도 없는데 용기병이 무슨 소용이냐며 뒤에서 그를 비웃었다. 그리고 용기병이라는 병과가 차라리 검병만도 못한 쓰레기라는 소리들을 해댔다.
하지만 용은 세상에 존재했다. 그가 거느린 수많은 아룡들이 그 증거였고, 시시때때로 들려오는 용의 음성은 현실이었다.
“그래서 네가 보기에는 용이 이 세상에 있는 것 같아? 없는 것 같아?”
김선혁은 물었다.
그의 질문을 듣고 나서야 최민영은 뭔가 깨달음이라도 얻은 듯, 표정이 달라졌다. 그녀의 눈가에 처음으로 알 수 없는 열망이 피어났다.
“요, 용은 존재하나요?”
그는 대답 대신 다시 물었다.
“글쎄. 어떨 거 같아?”
**
다시 떠올리기 싫은 훈련소의 생활, 하지만 이방인들은 다시 그 닭장과도 같은 세상으로 끌려왔다.
그리고 그들은 새로운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움직여! 쉬지 마!”
“발 보이는 새끼 누구야!”
당시 자신들이 지옥 같다 여겼던 훈련이 사실 애들 장난과도 같은 기초 교육에 불과했고, 그 이상으로 끔찍한 훈련법이 무궁무진하다는 사실을 그들은 몸으로 깨닫게 되었다.
김선혁을 따라온 기병들은 무지막지할 정도로 그들을 굴려댔고, 좀처럼 쉴 틈을 주지 않았다.
괴롭다. 고통스럽다. 도망치고 싶다.
모든 이방인들의 머릿속에 떠오른 공통된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도망치지 않았다.
그건 비단 머리 위를 맴도는 붉은 괴물 때문도 아니었고, 요새의 입구에 웅크리고 앉은 거대한 괴수 때문만도 아니었다.
“2차 전직에 이르는 길은 오직 레벨업 뿐이다.”
아무것도 모르고 진창을 굴러야 했던 과거와는 달리 이번에는 명확한 목표가 있었다.
무조건 하급을 벗어난다. 동서남북, 열악한 병영 생활을 벗어나고 만다. 그리고 귀족이 되어 보란 듯이 잘 살 것이다.
만약 단지 말뿐이었다면 그들도 이렇게까지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앞에 산 증인이 있었다. 스스로 목표를 이루고 마침내 현지인들조차 우러러봐야 할 존재가 된 김선혁이 그곳에 있었다.
“울고 짜도 소용없어. 도망쳐봐야 현실은 변하지 않아.”
그는 같은 이방인 출신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냉정하게 자신들을 대했다.
하지만 그가 모든 분야에서 냉정하고 무자비했던 것은 아니었다.
“맛있냐. 2차 전직을 하고 나면 얼마든지 이런 음식을 먹을 수 있다.”
이방인들에게는 옛 훈련생 시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풍족한 음식이 제공되었다. 온갖 향신료와 다양한 식재료로 늘 먹고 싶은 것을 먹고 살다가 이곳에 떨어진 뒤로, 그들에게 현지의 음식은 죽지 못해 먹는 끔찍한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들은 풍족한 식사 앞에 잊고 있던 먹는다는 행위가 단지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금 떠올릴 수 있었다.
사소하다면 사소한 부분, 하지만 그들에게는 그조차도 훌륭한 동기부여가 되었다. 그리고 김선혁이 제공하는 모든 것들이 그런 식이었다.
그는 각 조의 훈련 성과에 따라 시시때때로 혜택을 베풀었고, 그것이 그들로 하여금 이 끔찍한 훈련을 버텨내는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물론 모든 이방인들이 이러한 교육 방침에 동감한 것은 아니었다.
“빌어먹을 놈. 병과를 잘 타고 난 주제에 잘난 듯이 떠들어대기는.”
“뭐가 용기병이 하급이야. 저 괴물들을 봐. 당장 드레이큰지 뭔지 하나만 갖고 있어도 평생 대우받고 살겠구만.”
가혹한 김선혁의 훈련법에 불만을 표하거나, 욕설을 해대는 이들도 있었다.
“지금의 고통이 부당하다 여기는 자는 떠나도 좋다.”
그는 마치 꿰뚫어보듯 무리에 숨은 이방인들을 지목해 면담을 했고, 그들이 훈련을 받아들일 상태가 아니라는 사실이 파악되면 가차 없이 열외 되었다.
“이렇게 편한 걸, 왜 그렇게 고생했나 몰라.”
그들은 비록 보안상의 이유로 요새를 떠날 수 없었지만, 끔찍한 훈련에서 제외되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워 보였다
“백날 굴러봐라. 2차 전직인지 뭔지 말짱 황일 테니까.”
훈련에서 열외된 자들은 여전히 땡볕에서 구르고 또 굴러대는 다른 이방인들을 비웃었다.
하지만 여전히 고통받아야 했던 이방인들은 전혀 열외자들을 부러워하지 않았다.
당장 달려가 면담을 신청하고 훈련을 그만두겠다 밝히면 그만이었다. 그 간단한 행동만으로도 끔찍한 훈련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도망치는 것은 너무도 쉬웠다. 그래서 도리어 남겨진 자들은 지금의 훈련이 다시 오지 않을 기회임을 실감했다.
“나는 의지가 없는 자까지 강제로 이끌어줄 능력도 생각도 없다.”
김선혁은 누누이 강조했다.
고생 끝에 올 결실을 누리는 것은 오직 자신이고, 그 열매를 딸 수 있는 것 역시 스스로뿐이라 이방인들을 독려하였다.
몸은 끔찍할 정도로 힘들었다. 다음날이 되면 피로가 사라지고 멀쩡해지는 육신이 도리어 공포스러워질 지경이었다.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철저하게 통제되는 육신은 그 어떤 훈련에서조차 열외를 주장할 수 없게 만들었으니까.
“뭐하러 그렇게 고생을 해. 어차피 전직하는 순간 우리 인생은 결정된 거라고.”
“그렇게 고생을 하고도 아직도 2차 전직자가 나오지 않은 걸 보면 모르겠어?”
더욱 그들을 힘들게 했던 것은 열외자들의 비웃음이었다.
이방인들은 시시때때로 훈련을 그만두고 싶은 유혹과 싸워야 했고, 그게 너무도 괴로웠다.
하지만 그때마다 이를 악물고 유혹을 뿌리쳤다. 날이 갈수록 강도를 높여가는 훈련에도 그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북서쪽에서 반란을 일으킨 이방인 무리와 싸잡아 속을 모른다며 멸시하고 괴롭혀대는 주둔지의 현지인들과 지내는 것보다는 차라리 이곳에서 고생을 하는 게 나았다.
최소한 이곳은 마음만큼은 편했다.
게다가 시간이 흐를수록 성장해가는 자신의 스테이터스, 거듭되는 레벨업의 즐거움 또한 그들에게는 큰 보람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요새에서 처음으로 2차 전직자가 탄생했다.
“축하한다. 네가 첫 2차 전직자다.”
섬광 속에 휩싸인 한 사내에게 다가간 김선혁이 손을 내밀었다. 사내는 얼떨떨한 얼굴로 그의 손을 마주 잡았다.
“검병, 이수혁. 2차 전직 병과는 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