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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 특이 병과의 이방인 (1)
하급 병과의 이방인들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안색이 좋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불확실한 미래에 동요하고 있었고, 이 닭장 같은 요새로 다시 불려온 것에 대해 겁을 먹은 상태였다.
“일동 차렷! 백작님께 대하여! 경례!”
“앞으로!”
깁슨의 구령에 맞춰 경례를 하기는 했지만, 그 목소리에 패기라고는 눈곱만큼도 보이지 않았다.
무리도 아니었다. 왕도에서 지내는 중급 병과 이상의 이방인들조차 주변의 압박에 두문불출하고 있을 지경이다. 그런 그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열악한 대우를 받고 있던 하급 병과의 이방인들이야 말할 것도 없었다.
모르긴 몰라도 어디 숨지도 못하고 상관이나 동료들의 멸시를 당해왔을 것이다. 어쩌면 개중에 심약한 자는 제 부하들에게조차 따돌림을 당해왔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 괴롭힘의 흔적은 이방인들의 온몸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축 처진 어깨에 까맣게 죽어버린 눈동자가 반 폐인이나 다름이 없었다.
“쯧.”
예상보다 훨씬 더 심각한 이방인들의 모습에 저도 모르게 혀를 차고 말았다.
움찔.
투구로 가려진 머리 탓에 같은 이방인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걸까. 실망한 듯한 그의 태도에 이방인들이 더욱더 움츠러들었다.
김선혁은 순간 망설였다. 자신이 이방인임을 밝히고 저들에게 친근하게 다가설 것인지, 그도 아니면 가혹한 교관으로 그들의 태도를 질책할 것인지 쉽사리 결정할 수가 없었다.
그만큼 이방인들의 상태는 심각했다. 마음을 독하게 먹고 온 그조차도 순간 마음이 흔들릴 정도였다.
하지만 그는 결국 결정을 내렸다.
“서부 전선에서 온 이가 있나.”
그의 묵직한 음성에 사내들 셋이 슬쩍 손을 들며 나섰다.
안동진이 대부분의 이방인들을 회유하여 빼냈다지만, 서부 전선에 배치된 모든 이방인들이 노르딕으로 향한 것은 아니었다. 전쟁의 끔찍함을 용케도 견뎌낸 자들이 있었고, 그들이 바로 손을 들고 나선 세 명의 사내들이었다.
“개중 낫군.”
김선혁은 그나마 눈에 독기가 보이는 사내 셋을 좌측으로 분류시켰다.
“이 중에 실전을 겪어본 자가 있다면 좌측으로 가라.”
북부에서 온 이방인 열 명 가량이 그의 지시를 따라 왼쪽으로 이동했다.
“미치겠군. 동부와 남부에서는 아예 전력 취급도 안 한 건가.”
전투라면 동서남북 가릴 거 없이 벌어져 왔다. 서부에서는 그 상대가 녹테인이었고, 북부는 말 탄 이민족들이 그 주적이었다. 남부는 해적이 있었고, 동부는 몬스터들이 꽤나 기승을 부리는 걸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실전을 겪은 이방인들은 고작해야 2할이 조금 넘을 뿐이었다.
“갈 길이 멀구만.”
대충 분류를 마친 김선혁은 각기 2대 8의 비율로 나누어진 무리를 번갈아 바라보다 꾹 눌러쓴 투구를 벗었다.
“나는 앞으로 너희들의 교육을 맡게 된 김선혁이다.”
그의 말에 이방인들이 웅성거렸다. 이제야 그가 자신들과 같은 이방인이라는 사실을 알아챈 모양이었다.
위화감을 조성하지 않기 위해 골드레이크와 레드번을 요새 인근에 풀어두고 왔던 터라, 상징과도 같은 괴수가 없이 그의 정체를 미리 짐작하지 못한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설마 그 드라흔인가?”
“말단으로 시작해 고위 귀족까지 올랐다는?”
제 딴에는 들리지 않게 수군댄다는 게 그의 귀에 고스란히 들어왔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김선혁은 이방인들에 대해 한 가지를 파악할 수 있었다.
저들은 병과의 등급을 떠나 아직 군인조차 되지 못한 이들이었다. 만약 저들이 최소한의 군기라도 있었다면 이렇듯 까마득한 상급자를 두고 저리 입을 놀려대지는 못했을 테니까.
“조용! 백작님께서 이야기하시는데 누가 감히!”
깁슨이 나서서 소란을 정리할 때까지 김선혁은 가만히 기다렸다. 이윽고 이방인들이 눈치를 보며 입을 다물자 다시 말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나 또한 너희들처럼 한때는 하급 병과로서 일반 병사로 배치되었었다.”
되지도 않을 연설은 영 성격에 맞지 않았지만, 일단은 패배감에 절어 폐인이 된 이방인들에게 목표의식을 심어주는 게 중요했다.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현재 아덴버그에서 가장 유명한 기사이자, 이방인으로 고위 귀족의 반열에 오른 그가 자신들과 같은 하급 병과로 전선에 배치되었었다는 이야기에 이방인들의 눈빛이 변했다.
이미 알고 있었지만 당사자의 입을 통해 이야기를 들으니, 그 체감하는 바가 남달랐던 것이다.
“나도 처음에는 무시당했고 차별 받았다.”
그의 말에 클라크를 비롯한 몇몇 기병들이 헛기침을 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어떠한가. 너희들이 보기에 나는 아직도 무시당하고 차별 받고 있는 것처럼 보이나.”
그들이라고 드라흔의 소문을 왜 듣지 못했을까. 녹테인을 상대로 믿을 수 없는 승리를 거두며 마침내 왕실과 한 가족이 된 이방인에 대한 소문은 아덴버그뿐 아니라 대륙 곳곳에까지 퍼져 있었다.
“지금의 나는 왕실의 당당한 백작이자, 한 영지의 영주다. 그리고 아데스덴 왕실의 예비 사위기도 하지.”
제 입으로 제 업적을 떠들고 소개를 하자니 여간 얼굴이 뜨거운 게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애써 그런 기색을 억누르며 꿋꿋이 자신의 말을 이어갔다.
“너희들과 나는 다른 존재인가!”
그의 말을 자기 과시라고 받아들인 것일까. 썩은 동태 눈깔처럼 희끄무레 하던 이방인들의 눈빛에 형용할 수 없는 분노가 들어찼다.
“백작님께서는 드레이크 라이더이자 와이번 라이더가 아닙니까!”
“저희는 시시껄렁한 검병이고 궁병 나부랭이라고요!”
“저희도 백작님처럼 특별한 병과를 타고났다면, 이러고 있진 않았을 겁니다!”
그간의 서러움과 억울함이 한꺼번에 터진 듯, 서부 전선 출신의 이방인 셋이 발작적으로 그에게 외쳤다.
“너희들도 그렇게 생각하나?”
김선혁은 입을 열지 않은 다른 이방인들에게 물었다. 대답은 없었지만, 눈빛만 봐도 그들 역시 서부 전선 출신의 이방인들과 생각이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클라크. 내가 처음 배치됐을 때 어땠지?”
그의 말에 클라크가 한 발 나서서 대답했다.
“기병이라고 왔는데 말은 못 타고, 검술이고 창술이고 실전에서 써먹기에는 턱없이 부족했었습니다. 그때 우리 부대원들은 전부 백작님이 첫 실전을 이기지 못하고 전사할 거라 생각했습니다. 언제 죽나로 내기를 했지만, 애초에 산다는 쪽에 건 사람이 없어서 내기 자체가 성립이 안 될 정도였죠.”
“음.”
아무리 자신이 당시의 일을 말하라 했다지만, 너무 적나라한 클라크의 평가였다.
“또 기마술엔 얼마나 소질이 없는지, 나중에 가서는 얼마 가지 않아 일반 보병으로 배속이 바뀔 거라 생각했습니다.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말도 못 타는 사람을 기병대에 배속시킨 상부가 미친 건 아닌가 싶었었죠.”
“맞습니다. 말 못타는 기병이라니, 그게 말이 됩니까. 내가 그때 생각하면 아직도 황당해서….”
“그만!”
이제는 눈치 없는 한센까지 나서서 거들어대는 통에 김선혁이 손을 들어 두 사내의 입을 막았다. 그대로 두었다가는 굳이 밝히지 않아도 될 이야기까지 할 기세였던 탓이다.
“들었나. 내가 이래도 너희들보다 사정이 나았나.”
“그래도 용기병이라는 병과가 있는데!”
이번에는 클라크가 먼저 나서서 당시 그의 처지를 설명해주었다.
“용기병이 지금처럼 명성이 생기기 전에 어떤 취급을 당했는지, 조금도 모르는군. 용기병은 당시 가장 흔해빠진 검병만도 못한 쓰레기 취급을 받았다.”
“음.”
사실이긴 한데 묘하게 기분이 나빴다.
“이방인들이 자랑하는 스킬은 하나도 못 쓰지. 그렇다고 당장 뭘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부대에 배치된 하급 병과의 이방인들마저도 용기병을 비웃고 조롱했지.”
강정태는 그에게 언젠가 볕 뜰 날이 올 거라며 위로를 하고 뒤로는 그의 노력이 무의미하다고 동정하고 조롱했다. 그리고 그게 바로 당시 용기병에 대한 세간의 인식이었다.
“말을 타려고 해도 스킬이 없었다.”
김선혁은 여전히 자신의 말을 믿지 못하는 눈치의 이방인들을 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서 탈 수 있을 때까지 시도했다. 말에서 떨어지기를 수백 수천 번,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지.”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무식한 방법이었다. 하지만 그때는 달리 방법이 없었고, 그만큼 절실하기도 했다.
“그리고 마침내 말을 타게 됐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전쟁에 끌려갔다. 그곳에서 나는 전쟁이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 깨닫게 됐다.”
입지전적인 인물의 일대기는 언제나 사람들에게 웅심을 불러일으키는 법이다. 그가 거듭해서 강조하고 또 강조하자, 이방인들도 이제는 슬슬 그의 말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살아야 하니까. 내가 죽을 수는 없으니까. 견뎌야 했다. 토악질을 하고 악몽에 시달리더라도 버티고 버텨서 끝내 살아남아야 했지. 영문도 모르고 끌려와서 진창을 구르다 죽어버리는 건 너무 비참하니까.”
어느 순간 바뀌어버린 분위기, 김선혁은 물었다.
“너희들은 어떻지? 그냥 이대로 내내 진창만 구르다 전선에서 아무도 모르게 죽어버리기를 원하나?”
그럴 리가 없었다. 이방인들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김선혁은 어느 누구도 그렇게 비참하게 죽기를 바라지 않을 거라 확신했다.
“그래도 기왕지사 이런 세상에 떨어졌으면 귀족은 되어봐야 하지 않겠나. 최소한 사람답게는 살아봐야 하지 않겠나.”
유치한 연설이고, 턱도 없이 투박한 선동이었다.
하지만 이야기하는 당사자의 무게가 다르다. 그는 제 스스로 자신의 말을 기어이 지켜내고만 입지전적인 인물이었으며, 이방인들이 롤모델로 삼기에 충분한 존재였다.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우리는 고작 하급 병과의 이방인에 불과한데.”
처음에 그에게 따져 물었던 서부 전선 출신의 이방인이 물었다.
“내 시작도 너희들과 같은 하급 병과에 불과했다.”
물론 그 이면에 등급 책정이 잘못되었고, 용기병의 힘이 생각보다 대단했다는 진실이 있었지만 김선혁은 굳이 그 사실까지 말해주지는 않았다.
지금 이방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더 높은 곳으로 올라서고자 하는 향상심과, 그게 가능하다 여기는 긍정적 의지였다.
“너희들에게는 아직 2차 전직이라는 기회가 남아있다.”
하급 병과에 불과하니만큼 저들에게 그 이상의 전직이 가능할지는 몰라도, 2차 전직만큼은 분명 가능했다. 그렇기에 처음 이 세상에 떨어졌을 때 강정태를 비롯한 하급 병과의 이방인들이 자신들도 노력하면 중급의 대우를 받을 수 있을 거라 공공연하게 떠들었던 것이다.
“2차 전직!”
보다 명확한 목표에 이방인들의 눈빛에 처음으로 열기가 피어올랐다.
어쩌면 자신의 말이 저들 중 누군가에게는 헛된 희망으로 끝이 날지도 몰랐다. 하지만 지금의 그에게는 이게 최선이었다.
그는 저들의 미래를 보장할 수 없었고, 단지 가능성을 열어줄 수 있을 뿐이었다. 그 가능성을 마침내 현실로 이루고 말고는 전적으로 저들에게 달려 있었다.
“지금부터 조를 나누겠다.”
눈빛에 생기가 돌기 시작한 이방인들을 보며, 김선혁이 본격적으로 알렸다.
“클라크. 요나슨과 함께 저쪽을 맡아줘.”
실전경험이 있는 열셋의 이방인들을 클라크와 요나슨에게 맡겼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클라크는 이방인들의 썩은 눈빛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지만, 그의 명령에 토를 달지는 않았다.
“그리고 나머지는 열 명씩 나눠서 다섯 개 조로 나누겠다. 깁슨 교관.”
그의 호명에 깁슨이 냉큼 달려와 그의 손에 리스트를 전해주었다. 이방인들의 병과와 특이사항이 적힌 이력서였다.
“손호영! 김미지! 안호상….”
그는 리스트를 눈으로 훑어보고는 빠르게 인원을 분류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렇게 여섯 개의 조가 완성되어갈 무렵, 김선혁은 리스트 말미에 적힌 생소한 병과의 이름을 보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깁슨 교관?”
그의 부름에 달려온 깁슨에게 물었다.
“이 얼토당토않은 병과는 대체 뭐지?”
깁슨은 그가 내민 이력서 한 장을 보고는 마치 그가 관심을 보일 줄 알았다는 얼굴로 대꾸했다.
“저도 짐작뿐이지만….”
조심스러운 말투의 깁슨이 아직 조를 배정받지 못한 몇몇 이방인들 중 하나를 바라보았다.
“어쩌면 백작님과 같은 경우가 아닌가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