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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 그리피앙 왕가의 신물(神物) (2)
그 순간 폰티앙의 손에 끼워진 반지가 빛을 발하고, 그리핀들이 무언가에 억눌린 듯한 신음을 내뱉기 시작했다.
“옳지! 옳지!”
조금씩 무릎을 굽혀가는 그리핀의 모습에 폰티앙이 신이 나서 외쳤다.
“저, 저, 저!”
경악한 아덴버그의 인사들이 손가락질을 하며 호들갑을 떨었다.
하지만 김선혁은 태연했다. 이 정도쯤은 그도 예상했다.
살 부대끼며 사는 라이더들조차도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는 괴수를 누대에 걸쳐 부려온 그리핀도르의 군주라면 뭔가 신묘한 수를 써도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라 생각했다.
단지 그뿐이었다.
저 반지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는 그에게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폐하. 잠시 물러나 계시지요.”
김선혁은 서서히 이제는 거의 바닥에 머리를 조아리다시피 한 그리핀들을 바라보다 테오도르 국왕에게 말했다.
“그대를 믿겠다.”
테오도르 국왕은 짧게 한마디를 남기고는 멀찍이 물러섰다.
국왕과 왕가 수호대의 기사들이 여유 있게 거리를 두는 것을 확인한 김선혁이 슬쩍 심호흡을 했다.
“흡.”
이제는 수발이 자유로워진 드래곤 피어가 그의 온몸에서 줄기줄기 피어올랐다.
카르륵! 카륵!
폰티앙이 수작을 부렸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그리핀들이 동요했다. 사나운 괴수들이 마치 경기라도 일으키듯 캑캑대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쥐 죽은 듯이 땅에 부리를 박고 미동도 하지 않게 되었다.
팟.
반지의 빛이 절정에 이르렀다 사라진 것도 그즈음이었다. 그에 맞추어 김선혁 역시 드래곤 피어의 기세를 거두어들였다.
“으으.”
드래곤 피어의 압도적인 기세에 노출되었던 탓에 잠시 정신을 차리지 못했던 폰티앙이 뒤늦게 고개를 도리질 쳤다.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자신의 목적까지 잊지는 않았던 모양인지, 황급히 그리핀들의 상태를 확인했다.
그리핀들은 여전히 고개를 처박은 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폰티앙은 드래곤 피어의 영향력 때문인지 그를 두려워하면서도 기고만장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마치 네가 수작을 부려봤자라는 듯한 모양새였다.
하지만 김선혁은 그 두려움과 의기양양함이 마구잡이로 뒤섞인 우스꽝스러운 얼굴을 보면서도 덤덤하기만 했다.
그러자 약이 오른 것인지 폰티앙이 보란 듯이 그리핀들에게 명령했다.
“일어나라.”
그리핀들은 요지부동이었다.
“일어나!”
폰티앙이 더욱더 강하게 명령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폰티앙은 여전히 자신감이 가득했다. 하지만 그도 오래가지 않았다.
“일어나라! 드본! 미온테!”
직접 이름까지 불러 명령했지만 그리핀들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처음에는 납득하지 못한 듯 소리를 질렀고, 나중에 가서는 절망에 찬 음성으로 애원하듯 괴수에게 부탁했다.
그런 폰티앙을 가만히 바라보던 김선혁이 스윽 앞으로 나서서 말했다.
“일어나.”
폰티앙의 그것처럼 강압적이지도 절실하지도 않은 명령, 그저 지나가듯 던지는 한마디였을 뿐이다.
크우우.
그런데 그 대수롭지 않은 한마디에 이제껏 미동도 없던 그리핀들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대체 어떻게!”
드래곤 피어의 영향력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한 것인지, 정면으로 따지지는 못하고 시선을 애매하게 둔 어설픈 항의였다.
김선혁은 대답 대신 보란 듯이 그리핀들에게 손짓했다.
“말도 안 돼!”
폰티앙은 눈을 찢어져라 부릅떴다. 고고하고 자존심 강하기로 소문난 괴수가 마치 아양이라도 피듯 김선혁의 발치에서 고개를 구구거리는 것을 본 것이다.
“그럼 더 이상 볼 일은 없는가.”
타이밍 좋게 테오도르 국왕이 나서서 상황을 정리했다. 하지만 폰티앙은 납득하지 못한 듯 다시 한 번 반지를 사용했다.
결과는 변하지 않았다.
쨍!
몇 번이나 발악하듯 반지를 들이밀던 폰티앙의 손에서 거북스러운 금속성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빛을 잃은 반지가 두 조각이 나 바닥에 떨어졌다.
“아아….”
그리핀도르의 군주가 특별히 하사했을 반지가 망가지자 폰티앙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부디 이번에는 그대의 군주가 신의를 지켰으면 좋겠군.”
테오도르 국왕은 털썩 주저앉은 폰티앙을 보며 차갑게 말했다.
“쯧. 일국의 사절이라는 자가….”
혀를 찬 국왕이 김선혁에게 눈짓을 하며 자리를 벗어났다. 그 역시 국왕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폰티앙은 여전히 넋을 잃고 바닥에 주저앉은 채였다.
“생각지도 못한 소득이 생겼으니, 공로자인 그대에게 상을 주지 않을 수가 없구나.”
그 덕분에 막대한 배상금을 얻게 된 테오도르 국왕은 넌지시 청이 있으면 들어주겠다며 소원을 말해보라 했다.
“지금은 당장 생각나는 게 없습니다.”
지난 전쟁에서 세운 전공으로 받은 포상도 아직 다 쓰지 못한 김선혁이다. 딱히 바라는 것이 있을 리가 없었다.
“하기야 그대는 예사로운 소원을 말하는 법이 없지. 부디 궁리해보라. 나 또한 즐거이 그때를 기다릴 것이니.”
그의 대답에 껄껄거리며 웃는 국왕의 모습이 얼마 전 소원을 말해보라며 기대하던 왕녀의 모습과 판박이였다. 역시 핏줄은 속일 수 없는 모양인지 김선혁은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
“차라리 연회가 조금 더 길게 이어졌다면 좋으련만….”
김선혁만큼이나 지루한 연회가 끝이 나기를 고대했던 왕녀는 정작 행사가 끝이 나자 완전히 풀이 죽어 있었다.
“이제 식이 끝이 났으니, 그대도 곧 왕도를 떠나겠구나.”
왕녀는 더 이상 감정을 표현하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마치 그가 변하기 위해 노력하는 만큼 그녀 스스로도 변화하기로 작정한 듯 보였다.
“최대한 빨리 일을 마치고 다시 들르도록 하겠습니다.”
이제는 그도 왕녀에게 꽤나 정이 들었던지라 헤어짐이 아쉬운 것은 그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진심을 담아 왕녀를 달랬고 그녀는 그의 말에 귀를 쫑긋 세웠다.
“곧 나의 열다섯 번째 생일이다. 이는 나의 한 번뿐인 성년식이기도 하니, 그대는 만약 일에 진척이 없더라도 반드시 그날만큼은 나를 찾아야 할 것이니라.”
“선물부터 준비해야겠군요.”
김선혁은 왕녀의 말에 너스레를 떨었다.
“행여 마땅한 선물을 찾지 못하여 늦는 일이 없도록 하라. 가장 중요한 것은 그깟 물질이 아닐지니….”
뒤늦게 자신이 무슨 말을 한 것인지 깨달은 왕녀가 얼굴을 벌겋게 물들였다. 의젓한 모습을 보이려는 왕녀와 제 스스로의 감정에 충실한 왕녀가 마구잡이로 충돌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김선혁이 보기에 갈팡질팡하는 왕녀의 모습이 꽤나 앙증맞았다.
“명심, 또 명심하겠습니다.”
볼 때마다 무럭무럭 자라있는 왕녀가 과연 다음에는 어떤 식으로 변해있을지 기대하는 것도 색다른 즐거움이리라.
“그럼 다시 만나 뵐 때까지 부디 왕녀께서 평안하시기를 바라도록 하겠습니다.”
김선혁은 아쉬움을 뒤로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음에 만날 때는….”
왕녀가 그런 그를 보며 입을 웅얼거렸다. 너무 작은 소리라 무슨 말인지 알아듣기 힘든, 혼잣말에 가까운 말이었다.
하지만 김선혁은 풍 속성을 얻얻은 뒤로 청력이 극대화되었다. 그런 그에게 왕녀의 혼잣말은 더 이상 혼잣말이 아니었다.
‘오필리아라고 불러도 좋다.’
그는 기분 좋게 웃으며 대답했다.
“다음에는 그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노라.”
금세 시치미를 떼는 왕녀를 보니, 아무래도 조숙한 소녀가 완전히 솔직해지려면 한참은 더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네. 왕녀께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놀리듯 던진 한마디에 왕녀가 또다시 웅얼거렸다.
‘사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이 아니니라.’
변덕스러운 소녀의 감정에 그는 그냥 웃고 말았다.
**
김선혁은 왕도를 떠났다. 그를 따라온 기병들과 아샤 트레일과 함께였다.
“드라흔 백작이 왕도를 떠났구나.”
왕성에서도 가장 높은 곳, 창밖을 바라보며 테오도르가 물었다.
“아쉽더냐.”
왕녀 오필리아는 제 아비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말없이 창밖 저 너머를 바라보았다.
“사랑스러운 나의 딸, 오필리아여.”
그런 왕녀를 보며 테오도르는 드물게 회한에 젖은 음성으로 말을 이어갔다.
“아데스덴의 피에 담긴 이능(異能)은 지배자로서 축복인 동시에 인간으로서 저주나 다름이 없다. 이는 너 또한 벗어날 수 없는 숙명이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제 속을 드러내 보이지 않았던 완벽한 군주도 자신의 딸에게만큼은 그저 평범한 아비에 불과한 것일까. 평소 보여왔던 냉엄한 모습 따위는 온데간데없는 테오도르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복잡한 감정이 묻어났다.
“속을 들여다볼 수 없는 드라흔 백작은 가장 멀리해야 하는 존재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렇기에 도리어 그가 네 곁에 남아있기를 바라노라.”
“혹시 폐하께서는 어머니를 그리 보내신 걸 후회하시고 계신 것은 아니신지요.”
이제껏 말이 없던 오필리아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후회라….”
테오도르의 눈빛에 언뜻 고통스러운 빛이 스쳐갔다.
“네 어미는 나와 가는 길이 너무도 달랐다. 나를 가장 인간답게 만들어줄 수 있었던 것 역시 그녀였지만, 나는 그녀로 인해 비정(非情)을 강요받았다. 그녀는 왕비이자 아내 이전에 귀족이었다. 그리고 끝내 그 허울을 벗지 못했지.”
마치 왕비라는 단어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왕도에서만큼은 어느 누구도 왕비의 존재를 입에 올리지 않았다.
“후회하기에는 너무 멀리 왔으니, 후회라는 말이 무색하구나.”
그런데 그게 그럴만한 사정이 따로 있었던 모양이다.
“네 어미에 대한 이야기는 그만하자꾸나. 오늘은 그런 이야기를 하려고 너를 부른 것이 아니다.”
테오도르는 쓴웃음을 지우고 준엄한 얼굴을 해 보였다.
“오필리아. 나의 딸아.”
“말씀하소서.”
왕녀의 담갈색 눈동자는 기이할 정도로 투명하게 변해 있었다. 테오도르는 그게 곧 일어날 각성의 조짐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현 시간 부로 네게 부여했던 왕실의 대리인 자격을 회수한다.”
“뜻대로 하겠나이다.”
오필리아는 제 아비의 결정에 토를 달지 않았다.
“명은 성년식이 무사히 끝이 나고서야 거두어질 것이니, 그때까지 외부와의 그 어떤 접촉도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니라.”
“어느 누구와도 만나지 않고, 어느 누구와도 말을 섞지 않겠나이다.”
테오도르는 어린 딸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명심하거라. 지금의 고통은 앞으로 네가 겪어야 할 냉엄함에 비하면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닐지니, 부디 그 차가움에 네 여린 영혼이 얼어붙는 일이 없기를 바라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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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이곳으로 다시 돌아오게 될 줄이야.”
김선혁은 낡아빠진 요새의 성문을 바라보며 감회 가득한 얼굴을 해 보였다.
“정말로 이런 곳에서 지내셨던 겁니까?”
그런 그와 요새를 번갈아 바라보던 클라크가 질린 표정으로 물었다. 그만큼 요새는 허름했고 당장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모습이었다.
“그래. 여기가 내 시작점이지.”
어떤 자유도 없이 진창을 굴러야 했던 이방인들이 꿈에 나올까 두려워 마지않는 악몽과도 같은 요새, 하지만 그와 동시에 모든 이방인들의 시작점이기도 한 곳이었다.
김선혁은 감상에 젖은 눈으로 허름한 성문을 바라보다 일행을 돌아보며 말했다.
“빌어먹을 닭장에 온 것을 환영한다.”
왕국의 교관들은 이 요새를 ‘훈련소’라 불렀고, 이방인들은 이곳을 ‘닭장’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이 끔찍한 요새는 김선혁이 앞으로 성장시켜야 할 예순 명의 이방인들에게 왕실이 제공한 가장 안전한 장소였다.
끼이이익.
김선혁이 감상에 젖은 사이에 먼지 쌓여 열릴 것 같지 않던 요새의 문이 듣기 거북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쩍, 하고 입을 벌린 요새 너머에서 반가운 얼굴이 나타나 인사를 건네왔다.
“깁슨 교관.”
한때 자신을 끔찍이도 괴롭혔던 교관이자, 용기병을 하급 병과로 분류했다가 훗날 다시 상급으로 정정해주었던 왕실의 책정관 깁슨이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깁슨 뒤로 검은 머리를 한 예순 명의 남녀가 불안하게 눈을 굴려대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