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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곤 푸어-152화 (152/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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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 그리피앙 왕가의 신물(神物) (1)

상대의 정체를 확인한 김선혁은 폰티앙이라 자신을 밝힌 사내가 보이는 적대감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귀하디귀한 그리핀을 두 마리나 강탈당하고, 라이더들마저 빼앗겨 버렸다. 지금 이 자리에서 결투를 신청한다고 해도 아무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 정도로 그와 그리핀도르의 악연은 깊었다.

“그런 얼굴 할 것 없소. 전장에서의 일은 전장에서 끝이 난 것, 그 또한 기사로서의 숙명이 아니겠소. 나는 이 자리에 축하의 사절로 온 것이니 그리 경계하지 마시오.”

날 선 어조로나마 폰티앙은 자신의 입장을 그리 밝혔다. 마치 대단한 배려라도 해주는 듯한 모양새였다.

그게 김선혁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때 맞은 뒤통수가 아직도 얼얼하긴 하지만. 뭐, 어쨌건 축하해주러 그 먼 곳에서 왔다니 일단은 고맙다고 합시다.”

뒤통수를 쳐놓고 이제 와서 당시의 일을 전장에서 벌어진 명예로운 전투로 포장하는 돼먹지 않은 태도를 꼬집어 비아냥대니, 대번에 상대의 표정이 굳어버렸다.

“기왕 먼 곳에서 왔으니 즐기다 가시든지.”

김선혁은 굳이 상대하고 싶지도 않은 자의 꼬장을 받아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럼 나는 이만.”

그는 귀찮은 내색을 숨기지 않으며 그대로 몸을 돌렸다.

“이이….”

뒤편에서 으드득 이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핀도르의 기사라는 자들은 하나같이 내로남불의 화신이다. 상종할 자들이 아니었다.

“음. 아무리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다고 하나, 그래도 일국의 사신 자격으로 온 이네. 조금은 웃는 얼굴을 해 보였다면 좋았을 것을.”

돌아선 그에게 다가온 로젠하임 후작의 말이었다.

후작의 말 대로였다. 전후 사정이야 어찌 됐건 간에 약혼식을 축하하러 온 일국의 사자에게 면박을 주는 건 외교적인 결례였다.

그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당당했다.

“폐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폐하께서 따로 당부하신 말씀이 있으셨던가.”

테오도르 국왕이 언급되자 로젠하임 후작이 허리를 꼿꼿이 펴고, 자세를 달리 했다.

“만약 그리핀도르의 사자가 찾아온다면 이 말을 명심하라고 하시더군요.”

약혼식을 거행하기로 했을 때, 그리핀도르의 사자가 방문할 것은 이미 예견된 일이었다.

창공의 기사들이 허영심이 강하고 낭만을 찾는 것은 그리핀도르의 군주, 빅토르 베르트랑 드 그리피앙과 무관하지 않았다. 아예 국가 전반적으로 그러한 기풍이 흐르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아덴버그의 행사는 그리핀도르의 군주가 자신의 대인배스러운 면모를 과시하기에 꽤나 좋은 기회였다. 테오도르 국왕과 김선혁은 그리핀도르의 사자가 반드시 축하 사절을 보낼 거라 예상했다.

그리고 예상은 맞아 떨어졌다.

“승자가 아량을 베풀고, 만사를 포용하는 것은 미덕이나 그것 또한 승자가 선택할 수 있는 여러 명예 중에 하나일 뿐이다. 그러니….”

김선혁은 잠시 뒤를 돌아보았다. 여전히 이쪽을 노려보는 그리핀도르의 사자가 보였다.

“하고 싶은 대로 하라. 뒷일은 책임지겠다. 라고 하시더군요.”

그 곱지 않은 눈길을 빤히 바라보며 그는 도리어 도발적으로 웃어보였다.

**

그리핀도르의 기욤 조르쥬 폰티앙이 드라흔에게 다가가는 것을 바라보는 특사들의 눈이 빛났다. 각국의 특사들은 과연 드라흔이 악연 깊은 그리핀도르의 사자를 어찌 대할지 흥미로운 눈으로 지켜보았다.

“호오. 유순해 보이더니, 꽤나 강단이 있지 않은가.”

지난 일은 적당히 모르는 척 넘어가는 것이 관례였다. 그런데 그리핀도르의 사자를 대하는 드라흔의 태도는 특사들이 생각한 것 이상으로 강경했다.

어줍지 않게 상대를 포용하는 대신 정면으로 상대의 치부를 들이받은 것이다.

“정치가이기보다는 기사에 가깝군.”

분명 드라흔의 대처는 농담으로라도 세련됐다 말할 수 없었다. 만약 멋모르는 귀족이 저런 행동을 했다면 대번에 비웃음거리가 되고도 남았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이 자리에 모인 특사들은 어느 누구도 그를 비웃지 못했다.

오히려 그들은 드라흔의 행동을 통해 지난 전쟁의 승자가 누구인지 다시 한 번 실감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아덴버그 왕국 내에서 드라흔이 얼마나 입지가 탄탄한지 깨달았다.

직전까지만 해도 외교적인 관례 내에서 이국의 사자를 적당히 상대해주던 아덴버그의 귀족들이, 드라흔의 행동 직후 기욤 조르쥬 폰티앙의 주변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이다.

이는 귀족들이 그만큼 드라흔의 체면을 생각해준다는 의미였고, 동시에 드라흔이 아덴버그의 입장을 대변할 수 있을 정도로 거물이라는 의미이기도 했다.

“본국에 보고할 게 생겼군. 아데스덴 왕실은 드라흔을 그저 차기 여왕의 남편으로 묵힐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

특사들은 눈을 빛내며 더욱더 열성적으로 드라흔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

잠시 휴식을 취하고 온 오필리아 왕녀가 제 약혼자와 춤을 추는 것으로 축하 연회는 절정에 이르렀다. 하지만 절정이 있으면 끝이 있는 법, 오랜 연회를 버티기에는 아직 미성숙한 왕녀는 금세 지쳐서 자리를 떴고, 김선혁 역시 적당히 체면을 차리고는 연회장을 떴다.

“으아아아!”

밤늦게 숙소에 도착한 그는 온몸을 비틀며 괴성을 질렀다. 그간 승전 연회의 주인공으로 몇 번이나 참석한 그였지만 지금처럼 몸이 피곤한 적이 없었다.

친분을 다지기 위해 다가서는 귀족들은 끝이 없었고, 그들을 상대하는 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리핀도르를 제외한 다른 왕국의 사절들을 대하는 것도 허투루 할 수가 없었으니, 연회가 끝난 지금 그는 완전히 지치고 말았다.

“이런 지겨운 짓을 앞으로 며칠이나 더 반복해야 하다니….”

하지만 그가 질색을 하거나 말거나 연회는 예정되어 있었고, 그는 주인공이었다. 핑계를 대고 빠질 수도 그렇다고 도망칠 수도 없었다.

결국 그는 이를 악물고 남은 일정을 소화해내야 했다.

“조금만 참으면 이 또한 끝나리니….”

연일 계속되는 연회가 힘들었던 것은 김선혁뿐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왕녀 역시 피로한 얼굴로 주문처럼 혼잣말을 중얼거리는데, 이 행사가 어서 빨리 마무리되기를 바라는 눈치가 역력했다.

하기야 전장에서 굴러먹을 대로 굴러먹은 그조차도 견디기 힘든 일정이다. 어린 소녀가 무슨 체력이 있어 이 끔찍한 시간을 수월히 버텨내겠는가.

“잠시….”

김선혁은 왕녀를 안쓰러운 눈으로 왕녀를 바라보다 슬쩍 속성 지배력을 일으켰다.

심신을 가볍게 만드는 데 특화된 바람의 힘과, 피로와 상처를 회복하는 데 탁월한 효능을 지닌 물의 힘이 어린 소녀의 몸을 어루만졌다.

“아….”

왕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주변을 둘러보다 이내 그가 무언가 조치를 취한 것임을 알아채고는 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몸이 한결 가벼워졌도다. 이 또한 용기병의 힘인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그에게 왕녀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허나 왕성 내에서 힘을 발휘하는 것은 자제하는 것이 좋겠구나. 벌써부터 수호대의 인사들이 들썩이고 있으니….”

연회장의 그늘진 곳마다 배치되어 있던 왕가 수호대의 기사들과 마법사들이 순간적으로 모습을 드러냈다가, 왕녀의 손짓에 도로 제 위치로 돌아갔다.

“한 번쯤이야 뭐, 어떻습니까.”

김선혁은 도리어 뻔뻔하게 웃었다. 왕녀도 정말로 그를 질책할 생각은 없었는지, 마주 웃어 보였다.

그 뒤로도 김선혁은 왕녀의 얼굴에 피로가 보일 때마다 은근슬쩍 속성의 힘을 발휘했다. 그때마다 왕녀는 엄한 표정으로 그를 나무랐지만, 한 번도 그의 행동을 제지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기다리고 기다렸던 연회의 마지막 날이 왔다.

오늘만큼은 테오도르 국왕과 오필리아 왕녀도 처음부터 연회에 참석하여 자리를 지켰고, 왕성을 찾은 모든 귀족들 역시 연회가 끝이 날 때까지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밤이 새도록 연회는 계속되었고 그 사이 김선혁은 왕녀와 몇 번이나 춤을 추어야 했다. 하지만 연회도 오늘로 마지막이었던 만큼 두 남녀의 표정은 생기가 넘쳤고, 모든 이들이 그들을 축하해주었다.

“이로써 왕녀와 드라흔 백작의 약혼이 정식으로 이루어졌음을 선포하노라!”

길고 길었던 칠 주야의 연회는 테오도르 국왕의 선언으로 끝이 났다.

**

연회가 끝이 난 다음날 테오도르 국왕이 김선혁을 따로 불러냈다.

“그리핀은 그대가 얻은 전리품, 왕실은 이에 간섭할 생각이 없으며 두 그리핀이 온전히 그대의 소유임을 인정한다.”

창공의 기사들과 함께 포획한 그리핀은 한시적으로 김선혁이 왕실에 임대해주는 조건으로 왕도에 남겨 두었다.

그간 왕국 유일의 공군(?)으로서 다방면에서 혹사당해야 했던 그가 창공의 기사들로 하여금 자신의 역할을 대신 하게끔 만든 것이다.

그런데 그 그리핀의 거취에 대해 딴지를 건 자가 있었다.

“하지만 그리핀도르는 그리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다.”

바로 그리핀도르의 사자 기욤 조르쥬 폰티앙이었다.

“그들은 이미 전향한 라파예트와 롤랑이 아덴버그에 남는 것에 대해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지만, 그리핀만큼은 반환해주기를 강력하게 요청하고 있다.”

물론 공짜는 아니었다. 그리핀도르는 자국의 상징과도 같은 신수를 제공받는 조건으로 상당한 배상금을 제시했다.

“일고의 가치라도 있겠습니까?”

김선혁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이미 자신을 통해 하늘을 지배한다는 게 얼마나 대단한 메리트인지를 알게 된 아데스덴 왕실이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그들이 제시한 조건 중에 하나가 꽤나 솔깃하더구나.”

테오도르 국왕이 그런 그의 내심을 짐작이라도 한 듯 덧붙여 말했다.

“그들은 단지 그리핀을 자신들에게 보여주기만 한다면, 약속한 배상금의 절반을 지급하기로 했다. 물론 그리핀이 원주인에게 돌아갈 기미를 보이면 승복하는 조건이지.”

“아….”

김선혁은 그제야 테오도르 국왕이 자신을 불러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이미 창공의 기사들을 통해 그리핀도르의 왕실이 대대로 그리핀의 주인으로 군림할 수 있는 모종의 힘이 있다는 사실을 들어 알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기욤 조르쥬 폰티앙의 의도는 눈에 보이듯 빤하기만 했다.

“그리핀을 다시 굴복시킬 자신이 있는 모양이군요.”

주인을 바꾼 그리핀을 다시 원상태로 돌릴 만한 비책이 있는 게 틀림이 없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막대한 배상금을 단지 그리핀을 보는 대가로 제시했을 리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대에게 묻겠다.”

테오도르 국왕은 물었다.

“과연 그대의 지배는 공고한 것인가. 그리 단언할 수 있겠는가.”

속성 지배력은 정령사와 계약을 맺은 정령마저도 스스로를 바치게 만들 정도로 강력한 것이다. 국왕의 질문에 그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단언합니다.”

김선혁은 자신감을 가득 담아 대답했다.

“그리핀도르의 군주 본인이 온다면 모를까.”

**

“폐하의 결정으로 말미암아 아국과 아덴버그의 관계에 상당한 진전이 있을 거라 사료되옵나이다.”

기욤 조르쥬 폰티앙은 싱글벙글 웃으며 테오도르 국왕의 결정을 칭송했다.

“아데스덴 왕가의 자비로움에 축복이 있기를!”

마치 벌써부터 그리핀을 되찾기라도 한 것 같은 모습이었다.

왕성의 외곽, 인적 드문 공터에 왕가 수호대의 기사들과 마법사들이 포진했다. 그리고 그 사이로 기욤 조르쥬 폰티앙이 그렇게 기다리던 그리핀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카악!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동석한 김선혁을 발견한 그리핀들이 반가움에 길게 울부짖었다.

“허어.”

폰티앙은 그 모습을 보고 못마땅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하지만 그도 잠시였을 뿐, 이내 다시 싱글벙글 웃으며 그리핀들의 모습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전장에서 꽤나 상했다고 들었는데, 생각 이상으로 건재한 모습이군요.”

그 모습이 마치 제 물건을 잘 보살펴주어 고맙다 여기는 투라, 김선혁은 저도 모르게 코웃음을 치고 말았다.

“그럼 부디 아데스덴 왕실의 한마디가 천금과도 같기를 바라겠습니다.”

자신감 가득한 폰티앙의 말에 테오도르 국왕이 잠시 김선혁에게 시선을 보냈다.

끄덕.

그는 대답 대신 조용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고, 국왕은 그제야 폰티앙에게 대답했다.

“약속은 이루어질 것이다. 그대 역시 그러하리라 믿으마.”

테오도르 국왕의 말에 폰티앙이 그리핀에게 다가갔다.

카아아아악!

드본과 미온테, 두 그리핀이 그런 폰티앙을 보며 부리를 딱딱 거렸다. 당장에라도 폰티앙을 덮쳐들 것처럼 살벌한 기세였다.

하지만 폰티앙은 이 사나운 괴수들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바람의 신수여.”

폰티앙은 품속에서 반짝이는 무언가를 꺼내 손가락에 끼워 보이며 명령했다.

“굴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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