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래곤 푸어-151화 (15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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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 약혼식

왕도 아데스덴은 왕녀와 드라흔의 약혼을 축하하기 위해 방문하는 이들로 연일 문전성시를 이루었고, 그렇게 왕도를 찾은 이들로 인해 거대한 도시는 포화 상태에 이르렀다.

연대 하나가 퍼레이드를 벌여도 좁다 여겨지지 않을 대로조차도 북적거리는 방문객들을 감당하지 못해 미어터질 지경이 되었고, 왕도의 숙박업소들은 빈방 하나 없이 초만원이 된 지 오래였다.

“이놈! 내가 어디의 누군지 알고 이리 홀대하느냐!”

“누가 할 소리! 소속 가문과 이름을 밝혀라!”

왕실의 큰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온 시골 귀족들은 숙소를 잡지 못해 영 심기가 좋지 않았고, 만만해 보이는 자들에게 시비를 걸기 일쑤였다.

소란을 일으키는 건 귀족들뿐이 아니었다. 으레 행사가 있을 때면 왕실이 후하게 먹거리를 베푸는지라 주변에서 몰려든 뜨내기들의 수가 적지 않았다.

“당장 꺼져! 여기가 네놈 집 마당인 줄 알아!”

“며칠만 지붕 좀 빌립시다! 거 닳는 것도 아니고. 조용히 있다 가겠다는데!”

그 덕에 왕도의 시민들과 불청객들의 시비가 끊이지 않았다.

덕분에 왕도를 경비하는 왕도 수호군은 전에 없이 바쁘게 왕도를 누비고 다녀야 했다. 하지만 그들이 아무리 바쁘게 뛰어다녀도 왕도의 번잡함은 도통 정리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런 번잡스러움이 전염된 것일까. 평소 상주하는 시종과 시녀들의 수에 비해 적막하기 그지없었던 왕성도 꽤 소란스러운 상태였다.

“혹시라도 빠진 게 있으면 책임자 하나 목 날아가는 정도로 끝나지 않을 테니까, 두 번 세 번 확인해!”

“주문한 물건은 대체 왜 아직도 안 오는 거야! 오늘 물건 받아서 검수해야 당일 돼서 문제 안 생길 거 아냐!”

모시는 분의 체통이 상한다며 언행에 유별날 정도로 신경을 쓰던 왕실의 시종과 시녀들이 이곳저곳에서 소란을 피워댔다.

“절대로! 절대로 왕실의 이름에 누가 되지 않게 해야 한다!”

시종과 시녀들은 마치 강박증에라도 걸린 것처럼 히스테리를 부려댔다.

하기야 무리도 아니었다. 다음 대의 여왕이 될 게 분명한 왕녀의 약혼식을 준비하는데 행사를 준비하는 이들이 예민하지 않다면 그게 도리어 이상한 일이었다.

“귀하신 분들의 귀에 거슬리지 않게, 때와 장소를 구별하라.”

이때만큼은 엄격하기로 소문난 시종장마저도 아랫것들의 방정맞음을 크게 질책하지 않았다. 무엇이 더 중요한지는 시종장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지금은 아랫것들이 무슨 짓을 하든지 간에 식을 문제없이 마무리 짓는 것만이 중요했다.

시종장은 만약 무사히 식을 치를 수만 있다면 시종들이 발가벗고 다니든 물구나무를 서서 다니든 다른 건 아무래도 좋다 여기는 것처럼 보였다.

만약 무사히 식을 마무리 지을 수만 있다면 영혼마저 팔 듯 필사적인 모습이었다.

온 나라의 귀족들뿐 아니라 타국의 특사들마저도 참가한 큰 행사, 까딱 잘못해 실수라도 저지른다면 아데스덴 왕가의 명예가 곤두박질치고 만다. 그리고 왕실의 명예를 실추시킨 죄는 시종 몇의 죽음으로도 만회할 수 없는 끔찍한 것이었다.

게다가 이번에는 핑곗거리도 없었다. 약혼식의 준비는 온전히 아데스덴 왕실의 준비 하에 진행되었다. 아무래도 이방인인 김선혁의 입장을 배려한 때문이었다.

절차상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는 예물에 대한 준비마저도 왕실이 주도했고, 왕실이 미처 살피지 못한 부분은 절차상 후견인을 맡은 국왕파의 거두 로젠하임 후작이 준비하였다.

그 덕분에 김선혁은 몸만 덜렁 식에 참석하는 모양새가 되어 버렸다. 그래서인지 그는 당일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크게 실감을 하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을 뿐이다.

수십의 기사와 마법사들을 척살했네 마네 거창한 소개 끝에 식장에 불려 나온 그는 오직 자신만을 향한 수천 쌍의 눈앞에서 마치 발가벗겨진 듯한 기분이었다.

그제야 그는 약혼식을 실감하게 되었고, 저도 모르게 긴장하고 말았다.

아마 그래서였을 것이다. 그는 식이 어떻게 진행이 되었는지 도통 기억이 나지 않았다.

어, 어 하고 로젠하임 후작에게 이끌려 수많은 사람들 앞에 서 있게 되었나 싶더니,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어린 왕녀의 손에 약혼의 증거인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아덴버그의 적법한 지배자이자 자랑스러운 아데스덴 왕가의 수장인 나 테오도르 티베리우스 로 아데스덴은 이 자리를 빌어 오필리아 라우렐 로 아데스덴과 선혁 라인펄 김 드라흔의 약혼이 이루어졌음을 선포하노라!”

왕녀의 보호자이자 약혼의 공증인으로 참석한 테오도르 국왕의 쩌렁쩌렁한 음성을 듣고 나서야 김선혁은 식이 끝이 났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아….”

김선혁은 뒤늦게 눈앞의 약혼자를 바라보았다.

필시 하녀들이 공을 들여 치장해주었을 왕녀는 그 어느 때보다 성숙해 보였다. 그 타고난 기품과 사랑스러움을 강조하고 보완하기보다는 오로지 풋풋함을 감추고 성숙함을 만들어내는데 몰두한 기이한 화장술의 결과였다.

아마 다른 이들이 이런 화장을 했다면 필시 그 모습이 적지 않게 흉했을 것이다. 하지만 왕녀는 아니었다.

그녀는 전혀 흉하지도 그렇다고 어색하지도 않았다.

소녀도 아니고, 여인도 아닌, 소녀와 여인의 중간 어디쯤 걸쳐진 듯한 그 기묘한 자태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묘한 감상을 불러일으키는 마력이 있었다.

김선혁은 순간적으로 왕녀의 화장을 전담하는 시녀들의 뛰어난 수완에 감탄을 해야 하는지, 그도 아니면 왕녀가 타고난 미색에 감탄을 해야 하는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리고는 이내 전자 쪽에 무게를 두게 되었다.

가만히 왕녀의 얼굴을 바라보다 보니 그런 미묘한 어긋남조차도 시녀들이 의도한 건 아닐까 의심이 되었던 것이다.

“드라흔 백작?”

시녀들의 신묘한 기술에 감탄하여 저도 모르는 사이에 왕녀를 빤히 바라보고 말았다. 뒤늦게 그 사실을 알아차리고 시선을 돌리려 했지만, 약혼식에서조차 당당한 이 왕녀는 도리어 덤덤한 시선을 보내왔다.

아데스덴의 혈통 특유의 투명한 시선을 마주하고 나니 괜스레 민망함이 더해졌다. 마치 왕녀의 변해버린 외모에 조금이나마 마음이 움직인 제 속마음이 들킨 듯한 기분이었다.

내심을 숨기기 위해 그는 무심코 홱, 하고 소리가 나게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부디 그대와 오필리아 모두 온전히 부부로 거듭나는 그날까지 서로가 변함없이 순결하고 신의 있기를 바라겠다.”

테오도르 국왕은 그런 그의 내심을 전부 다 알고 있는 듯, 묘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국왕 폐하 만세!”

그 아무것도 아닌 덕담에 왕도의 시민들과 귀족들이 열광적으로 환호했다.

슥.

테오도르 국왕은 그들을 잠시 훑어보다 아무렇지도 않게 손을 들어 올렸다.

소란스러운 광장에서 주의를 끌기에는 턱없이 작은 몸짓, 하지만 그 아무렇지도 않은 행동에 목에 핏대를 세우고 왕실을 찬양하던 시민들과 귀족들이 거짓말처럼 입을 다물었다.

“먹고 마시고 취하라! 이는 왕명일지니, 시종관은 왕실의 곳간을 열어 저들이 명에 충실할 수 있도록 술과 먹을 것을 제공하라!”

“폐하의 뜻대로 하겠나이다.”

“아데스덴 왕실의 무한한 영광을 위하여!”

“자비로운 폐하께 축복이 있기를!”

목소리만큼은 누구보다 큰 시종관이 테오도르 국왕의 명을 선포하자, 왕도의 시민들이 더욱더 열렬하게 환호했다.

“축하하네. 드라흔 백작.”

이 세상에 아무런 연고가 없어 어쩔 수 없이 김선혁의 후견인을 맡아야 했던 로젠하임 후작이 다가와 축하의 말을 건네주었다.

“축하합니다! 부디 혼약의 그 날까지 무탈하게 지내어 오늘 뿌린 씨앗이 열매를 맺기를 바라겠습니다.”

“약혼을 축하드립니다.”

이를 시작으로 주변에서 눈치만 보고 있던 귀족들이 앞다투어 달려와 축하의 말을 건넸다.

“감사합니다.”

그는 축하를 건네는 귀족들에게 둘러싸이고 말았다.

**

약혼식이라는 게 얼마나 거창하고 정신이 없는 것인지, 김선혁은 식이 도대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지경이었다.

단지 기억이 나는 것이 있다면 오늘따라 유달리 성숙해 보이던 약혼자의 모습뿐이었다.

왕녀는 순결을 상징하는 순백의 드레스를 곱게 차려입고 있었고, 그 여인도 소녀도 아닌 자태가 아직도 강렬하게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과연 여자의 변신은 무죄라 했던가.

화장한 소녀의 아름다움은 꽤나 인상이 깊었고, 김선혁은 어쩐지 왕녀가 앞으로 어떻게 자랄지 어렴풋이나마 미래를 엿본 듯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오늘의 그에게는 왕녀의 자태를 떠올리며 곱씹을 여유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수많은 귀족들이 그와 친분을 쌓기 위해 달려든 탓이었다.

“드라흔 백작님. 저는 북부에서 온 휴페리언이라고 합니다. 먼저 약혼을 축하드리며….”

“남부 헥센 가문의….”

“저희 가문으로 말할 것 같으면….”

도대체 얼마나 많은 귀족들에게 축하를 받았고, 이름을 들었는지 이제는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반갑습니다.”

기계적으로 답례의 말을 건네는 것만으로도 그는 진이 빠지고 말았다.

김선혁으로서는 어서 이 정신 없는 약혼 축하 연회가 끝이 나기를 바랄 뿐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연회는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고, 심지어 오늘 하루 동안만 진행되는 것도 아니었다.

테오도르 국왕의 포고 아래 왕도 아데스덴은 일주일간의 축제와 연회가 예정되어 있었다.

“드라흔 백작.”

“백작.”

“드라흔 백작이시여.”

김선혁은 자신을 둘러싸고 한마디라도 더 걸기 위해 눈을 뒤룩뒤룩 굴려대는 귀족들을 보며 남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축하드립니다.”

“아름다우신 왕녀를 약혼자로 맞이하신 것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드라흔 백작.”

그런데 그중에서도 유달리 귓가를 파고드는 음성이 있었다.

억지로 만들어낸 친근함과 호의를 덕지덕지 처바른 귀족들의 음성 사이에 유달리 건조하고 메마른 음성은 단연 이질적이었다.

“음?”

그는 저도 모르게 목소리의 주인을 찾아 몸을 돌렸다. 척 보기에도 아덴버그의 복식과는 다른 차림새를 한 장년의 사내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반갑소. 기욤 조르쥬 폰티앙이요.”

말로는 반갑다 하면서도 묘하게 날이 선 어조에는 적대감마저 느껴질 지경이었다.

그 거북스러운 태도에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던 김선혁은 뒤늦게 사내의 가슴팍에 새겨진 새하얀 문양을 발견했다.

김선혁은 그 문양이 무엇을 상징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리핀도르….”

창공의 기사들을 상대하며 몇 번이나 보아왔던 괴수를 똑 닮은 문양이 상대의 심장 어림에 새겨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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