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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 변화 (3)
왕녀는 몇 달 사이에 부쩍 자라 있었다.
젖살이 남은 얼굴은 여전히 앳되기만 했지만 훌쩍 자라버린 몸은 이제 슬슬 여인의 굴곡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가 한껏 치장을 하고 꽃 가득한 정원에 앉아 있으니 그 모습이 마치 한 폭의 그림과도 같아 감탄이 절로 나올 지경이었다.
하지만 한 떨기 꽃 같은 자태와는 별개로 왕녀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무표정했고, 조곤조곤한 말투도 묘하게 냉랭했다.
그래서 김선혁은 더욱 불편해져 버렸다.
“…하여 마법전문을 발송하여 왕도에 참석할 동서남북 변경백들을 수행할 자로 그대가 말한 하급 병과의 이방인들을 전원 포함케 하였다.”
그와 왕녀의 약혼식은 사방에 흩어진 이방인들을 불러 모을 구실로 더할 나위가 없었다. 나라의 큰 행사로 왕도를 오가는 이들의 행렬이 끊이지 않는 지금이라면 귀족들의 의심을 받지 않고 이방인들을 왕도로 불러들이는 게 어려운 일만은 아니었다.
“조금만 늦었다면 최소한 동서남북 중 동과 북의 변경백들에게는 연락이 닿지 않았을 것이다.”
들리는 건 전부 좋은 소식뿐이었다. 하지만 김선혁은 왕녀의 설명을 들으면서도 웃을 수가 없었다.
“이미 왕국에 존재하는 이방인들 중 7할 이상이 왕도에 집결하였고, 남은 이들 역시 이번 주 내로 왕도에 도착하게 되리라.”
평소와 다름없다면 다름이 없는 왕녀의 태도, 그런데 그 말투가 어쩐지 날이 서 있었다.
끙. 역시 아직도 기분이….
김선혁은 그 미묘한 온도 차의 이유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왕녀는 지난 통신의 서운함을 아직도 다 털어내지 못한 게 분명했다.
“이렇듯 순조롭게 일이 진행되고 있으니 그대는 걱정 말고 식을 준비하는 데만 전념하라. 이방인들을 만나는 건 식이 무사히 거행되고 난 후에나 가능하리라.”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사무적으로 용건만 말하고는 돌아가라 축객령을 내릴 리가 없었다.
“그럼 다시 또 찾아뵙겠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고개를 숙인 채 찻잔만 매만지고 있는 왕녀를 가만히 바라보던 김선혁은 결국 하는 수 없이 엉덩이를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대는….”
막 자리를 뜨려던 그는 풀죽은 음성에 걸음을 멈춰 세워야 했다.
“진정 바보다.”
“네?”
설마 왕녀가 이런 말을 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김선혁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하지만 고개 숙인 왕녀는 고개를 들 줄 몰랐고, 결국 그는 답답한 가슴을 안고 자리를 뜰 수밖에 없었다.
“하아.”
왕녀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걸음을 멈춰 세운 그는 참았던 한숨을 무겁게 내쉬었다.
사실 그라고 왜 모르겠는가. 약혼자의 무덤덤한 태도에 토라진 소녀를 달래는 데 필요한 건 특별한 이벤트도 고가의 선물도 아니었다. 단지 따뜻한 말 한마디면 충분했다.
하지만 그게 영 쉽지가 않았다.
왕녀와 자신의 사이에 놓인 세월은 16년에 달했고, 그 차이는 그가 극복하기에는 너무도 버거운 것이었다.
개선식 때 처음 보았던 어린 여아의 모습은 아직도 그의 머릿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아무리 왕녀가 성장한다고 해서 그때의 기억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김선혁의 입장에서는 코찔찔이(?)가 이제 좀 자랐다고 흑심을 품는 건 파렴치한 짓이었고, 그래서인지 도무지 왕녀를 여느 여인 대하듯 할 수가 없었다.
“끄응. 차라리 조금 늦게 만났다면 마음이 편했을 텐데.”
제 나이의 반도 채 살지 못한, 그것도 성인이 되려면 아직 한참이나 남은 소녀를 상대로 되지도 않을 감언이설을 지껄여댄다는 건, 정말이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자괴감이 드는 일이었다.
“너!”
왕녀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느라 내원을 걷고 있는데, 어디선가 흉악한 음성이 들려왔다.
“아….”
김선혁은 돌아보지 않고도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단박에 알아챘다.
“오랜만입니다. 후작님.”
왕녀를 끔찍이도 아끼는 성질 괄괄한 기사, 레인하르트 후작의 목소리가 분명했다. 그리고 후작은 지금 이 순간 가장 만나고 싶지 않은 인물 중에 하나였다.
‘왕녀께서 네놈으로 인해 슬퍼하실 일이 생긴다면, 절대로 가만두지 않을 테다.’
몇 번이나 들어왔던 후작의 경고, 아니나 다를까. 돌아선 그의 눈에 잔뜩 얼굴을 일그러트린 후작이 보였다.
“끄응. 진짜 돌겠네.”
왕성의 내원을 지키는 건 왕가 수호대의 기사들, 그리고 레인하르트 후작은 그 수호대의 수장이었다. 그런 후작을 언제까지고 피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최소한 그게 지금은 아니기를 바랐다.
가뜩이나 머리도 복잡한데 성질 괴팍한 후작의 잔소리를 들어서야 생각만 복잡해질 테니까.
하지만 어쩌랴. 이미 물은 엎질러졌고, 잔뜩 화가 난 후작은 그의 눈앞에 있었다.
김선혁은 후작이 뭐라 말을 하기도 전에 재빨리 선수를 쳤다.
“그렇지 않아도 후작님께 상담할 일이 있었습니다.”
“지금 네 고민 따위가 중요한 게 아니….”
“왕녀와 관계된 일이기도 합니다.”
그가 허심탄회하게 자신의 마음을 늘어놓는 바람에 화를 내려다 타이밍을 놓친 후작이 이를 갈아댔다.
“이익!”
하지만 왕녀의 일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후작답게 화를 내는 대신 감정을 억누르며 그의 말에 귀를 기울여 주었다.
“제가 살던 세상에는 미성년자(未成年者)라는 말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후작의 화를 피하기 위해 시작한 상담이었지만, 저도 모르는 사이에 진솔하게 속내를 털어놓게 되었다.
“성인이 미성년자를 사귄다는 건 꽤나 거북스러운 일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범죄자라고 손가락질을 받기도 하지요.”
김선혁은 자신이 왕녀를 어정쩡하게 대할 수밖에 이유를 전부 설명해주었다.
“압니다. 약혼이 결정된 이상, 저도 이제는 태도를 바꿔야 한다는 걸. 하지만 그게 제게는 영 쉽지가 않습니다.”
이쪽 세상에 꽤나 적응했다고 해도 그게 그의 가치관 전체가 바뀌었다는 말은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왕녀가 자신의 따뜻한 한마디 말만을 기다린다는 걸 알면서도 모른 척하고 말았다.
“후우. 원래는 말이다.”
그의 이야기를 들은 레인하르트 후작은 탄식처럼 입을 열었다.
“너를 만나면 가만두지 않을 생각이었다.”
농담이 아니었다. 처음 마주쳤을 때의 후작은 만약 그가 진지하게 고민을 털어놓지 않았다면 칼이라도 뽑아 들지는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로 화가 나 있었다.
“꽃길만 걸으셔도 부족할 왕녀께서 하루에도 몇 번이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걸 들을 때마다 나는 마음속으로 검을 휘둘렀다.”
그 마음속으로 휘두른 검에 난도질당한 누군가의 정체를 짐작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참기로 했다.”
“다행이군요.”
김선혁은 진심을 담아 말했다.
녹테인의 기사단을 상대로 홀로 달려들면서도 망설임이 없던 그였지만, 레인하르트 후작의 분노를 정면으로 마주하고 싶은 생각은 요만큼도 없었다.
그땐 내가 미쳤었지. 무식하면 용감하다더니.
과거에 후작을 골탕 먹이기 위해 했던 짧은 대련이 얼마나 무모한 짓이었는지, 근래 들어서야 알게 되었다. 이 그라두스 넘버 4에 빛나는 장년의 기사는 괴물 중에서도 진짜 괴물이라고 할 수 있는 자였다.
한 번 더 전직을 한다면 모를까. 지금의 그로서는 후작을 상대할 자신이 없었다.
물론 후작이 마음속으로 칼을 휘둘렀다고, 정말로 현실에서까지 칼을 휘두르지는 않을 것이다. 후작은 괴팍한 성격을 지녔지만 그 정도로 앞뒤를 모르는 인물이 아니었다.
“난 네가 살던 저 너머의 세상이 어떤 곳인지, 그곳의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갖고 살아가는지 조금도 알 수 없다. 하지만….”
불같이 화를 내지는 않았지만, 후작의 목소리는 끔찍할 정도로 차가웠다.
“네 어정쩡한 태도가 미래에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내가 아무리 칼을 휘두를 줄밖에 모르는 무식한 무부(武夫)라고 해도 말이다.”
김선혁은 반박할 수 없었다. 그 스스로도 지금의 자신이 얼마나 어정쩡한 상태인지 더없이 잘 알고 있었던 탓이었다.
이곳 세상에 완전히 적응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그가 정말로 이 세상의 법칙을 받아들인 건 일부에 불과했다.
싸우고 죽이고 어울리고 믿고 의지하는 단순한 행동만을 몸에 익혔을 뿐, 그 외에는 전혀 받아들이지도 않았고 받아들일 생각조차 없었다.
“네가 있는 곳은 저 너머의 세상이 아니라, 여기 왕도 아데스덴이다.”
레인하르트 후작의 말 대로였다. 저쪽 세상으로 돌아가기를 포기한 이상, 이쪽저쪽 필요한 것만 취하는 어정쩡한 태도는 이제 버려야 했다.
“드라흔은 허상인가. 단지 이방인 김선혁이 잠시 뒤집어쓴 껍데기에 불과한지, 네 스스로 판단하여 선택해야 할 것이다.”
김선혁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왕녀께서….”
하지만 고민은 길지 않았다.
“지금 어디 계신지 알고 계십니까?”
처음부터 이리 했어야 했다.
스스로 약혼을 받아들이고도 이리 오랫동안 간을 보듯 거리를 두고 있었으니, 왕녀에게 지은 죄가 참으로 컸다.
“왕녀께서는 아까 그곳에 그대로 계시다.”
레인하르트 후작은 여전히 화가 풀리지 않은 듯한 모습이었지만, 그의 질문에 선선히 대답해주었다.
“드라흔 백작.”
막 왕녀를 찾아 떠나려는데, 후작이 그를 불러 세웠다.
“그분을 잘 부탁한다.”
제 딸을 빼앗긴 아비의 음성처럼 꽁한 기색이 있었지만, 후작의 음성은 진심이 가득했다.
“걱정 마십시오.”
김선혁은 그런 후작을 보며 씨익 웃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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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녀는 김선혁이 내원을 떠났을 때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녀는 아까와 마찬가지로 식어버린 찻잔을 매만지고 있었고, 고개를 숙인 채였다.
쉿.
그를 발견한 시녀들이 왕녀에게 기별을 주려는 걸, 손가락을 입에 대고 막았다. 눈치 빠른 시녀들이 잠시 왕녀와 그를 번갈아 바라보다 발소리 없이 슬금슬금 물러났다.
제 주변을 지키던 시녀들이 자리를 뜬 것도 모르고 왕녀는 여전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무슨 생각을 그리 하십니까.”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있던 왕녀가 그의 음성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이내 그를 발견하고는 놀란 토끼처럼 황급히 얼굴을 숨겼다.
“그대는 돌아간 게 아니었나.”
찻잔을 매만지는 손길이 더욱 조급해졌다. 작고 가는 손가락이 오간 찻잔 부분이 벌써부터 반질반질 광이 날 지경이었다.
김선혁은 그런 왕녀를 가만히 바라보다, 말했다.
“생각해보니 잊은 게 있지 뭡니까.”
왕녀는 애써 반응을 보이지 않았지만, 어쩐지 모르게 귀가 쫑긋 선 듯한 느낌이었다. 그 모습에 김선혁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왕성의 내원이 이 시기에 그렇게 아름답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리고 제가 돌아오면 구경시켜준다고 하셨었지요. 혹시 잊으셨습니까?”
“…잊지 않았다.”
잠시 텀을 두고 왕녀가 작은 목소리로 대답을 해왔다.
“혹시 왕녀께서 친히 제게 내원의 아름다움을 견식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실 수 있을런지요. 할 줄 아는 게 쌈박질밖에 없는지라 꽃이고 풀이고 이름 하나 아는 게 없습니다.”
“화초에 관심이 있는 자라고 해도 이 많은 풀과 꽃들의 이름을 전부 아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스스로를 무식하다 말했더니, 그게 마음에 걸렸는지 은근슬쩍 그를 두둔해주었다.
“그렇군요. 그럼 지금이라도 조금씩 배워볼까 하는데, 혹시 도와주시겠습니까.”
왕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났을 뿐이었다.
“저건 삼색 크데난데라는….”
작고 가는 손가락이 펼쳐졌다. 그리고 앙증맞은 입술에서 조곤조곤 꽃의 이름이 흘러나오고 그 아름다움을 찬양하는 시가 읊어졌다.
“호오.”
솔직히 꽃의 이름과 꽃말 따위야 아무래도 좋았다.
그래. 이렇게 하다 보면….
심경의 변화가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장 왕녀가 여자로 보이게 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자신의 마음속에 공고히 솟아 있던 벽 하나가 무너져 내렸다는 것만큼은 분명했다.
그는 선택했고, 앞으로 많은 면에서 바뀌어 갈 것이다.
김선혁은 슬쩍 발을 내딛어 왕녀의 곁에 섰다. 이렇게 붙어서면 보이는 게 아직은 작은 머리통 꼭대기 밖에 없었지만, 언젠가 왕녀도 어른이 되고 여인이 될 것이다.
그때가 되면 눈을 마주하고 나란히 걷는 것도 가능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