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래곤 푸어-149화 (149/305)

00150    =========================================================================

150. 변화 (2)

[근래 들어 여론이 좋지 않은 건 그대도 알고 있으리라.]

왕녀는 노르딕의 멸망으로 인해 이방인들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이 최고조에 이르렀다며 우려를 표했다.

[그런 상황에서 비록 하급 병과라 하나 수십이나 되는 이방인들을 움직이는 건, 자칫 잘못하면 여론을 악화시키는 빌미가 될 수도 있음이니라.]

이방인들에 대한 경계심이 극에 달한 상황에서 수십의 이방인들을 한곳에 모은다면 잡음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다른 때라면 몰라도 지금 명분을 쥐고 있는 건 귀족들이었다.

‘이방인들로 인해 왕국이 흔들리는 일은 있어서는 안 된다.’

‘충성스러운 기사들과 지혜로운 마법사들이 버티고 있는 이상, 이방인들의 힘은 왕국의 명운과 밀접하게 닿아있지 않다.’

‘이방인들이 없었던 때에도 왕국은 나약하지 않았다.’

귀족들의 말 대로였다.

이방인들이 실질적으로 왕국의 전력에 차지하는 비중은 결코 크지 않았다. 비록 김선혁 스스로가 놀라운 전공을 세워 녹테인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지만, 이는 오직 그라는 개인의 성과일 뿐이었다. 다른 이방인들이 전쟁에 기여한 것은 사실상 전무하다고 봐야 했다.

‘드라흔이 큰 공을 세우기는 했지만, 왕국의 안위를 지켜온 것은 기사들과 마법사들이다. 그들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감히 왕국을 범할 마음을 품지 못하게 만드는 이들이니 그들이야말로 왕국의 진정한 수호자들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왕국을 수호하는 건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이방인이 아닌 기사들과 마법사들이다.’

오직 왕실의 명을 따를 뿐인 이방인들은 귀족들에게 있어 목에 걸린 가시 같은 존재였고, 어떻게든 전력을 약화시켜야 하는 존재들이었다.

비록 그 너머에 왕실에 대한 견제가 가득할지언정 그들이 내세운 주장이 꼭 틀린 것만은 아니었다. 그래서 왕실은 그들을 권위로 찍어 누를 수가 없었다.

노르딕에서 일어난 이방인들의 반란을 주의 깊게 지켜보는 게, 귀족파의 귀족들만이 아니었던 탓이다.

‘인재를 아끼시는 폐하의 공정한 마음이야 십분 알고 있으나, 이미 수십의 이방인들이 은혜를 저버리고 이탈한 이상 한 번쯤은 그들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셔야 하리라.’

왕가에 충성을 맹세한 국왕파의 귀족들마저도 이방인에 대한 우려를 표하고 나선 것이다.

상황이 그러하니, 왕실이 전처럼 이방인들을 무조건적으로 비호해주는 건 적지 않은 부담이 되는 일이었다.

김선혁도 왕국 내 정세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왕실이 자신의 요청을 쉽게 받아들일 거라고는 처음부터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포기할 생각도 없었다.

“듣기로는 각 왕국에서 이탈한 이방인들 중 대다수가 하급 병과의 이방인들이라 하더군요.”

그는 끈기 있게 왕녀를 설득했다.

“저는 그렇게 왕국을 떠나 노르딕으로 향한 이방인들이 대단한 신념을 위해 이탈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전쟁을 몇 번이나 겪은 그에게도 죽고 죽이는 전장은 끔찍한 것이었다. 그런데 저쪽 세상에서 평화롭게 살아온 이들이 무슨 영광을 보겠다고 한창 전쟁 중인 노르딕으로 향했겠는가.

모르긴 몰라도 단지 왕국에서의 삶에 그다지 미래가 보장되지 않기 때문에 떠났을 가능성이 높았다. 물론 개중에는 노르딕의 이방인들이 당한 학대에 분노했다거나 그 이념에 공감하여 떠난 자들도 있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그들조차도 중급 병과에 비해 상대적으로 열악한 자신들의 처지에 대한 불만과 박탈감이 아예 없지는 않을 것이다.

“하여 저는 그들의 삶이 지금보다 윤택해진다면 왕국을 떠나지 않을 거라 생각합니다.”

[일리가 있다.]

왕녀 역시 그의 생각에 동의했다.

[하지만 과연 그들이 그럴 가치가 있겠는가?]

분명 인재를 아끼는 건 틀림이 없었지만 아데스덴 왕실은 제 스스로 가치를 입증하기 전에는 다소 혹독하게 대하는 면모가 있었다. 왕녀의 질문 역시 왕실이 그간 보여왔던 그러한 태도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김선혁은 왕녀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지금은 없겠지요.”

하급 병과의 이방인들은 아무리 잘 봐줘 봐야 조장급 병사 수준일 뿐이었다. 왕실이 그런 그들을 단지 잡아두기 위해서 지원을 해주기를 바라는 건 무리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그들이 가치를 입증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중급 병과라면 모를까.”

어딘지 모르게 묘한 김선혁의 말에 왕녀가 궁금증을 참지 못한 듯 물어왔다.

[그대의 말은 마치 그들을 모두 중급 병과로 만들 자신이 있다는 말처럼 들리는구나. 내가 잘못 들은 것인가?]

“생각해둔 것이 있습니다.”

이방인의 능력을 결정짓는 가장 큰 요소는 병과다. 그 다음이 레벨과 스테이터스였다.

타고난 병과는 바꿀 수 없겠지만, 레벨을 올려 스테이터스를 상승시키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했다.

그리고 그는 레벨업에 이르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이미 터득한 바가 있었다.

“굴려야지요.”

안 되면 될 때까지, 노가다로 되지 않는 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

[당장 대답을 하기에는 곤란한 청이로다.]

왕녀는 잠시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 말했다. 아무래도 그의 말만 믿고 정치적인 부담을 짊어지기에는 무리가 있다 여긴 모양이었다.

“기다리겠습니다.”

김선혁은 겸허하게 왕실의 결정을 기다리겠노라 대답했다.

[할 말은 그게 다인가?]

“네. 이게 답니다.”

그런데 왕녀는 어쩐 일인지 용건이 끝나고도 통신을 끊지 않았다. 뭔가 할 말이라도 따로 있는가 싶어 가만히 왕녀의 말을 기다렸더니, 저 너머에서 깊은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식을 치르기까지 남은 시간이 불과 3주뿐이니라.]

그렇지 않아도 근래 들어 줄리앙이 왕도로 출발할 인선을 꾸린다고 한창 바쁘게 뛰어다니고 있었다. 중요한 식을 위해 왕도로 가는 것이니 그 위엄과 권위가 손상되지 않을 만큼의 인원을 동행해야 한다는 이유였다.

혹시나 자신이 늦을까 염려하는 건가 싶었던 김선혁이 거의 준비가 끝났다 말해주려는 찰나, 왕녀가 먼저 말을 꺼냈다.

[그리고 그대가 왕성을 떠난 지 몇 달이나 지났노라.]

점점 알 수 없어지는 왕녀의 말에 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대는 약혼녀의 안부조차 묻지 않고 제 할 말만 늘어놓는구나.]

“아….”

김선혁은 그제야 왕녀가 내뱉은 한숨의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늦게나마 자신의 실수를 알아차린 그가 왕녀에게 안부를 물었지만, 그조차도 무미건조하기 짝이 없었다.

[기다림이 길었던 것은 오직 나뿐인 듯하니, 마음이 과히 좋지는 않도다.]

서운함을 넘어 냉랭하기까지 한 왕녀의 대답에 그가 변명이라도 하려는데, 뚝, 하고 통신 마법이 종료되었다.

**

왕실에서 짧은 마법 전문이 날아왔다.

‘허(許)’

왕실이 정치적 부담을 감수하고 기꺼이 김선혁의 청을 들어주기로 결정한 것이다.

계획대로 결과만 나온다면 왕실에게도, 그에게도, 하급 병과의 이방인들에게도 좋은 일이었다.

“아, 뭐지. 왜 이렇게 찝찝하지.”

하지만 그는 왕실의 답신을 받고서도 마냥 기뻐할 수가 없었다. 마지막에 일방적으로 통신 마법을 종료했던 왕녀의 태도나, 지나치게 짤막한 왕실의 마법전문이 영 마음에 걸렸던 탓이다.

“아오. 멍청한 놈.”

제 눈에 연애 상대로 보이지 않는다고 해도, 왕녀는 엄연히 약혼자였다. 그런 그녀를 직장 상사 대하듯 제 할 말만 하고 말았으니 왕녀가 토라지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이건 또 어떻게 풀어준다….”

할 줄 아는 거라고는 전장을 들쑤시고 다니는 것밖에 없었던 터라 어린 약혼녀의 기분을 풀어줄 방법이 도통 떠오르지 않았다.

“왕녀께서는 제 스스로 감정을 다스리는 데 능하시니, 크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는 게 없으니 주변의 도움이라도 청해볼 생각으로 아샤 트레일에게 물었다. 하지만 그는 금세 후회해야 했다.

자신이 싸우는 것밖에 모른다면, 이 우직한 여기사는 검을 수련하는 것밖에 모르는 여인이었다. 질문 상대로는 그다지 좋은 상대가 아니었던 것이다.

뒤늦게 질문상대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은 김선혁이 다른 이들을 찾았다.

“가서 확, 하고 안아드립시오.”

클라크는 그다지 확신이 서지 않은 얼굴로 조언했고,

“남자가 뭘 그런 사소한 걸 신경 씁니까!”

한센은 도리어 그를 사내답지 못하다며 비난했다.

“진심은 통한다! 모르십니까?”

요나슨을 비롯한 다른 기병 사내들도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내가 깜빡했네. 기병대 전원 모태 솔로였지.”

애초에 여자 경험이라고는 술집에서 수작을 부리는 것밖에 모르는 기병대원들에게 이런 질문을 한 게 실수였다.

“끙. 선물이라도 준비해봐야 하나.”

결국 그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한 김선혁은 혼자 끙끙거리며 토라진 왕녀의 기분을 풀어줄 방법을 궁리해야만 했다.

하지만 그에게 고민할 시간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이제는 왕도로 출발해야 했다.

“영주님.”

저택을 나서니 기병들이 가벼운 무장을 갖추고 기다리다 예를 표해왔다.

“매번 레드번을 타고 훌쩍 날아가셔서 섭섭해지려던 참이었습니다.”

클라크가 기분 좋게 웃으며 그에게 말을 걸어왔다.

왕녀의 약혼자가 홀로 왕도에 들어서는 건 위신에 맞지 않는 일이라며, 줄리앙이 부득불 고집을 부린 덕에 이번 왕도행에는 기병대원들과 함께 하게 되었다.

클라크를 비롯한 사내들은 그렇게라도 그와 함께 한다는 게 꽤나 기분이 좋은지 하나같이 방실방실 웃는 얼굴이었다.

“그럼 출발!”

골드레이크에 올라탄 김선혁은 영지에 남겨질 이들에게 몇 가지 당부를 하고는 일행을 출발시켰다.

**

대륙 북서부는 이방인들의 반란으로 난리가 났건만, 아덴버그의 왕도 아데스덴은 이방인과 왕녀의 약혼식으로 완전히 축제 분위기였다.

“아덴버그만 다른 세상 같군.”

약혼식을 축하하기 위해 아데스덴을 찾은 각국의 특사들은 그런 분위기에 영 익숙해질 수가 없었다.

“드라흔, 드라흔. 아주 귀에 딱지가 생기겠어.”

자신들의 왕국은 이방인들에 대한 여론이 악화되어 이제는 이방인들을 입에 담는 것만으로도 불온한 자 취급을 받을 지경인데, 아덴버그에서는 그 이방인이 하나뿐인 왕위 계승자와 약혼을 한다니 기분이 묘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한 편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수백 년에 걸쳐 이어져 온 녹테인과 아덴버그의 관계는 대륙에서도 유명했다. 만약 양국의 전력이 비등하지 않았다면 진즉에 사생결단이 났을 정도로 두 왕국은 사이가 좋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는 옛말이었다.

녹테인의 동부를 흡수한 아덴버그는 명실상부한 동부 대륙의 강대국이 되었고, 서부와 동부에서 동시에 두 나라를 상대로 방어전을 치러야 했던 녹테인은 정기가 크게 상하고 말았다.

동부에서만 각기 두 개의 기사단과 마법병대가 괴멸당하다시피 한 녹테인을 아덴버그의 맞수라 말하는 이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그만큼 지난 전쟁에서 갈린 승자와 패자의 입지는 명백했다.

그리고 그 모든 게 이방인, 드라흔의 덕이었다.

그 정도 공을 세웠으니 아데스덴 왕가가 귀한 왕녀와 혈연으로 묶어버리려 할 만도 했다.

“드디어 그 유명한 창공의 붉은 악마를 보게 되는군.”

지금 대륙에서 가장 유명한 이를 꼽자면, 노르딕의 마왕 박상진과 아덴버그의 용기병 김선혁이었다. 그중에서도 동부에서만큼은 용기병의 명성이 압도적이었다. 그런 유명 인사를 만나게 되었으니 특사들이 기대할 만도 했다.

“과연 어떤 자일지….”

명성 높은 와이번 라이더에 대한 소문은 무성했지만 정작 소문의 당사자가 어떤 자인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많지 않았다. 그래서 특사들은 제 나름대로의 상상력에 의존해 소문의 용기병을 그려보아야 했다.

“필시 피도 눈물도 없는 철혈의 사내겠지.”

수십의 기사들과 마법사들을 척살한 냉혈한(冷血漢), 그게 그들이 생각하는 드라흔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정작 그들이 그렇게 피도 눈물도 없을 거라 생각한 드라흔은 그 시각, 고작해야 제 가슴께에나 올 법한 소녀를 상대로 고전(苦戰)하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