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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곤 푸어-148화 (148/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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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 변화 (1)

“퍽도 일찍 사과한다. 난 머리통이 터질 뻔했는데.”

농담이 아니었다. 위기의 순간에 교감을 스스로 끊어내는 법을 깨닫지 않았다면 그는 자신의 머리통이 정말로 폭발했을 거라 확신했다.

[모든 것이 심신의 불완전함으로 말미암아 일어난 소치이노니, 입이 있어도 변명할 수가 없구나.]

용의 음성은 평소처럼 차분하고 태연했지만, 말이 아닌 머릿속에 직접 전달되는 사념이기에 그 너머에 느껴지는 감정의 편린까지 걸러낼 수는 없었다.

용은 지금 죄를 지은 아이처럼 전전긍긍하며 안달을 내고 있었다. 아닌 척하지만 그는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미안하긴 한가보네.”

[미안하다뿐이겠는가. 하나뿐인 나의 반려를 한순간의 감정을 이기지 못해 살해할 뻔했으니, 그 죄의 무게가 실로 무겁고 또 무겁도다.]

단순히 심증으로 자신이 죽을 뻔했다 여기는 것과 용이 직접 확인을 해주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김선혁은 놀라서 되물었다.

“뭐야. 정말 나 죽을 뻔한 거야?”

[그대 스스로 교감을 차단하지 않았다면, 살아도 백치가 되었을 것이다.]

이걸 화를 내야 할까. 말아야 할까. 진심으로 고민이 되었다. 하지만 일단은 의문을 푸는 게 먼저였다.

“끙. 그냥 넘어갈 생각은 없지만, 일단은 마왕이 뭔지 말해봐.”

순간 머릿속이 울렁댔다. 바로 전의 그 끔찍한 경험을 떠올린 김선혁은 기겁을 하며 외쳤다.

“그만!”

마치 뇌가 출렁이는 듯한 감각이 순식간에 가라앉고, 착, 하고 가라앉은 용의 음성이 들려왔다.

[입에 담기도 거북한 그 역천의 사도는 존재 자체로 세상의 법칙을 어그러트리는 끔찍한 존재다. 또한 그는 세상 모든 광명한 존재의 대척점에 있는 자이니 평화의 반대말과 다름이 없노라.]

용의 말투는 여전히 뜬구름을 잡듯 모호했다. 하지만 전하고자 하는 바는 더없이 명료했다. 용은 마왕을 이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되는 절대적인 악으로 규정하고 있었다.

[죽음은 모욕 받고, 생명은 끝없는 절망 속에서 허우적거릴 것이니, 세상에 귀함이 온데간데없으리라. 가장 더럽고 추악한 것들이 득세하여 온 세상이 비탄과 증오로 가득 차 곳곳에 신음과 단말마가 들리지 않는 곳이 없으리라.]

그 역시 마왕이라는 존재에 대해 강렬한 거부감을 느끼던 차였다. 하지만 그 증오는 용으로부터 전이된 것, 스스로는 아직 마왕의 존재에 대해 명확하게 파악이 되지 않은 상태였다.

“강해? 그 마왕이라는 놈?”

[그대가 나로 말미암아 힘을 얻었듯, 그자 역시 혼돈의 파편에게 이끌렸을 터, 그간 얻은 것이 적지는 않을 것이다.]

“아….”

초월적인 무언가에게 인도를 받는다는 건 정말이지 엄청난 매리트였고, 혼돈의 파편이라는 놈이 용보다 못할 것 같지는 않았다. 만약 그랬다면 저 자존심 강한 용이 이렇게 호들갑을 떨 리가 없었다.

실제로 노르딕 왕국을 멸망시킨 것은 이방인들의 군대가 아닌, 마왕과 마왕이 이끄는 죽음의 군대라 했다.

“그럼 그놈이 나타나면 세상에 멸망이라도 온다는 말이야?”

[암소는 새끼를 낳지 못하고, 과년한 처녀는 아기가 들어서지 못하게 되어 혼돈의 파편이 뿌리 내린 대지 위, 그 어떤 존재도 생명을 잉태할 수 없노라.]

용은 마왕이 할 줄 아는 것은 파괴뿐이라 몇 번이나 거듭 강조했다.

“음.”

이야기만 들어보면 마왕은 차라리 악마였고, 살아있는 모든 존재들의 적이었다. 하지만 김선혁은 그다지 마왕의 위험성을 실감할 수 없었다.

일단 난리가 난 노르딕 왕국은 아덴버그로부터 한참은 떨어진 대륙의 반대편이었고, 안동진을 통해 전해들은 마왕은 악마가 아닌 인간이었다. 그것도 모진 학대와 수탈 속에서 어쩔 수 없이 이 세상과 맞서 일어선 피해자였다.

[역천의 사도는….]

“잠깐.”

김선혁은 용의 음성을 제지했다.

“정신 사나우니까, 잠깐 가만 있어 봐.”

용은 거듭 강조하며, 세뇌하듯 마왕에 대한 적개심과 증오를 강요했지만 그는 마왕이 반드시 없애야 할 사악한 존재라 여겨지지 않았다.

물론 마왕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되었을 때의 거북스러운 감정은 여전히 가슴 속에 들어찬 돌덩이처럼 그를 답답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지금의 증오와 적개심이 인위적인 것이라는 것을 그도 잘 알고 있기에 스스로를 다스렸다.

한참을 궁리하고 고민하던 그가 마침내 결정을 내렸다.

“나는 상황을 더 지켜보겠어.”

[광명, 그중에서도 가장 찬란하게 빛나는 용기병이여! 이는 절대로 받아들일 수도 있어서는 안 되는….]

“일단 내 말부터 들어.”

당혹스러움이 가득한 용의 음성을 잘라낸 김선혁이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네가 아는 마왕이 얼마나 사악하고 끔찍한 놈인지는 알겠어. 그런데 지금의 내가 너조차도 호들갑을 떨 정도로 대단한 놈과 맞서 싸울 정도로 충분한 힘이 있어?”

입버릇처럼 너는 아직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말하던 용이다.

“대체 나더러 어쩌라는 거지? 지금 당장 레드번을 타고 저 대륙 끝과 끝, 반대편에 위치한 노르딕까지 날아가서 마왕과 싸우다 죽어버릴까?”

애초에 마왕이 천하의 나쁜 놈이라고 해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당장 드러난 업적만 보아도 마왕은 절대로 그의 아래가 아니었다.

“아서라. 아서. 살겠다고 일으킨 전쟁이다. 따지고 보면 먼저 시작한 건 노르딕의 왕족들과 귀족들이야.”

남자들은 노역으로 혹사당하고 여자들은 노리개가 되었다. 마왕과 노르딕의 이방인들은 명백한 피해자들이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이 세상에 끌려온 자들을 단지 자신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노예처럼 부리고 노리개로 취급했지. 그럼 노르딕의 귀족들과 왕족들은 선한 자들인가? 네가 말하는 광명한 존재에 이들 역시 포함되는 건가?”

지금 상황에서 누가 가해자고 누가 피해잔지는 더없이 명확했다. 그런데 용은 자꾸만 마왕이 사악한 존재니 당장 없애야 한다고 떠들어댔다.

김선혁은 그게 영 공감이 가지 않았다. 그가 보기에는 사악한 건 노르딕의 귀족들과 왕족들이었다. 안동진을 비롯한 북서부의 이방인들은 단지 사람답게 살기 위해 발버둥을 치는 것이었다.

[혼돈의 종자는 그 존재 자체로….]

그는 또다시 용의 말을 막았다.

“웃기지 마. 단지 마왕이라는 병과를 타고 났기에 그자가 죽어야 한다는 건 말이야.”

김선혁은 잠시 말을 멈추고 쓰게 한마디를 내뱉었다.

“나나 그자나 결국 누군가의 인도를 받아 그대로 따를 수밖에 없는 꼭두각시라는 말과 다르지 않아.”

박상진이라는 자가 마왕의 병과를 타고 났다는 이유만으로 죽어 마땅한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한다는 건, 김선혁 스스로도 용이 부여한 사명을 따라 살아갈 수밖에 없는 꼭두각시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말해봐. 나는, 박상진은 단지 너희들의 종일 뿐인가?”

용은 침묵했다.

“너한테는 늘 고마워. 어쩌면 네가 아니었다면 나는 진즉에 사스테인과의 전투에서 전사했거나, 또 다른 전투에서 죽었을지도 몰라. 아니, 아마 확실히 죽었을 거야.”

하급 병과의 태반이 전쟁에서 죽어버렸다. 살아남은 자들은 죽고 죽이는 끔찍한 상황 속에서 반미치광이가 되었다. 그들과 자신의 차이는 단지 타고난 병과의 격차밖에 없었다.

만약 그가 그들처럼 그저 그런 병과로 각성했다면 그 역시 그들처럼 여전히 고통 속을 살아가고 있었으리라.

그렇기에 그는 늘 용을 생명의 은인이라 생각했고, 마음 깊이 고마움을 간직해왔다.

“그래서 미안해. 나는 네 말을 따를 수 없거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번만큼은 용의 말을 들어줄 수가 없었다.

“나는 상황을 지켜보겠어.”

과연 마왕이 용의 말처럼 단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세상에 해악을 끼치는 악마라면 언제고 그 민낯이 드러날 것이다.

지금의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언젠가 올지 안 올지 모르는 그 날을 위해 최선을 다 해 힘을 기르는 것뿐이었다.

김선혁은 간절히 바랐다. 자신이 마왕과 대적해야 하는, 노르딕의 수많은 이방인들과 적으로 만나는 그 날이 오지 않기를, 마왕이 혼돈의 하수인이 아닌 인간 박상진으로 남기를 바랐다.

[그대는….]

한참 만에 침묵을 깨고 용이 무거운 어조로 말을 걸어왔다.

[나의 꼭두각시가 아니다.]

당장 마왕을 처단하지 않으면 모든 힘을 거두어들이겠느니 마니 떠들어댈 것 같더니, 용의 음성은 예상과는 다르게 화가 나 있지도 그렇다고 그를 질책하는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나 역시 그대의 의지를 강제할 생각은 없으니, 그대는 행여라도 스스로를 그리 여기지는 말지어다.]

생각지도 못한 격려에 김선혁은 피식 웃었다.

[그대는 나의 반려, 오롯이 판단하고 행하는 존재일지니 나 또한 반려의 의사를 존중하겠노라.]

의외로 선선히 그의 결정을 존중해주는 용의 태도에 김선혁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스스로의 정체성과도 맞닿은 마왕의 문제 탓에 혹시라도 용과 대립하게 되는 건 아닌가 내심 마음을 졸였던 탓이었다.

[허나 그대는 언제고 알게 되리라. 그대와 마왕이 같지 않고, 나와 혼돈의 파편이 같지 않음을 깨닫게 되리라. 다만 그 날이 너무 늦게 오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나도 그러길 바라지.”

짧은 대답 뒤에 다시 정적이 찾아왔다. 아무래도 용과의 대화는 이것으로 끝인 모양이었다.

“차라리 말단 기병일 때가 나았던 거 같네.”

용조차 사라져 홀로 남은 김선혁은 저도 모르게 한탄했다.

지금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초라했던 그 시절이 지금보다 몇 배는 편안했다. 최소한 그때는 단지 몸이 고단했을 뿐, 지금처럼 고민거리가 많지 않았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과거에만 머물러 있을 수만은 없었다.

지금의 그는 아덴버그 왕국의 고위 귀족이었고, 왕가의 예비사위였으며 수많은 부하들과 영민들을 책임지는 위치에 있었다.

“결국 익숙해지는 것밖에 없나….”

이제는 스스로도 변해야 할 때였다.

**

용과 대화를 나눈 그날 이후 김선혁은 조금 더 적극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안으로는 영지의 대소사를 직접 살펴보고 안토인 몽테뉴가 하는 일에 관심을 기울였고, 밖으로는 아덴버그 왕국에 남아있는 이방인들의 사정을 살피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많이 비네….”

그렇게 알아본 이방인들의 수는 예전에 비해 한참은 모자랐다. 일부는 녹테인과의 전쟁에서 전사하고, 일부는 안동진을 따라 노르딕으로 향했다.

남은 이방인들은 처음 소환되었을 때에 비해 절반 이상이 줄어버려, 백여 명도 되지 않았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사라진 이방인들의 대다수는 하급 병과의 이방인들이었다.

중급 병과의 이방인들 중 아덴버그를 이탈한 자들은 중앙 기사단에서 근무하던 이들 뿐이었는데, 공교롭게도 이탈자 전원이 김선혁에게 항명죄로 모질게 처벌을 받았던 자들이었다.

아무래도 왕녀의 묵인 하에 가해진 처벌에 앙심을 품고 노르딕으로 떠난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왕국에서도 꽤나 중히 대우하는 중급 병과의 이방인들이 단체로 저 험난한 전쟁터로 떠났을 리가 없었다.

“일백. 그중에서 왕실에서 집중 관리하는 중급 이상의 병과를 지닌 이들을 제외하면 대충 예순 정도인가.”

많이 떠났지만, 그래도 아직은 상당수의 하급 병과 이방인들이 아덴버그에 남아 있었다. 혹자는 노르딕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전쟁의 소용돌이가 두려워 남았을 테고, 혹자는 그처럼 이 세상에 정을 붙여 남았을 것이다.

이유는 제각각이었지만 그중 대다수가 중급 병과의 이방인들이 누리는 것에 비해 상대적으로 열악한 환경에 놓여 있다는 것만큼은 동일했다.

김선혁은 그런 자들을 추려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시작했다.

비록 강정태를 비롯한 서부 전선의 이방인들이 이탈하는 것을 막지는 못했지만, 남아 있는 자들이라도 챙기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사적으로는 동기들의 삶을 조금이나마 윤택하게 만들고, 크게는 아덴버그에서 더 이상 이방인의 이탈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그는 이러한 행동이 가져오는 정치적인 위험성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모든 일을 진행하기에 앞서 왕가에 자신의 의사를 밝히고 혹시 모를 오해의 소지를 차단했다. 이는 과거의 그라면 미처 헤아리지 못했을 부분이었다.

[내 경청할 것이니 그대는 기탄없이 말하라.]

통신마법 너머에서 들려오는 왕녀의 음성에 김선혁은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말했다.

“하급 병과의 이방인들을 성장시켜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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