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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 죽음의 군대 (2)
그건 차라리 목소리라기보다 거대한 사념의 파도와도 같았다. 김선혁은 머릿속이 터질 것처럼 몰려드는 엄청난 증오에 순간적으로 눈앞이 노래지고 말았다.
태어나서 한 번도 겪어보지 못했던 그 끔찍한 고통, 김선혁은 자신의 존재가 흩어지는 듯한 공포를 느꼈다.
“그만! 그만!”
필사적으로 정신을 차리고 몇 번이나 용에게 말을 걸었지만, 분노한 용은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역천(逆天)의 사도, 파괴(破壞)의 왕! 혼돈(混沌)의 자식이여! 어찌하여 또다시 세상에 현신했다는 말인가!]
“닥쳐! 닥치라고!”
김선혁은 정신을 차릴 수 없는 그 고통 속에서 마구 소리를 지르며 몰려드는 사념의 파도에 저항했다.
[이는 있어서는 안….]
“꺼지라고!”
그 노력이 통한 것인지 어느 순간이 되자 존재 자체를 잠식할 듯 정신을 짓누르던 거대한 의지가 뚝, 하고 끊어졌다.
“우윽.”
찰나의 시간 그는 극한의 공포와 고통을 느꼈고, 혼이 나가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초인적인 정신력으로 가까스로 의식을 회복할 수 있었다.
“빌어먹을 용….”
겨우 숨을 돌렸지만 용의 분노를 직접적으로 맞닥뜨린 여파는 결코 적지 않았다. 그는 지독스러운 탈력감에 시달려야 했다. 그리고 그런 상황은 안동진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 어느 때보다 강력했던 드래곤 피어를 정면으로 마주한 노르딕의 이방인은 눈을 까뒤집고 거품을 물고 있었다.
김선혁은 그 바닥에 허물어지듯 주저앉아 숨을 몰아쉬었다. 어느새 아티야는 소환 해제되어 사라져 있었고, 방 안에 들려오는 것은 오직 자신의 거친 숨소리뿐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숨을 돌리고 있자니, 아득해졌던 의식이 겨우 명료해졌다.
“후우.”
그는 한 번도 본 적 없었던 용의 격앙된 태도를 떠올리며 심호흡을 했다.
마왕이라는 이름이 주는 그 불길한 울림은 둘째 치고서라도, 용은 마치 필생의 대적이라도 마주한 것처럼 전에 없이 분노를 토해냈다.
서로 악연이라도 있었던 것일까. 지금의 그로서는 알 수 없었다.
“아오. 빌어먹을 용 새끼가 아주 머리를 엉망진창으로 헤집어 놨네.”
생각을 이어가려고 해도 워낙에 큰 충격을 받은 탓인지 머리가 제대로 돌지 않았다. 그는 그 상태로 침대에 걸터앉아 한참이나 더 스스로를 추슬러야 했다.
“끄으….”
그렇게 잠시 시간이 흐르자, 정신을 잃었던 안동진이 의식을 차렸다. 하지만 초점 없이 풀린 눈동자나 침이 흥건한 주둥이는 절대로 정상처럼 보이지 않았다.
“정신 차려.”
김선혁은 가만히 눈만 깜빡이는 안동진의 뺨을 두들기며 그 이름을 불러주었다.
“으으. 뭐지. 내가 왜….”
과도한 충격으로 순간의 기억이 날아갔는지, 안동진은 자신이 바닥에 쓰러진 이유를 영 떠올리지 못했다. 굳이 세세한 사정을 이야기해줄 생각이 없었던 김선혁은 의식을 차린 그를 다그쳐 중간에 끊겨버린 이야기를 재개하도록 종용했다.
“하… 생각했던 것보다 더 일이 크네.”
혼몽함이 채 가시지 않아 멍한 얼굴을 한 안동진은 가감 없이 노르딕의 사정을 털어놓았다.
안동진의 말에 의하면 놀랍게도 박상진이 이끄는 군대는 벌써 몇 개나 되는 기사단과 마법사단을 홀로 박살냈고, 노르딕을 거의 정복하기 직전이라고 했다. 이러한 성과에 고무된 대륙 북서부의 이방인들이 속속 노르딕의 이방인 무리에 합류하고 있다니, 생각했던 것보다 한참은 더 일이 진행된 모양이었다.
안동진은 그 모든 게 박상진이라는 이방인, 마왕의 힘 덕분이라 강조했다.
“혼자서 녹테인의 기사단을 두 개씩이나 박살내고, 그리핀 라이더들을 굴복시킨 그쪽이라면 우리에게 큰 힘이 될 거라 생각했어. 그래서 당초 계획보다 일정을 앞당겨서 내가 온 거지.”
말을 하면서 정신이 든 것인지 그렇게 말할 때의 안동진은 비교적 눈빛이 명료한 모습이었다.
“우리와 함께 하자. 그쪽이라면 당장 마음만 먹으면, 노르딕까지 가로질러 갈 수도 있잖아.”
정신을 차리자마자 또다시 회유를 시도해오는 상대를 보며 잠시 고민하던 김선혁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돌아가. 네가 다른 사람을 데려가는 것까지는 막지 않겠어. 하지만 난 너희들과 함께 할 생각이 없어.”
차라리 처음부터 저들과 함께였다면 어쩌면 먼저 나서서 이 세상의 불합리함을 타파하고자 노력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그 스스로가 이 세상에 너무도 많은 정을 붙였다.
거칠지만 속정은 깊은 기병대의 사내들과 충성스러운 종자, 처음부터 자신을 알아주고 믿어주었던 노사령관, 그리고 겉과 속이 다르지만 그래서 더욱 정이 가는 어린 왕녀.
그에게 있어 그들은 타파해야 할 이 세상의 부조리가 아니라, 현실이었고 동료였다.
어쩌면 그게 마왕이라는 존재에 대한 이유 모를 거부감 때문인지, 그도 아니면 이곳 아덴버그에서 이룩한 많은 것들을 포기하지 못해 부리는 고집일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자신이 저들의 이상에 큰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너도 우리와 같은 이방인이잖아. 이 빌어먹을 세상의 주변인이라고!”
그의 거절에 안동진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그에게 소리쳤다.
“아덴버그의 왕이 정말로 너를 사위로 여길 것 같아? 결국 우리는 이용만 당하다 버려질 운명이라고!”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너희라고 다를까?”
“무슨 소리야 우리는 같은 이방인이야. 배신할 리가 없잖아.”
대체 노르딕의 이방인들이 어떤 삶을 살아온 것인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하지만 서로를 의지하며 똘똘 뭉쳐야 했던 그들의 사정만큼은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사정을 이해한다고 해서 그의 결정이 바뀌는 건 아니었다.
그들이 서로를 믿고 의지하는 만큼 자신 역시 이곳의 인간들을 믿고 의지하고 있었다. 이제 와서 새삼 그들의 신뢰와 우정을 모두 저버릴 수는 없었다.
그 뒤로도 안동진은 한참이나 그를 더 설득했지만, 그는 요지부동이었다. 결국 노르딕의 이방인은 영지에 하루를 머물다 훌쩍 떠나버렸다.
그 뒤로 곳곳에서 소식이 들려왔다. 강정태를 비롯해 서부군에 남아있던 하급 병과의 이방인 전원이 자취를 감췄고, 중앙 기사단에서도 열넷이나 되는 중급 병과의 이방인이 이탈했다.
당연하게도 왕국은 발칵 뒤집혔다. 대번에 국경이 폐쇄되었고 이방인들의 추적을 위해 중앙에서 기사단이 뛰쳐나왔다.
하지만 종적을 감춘 이방인들은 발견되지 않았다.
“은혜도 모르는 이방인 놈들은 금수와도 같다.”
“언제 도망칠지 모르는 자들을 중용해서는 안 된다.”
가뜩이나 노르딕의 내란 탓에 좋지 않던 여론이 더욱 악화되었다. 공고하던 왕실조차도 완전히 그 비난을 완전히 막아내지 못할 정도였다.
“사라진 이방인들은 노르딕의 반란군에 회유되었다.”
어떻게 알아챈 것인지 악화일로를 걷는 상황 속에서 귀족들이 사라진 이방인의 행방을 알아냈다. 그리고 거의 그와 동시에 김선혁을 노린 소문이 떠돌았다.
“아덴버그에 침입하여 이방인들을 빼돌린 노르딕의 반란군이 드라흔 백작의 영지에도 방문했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드라흔 백작 또한 이방인, 과연 믿을 수 있는가.”
다른 이방인들을 비난하는 것처럼 드러내놓고 노골적으로 그를 잠재적 배신자 취급하지는 못했지만, 의도하는 바는 명명백백했다.
“빌어먹을 자식이 장난질을 쳐?”
소문을 전해 들은 김선혁은 잔뜩 화가 났다.
은신에 일가견이 있어 보이는 안동진은 종적조차 남기지 않고 수십의 이방인들을 빼내 갔다. 만약 이런 식으로 흔적이 발견됐을 자라면 애당초 폐쇄된 국경을 빠져나가지도 못했으리라.
그렇다면 이런 소문이 왜 퍼진 것인지,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그 전후 사정을 파악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안동진이 직접 자신의 행적을 흘렸다고 볼 수밖에 없었다.
사적으로는 자신들의 거룩한 혁명에 동참하지 않은 배신자를 곤란하게 만들고, 공적으로는 왕국 내에 그의 입지를 좁히고 배척당하게 만들어 결국은 자신들과 함께 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려 한 것이다.
하지만 안동진이 하나 간과한 것이 있었다.
“불온한 자가 드라흔 백작의 영지를 방문했건 아니건 간에, 지금 드라흔 백작이 있는 곳은 어디인가. 그는 자신의 영지를 지키고 있으며, 여전히 아덴버그의 당당한 백작이다. 혹여 쓸데없는 소문을 빌미 삼아 그의 충의를 의심하는 자가 있다면 직접 발본색원하여 그 죄를 물을 것이다.”
바로 아덴버그 왕실이 그에게 보내는 전폭적인 신뢰였다.
아데스덴의 수장 테오도르 티베리우스 로 아데스덴은 김선혁의 명예에 흠집을 내는 자는 직접 찾아 엄하게 처벌할 것이라 선언했고, 이때다 싶어서 그를 헐뜯던 귀족들은 강도 높은 포고에 몸을 사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한 번 생긴 불신의 여론은 좀처럼 사그라지지 않았다. 이방인들에 대한 대우가 좋은 아덴버그의 처우가 이러할진대 다른 국가들이야 오죽하랴.
대륙 전체에서 이방인들의 입지가 빠르게 추락하고 있었다.
“이 망할 놈들이 일을 벌이려면 혼자 벌이지. 잘 살고 있는 사람들까지 물을 먹여?”
“차라리 그냥 망명을 하지. 동부에서라면 사람답게 살 수 있잖아.”
능력을 인정받아 탄탄대로를 걷던 각국의 이방인들이 노르딕의 반도들을 비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부에 위치한 왕국들에서도 이탈자가 속출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대부분 왕국의 인정을 받지 못해 변방을 떠돌던 하급 병과의 이방인들이었다.
“노르딕은 자국의 이방인들을 엄히 다스려 그들이 분란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하라!”
“속히 주력을 투입하여 영내에 들어온 아국의 이방인들을 잡아 송환토록 하라.”
이방인 전력에 타격을 받은 동부의 왕국들이 노르딕의 왕실에 강력한 항의를 보냈지만, 닷슈르테 왕가는 묵묵부답이었다. 그리고 그 이유가 금세 밝혀졌다.
‘노르딕 왕실 근위 기사단과 근위 마법사단 괴멸.’
‘노르딕의 왕도 다나브로그 함락.’
‘닷슈르테 왕가, 일족 전원 처형.’
노르딕 왕국은 답을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회신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살아남은 노르딕의 귀족들과 기사, 마법사들이 인근 왕국에 속속 망명하여 그 사태의 심각성을 알렸고, 대륙 북서부는 완전 난리가 났다.
하기야 왕국 하나가 통째로 이방인들에게 넘어갔는데, 발칵 뒤집히지 않았다면 그게 도리어 이상한 일이었다.
“노르딕의 근위 기사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나, 반란군과 싸우다 죽는 것만큼은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다.”
생존자들을 통해 노르딕 왕국의 내부 사정이 속속들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왕도 다나브로그에서 치러진 최후의 전투에서 살아남은 상급 기사가 반란군이 지닌 가장 큰 무기를 알렸다.
“죽어도 죽을 수가 없으니, 흙 위에 몸 뉘인 자는 반드시 일어나 반란군을 위해 싸우게 되었다. 이는 기사로서 아군에게 칼을 겨누는 불명예요, 신자로서 죽음을 모독당한 것이니 어찌 두렵지 않겠는가.”
“반란군의 수장은 스스로를 사자(死者)들의 왕이라 칭하였으니, 어쩌면 사악한 흑마술을 이어받은 자일지도 모른다.”
강력한 근위 기사단과 마법사단을 비롯해 용맹무쌍하기로 소문난 바이킹 전사들이 왜 그렇게 속수무책으로 당했는지 뒤늦게 그 이유가 밝혀졌다.
싸울수록 아군은 줄어가는데 적은 늘어나니, 달리 이길 방도가 없는 게 당연했다.
노르딕과 국경을 접한 3개의 국가가 연합하여 망국을 침범했다. 그들은 각기 자신들의 나라에 망명한 귀족들이 정통성을 지니고 있다 주장하며 수복 이후의 노르딕을 좌지우지할 생각에 벅차 있었고, 이방인들을 상대하기 위해 자국의 기사와 마법사들을 대거 파견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왕국들은 노르딕의 반란이 금세 정리될 거라 믿었다.
그도 그럴 것이 3국이 동원한 기사단의 수가 아홉이요, 마법사단의 수가 여섯이었으니 이는 어지간한 왕국의 총력에 가까운 숫자였던 탓이다.
하지만 그런 왕국들의 예측을 뛰어넘어 노르딕의 반란군들은 끈질기게 버텨냈다.
‘사자(死者)들의 왕 박상진.’
‘홍염(紅焰)의 마도사 이서라.’
‘섬광(閃光)의 기사 한성웅.’
‘암흑(暗黑)의 사제 조철현.’
전투 속에서 성장한 상급 병과의 이방인들이 속속 2차, 3차 전직을 하며 악명을 떨치기 시작했고, 3국 연합군은 그들을 상대로 악전고투하며 일진일퇴(一進一退)를 거듭했다. 그때 즘엔 이미 노르딕을 집어삼켜 자국의 배를 불리겠다는 계산은 온데간데없게 돼버린 후였다.
인근이라 할 수 있는 대륙의 북부와 서부 국가들이 비상체제에 돌입하여 자국 내의 이방인들을 단속했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자국의 기사단과 마법사들을 대기시켜 혹시 모를 난리를 대비했다.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진 동부와 남부의 왕국들도 이 심상치 않은 전운(戰雲)에 바짝 긴장을 한 채 추이를 지켜보았다.
그런 와중에도 아덴버그 왕국은 왕녀와 김선혁의 약혼을 늦추지 않았고, 그 시기가 성큼 가까워지고 있었다.
[감정을 다스리지 못해 그대에게 크나큰 고통을 주었으니, 이는 오로지 나의 불찰이노라.]
왕녀와의 약혼을 한 달 앞둔 어느 날, 김선혁 스스로가 끊어버렸던 용과의 교감이 다시 연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