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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 서서히 돌기 시작하는 수레바퀴 (2)
처음 블루곤이 머리통만 드러냈을 때까지만 해도 김선혁은 탈피 전과 지금의 모습이 뭐가 달라졌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블루곤이 제 스스로 뭍으로 기어 올라왔을 때는 어지간한 그조차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블루곤, 너?”
한 점 어긋남 없이 매끄러워 보는 것만으로도 감탄이 절로 나오던 아름다운 육신은 거무튀튀한 껍데기로 가려져 온데간데 보이지 않았고, 양옆으로 물갈퀴가 달린 세 쌍의 발이 튀어나와 있었다.
“이게 뭐야!”
김선혁은 뜨악한 얼굴로 괴성을 내지르고 말았다. 그만큼 블루곤의 변화는 놀랍다기보다는 충격적이었다.
흉폭하지만 아름답던 블루곤은,
“완전 거북이잖아!”
한 마리의 기형 거북이가 되어 있었다.
스윽.
블루곤이 꼿꼿이 고개를 쳐들었다. 머리통만큼은 예전의 그 아름답고도 존재감 넘치는 해룡의 모습 그대로였고, 그게 블루곤을 더욱 더 기괴하게 보이게 만들었다.
크아아아아아!
충격을 받은 제 주인의 속도 모르고 블루곤이 잘난 듯이 포효했다. 우스꽝스러운 생김새와 어울리지 않는 그 웅혼한 포효에 그는 저도 모르게 머리를 짚고 말았다.
이게 대체 무슨 날벼락인지, 남해의 거친 선원들조차 두려워하던 심해의 지배자는 어디 가고 씨 서펜트도 아니고 거북이도 아닌 기괴한 생명체가 나타났다는 말인가.
하지만 돌연변이 거북이처럼 변해버린 블루곤의 모습이 우스워 보이는 것은 오직 주인인 그에게나 해당되는 이야기였다.
집채만 한 등딱지를 뒤집어 쓴 블루곤은 그 덩치만으로도 세상 모든 생명체를 압도하는 무지막지함이 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어지간한 이들이라면 이 거대하고도 기괴한 생명체를 마주하는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고 말 것이다.
게다가 변한 것은 단지 외양뿐이 아니었다.
․ 씨 서펜트(블루곤)(水)(돌연변이)(Lv. 05)
- 근력 118 / 민첩 42 / 맷집 140 / 지능 37 / 마법 저항력 90 / 복종도 60
: 상태 – 미미한 탈진
전에도 뭍으로 올라오지 못한다는 페널티만 제외하면 능력치의 총합이 가장 높은 게 바로 블루곤이었다. 그런데 그런 블루곤이 탈피를 통해 또 한 번 성장했다. 그중에서도 맷집은 거의 골드레이크에 육박할 정도가 되었으니, 꼴이 기형 거북이 같다 해서 마냥 우습게 볼 수도 없었다.
“어지간히 분했구나.”
김선혁은 블루곤의 기형적인 변화를 보며 내심 짐작 가는 바가 있었다.
탈피 직전 녹테인의 초인들에게 두들겨 맞아 만신창이가 되었던 블루곤이다.
아마 남해에서 그 어떤 적수도 없이 지배자로 군림해왔던 해룡에게는 당시의 일이 더없이 치욕적이고 수치스러운 일로 기억됐으리라. 아룡들 중에서도 유달리 지능이 높은 블루곤이라면 그런 감정을 느끼고도 남았다.
아마 그래서였을 것이다. 흉폭하고도 아름답던 블루곤이 저 어울리지 않는 등껍질을 뒤집어쓴 건, 자신을 상처 입혔던 기사들의 검력과 마법사들의 마법에 다시는 상처를 입지 않고 말겠다는 각오의 발로였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블루곤의 탈피는 충분히 성공적이었다.
고고함과 아름다움을 잃은 대신 수면 아래 유폐되었던 육신이 뭍으로 나올 수 있게 되었고, 보기에도 단단해 보이는 강력한 갑주를 얻었다. 제 나름대로 자신의 단점을 보완한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모든 변화가 마냥 긍정적이었던 것만은 아니었다.
엉금, 엉금.
“미치겠네.”
뭍에 올라온 블루곤은 미치도록 느렸다. 정말로 거북이라도 된 듯한 모습이었다.
저래서야 기사들과 마법사들의 좋은 표적이 될 뿐, 저렇게 느려터진 속도로는 기사들은커녕 발 느린 마법사조차 상대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하지만 그건 김선혁의 착각이었다. 블루곤은 대책 없이 뭍에 올라온 게 아니었다.
“레드번!”
잠깐 생각에 잠긴 사이에 사고뭉치 레드번이 또 사고를 쳤다. 거북이를 닮은 괴수의 모습이 신기했는지 성큼성큼 다가가 껍데기 사이로 삐져나온 꼬리를 덥석 문 것이다.
크악!
깜짝 놀란 블루곤이 괴성을 지르자 레드번이 덩달아 놀라 하늘로 날아올랐다.
꿀럭.
성난 블루곤이 목을 꿀렁이다 입을 벌렸다.
콰아아아아아!
그리고는 쩍 벌린 아가리 사이로 강력한 물줄기를 토해냈다.
콰직.
엄청난 수압을 동반한 물기둥이 하늘로 치솟았다. 하늘 높이 날아올랐던 레드번이 화들짝 놀라 몸을 피하려다 물줄기를 얻어맞고는 비명을 지르며 곤두박질쳤다.
“멈춰!”
레드번을 똑바로 노려보며 또다시 목을 꿀렁대는 블루곤을 본 김선혁이 비명처럼 외쳤다. 하지만 블루곤은 그의 명령을 듣지 못한 것인지, 그도 아니면 듣고도 무시한 것인지 기어이 물대포를 쏘았다.
빼애액!
나 죽겠다고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뒹굴던 레드번이 황급히 날아올랐다. 그 바람에 애꿎은 강변의 거목들만 몸통이 부러지며 넘어갔다.
“멈추라고!”
김선혁이 다시 외쳤지만 블루곤은 그의 통제를 따르지 않았다.
“야, 인마!”
노골적으로 명령을 무시하는 블루곤, 아무래도 그간 쌓이고 쌓인 분노를 한꺼번에 토해낼 작정인 모양이었다.
직접 주인을 노리지는 못했지만, 레드번을 향해 계속해서 물대포를 쏘아대는 블루곤의 모습에 김선혁이 아티야를 불러 막을 쳤다.
‘꺄악!’
하지만 그의 예상보다 물대포의 위력이 훨씬 더 강력했는지, 아티야는 오래 버티지 못하고 흩어지고 말았다.
**
블루곤의 난동이 끝이 난 건 그로부터 한참이나 지나고 나서였다.
끊임없이 쏘아지던 물줄기가 어느 순간 가늘어진다 싶더니, 어느 순간이 되자 멀리 뻗지 못하고 줄줄 흘러내렸다.
크아아악!
블루곤은 물줄기가 닿지 않는 하늘 높은 곳으로 완전히 숨어버린 레드번이 얄미운지 사납게 포효했다. 그리고는 엉금엉금 강가로 기어가 머리통을 수면에 처박았다.
꿀럭, 꿀럭.
블루곤의 목이 마구 요동을 쳤다. 그 모습을 본 김선혁이 황당하다는 듯이 말했다.
“충전식이야?”
아무래도 저 거대한 등딱지의 용도는 갑주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필시 물탱크의 용도도 겸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
충전(?)을 마친 블루곤은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제 주인을 내려다보았다.
마치 태생적인 한계로 버림받아 방치되다시피 했던 자신의 변화를 보란 듯이 과시라도 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엄청나네.”
김선혁은 그런 괴수의 마음을 헤아려 몇 번이고 감탄하고 칭찬을 해주었다. 물론 그냥 그게 블루곤의 마음을 달래주기 위한 빈말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진심으로 블루곤의 능력에 놀라고 있었다.
비록 이동속도가 끔찍할 정도로 느리기는 하지만, 아름드리 거목을 일격에 박살내는 물대포와 단단한 등껍질을 지닌 블루곤은 흡사 스스로 이동하는 야전포와도 같았다. 단지 포탄 대신 압축될 대로 압축된 물줄기를 쏘아 올리는 포라는 게 달랐을 뿐이었다.
“네가 최고다. 블루곤.”
김선혁은 그 어떤 아룡들보다 더욱 현대적인 블루곤의 능력에 진심어린 찬탄을 보내며 엄지를 추켜 세웠다.
크르르르.
화가 잔뜩 나 있던 블루곤도 그제야 기분이 풀린 듯 목을 울려댔다.
**
영지에서 멀지 않은 강가에서 그 난리를 쳐댔으니, 라인펄의 순찰 기병들이 그 소란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게 도리어 이상한 일이었다.
“저건 또 뭡니까.”
기병들을 인솔하고 있던 요나슨은 오랜만에 복귀한 영주에 대한 반가움을 느낄 새도 없이 거대한 괴수의 위용에 압도당하고 말았다.
“대체 어디서 뭘 하다 오셨길래, 이런 놈을 또 주웠답니까.”
요나슨과 한센은 블루곤을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너무도 변해버린 괴수의 모습에서 블루곤의 모습을 찾지는 못한 모양이다.
황당하다는 듯 괴수와 자신을 번갈아 바라보는 요나슨에게 김선혁이 대꾸했다.
“원래 있던 놈이야.”
“저는 이런 놈 본 적이 없는….”
그의 말에 눈살을 찌푸리던 요나슨이 거만하게 고개를 쳐든 괴수의 머리통을 살펴보다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거, 블루곤입니까?”
그는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용의 아종이라는 놈들이 원래 이렇게 죄다 괴상하게 변하는 겁니까?”
요나슨은 목도리 도마뱀처럼 변해버린 골드레이크에 이어 블루곤까지 괴상하게 변해버렸다며, 얼빠진 얼굴을 해 보였다.
설마 레드번도 나중에 변하는 건 아니겠지.
그는 한숨을 쉬며 블루곤을 피해 달아난 레드번을 불러들였다.
**
애초에 김선혁이 영지로 돌아온 목적은 블루곤의 탈피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 목적은 이미 이루어졌고, 불만에 가득 차 있던 괴수는 기분이 풀어진 상태였다.
아무래도 자신의 변화가 썩 마음에 들었던 모양인지, 오랜만에 만난 주인은 신경도 쓰지 않고 며칠 동안이나 뭍을 쏘다니다 도로 강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상태 – 탈진.
탈피 직후 기력을 충전할 새도 없이 그렇게 물대포를 쏴대고 땅 위를 쏘다녔으니, 블루곤이 지칠 만도 했다.
회복기에 들어간 괴수의 모습을 쫓아 라인펄 강가를 바라보던 김선혁은 문득 하나 남은 용의 아종에 대해 떠올리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이제 페어리 드래곤만 깨어나면 되겠네.”
수면 아래 세상에 유폐되어 있던 괴수가 풀려난 지금, 남은 것은 알 속에 잠이 든 채 깨어나지 않는 페어리 드래곤뿐이었다.
“언제 깨어나려나….”
당장에라도 깨어날 것 같았던 페어리 드래곤은 거의 1년이 되어가도록 감감무소식이었다. 혹시 부화에 필요한 조건이 있는가 싶었지만, 원체 정보가 없는 아룡이기에 도무지 실마리가 잡히지 않았다.
“끙.”
결국 시간만이 해결해주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을 모양이었다.
김선혁은 영지에 며칠을 더 머물며 클라크를 비롯한 기병들과 회포를 풀고, 골드레이크와 시간을 보내다 다시 왕도로 향했다.
블루곤의 탈피를 확인하기 위해 황급히 오는 바람에 남겨둔 줄리앙이 염려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왕도에 도착한 김선혁은 자신이 떠나기 전과 미묘하게 달라진 공기를 감지할 수 있었다.
“드라흔 백작님.”
“아무래도 제가 없는 동안 일이 벌어진 모양이군요.”
그는 일행 중 유일하게 내성 밖에 머물고 있었던 아샤 트레일을 찾아 그간의 상황을 물었다.
“당장 백작님께 해가 될 일은 없었지만, 여론이 좋지 않습니다.”
아샤 트레일은 담백한 어조로 귀족들이 어떤 식으로 그를 음해하고 다른 이방인들을 몰아붙였는지 설명해주었다.
“징한 놈들. 태도 바뀌는 게 무슨 손바닥 뒤집듯이 바뀌네.”
이방인들을 포섭하려고 들 때는 언제고, 이제는 해충 보듯 몰아가는 귀족들의 태도가 영 못마땅했다.
“그러고 보니 유정 씨는 잘 지내려나.”
아티야의 원주인이었던 이방인 정령사를 떠올린 그가 잠시 그녀를 찾아가 볼까 생각하다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간 왕도에 머물며 제 나름대로 몸에 익힌 처세술이 그를 붙잡았다.
지금은 가만히 있는 게 상책이었다. 괜스레 이방인들을 만나고 다녔다가는 원치 않은 구설수에 오르기 십상이었다.
“그보다 줄리앙은 어떻습니까?”
김선혁은 다른 무엇보다 줄리앙의 상세에 대한 걱정이 컸다. 대책 없던 자신의 행동으로 인해 평생 아이로 남을 수밖에 없는 후유증이 생겨버린 불쌍한 종자에 대한 책임감이었다.
“음.”
그의 질문에 아샤 트레일이 잠시 망설이는 기색을 보였다.
“설마 뭐가 잘못된 겁니까?”
그 모습을 본 김선혁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듯한 기분이 되었다. 그늘진 여기사의 태도가 영 심상치 않았던 것이다.
“잘못된 건 아니지만….”
“그럼 뭐가 문제인 겁니까.”
드물게 말끝을 흐리는 여기사의 태도에 답답함을 느낀 그가 몇 번이나 되물었다.
“줄리앙을 직접 만나보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뭔가 일이 있는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아샤 트레일이 저렇게 뜸을 들일 리가 없었다. 김선혁은 망설이지 않고 곧장 줄리앙을 찾아 내성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