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래곤 푸어-143화 (143/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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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 서서히 돌기 시작하는 수레바퀴 (1)

- 노르딕 왕국 내란 발발, 왕위 계승 서열 3위 3왕자 사망.

- 왕국의 3할이 반란 세력에 의해 점거, 현재 노르딕의 닷슈르테 왕가 기사단 급파.

- 노르딕 왕도 기사단 괴멸. 반란 세력 확산.

대륙 북서부에서 흉흉한 소문이 들려왔지만, 아덴버그와는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소문의 진원지인 노르딕 왕국은 근본부터가 야만적인 국가였고, 내란이 빈번하게 일어나던 곳이다. 대륙의 끝과 끝이라 할 수 있는 나라의 흉흉한 소문 따위가 문제가 될 턱이 없었다.

게다가 아덴버그는 지금 명실상부한 3국 전쟁의 유일한 승전국이었다. 이스테인 평원을 중심으로 녹테인의 동부지역을 통째로 집어삼켰고, 그리핀도르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창공의 기사들을 굴복시키기까지 했다.

그 압도적인 승리의 열매에 취한 왕도 아데스덴은 그 어느 때보다 활기가 넘쳤다.

시민들은 곧 있을 왕실의 약혼을 기대하며 벌써부터 축제 분위기였고, 귀족들은 숙적을 상대로 거둔 통쾌한 승리를 안주 삼아 연일 파티를 열어댔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한껏 달아오른 분위기를 즐기지 못하는 이들이 있었으니, 연일 소집되는 회의에 참석해야 하는 고위 귀족들이었다.

“그러니까, 애초에 뒤통수를 먼저 친 게 누군데 우리가 먼저 화평을 신청한단 말인가!”

“아무리 국경을 접한 게 녹테인뿐이라지만, 그리핀도르와 계속해서 긴장 관계를 유지해서 좋을 게 뭐가 있소! 지금이야말로 승리에 도취될 것 없이 대국적인 시선으로 정세를 살펴봐야 할 때요!”

백작 이상의 고위 귀족들은 대개가 장년 이상의 노귀족들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매일 벌어지는 격렬한 회의는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피로를 호소하면서도 회의에 불참한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자신의 영향력을 과시하고, 정치력을 뽐내는 것이야말로 왕도 귀족의 가장 큰 미덕이었던 탓이다.

모르긴 몰라도 중간 중간에 휴식시간을 따로 배정하지 않았다면, 회의에 참석한 이들 중 몇몇쯤은 쓰러져도 진즉에 쓰러졌을 것이다. 하지만 목소리는 다 쉬어 터졌을지언정 눈빛만큼은 처음의 형형함을 잃지 않는 노귀족들은 절대로 먼저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들에게 있어 이 넓지 않은 회의실은 하나의 전장이었고, 안건 하나하나가 결투 그 자체였다.

그러다보니 사소한 안건마저도 쉽게 결정이 나는 법이 없었고, 이미 결정된 사안이 뒤집히는 경우가 빈번했다.

와. 징하다. 징해.

김선혁은 이 비생산적이고 극도로 비효율적인 회의가 과연 끝이 나긴 날지 궁금할 지경이었다.

“그대가 생각하는 대국적인 결정이 이미 전향을 결정한 창공의 기사들을 송환하는 것인가! 도대체가 그대가 그리핀도르의 귀족인지 아덴버그의 귀족인지 알 수가 없군!”

“지금 말 다 했소!”

논쟁은 끔찍할 정도로 소모적이었지만, 그 안에서 그가 얻은 것은 결코 적지 않았다.

이곳에 떨어진 이후 줄곧 군인으로 살아와야 했기에 무지할 수밖에 없었던 왕국의 정세에 대해 어느 정도 눈을 뜨게 된 것이다.

그게 바로 테오도르 국왕이 정치적 식견이라고는 쥐뿔도 없는 그를 이 길고 지루한 회의에 강제로나마 참석토록 한 이유였으리라.

“우리는 승전국이네. 그런 우리가 뭐가 아쉬워서 투항한 기사들까지 돌려주면서 뒤통수를 친 그리핀도르의 눈치를 봐야 하는 것인지, 당최 이유를 모르겠군.”

“눈치를 보자는 게 아니지 않소! 어디까지나 녹테인이라는 적을 두고 대국적으로….”

“그 잘난 식견이 언젠가는 아국의 기사들까지 넘겨주자 주장할까 무섭군.”

“뭐요! 당신 말 다 했소?”

“하. 당신? 최소한의 품위도 없고 긍지마저 없으니 같은 자리에 있는 것조차 불쾌해질 지경이야. 부디 부끄러운 줄 알라.”

이제는 회의의 주제 따위는 안중에도 없어진 귀족들이 서로를 향해 인신공격을 해대기 시작했다. 대개 이럴 때면 국왕이 나서서 분위기를 정리하기 마련이라 김선혁은 가만히 국왕을 바라보았다.

그의 예상대로 국왕은 귀족들 간의 말다툼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만.”

목에 핏대를 세우고 상대 진영의 의견을 묵살하고 반박하던 귀족들이 테오도르 국왕의 나직한 한마디에 입을 다물었다.

“더 나은 대책을 마련하기 위한 경들의 열의가 실로 대단하다. 하지만 이래서야 도무지 회의의 끝이 보이지를 않으니 답답할 노릇이로다.”

얼핏 듣기에는 열성적으로 참여하는 귀족들의 태도를 추켜 세워주는 듯했지만, 한기가 뚝뚝 떨어지는 음성은 차라리 질타에 가까웠다.

진영 논리에 취한 소모적이고 공격적인 논쟁은 더 이상 허락하지 않는다.

국왕은 지금 귀족들에게 경고를 하고 있었다.

국왕의 서슬 퍼런 기세에 질려버린 귀족들이 그 작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고개를 숙였다. 이럴 때는 입을 다무는 게 상책이라 여긴 모양이었다.

“3일.”

그런 귀족들을 보며 테오도르 국왕이 툭, 하고 한마디를 내뱉었다.

“3일의 시한 내로 미텐마이어 후작과 로젠하임 후작이 책임지고 의견을 조율하여 대책을 마련하도록 하라.”

귀족파 귀족들의 거두인 미텐마이어 후작과 국왕파 귀족의 우두머리격인 로젠하임 후작이 국왕의 지목에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폐하의 뜻대로 하겠나이다.”

“맡은 바 소임을 다하겠습니다.”

두 노귀족의 대답에 테오도르 국왕이 그제야 표정을 풀었다.

“그럼 오늘 회의는 이것으로 마치도록 하겠다.”

국왕의 선언에 길고 길었던 회의가 겨우 끝이 났다.

“끄응.”

몇 시간동안 자리에 앉아 귀족들이 떠들어대는 꼴을 보고 있었던 김선혁은 참았던 숨을 내뱉으며 몸을 비틀다 자신을 바라보는 테오도르 국왕과 눈이 마주쳤다.

“드라흔 백작은 잠시 나를 보도록 하지.”

**

“그대도 회의에 참석했으니, 북서부 노르딕 왕국의 내란에 대한 이야기는 들어 알고 있겠지.”

그다지 심도 있게 다루어지지는 않았지만, 확실히 노르딕이라는 나라의 내란 소식은 들은 적이 있었다.

“노르딕 왕국이 원체 내란이 빈번한 나라라는 사실도 들었습니다.”

“틀리지 않다. 하지만 이번 내란은 이전까지의 것과는 경우가 전혀 다르다 할 수 있노라.”

김선혁은 도무지 테오도르 국왕이 이렇게 따로 자리를 마련하여 대륙 저 반대편에 있는 노르딕 왕국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그런 그의 의문을 헤아린 것인지 국왕은 곧장 본론을 꺼내들었다.

“이번 내란을 일으킨 주모자는 이방인이다.”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에 그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대대로 대륙의 서부와 북부는 이방인들에 대한 대우가 박한 편이었다. 필시 이번 내란을 주도한 노르딕의 이방인 역시 모진 학대를 견디지 못해 일을 벌였으리라.”

어느새 이곳의 생활에 젖어들어 다른 국가에 떨어진 이방인들에 대해 조금도 생각하지 않고 있었던 스스로를 깨달은 김선혁이 무거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곧 귀족들도 이 소식을 알게 될 터, 그들에게는 노르딕의 이방인들이 얼마나 모진 학대를 받았는지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그들은 오직 이방인들의 위험성에 주목할 것이며, 노르딕의 이방인들이 일으킨 내란을 빌미 삼아 그대가 이룬 전공에 흠집을 내고 마침내는 왕녀와의 혼사마저 무산시키려 하겠지.”

목숨을 걸고 적과 싸웠다. 살인의 업에 짓눌려가며 적진을 쓸고 다녔다. 그런 자신의 노고와 전선의 장병들이 치른 희생을 부정당한다는 게 얼마나 기분이 더러운 일인지 그는 지난 경험으로 깨달은 바가 있었다.

“흔들리지 마라. 귀족들이 뭐라고 떠들든 간에 그대가 전장에서 올린 혁혁한 전공과 승리들은 빛바래지 않을 것이며, 왕실은 그 어떤 경우에도 그대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지 않을 것이다.”

김선혁은 그제야 국왕이 따로 자리까지 마련해가며 이런 이야기를 해주는지 알 수 있었다. 아무래도 정치적인 재능이 그다지 없는 그가 혹시라도 귀족들의 정치 공작에 휩쓸려 왕국 자체에 대해 회의감을 느끼게 될까 봐 염려라도 한 모양이었다.

“왕실은 절대로 그대의 신뢰를 배반하지 않으리라.”

“믿겠습니다.”

**

테오도르 국왕의 경고는 금세 현실이 되었다.

귀족들은 노르딕 왕국의 내란을 주도한 주모자가 이방인들이라는 정보를 입수하고는 곧장 정치 공작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귀족도 왕도 없는 세상에서 나고 자란 이방인들이 지니고 있는 위험한 사상에 대해 우려를 표했다.

덕분에 왕도에 거주하는 수많은 이방인들은 귀족들과 마주칠 때마다 곤욕을 치러야 했다.

하지만 귀족들도 김선혁만큼은 섣부르게 도마 위에 올릴 수가 없었다.

“주둔지에 몰려든 피난민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다지? 그 때 입은 부상으로 한때 전사했다는 소문이 들려왔다니 얼마나 고된 싸움이었을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치명적인 부상을 입고도 몸이 채 회복되기도 전에 전장에 복귀하여 녹테인을 상대로 혁혁한 공을 세운 드라흔 백작은 다른 이방인들과는 다르다.”

드라흔이라는 이름이 받는 국민적 지지는 아무리 평민들을 눈 아래로 보는 귀족들이라고 해도 쉬이 여길 수 없었다.

하기야 그가 이룩한 놀라운 전공을 감히 누가 폄하할 수 있겠는가.

이제 와서 출신을 빌미 삼아 의심하기에는 스스로 입증한 바가 적지 않았다.

게다가 그는 고작해야 자작에 불과한 다른 이방인들과 그 입지가 달랐다.

김선혁은 왕국의 당당한 백작이었고, 전쟁 영웅이었으며 아데스덴 왕실과 맹스크 가문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 유력자였다.

섣부르게 건드렸다가는 먼저 이야기를 꺼낸 쪽이 역풍을 맞기에 딱 좋은 상황이었다.

“드라흔 백작이 근래 들어 사병의 육성에 열을 올린다는 소문이 있던데….”

하지만 귀족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이제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여겼던 왕실과 드라흔의 결합을 막을 빌미가 생겼으니 어떻게든 기회를 살려야 한다 여겼던 모양이다.

“레이라크 남작의 광산을 힘으로 빼앗았다는 소문이….”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왕실의 동량이 되어야 할 열넷의 기사들을 반 폐인으로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있더군.”

그들은 국왕파의 귀족들과 왕실에 빌미를 주지 않을 정도의 선에서 끊임없이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흘렸다.

가랑비에 옷이 젖듯이 시간이 흐를수록 조금씩 그들의 의견에 동조하는 자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물론 그 수는 많지 않았지만 어쨌건 간에 이방인들에 대한 반감 여론이 조성되기 시작했으니 귀족들도 제 나름의 성과를 올렸다 할 수 있었다.

시간이 흘러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금방 진압될 거라 생각했던 노르딕의 내란이 사그라지기는커녕 도리어 더욱 번져나갔다.

이제는 인근 국가들의 이방인들마저 동조하는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는 소식에 각 왕국은 자국 내에 존재하는 이방인들을 단속하기 시작했다.

왕도 아데스덴의 이방인들은 입지가 대폭 좁아져 나중에는 두문불출하며 다른 이와 만나는 것을 꺼릴 지경이 되었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귀족파의 귀족들이 그토록이나 깎아내리려고 혈안이 되었던 김선혁은 정작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한창 소문이 퍼져 나가며 귀족들이 되지도 않을 사상검증으로 이방인들을 못살게 구는 동안 김선혁은 이미 왕도를 떠나고 난 후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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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도에서 한창 귀족들이 왕실의 수족과도 같은 이방인들의 입지를 좁히기 위해 부산을 떠는 동안, 김선혁은 자신의 영지에 도달해 있었다.

줄리앙의 상세를 살피고, 그 대책을 찾기 위해 지루한 회의에 참석하는 것조차 견뎌낸 그였다.

그런 그가 왕도에 흉흉한 소문이 도는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영지에 귀환한 것은 그만큼 중요한 이유가 있었던 탓이다.

“블루곤!”

그는 장장 두 달 만에 탈피를 끝낸 블루곤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 영지에 돌아온 것이었다.

쿠르르르르.

김선혁의 음성에 라인펄 강의 푸른 수면이 기포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촤악, 하고 갈라지며 물빛의 비늘을 두른 괴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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