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래곤 푸어-142화 (142/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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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 이방인의 취급 (2)

김선혁이 왕도에 들렀던 것은 단순히 참전에 대한 수당을 받기 위해서였다. 그는 논공행상이 끝이 나면 왕도를 떠날 손님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 모든 게 왕녀와의 약혼이 결정 나며 바뀌어버렸다.

왕가의 예비 사위가 되어버린 그는 더 이상 왕도의 중앙 정치와 관련이 없는 주변인이 아니었고, 떠나면 그만인 손님이 아니었다.

3국 전쟁이 끝이 난 직후의 혼란한 정국, 싫으나 좋으나 그는 왕가의 예비 사위 자격으로 연일 벌어지는 대책회의에 참석해야 했다.

“아오! 지겨워! 지겨워!”

복잡한 정국을 꿰뚫는 현안도 없고, 정치적인 식견도 없다. 그런 그에게 고위 귀족들만이 참석할 수 있다는 왕도 최고회의(Oberster Rat Königliche Hauptstadt)는 영광스러운 자리가 아닌 그저 지루하고 귀찮기만 한 자리에 불과했다.

“왕가의 일족이 된 이상, 그대는 정치적으로 이용당하지 않을 최소한의 식견은 갖춰야 하느니, 익숙해져야 하노라.”

차라리 전장에서 3일 밤낮을 구르는 게 낫다고 앓는 소리를 내는 그에게 왕녀는 익숙해지라 말했다.

김선혁으로서는 납득할 수 없는 말이었다.

애초에 왕위 계승자들의 배우자들은 정치적으로 그 어떤 직책을 맡는 것도 금지되어 있었다. 극진한 대우를 받기는 하지만, 그게 그렇다고 해서 정국에 큰 영향을 발휘할 수 있는 권위와 같은 말은 아니었다.

“아무것도 모르면 차라리 휘둘리지도 않습니다. 어설프게 아는 놈들이 꼭 제 꾀에 넘어가는 법이지요.”

억울한 심정에 그렇게 이야기하니, 왕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사내라는 족속들은 무릇 계집과 재물보다 권력과 명예에 더욱더 목숨을 거는 법, 그대는 실로 이상한 자로다.”

“아무래도 제가 이곳이 아닌….”

“이번에도 그대가 이방인이기 때문이라 말하려는 것인가.”

그간 나눠온 대화가 적지 않으니 그의 정신세계가 이곳에서 나고 자란 귀족들과는 완전히 다름을 알고 있던 왕녀다. 하지만 그런 그녀도 이번에는 이방인이라는 핑계로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만약 그대가 이방인이라 이리도 권력에 초탈한 것이라 말할 작정이라면, 나는 왕도에 머무는 이방인들을 예로 삼아 그대의 말을 부정하겠노라.”

왕녀는 왕도에 머무는 이방인들이 이곳의 귀족과 그리 다르지 않다며, 그를 신기한 동물 보듯 바라보았다.

“그럼 제가 그냥 특이한 것으로 하지요.”

왕녀를 상대로 하는 말치고는 지나치게 성의가 없었지만, 왕녀는 그의 태도를 책잡지 않았다. 도리어 그의 말에 납득한 듯 고개까지 끄덕여 보였다.

“훌륭한 시종과 시녀, 명장들이 공들여 만든 침대와 소파, 하지만 그대는 여전히 이 모든 게 불편하다 말하는 듯하구나.”

왕녀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실제로 그는 명장들이 만든 으리으리한 침대에서 잠이 드는 것보다, 허름한 막사에 놓인 야전 침대에서 잠을 청할 때 훨씬 더 마음이 편했다. 고급스러운 의자에 앉아 우아하게 차를 마시며 왕국의 정세를 논하는 것보다, 사내들과 흙바닥에 주저앉아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주고받을 때가 훨씬 더 즐거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선혁이 아직까지 왕도를 뛰쳐나가지 않은 것은 줄리앙의 상세가 아직 완벽하게 파악이 끝나지 않았던 탓이다.

“내가 마법에 대해 뭘 아는 건 아니지만, 뭔가 이상해.”

그는 검사가 진행될수록 초췌해져 가는 줄리앙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피를 대체 얼마나 뽑고, 머리카락은 가발이라도 만들겠대? 아주 죄 뜯어갔네. 그냥.”

그가 아는 마법사라는 족속이라면 이때다 싶어서 실험을 하고도 남았다. 해룡의 독에 중독되어 후유증을 앓는 실험체는 아무래도 구하기 힘든 재료일 테니까.

“저는 괜찮습니다.”

어린 종자는 도리어 그를 달랬다. 아무래도 그가 미안한 마음에 더욱더 안달복달을 내는 거라 짐작했던 모양이다. 그럴수록 그는 더욱더 미안해질 수밖에 없었다.

“바람이라도 쐴래?”

“그 바람이라는 게 레드번을 타고 나는 것이라면 사양하겠습니다.”

기분전환이라도 할 겸 레드번과의 비행을 제안했더니, 줄리앙이 기겁을 했다. 아무래도 그녀가 하늘과 친해질 일은 앞으로도 영영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반대로 줄리앙과는 다르게 본인이 타고 싶어도 타지 못하는 이도 있었다.

“드라흔 백작이 함께 할 텐데, 뭐가 그리 걱정인지. 수호대의 기사들은 참으로 걱정이 많은 자들만 골라 뽑은 모양이로다.”

그게 바로 왕녀 오필리아였다.

왕녀는 소문의 붉은 악마를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 했고, 경호를 책임지는 레인하르트 후작의 면밀한 검증이 끝난 뒤에야 겨우 레드번을 볼 수 있었다.

“이 세상에 이리도 아름답고 우아한 생명체가 있다니, 놀라운 일이로다!”

묵직한 드레이크에 비해 상대적으로 날렵한 느낌의 레드번을 본 왕녀는 온갖 찬사를 쏟아냈다. 그녀는 자신이 이 아름다운 생명체의 이름을 지어줄 기회를 놓쳤다는 것에 대해 진심으로 안타까워하기까지 했다.

“레드번이라니! 꽤나 잘 어울리는 이름이구나. 내가 지었다고 해도 이보다 더 좋은 이름을 짓지는 못했으리라.”

아쉬워하는 기색도 잠시였을 뿐 왕녀는 이내 지금의 이름도 썩 괜찮은 이름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왕녀에게 작명 실력을 인정받았다는 게 과연 좋은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왕녀는 정작 그렇게 마음에 들어 하는 레드번을 탈 수 없었다. 테오도르 국왕은 물론이거니와 그녀의 경호를 책임지는 레인하르트 후작마저도 절대 불가의 입장을 고수한 탓이었다.

기사들은 왕녀가 자신들의 손이 닿지 않는 하늘로 향하는 것을 극구 반대했다. 마법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언제고 반드시 타고 말리라.”

어쩔 수 없이 물러난 왕녀였지만, 아직 완전히 포기하지는 않은 모양인지 혼자 결의에 불타 선언을 했다.

“미리 말해두는데 혹시라도….”

“안 태워드립니다. 걱정 마십시오.”

레인하르트 후작의 말을 냉큼 잘라낸 김선혁은 이럴 때만 아이처럼 떼를 쓰는 왕녀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말았다.

왕녀는 비록 자신이 비행을 해볼 수는 없었지만 레드번을 극진히 대했다. 최고급 소와 돼지로 매 끼니를 챙겨 먹이는가 하면, 목욕과 관리를 전담하는 하인을 두어 레드번의 비늘과 날개를 손질하게까지 했다.

물론 그 모든 게 주인인 김선혁이 곁에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레드번 이 새끼, 이거 나중에 못 나는 거 아냐?”

그냥 하는 걱정이 아니었다. 하루 세 번 꼬박 지급되는 풍족한 식사에 레드번은 처음 왕도에 왔을 때에 비해 엄청나게 살이 쪘다. 왕녀가 극찬했던 날렵하고 기능적인 모습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김선혁이 레드번의 꼴을 인지했을 때는 이미 창공의 붉은 악마는 배부른 돼지가 되고 난 후였다.

“이전의 날렵한 모습도 보기 좋았지만, 이렇듯 살이 오른 모습도 꽤나 보기 좋지 아니한가.”

혹시 모를 비행 능력의 저하를 막으려면 이쯤에서 왕녀의 애정 공세와 레드번의 식탐을 제지해야 했다. 하지만 김선혁은 굳이 둘을 말리지 않았다.

“그래. 골디가 없는 동안 많이 먹어라.”

영지에서는 골드레이크의 눈치를 살피느라 제대로 끼니도 챙겨 먹지 못하는 레드번이니만큼 지금이 아니면 언제 이런 호사를 누리겠나 싶었던 탓이었다.

그렇게 레드번이 때아닌 호사에 빽빽거리며 왕성 위를 쏘다니는 동안에도 왕도의 최고회의는 계속 진행이 되었다.

김선혁은 회의실에 앉아 남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복잡한 정치 이야기가 오갈 것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머리가 아파왔다.

“일단 오늘은 잠시 그리핀도르와 녹테인의 도발과 견제에 대한 이야기를 미루어두고 다른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그런데 오늘은 테오도르 국왕이 다른 주제를 꺼내들었다.

“적국의 위협과 견제가 심화될 기미가 보이는 지금은 비상시국이라 하기에 전혀 모자람이 없다.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나라 안을 돌보고 기틀을 단단히 해야 하는 법. 하여 왕실은 왕녀와 드라흔 백작의 약혼을 통해 흉흉해진 민심을 바로잡고, 전선의 사기를 고무하려 하는 바이다.”

결국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는 생각에 김선혁은 눈을 질끈 감았다.

“천문에 능한 이들을 불러 길일을 잡는 것이 어떨지….”

“그것도 나쁘지는 않으리라. 하지만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

테오도르 국왕은 칼을 뽑아든 김에 아예 마무리까지 지으려는 것인지 정신없이 귀족들을 몰아붙였다.

“폐하. 왕국의 중대사이니만큼 각국에 알리고 사절들이 당도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나이다.”

“시간에 맞추지 못하는 자들은 마법 전문이라도 보내겠지.”

귀족들은 어떻게든 시간을 끌어 변수를 만들려 했지만, 이미 마음을 굳게 먹은 국왕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약혼에 참석하지 못하는 국가들이 서운함을 느낄 수는 있으나, 이는 결혼식을 성대하게 여겨 그들이 섭섭지 않도록 대접하면 될 일. 그러니 폐하의 뜻대로 하소서.”

그간 별다른 의견을 내지 않고 침묵하고 있던 국왕파의 귀족들이 대거 나서서 적극적으로 왕가의 결정을 지지한 것이다.

애초에 왕실의 혼사 문제이니만큼 귀족파의 귀족들이 끼어들 여지가 많지 않았다. 거기에 명분도 세력도 밀리니 귀족파의 귀족들은 속수무책으로 약혼 일정이 잡히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나 테오도르 티베리우스 로 아데스덴은 왕실의 수장이자 오필리아 라우렐 로 아데스덴의 아비로서 이 자리에서 선언한다.”

테오도르 국왕은 그 자리에서 선언했다.

“약혼은 오는 7월 셋째 주, 여섯 번째 날에 이루어질 것이다.”

“경하드리옵나이다!”

귀족들은 속이야 어떨지 모르겠지만, 겉으로는 앞다투어 왕가의 경사를 축하했다.

“축하하오. 드라흔 백작.”

“왕국에서도 현명하고 아름답기로 소문난 약혼녀를 두게 되셨소. 참으로 축하할 일이오.”

그들은 회의실 한구석에 말없이 있던 김선혁에게까지 손을 내밀고 호들갑을 떨어댔다. 마지못해 국왕에게만 축하의 말을 건네고 사라진 귀족파의 귀족들이 아닌, 국왕파의 충신들이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진즉에 테오도르 국왕으로부터 국왕파의 귀족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라는 당부를 받은 바가 있던 김선혁은 그들의 축하 인사에 일일이 고개 숙여 감사의 말로 화답했다.

이제는 정말 빼도 박도 못하겠구나.

속내를 숨기고 웃는 낯으로 귀족들을 대하느라 입가가 푸들푸들 떨리는 김선혁이었다.

**

‘금년 7월 셋째 주, 여섯 번째 날, 오필리아 라우렐 로 아데스덴 왕녀와 선혁 라인펄 김 드라흔 약혼 예정. 내방하여 축하 바람.’

오필리아 왕녀와 드라흔 백작의 약혼 소식을 알리기 위한 마법 전문이, 짧게는 수백 킬로미터에서 길게는 수천 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곳에 위치한 대륙의 유력자들에게 전송되었다.

다소간의 시차는 있었지만, 대륙의 유력자들에게 소식이 전해지는 건 금방이었다.

“이방인과 왕위 계승자를? 미쳤군. 테오도르가 완전히 미친 모양이야.”

“능력만 있다면 비천한 노예도 중용하겠다고 공공연하게 떠들던 아데스덴 왕실이다. 이 미치광이 같은 결정은 진즉에 예견되었던 것이지.”

“아비를 잘못 만난 왕녀만 불쌍하게 됐군. 먼발치에서 봤지만, 어린 나이에도 꽤나 미색이 출중하던데 말이야.”

전부터 아데스덴의 인재 우대 정책의 근본 없음을 비난해왔던 몇몇 이들은 미천한 이방인과 왕위 계승자를 이루어주려는 테오도르 국왕의 결정을 조롱하고 헐뜯었다.

“홀로 녹테인의 기사단과 마법병대를 농락하고, 창공의 기사들마저도 꺾은 드라흔이라면 왕녀를 내줄 가치가 있지.”

“가뜩이나 아데스덴 왕가 앞에서 기를 못 펴는 아덴버그의 귀족들이 앞으로는 더욱더 벌벌 기겠군. 테오도르 국왕이 제법 괜찮은 칼을 얻었어.”

하지만 대부분의 이들은 아데스덴 왕실의 용단에 찬사를 보내고, 숙적 녹테인을 상대로 큰 승리를 얻고 드라흔이라는 강력한 기사를 완전히 제 것으로 만든 아덴버그가 앞으로 보일 행보에 주목했다.

대륙 북부와 남부, 서부와 동부 할 것 없이 모든 이들이 이 세기의 결합에 대해 떠들어댔고, 영웅담을 좋아하는 철없는 이들은 이 영웅시와도 같은 소식에 열광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이 소식에 열광한 것은 낯선 세상에 떨어져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해야 했던 이방인들이었다.

“공만 세우면 우리도 얼마든지 저렇게 될 수 있어.”

그들은 이방인이라도 제 능력만 입증하면 얼마든지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제 몸으로 증명해낸 김선혁의 소식에 많은 자극을 받았다.

하지만 이방인들 중에는 애초에 그런 기회 자체가 주어지지 않은 이들도 있었다.

대륙의 가장 끝단, 북서부에 위치한 노르딕 왕국의 이방인들은 노예의 낙인이 찍힌 채, 짐승과도 같이 살아가야 했다. 그런 그들에게 다른 이방인의 성공담 따위는 다른 세상 이야기에 불과했다.

“이 세상은 지옥이야.”

김선혁에게 있어 새로운 기회가 된 이 세상이 그들에게는 지옥이었다. 그리고 그들 중에는 정말로 세상을 지옥으로 만들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자도 있었다.

- 3차 전직에 필요한 조건을 만족했습니다.

- 2차 병과 마왕 군단장(Evil Corps Commander) 병과에서 3차 병과 마왕(Evil Overlord)으로 전직합니다.

- 마왕으로 전직하겠습니까?

타고나기를 절름발이로 태어나 병과의 등급을 확인할 기회조차 박탈당한 가엾은 이방인, 노르딕의 박상진은 머릿속을 파고드는 메시지에 환하게 웃어 보였다.

“이 빌어먹을 세상만 들어엎을 수 있다면, 얼마든지.”

그날 박상진이 3차 병과로 전직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노르딕 왕국에 내란이 일어났다는 소문이 대륙에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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