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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 아이에서 소녀로 (2)
왕도에 온 뒤로 숙소가 내성과 외성으로 갈려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여기사가 왕녀 앞에 있었던 것이다.
“트레일 경?”
뜻밖의 만남에 아는 척을 하니 아샤 트레일이 미미하게 고개를 숙여보였다.
“트레일 경은 이만 돌아가 보도록 하라.”
그런데 뭔가가 이상했다. 아샤 트레일이라면 끔찍이 여기던 왕녀가 친애하는 여기사를 대하는 말투가 어쩐지 냉랭했다.
“돌아가 보겠습니다.”
미처 인사를 할 새도 없이 돌아서서 저 멀리 사라지는 아샤 트레일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자니, 왕녀가 말을 걸어왔다.
“오늘은 생각보다 이르게 왔구나.”
평소와 다름없이 친근한 왕녀의 말투였다.
“이르나 늦으나 그대와의 만남은 즐거운 것이나, 오늘은 내가 몸이 그다지 좋지가 않구나. 하여 오늘의 담소를 내일로 미루고자 하는데, 양해해주겠는가.”
잘 못 본 건가?
아니. 잘 못 봤을 리가 없었다. 분명 왕녀는 아샤 트레일을 돌려보낸 것이 아닌 쫓아 보낸 것이었다. 그도 그 정도의 눈치는 있었다.
“그럼 저는 내일 이 시간에 다시 찾아오도록 하겠습니다.”
김선혁은 적당히 몸조리 할 것을 당부하고는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드라흔 백작님.”
숙소로 돌아가니 아샤 트레일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먼저 약혼을 축하드립니다.”
방금 전의 분위기가 찝찝한 것은 혼자뿐이었는지, 여기사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왕녀와의 약혼을 축하해주었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분명 출세라면 출세였지만, 어린 소녀와의 약혼을 당당히 축하받을 정도로 그는 뻔뻔하지 않았다. 그런 탓에 그녀의 축하가 영 어색하기만 했다.
“바깥은 어떻습니까?”
김선혁은 황급히 화제를 돌렸다.
“백작님과 줄을 대려는 귀족들이 하루 종일 찾아오는 바람에 스콰이어 줄리앙이 고초를 겪고 있습니다.”
자신이 내성에 꼭꼭 틀어박혀 있는 동안 줄리앙이 대신해서 귀족들에게 시달리는 모양이었다. 혹시라도 귀족들이 어린 종자에게 심한 짓을 하지는 않을까 걱정되어 그가 곤란한 표정을 지어보이니 아샤 트레일이 미미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백작님께서는 종종 스콰이어 줄리앙의 조부가 누구인지를 잊으시는 것 같군요.”
“아….”
김선혁은 뒤늦게 줄리앙이 왕국에서도 손꼽히는 변경백, 비텐펠트 로이엔 맹스크의 손녀라는 사실을 떠올릴 수 있었다.
“검에 대한 재능 이상으로 처세에 능한 아이이니, 백작님께서 따로 염려하실 일은 없을 겁니다.”
하기야 평소에도 귀족들에 대한 응대를 도맡아 하는 줄리앙이니만큼 새삼 달리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그보다 왕성에는 무슨 일이십니까?”
“왕녀께서 따로 부탁하신 일이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그 부탁이라는 게 잘 처리가 안 된 것일까. 그렇지 않고서야 방금 전에 보았던 그 싸늘한 분위기를 설명할 수가 없었다. 당장 어떻게 된 일인지 묻고 싶은 마음은 굴뚝이었지만, 아샤 트레일이 바라지 않았다.
“음….”
하지만 걱정하는 김선혁에 비해 아샤 트레일의 표정은 평온했다. 아니, 차라리 홀가분해 보이기까지 했다. 마치 오랜 짐을 벗어던지기라도 한 듯한 얼굴이었다.
“그럼 저는 가보겠습니다. 내성을 나오실 때, 기별을 주시면 마중 나오도록 하겠습니다.”
그 뒤로 잠시 더 머물던 아샤 트레일은 인사를 남기고는 사라졌다.
**
“트레일 경은 참으로 고지식하구나.”
김선혁을 돌려보낸 왕녀 오필리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아샤 트레일을 내성으로 불러들인 것은 일전에 내렸던 지시를 거두기 위해 내성으로 그녀를 부른 것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이 고지식한 여기사는 조금만 참으면 효력을 잃을 명령을 굳이 따를 수 없다고 밝혔다.
“내가 그녀에게 드라흔 백작의 동향을 살피라 지시했던 것은 혼사가 결정되기 한참 더 이전의 일이다. 조금만 기다렸다면 그 명 자체가 무색해질 게 자명한 상황에서 굳이 스스로의 의사를 내게 밝히는 건 조금도 현명한 행동이 아니다.”
“아마도 스스로에게 당당하기 위해서였겠지.”
혼잣말처럼 이어가던 의문에 대답을 해준 것은 테오도르 국왕이었다.
“폐하.”
“오필리아. 나의 사랑하는 딸아. 너는 아직도 멀었구나.”
질책하는 투는 아니었다. 귀족들이 어느 누구보다 대하기 꺼려한다는 아데스덴의 수장은 마치 동화라도 이야기해주듯 다정한 목소리로 제 딸에게 말했다.
“무릇 사람마다 저마다의 그릇이 있고, 그 쓰임이 있는 법이다. 그런데 너는 아직도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구나.”
테오도르 국왕은 아샤 트레일이 누군가를 살피고 염탐하는 데 적당한 인재로 보이는지를 물었고, 왕녀는 가만히 생각해보다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의 충성이 거짓된 것이냐.”
이번에도 왕녀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용인술(用人術)의 요점이 뭐라고 했는지 혹시 기억하더냐.”
테오도르 국왕의 질문에 왕녀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마음으로 그들의 진정을 살 수 있다면 그것이 가장 먼저요, 그게 불가능하다면 상대가 필요한 것을 쥐고 협조를 받는 것이 두 번째요, 그조차도 불가능하다면 상대가 꺼리고 두려워하는 것을 쥐고 경거망동치 못하게 하는 것이 세 번째라 말씀하셨나이다.”
왕녀의 대답에 흡족한 얼굴을 한 국왕이 물었다.
“그중 트레일 경은 몇 번째 경우에 속하느냐.”
왕녀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첫 번째, 마음으로 얻은 진실 된 인재이옵니다.”
“그걸 알면서도 너의 표정이 그리 뚱한 것을 보니, 아무래도 친한 벗을 빼앗겨 속이 상한 모양이구나.”
그녀는 제 아비의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오직 자신을 최우선으로 생각할 거라 여겼던 충성스러운 여기사가 보인 예상치 못한 반응에 다소 감정적이 된 건 아닌가 싶었던 것이다.
“트레일 경과 같은 인재는 드물다. 다시는 그녀의 올곧음을 시험하지 말거라.”
“명심하겠나이다.”
이런 대화를 주고받은 것이 하루 이틀이 아닌지 질문을 던지는 테오도르 국왕이나 대답을 하는 오필리아 왕녀나 더없이 자연스럽기만 했다.
“헌데 드라흔 백작과의 관계는 진척이 있는지 궁금하구나.”
이제껏 청산유수처럼 아비의 말에 대답하던 왕녀가 처음으로 입을 다물었다.
“호오.”
대답 없는 왕녀였지만 표정에 많은 감정이 떠올라 있었다.
“드라흔 백작이 제법 마음에 드는 모양이로다.”
그런 딸의 모습을 본 테오도르 국왕이 탄식과도 같은 한마디를 내뱉었다.
“잘 되었다. 기왕지사 네 마음에 거리낌이 없다면 무슨 수를 쓰더라도 그의 마음을 네 것으로 만들거라.”
얼마 전에도 비슷한 말을 하기는 했지만, 이번에는 그 어조에 훨씬 더 힘이 실려 있었다.
“혹시 그를 ‘들여다 본 것’이십니까.”
왕녀는 전에 없는 아비의 어조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보았다. 하지만 보지 못하였다.”
이번에는 총명한 왕녀도 그의 말을 알아듣지 못해 되묻고 말았다.
“분명 들여다보았으나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
이제껏 한 번도 흐트러진 모습을 보인 적이 없던 왕녀가 진심으로 놀란 얼굴을 해 보였다.
“이런 경우는 둘 중 하나뿐이지.”
테오도르 국왕은 제 딸의 놀란 얼굴을 바라보며 웃어보였다.
“아데스덴의 눈으로도 감히 살펴보지 못할 정도로 그가 격이 높은 존재이거나, 그도 아니면 아무런 능력이 없는 무능력자이거나.”
여지를 두는 듯한 말이었지만 사실 답은 정해져 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허나 폐하께서 과거 드라흔의 가능성을 들여다보신 적이 있지 않으십니까.”
테오도르 국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과거에는 보았으나 지금은 볼 수 없다. 이유는 너무도 명확하다.”
국왕의 말간 눈빛이 저 멀리 김선혁의 숙소가 있는 방향을 향했다.
“드라흔 백작은 이번 전쟁을 통해 격 자체가 높아진 것이다. 그것도 왕도의 어느 누구보다도.”
**
왕도 아데스덴은 완전히 난리가 났다. 요 몇 년 사이 가장 큰 명성을 날리고 있는 드라흔 백작이 왕녀 오필리아 라우렐 로 아데스덴과 약혼을 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공표된 것이다.
‘아데스덴 왕실의 가장 찬란한 보석과 드라흔의 약혼!’
‘이방인으로 시작하여 왕실의 일원이 되기까지, 드라흔 백작의 일대기.’
왕도의 신문은 연일 왕국의 영웅과 아름다운 왕녀의 약혼에 대해 대서특필했고, 왕도의 시민들 역시 서로 만나기만 하면 이 경사스러운 약혼에 대해 떠들어댔다.
오직 귀족파의 귀족들만이 이 세기의 결합에 우려를 표했을 뿐이다. 하지만 그들은 왕실의 결정을 번복할 그 어떤 명분도 스스로가 지니고 있지 않음을 알고 있었고, 차라리 이제라도 급성장한 이방인과 안면을 트기 위해 부산을 떨어댔다.
하지만 내성에 틀어박힌 드라흔 백작은 그날의 회의 이후로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고, 귀족들은 아쉬운 대로 그의 종자에게라도 청탁을 넣을 수밖에 없었다.
“저의 주인 되시는 분으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동부에서도 유서 깊은 레힐름 백작가의….”
“북부의 로젠다로 백작가에서 왔습니다. 드라흔 백작님께 부디 말씀을 전해주시기를….”
국왕파건 귀족파건 상관없었다. 속한 세력은 달랐지만 찾아오는 이들은 모두 아데스덴 궁중 권력의 새로운 중심으로 떠오른 드라흔 백작과 조금이라도 친분을 다지기를 원했다.
“이건 저희 영지에서만 특별히 생산되는….”
“기사에게 있어 좋은 무구와 갑주는 더없이 훌륭한 동반….”
편지를 보내는 것은 약과고 때로는 과하다 싶을 정도의 선물을 보내왔다. 귀족들은 조금이라도 제 가문의 이름을 각인시키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백작님께서 돌아오시면 꼭 편지 전해드리겠습니다.”
“더없이 훌륭하고 귀한 선물, 틀림없이 백작님도 좋아하실 겁니다.”
시시껄렁한 귀족가라면 대충 상대하여 돌려보냈을 텐데, 찾아오는 시종들의 가문이 하나같이 쟁쟁하여 그럴 수도 없었다.
성실한 성격 탓에 요령도 피우지 못하고 시달리던 줄리앙을 도와준 것은 뜻밖에도 왕녀 오필리아였다.
“몇 번 본 적은 있지만,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건 처음이구나. 맹스크 가의 여식이여.”
“지금은 맹스크의 핏줄이 아닌 드라흔 백작님의 종자로 이 자리에 있을 뿐이옵나이다.”
왕녀는 꽉 막힌 줄리앙의 태도를 보면서도 도리어 웃었다. 대대로 왕실에 충성을 바쳐온 맹스크 가의 핏줄다운 태도라 여기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그대는 오늘부터 내성에 머물며 백작을 보좌하라.”
그녀는 마치 제 식구라도 챙기듯 따뜻하게 줄리앙을 챙겨주었고, 이 소식은 줄리앙을 통해 금세 김선혁의 귀에 들어갔다.
“아, 부담스럽다. 정말.”
어린 소녀의 속이 어찌 그리 야무진지 그 앙큼한 속내를 알면서도 당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본거지가 아니기에 따로 챙겨줄 수 없었던 어린 종자를 대신해 챙겨준 왕녀에게 빚이 하나 늘어난 것이다.
“어떻게 된 겁니까. 대체.”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
“왕족과의 약혼이 어쩌다 보니 될 수 있는 겁니까?”
줄리앙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묻는 말에 김선혁은 대강의 사정을 설명해주었다.
“국왕 폐하께서 어지간히 백작님을 높게 본 모양이군요.”
“그러게 말이다. 부담스럽게 말이지.”
말과는 달리 김선혁도 내성에서의 생활에 제법 익숙해진 것인지 그다지 표정에 그늘이 없었다.
그 모습에 괜스레 억울해진 것일까. 왕성 밖에서 내내 귀족들에게 시달리느라 곤욕을 치렀던 줄리앙이 입을 삐죽거렸다.
“그래도 이렇게 줄리앙이 곁에 있으니, 든든하네.”
“저 없이도 잘 지내신 것처럼 보이는데요.”
말과는 달리 금세 풀어진 얼굴이 된 줄리앙은 그의 곁에 찰싹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그녀도 테오도르 국왕의 주도 하에 벌어진 기밀 회의에는 따라나설 수가 없었으니, 김선혁은 홀로 왕성에서도 꽤나 깊은 곳에 위치한 회의실에 자리를 잡았다.
“라파예트 경. 롤랑 경.”
회의실에 미리 나와 있던 익숙한 얼굴을 본 그가 아는 체를 하자, 창공의 기사들이 깊이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건네 왔다.
“자. 이렇게 공사가 다망할 경들을 한 자리에 모은 것은 그리핀도르와 녹테인 간의 밀약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자 함이다.”
몇 마디 채 나누기도 전에 회의실에 나타난 테오도르 국왕이 곧장 회의의 목적을 꺼내 들었다.
“라파예트 경.”
호명을 받은 불꽃의 라파예트가 자신을 소개하고는 곧장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