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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 아이에서 소녀로 (1)
“이방인입니다.”
다소 뜬금없게 들릴 수도 있는 첫마디에 왕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예전의 앳되던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는 모습이었다.
“생각도 가치관도 이곳에서 나고 자란 이들과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이 세상에서 왕녀가 혼인을 하기에 충분한 나이라 인정을 받는다고 한들, 그에게는 멀게만 느껴지는 이야기였다. 머릿속은 몰라도 도무지 마음으로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 왕녀는 다소 의젓한 아이에 불과했고, 부쩍 성장해 몰라보게 변해버린 지금도 아이일 뿐이었다. 그런 여아를 상대로 좋고 싫고를 따진다는 것 자체가 거부감이 드는 일이었다.
그러한 사정을 설명해주니 왕녀가 다소 가라앉은 표정으로 물었다.
“그러면 그대는 내가 싫다는 것인가.”
“싫은 건 아닙니다.”
처음에는 다소 피곤한 상대라 여겼다. 하지만 그 뒤로 왕녀는 물심양면 자신을 도와주었고, 단 한 번도 무리한 요구를 한 적이 없었다. 굳이 따지자면 좋아하는 쪽에 가까웠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인간으로서 왕녀를 대하는 호감에 불과할 뿐, 여인으로서 매력을 느끼냐 묻는다면 그건 또 아니었다.
“그러면 된 것이다. 참으로 복잡하게도 생각하고, 길게도 말하는구나.”
자신의 말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은 것인지, 그도 아니면 듣고 싶은 것만 듣는 어린아이 특유의 아집이 발동한 것인지 까지는 알 수 없었다.
“아무리 정치적인 필요에 의해 오가는 혼담이라 하여도, 서로를 혐오하면서도 살을 부대끼며 살아가야 한다면 그것만큼 끔찍한 일도 없으리라.”
어린 소녀가 살을 부대끼네 마네 말을 해대는 건 정말이지 그냥 들어주기 힘들었다. 왕녀의 노숙한 화법에 꽤나 익숙해졌다 자부하던 그조차도 민망함을 느낄 지경이었다. 그에 반해 왕녀는 태연하기만 했다.
“하지만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싫어하지 않으니, 최소한 끔찍한 결혼 생활을 하지는 않겠구나.”
왕녀의 말에 조금은 웃음기가 묻어있었다. 아무래도 왕녀 딴에는 농담이라도 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김선혁은 차마 웃을 수가 없었다.
“보아라. 그리고 묻노니 나는 그대가 처음 보았을 때의 모습 그대로인가?”
미미하게 미소를 띤 왕녀가 물었고,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이가 소녀가 되는 것이 순리이듯이, 소녀 또한 언젠가 여인이 되기 마련이다. 나 또한 머지않아 그리될 터, 이는 어느 한쪽이 노력하지 않아도 반드시 그리되고야 마는 순리이도다.”
왕녀의 말은 정론이었다. 아이가 청소년이 되고 다시 어른이 되는 건 너무도 당연한 세상의 법칙이었고, 그녀는 그의 걱정이 하찮은 것에 불과하다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스윽.
말을 채 다 내뱉기도 전에 차가운 무언가가 입술에 와 닿았다. 뒤늦게 그것이 어린 소녀의 손가락이라는 사실을 알아챈 그는 순간적으로 멍해지고 말았다.
“지금 그대가 해야 할 말은 부정과 염려가 아니니라.”
하지만 그가 그러거나 말거나 왕녀는 제 할 말만 늘어놓았다. 뒤늦게 자신의 추태를 깨달은 그가 얼굴을 붉혔다.
어린 애를 상대로 잘하는 짓이다.
어른스럽지 못한 자신의 태도에 욕이라도 한바탕 퍼부어주고 싶을 지경이었다.
“우리의 관계가 달콤한 연인의 그것이 될 수는 없을지언정, 내가 그대의 약혼녀라는 사실은 변치 않나니, 사내 된 자로서 어린 약혼녀에게 조금은 믿음직한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겠는가.”
틀린 말도 아니었다. 이제 와서 혼담을 뒤집을 게 아니라면, 굳이 속내를 전부 털어놓아서 뭘 하겠는가.
왕녀의 말에 납득한 그는 목 끝까지 올라왔던 수많은 말을 도로 삼켰다.
그러고 보니 어린 소녀에게 위로를 받는 꼴이 되어버렸다.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달은 그가 스스로를 자책했다.
“음.”
하지만 막상 뭐라고 말을 하려고 해도 말문이 열리지를 않았다. 채 허물어지지 않은 저쪽 세상의 윤리와 도덕이 여전히 그의 입을 틀어막고 있었다.
“자, 말해보라. 그대는 그대의 어린 약혼녀에게 어떤 달콤한 말을 해줄 것인가.”
왕녀는 여전히 그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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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왕녀께 그렇게 말했다고?”
낄낄대며 웃어대는 레인하르트 후작 역시 그중에 하나였다.
“이걸 솔직하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멍청하다고 해야 할까. 아무래도 후자 같구나.”
하도 마음이 갑갑해 하소연이라도 할 생각으로 왕녀와의 이야기를 말했더니, 레인하르트 후작은 도리어 그를 놀려댔다.
“무릇 여인들이 결혼 전에 하는 질문에 곧이곧대로 대답하는 것은 차후 평생 동안 트집 잡을 빌미를 주는 것과 같으니, 네 앞날이 보이는 것 같구나.”
어쩐지 즐겁게만 보이는 후작의 태도에 그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럼 뭐라고 합니까.”
“뭐라고 하기는. 대충 알아서 말해야지. 행복하게 해주겠느니, 너밖에 없느니. 많지 않은가.”
“아직 왕녀와는 그런 사이가 아니지 않습니까.”
노골적인 조롱에 화가 나 톡, 하고 쏴주니 후작은 또 그걸 보고 낄낄대며 웃어댔다.
“심정이야 이해한다만, 남자라면 때로는 마음에도 없는 말을 지껄여댈 줄 알아야 가내가 평안한 법이다.”
“끄응. 지금 놀리러 오신 겁니까?”
“그건 아니다만, 어쩌다 보니 그리 되었군.”
정색을 한 그를 보며 찔끔한 표정을 해 보인 후작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서 왕녀께서 그 말을 하신 후에, 너는 뭐라고 대답을 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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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을 망설인 끝에 고르고 고른 한마디를 내뱉었다.
“최소한 왕녀께서 눈물을 흘리실 일은 없도록 하겠습니다.”
스스로가 생각해도 유치하고 낯 간지러운 한마디, 하지만 김선혁은 이 말 외에는 다른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아….”
그런데 왕녀의 표정이 뭔가 이상했다. 그녀는 그의 유치한 다짐을 비웃지도 않았고, 시원찮다고 핀잔을 주지도 않았다. 그녀는 마치 머리라도 한 대 얻어맞은 듯 멍한 얼굴로 한참을 있었을 뿐이었다.
“우스운 말이구나. 단지 눈물을 흘리지 않게 하겠다니, 어느 사내가 이런 말을 할까.”
그러고 보니 어린 왕녀가 눈물을 흘리는 일이 있을까 싶었다. 왕국의 당당한 왕위 계승자이자 자신의 혼사마저도 정치적으로 해석하고 이용하는 그녀에게는 영 맞지 않는 말이었다.
“물론 왕녀께서 눈물을 흘리실 정도로 나약해 보이지는 않….”
혹시라도 적절하지 못한 언사로 왕녀의 자존심을 건드린 건 아닌가싶어 황급히 부연설명을 하려는데 왕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하지만 수천 마디의 달콤한 말보다, 그대의 투박한 한마디가 더욱 기껍게만 느껴지니 실로 묘한 일이구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왕녀가 환하게 웃었다. 고결하지만 나이에 맞지 않은 듯했던, 왕녀가 이제까지 보여주었던 담담한 미소와는 완전히 다른 환한 미소였다.
마치 꽃이 만개하듯 아름다운 미소는 딱 그 나이 또래의 싱그러움이 가득한 것이었다.
“그대를 믿겠노라.”
어쩐지 차분했던 왕녀의 목소리마저도 들뜬 듯 들려와 김선혁은 더욱 더 민망해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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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눈물을 흘리시지 않도록 하겠다고?”
이제 레인하르트 후작은 아예 배를 잡고 숨이 넘어갈 듯이 웃어 재끼고 있었다. 얼마나 심하게 웃었는가 하면 발을 동동 굴러대는 바람에 작은 협탁이 넘어가도 모를 정도로 낄낄거려댔다.
“대답 한번 걸작이구나!”
지금에 와서 다시 생각해도 얼굴이 화끈거리는 상황이었다. 비록 부추김을 받아 어쩔 수 없이 건넨 말이라고 해도 결국은 어린 소녀에게 한 고백이나 다름이 없었던 것이다.
“끄응. 그만 웃으십쇼.”
김선혁이 민망함에 시뻘게진 얼굴로 만류를 해보았지만, 후작은 그 뒤로도 한참이나 웃어댔다. 얄미워도 더럽게 얄미운 노인네였다.
“그래. 왕녀께서 마음에 들어 하셨다면 되었다. 그래. 그걸로 된 거지.”
여전히 웃음기가 묻어나는 음성, 하지만 후작의 부리부리한 눈동자에 떠오른 것은 보다 복잡한 감정이었다.
“언제고 여왕이 되셔야 할 왕녀시다. 어떤 짝을 만나더라도 정상적인 부부가 되기에는 힘들 터, 스스로도 그 사실을 알기에 또래의 소녀들이 보이는 모습을 단 한 번도 보인 적이 없으시지. 그 점이 나는 늘 안타까웠다.”
후작은 엉망으로 찻잔이 나뒹구는 테이블을 빤히 바라보다 그에게 말했다.
“아이의 성장은 봄날 돋아난 싹이 어느새 꽃으로 만개하듯 갑작스레 눈에 들어온다더니, 지금이 딱 그 짝이로다. 왕녀께서 어느새 여인이 다 되신 게야. 그 사실을 나만 몰랐구나.”
아직은 다 자랐다고 말하기에는 여러모로 여물지 못한 왕녀였지만, 김선혁은 굳이 그런 이야기를 해서 후작의 말을 막지 않았다.
“너는 말이다. 여러모로 왕녀께 부족한 몸이다.”
갑작스러운 혹평에 그가 인상을 찌푸리니, 후작이 가만히 자신의 말을 더 들어보라며 말을 이어갔다.
“휘황찬란한 가문도 없고, 멋들어진 귀족의 소양도 없다. 할 줄 아는 거라고는 전장에서 들개처럼 적들을 물어뜯는 것밖에 없지.”
가만히 들어보니 더한 혹평이 쏟아졌다. 발끈한 그가 나서서 한마디를 하려니 이번에도 후작이 먼저 선수를 쳤다.
“폄하하려는 것이 아니다. 네가 정치가보다는 무인에 가깝기에 오히려 나는 마음이 놓인다. 한 나라의 왕위 계승자조차 여염집 아이 보듯 하는 너이기에 나는 도리어 기껍다.”
그를 바라보는 후작의 눈가에는 드물게 온기가 뚝뚝 흘러내리고 있었다.
“어쩌면 너라면 왕녀께서 진즉에 포기했던 무언가를 되찾아줄 수도 있겠지.”
갑작스레 솥뚜껑만 한 손이 다가와 그의 손을 꽉 움켜잡았다.
“사내라면 자신의 말을 반드시 지켜 보여라. 왕녀께서 부디 비탄에 잠겨 눈물을 흘릴 일이 없도록 하라. 이는 공적으로는 왕녀를 모시는 왕가 수호대의 수장으로 하는 부탁이요, 사적으로는 왕녀의 먼 친척뻘 되는 자로 하는 부탁이다.”
“아….”
왕실의 계보에 대해 무지한 김선혁이기에 처음으로 레인하르트 후작이 멀게나마 아데스덴 왕실의 혈족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사실을 알고 나자 평소에도 대하기 부담스럽던 성질 괴팍한 후작이 두 배는 더 부담스러워졌다.
“만약 왕녀께서 너로 인해 눈물을 흘리는 일이 생긴다면….”
후작은 끝까지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때로는 백 마디 말보다 침묵이 더욱 많은 것을 이야기해주기도 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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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왕도에 도착했다는 사실이 귀족들에게 탄로가 났음에도 김선혁은 한동안 더 왕성의 내원에 머물러야 했다. 그렇다고 해서 왕실이 그를 내원 밖으로 나가는 것을 강제로 막은 것은 아니었다.
단지 그가 모습을 드러내기만 기다리고 있는 수많은 귀족들로 인해 생길 귀찮은 일을 피하기 위해서 조금 더 내원에 머물렀을 뿐이었다.
“그렇게 반대할 때는 언제고, 거 참….”
김선혁으로서는 그렇게 자신의 출신을 문제 삼아 폄하까지 해대던 귀족들이 금세 태도를 달리하여 왕녀의 약혼자에게 줄을 대려고 아등바등 거리는 꼴이 불편하기만 했다.
“그게 바로 정치고, 귀족들이다.”
정작 본인은 전혀 정치적이지 않은 주제에 레인하르트 후작은 잘난 듯이 떠들어댔다.
“저는 태생적으로 귀족들하고는 잘 맞지 않는 모양입니다.”
“나도 후작이고 귀족이다. 그런 것 치고는 꽤나 편하게 나를 대하고 있지 않은가.”
“후작님이야, 원체 귀족 같지가 않아서….”
꽤나 건방진 말이었지만, 후작은 전혀 기분 나쁜 눈치가 아니었다.
“아주 친구 먹어라. 친구.”
도리어 껄렁거리며 한 술 더 뜨기까지 했다.
내성을 벗어나지 못하는 상황이라 말상대라고 해봐야 몇 되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후작과 자주 어울리게 되었고 꽤나 친해져 버렸다. 이제는 어지간한 말장난 정도는 서로 아무렇지도 않게 주고받을 정도가 된 것이다.
“칭찬입니다. 칭찬.”
후작은 분명 괴팍했지만 말이 통하지 않는 상대는 아니었고, 가끔 꼬장을 부리는 것을 제외하면 제법 좋은 말상대였다.
“왔구나.”
내성에서 그에게 허락된 또 다른 대화상대는 왕녀 오필리아였다.
테오도르 국왕은 약혼에 앞서 두 사람이 가까워질 필요가 있다 여긴 것인지 대놓고 그를 부추겼고 이런저런 구실로 그와 왕녀가 함께 있을 시간을 만들어주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약혼이 결정된 이후로 왕녀의 태도는 엄청나게 변했다. 한결같이 의젓하던 왕녀가 근래 들어 부쩍 제 감정을 표현하기 시작한 것이다.
“언제 오나 이제나저제나 기다리고 있었노라.”
이렇게 반가움을 표시한다거나,
“벌써 시간이 이리 되었다니, 아쉽고 아쉽구나.”
헤어짐을 슬퍼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게 왕녀가 갑작스레 자신에게 연심을 품게 되었다거나 하는 의미는 아니었다. 왕녀의 모습은 마치 외로운 소녀가 말동무를 찾아 기뻐하는 것에 가까웠다. 그로서도 점점 왕녀를 대하는 게 편해져 가고 있었다.
다만 이따금씩 나이에 걸맞지 않은 성숙한 화장을 하고 은근히 기대하는 모습을 보인다는 게 껄끄러웠을 뿐이었다.
“잘 어울리십니다.”
“예쁘십니다.”
그럴 때면 무언의 압박에 눌려 칭찬 한마디라도 해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왕녀는 마치 세상 다시없을 칭찬이라도 받은 것처럼 환하게 웃어 보였다.
자꾸 웃지 마라. 정 든다.
화사하게 웃어 보이는 왕녀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확실히 전처럼 왕녀가 불편하게만 느껴지지는 않았다. 물론 그게 이성으로서 왕녀를 좋아하게 된 것은 아니었지만, 분명 전보다 관계가 훨씬 친근해진 것만큼은 분명했다.
“어?”
이제는 왕녀와의 담소도 레인하르트 후작과의 시시껄렁한 농담 따먹기도 익숙해질 무렵, 김선혁은 언제나와 같이 왕녀를 찾았다가 생각지도 못한 이를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