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래곤 푸어-138화 (138/305)

00139    =========================================================================

139. 아데스덴의 보물 (5)

끄응. 모욕을 당하면 나서라더니, 이건 아예 작정하고 유도하는 거잖아.

국왕의 의도는 빤했다. 이런 식으로라도 트집을 잡아 귀족들의 반박을 억누르고, 귀족들의 모욕을 받은 김선혁이 그들과 대립하여 선택을 뒤집을 수 없도록 쐐기를 박으려는 게 분명했다.

이건 쇼다. 왕실의 가족이 되기 위해 거쳐 가는 일종의 신고식이었다. 그 정도쯤은 김선혁도 알고 있었고, 이미 마음을 먹은 이상 기꺼이 장단을 맞춰줄 용의가 있었다.

하지만, 귀족들이 하는 행태를 보고 나니 적당히 끝낼 생각이 사라져버렸다.

“폐하. 드라흔 백작이 세운 전공이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한 것이기는 하나, 이는 어디까지나 무부(武夫)가 제 재주를 뽐낸 것에 불과할 뿐이옵나이다!”

여기서도 군바리는 개돼지 취급이냐.

대가를 받고 안 받고를 떠나 목숨 걸고 전장을 쏘다니며 손에 원하지도 않는 피를 묻혔더니 하는 말이 고작 무부의 재주 자랑에 불과하단다.

“큰 공을 세웠다고 하나 이는 마땅히 왕국의 기사된 자로 해야 할 헌신이며, 이를 셈하는 것은 그 숭고하고 거룩한 봉사를 모욕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나이다.”

모욕이란 그런 게 아니었다. 기꺼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건만, 그조차 당연하다 말하는 귀족들의 행태야말로 희생된 장병들을 모욕하는 것이었으며, 죽을 고생을 하며 싸운 자신을 모욕하는 것이었다.

안전한 후방에 남아 타인의 노력과 헌신을 당연한 것으로 취급하는 귀족들의 특권의식에 그는 슬슬 열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 출신이 근본을 알 수 없는 이방인이라….”

“천박함과 존귀를 구분치 못하는 그 우둔함만큼은 어찌할 수가 없는 이들….”

“단지 능력이 있다 하여 천하디 천한 것들마저 중용한다면 나라의 근본이 무너지고….”

멋대로 사람을 천하네 마네 가치를 매기는 귀족들의 행태에 그는 이제 정말로 화가 났다. 단지 부모를 잘 만나 그 자리에 있을 뿐인 세습 귀족들의 우두머리들이 하기에는 지나치게 뻔뻔한 말이었다.

“저 말을 어떻게 생각하지, 드라흔 백작?”

타이밍 좋게 테오도르 국왕이 끼어들 기회를 주었다. 김선혁은 면갑을 들어 올리며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섰다.

“드, 드라흔 백작?”

자신을 알아본 귀족들의 안색이 해쓱해졌다.

“하아….”

그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내키지 않은 자리, 마음에도 없는 쇼였다. 하지만 그보다 더욱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귀족들이었다.

처음부터 김선혁은 귀족들이 싫었다.

처음 왕도에 들렸을 때, 어떻게든 자신을 이용해먹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던 그들로 인해 얼마나 곤욕을 치렀던가. 거기에 더해 가만히 있다가 욕까지 들어먹었다. 그런데도 귀족들이 좋게 느껴진다면 그게 도리어 이상한 일이었다.

“폐하. 잠시 뒤로 물러나 주시겠습니까?”

테오도르 국왕은 그의 당돌한 요청에 흔쾌히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귀족들 앞에 선 김선혁은 교활하게 눈동자를 굴려대는 젊고 늙은 사내들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폐하. 왜 드라흔 백작이 수호기사의 차림을 하고 이곳에 있는 것인지….”

아직까지도 상황 파악이 되지 않은 것인지, 도리어 국왕이 자신들 몰래 이 지루한 논공행상의 당사자를 대동한 사실을 트집 잡는 귀족의 목소리를 들으며 그가 잠시 눈을 감았다.

비록 억지로 유도해 만들어낸 상황이었지만, 그의 분노만큼은 진짜였다.

김선혁이 감았던 눈을 다시 떴을 때, 그의 기세는 마치 용의 그것처럼 변해 있었다.

**

철푸덕.

가장 앞장서서 그를 폄하하던 귀족이 허물어지듯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조차 파악하지 못한 귀족은 몇 번이나 일어나려다 다시 넘어졌다.

“어?”

뒤늦게 제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고 있는 것을 발견한 귀족이 얼빠진 소리를 내뱉었다. 그리고 이내 하얗게 눈을 뒤집고는 거품을 물었다.

“이게 무슨….”

영문 모를 상황에 귀족들이 눈살을 찌푸리며 나서려다가 그대로 굳어버렸다. 자신들을 빤히 바라보는 김선혁의 무감정한 시선을 발견한 것이다.

“음.”

속을 낱낱이 파헤치는 듯한 아데스덴의 눈빛과는 달랐다.

귀족들이 보기에 그의 눈빛은 보다 이질적이고 폭력적이었다. 함부로 나섰다가는 그 자리에서 온몸이 갈기갈기 찢겨질 것 같은 적의였고, 또한 압도적인 차이로 찍어눌러오는 격의 차이였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저런 종류의 눈빛과 마주해 본 적이 없었던 귀족들은 감히 그 시선을 마주 볼 수가 없었다. 그들은 스스로도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눈을 피하고 궁지에 몰린 동료조차 외면해야 했다.

고작 이런 새끼들이.

감히 맞설 생각조차 못하고 눈을 내리까는 귀족들은 전선에 근무하는 가장 말단의 병사만도 못해 보였다.

잘난 듯이 죽음을 논하고 희생과 헌신을 언급했지만, 실상 자신들은 그 언저리에도 가보지 못한 쭉정이들이었던 것이다.

그 형편없는 민낯을 마주하고 나니 차라리 허탈감이 밀려왔다.

“하….”

김선혁은 적의를 누그러트리고 기세를 갈무리했다.

“으으으.”

잠시 시간이 흐르고 거품 물고 눈을 까뒤집었던 귀족이 정신을 차렸다.

“어디의 누굽니까.”

“리, 린넨만 백작가의….”

대답은 다른 곳에서 들려왔다. 하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그저 가장 열성적으로 자신을 헐뜯었던 귀족의 이름을 들은 것만으로 충분했다.

“린넨만 백작가라….”

김선혁은 단지 린넨만 가문의 이름을 입에 담았을 뿐이었다. 그것만으로도 린넨만 백작은 마치 사형선고라도 받은 듯한 얼굴이었다.

“일간 찾아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는 경고를 남기는 것을 잊지 않았다.

“아….”

그의 한마디에 린넨만 백작이 다급하게 다른 귀족들을 바라보며 도움을 요청했다.

“커흠.”

하지만 잠시 김선혁과 눈이 마주 친 뒤로는 완전히 기가 눌려버린 귀족들은 나서서 동료를 도와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괜히 당사자를 앞에 두고 변호를 한답시고 입을 놀려대다가 지지 않아도 될 원한을 질지도 모른다 여긴 모양이다.

“아무래도 린넨만 경이 몸이 좋지 않은 모양이다. 돌아가서 쉬고 차후 오늘의 결과를 통보받도록 하라.”

그때 테오도르 국왕이 나서서 사태를 수습했다.

“뭐 하는가. 린넨만 경이 쉴 수 있도록 돕지 않고.”

그 말에 대기하고 있던 기사들 중 하나가 다가가 린넨만 백작을 끌어내다시피 회의장 밖으로 내몰았다.

“잠시 소란이 있었지만, 나는 전에 말한 대로 오늘 일을 마무리 지을 생각이다.”

국왕의 말에 귀족들이 눈치를 살폈다.

당사자가 눈앞에 있으니 방금 전처럼 극렬하게 반대하기가 곤란해진 모양이었다. 게다가 그들은 방금 전에 린넨만 백작이 어떤 꼴을 당했는지 똑똑히 지켜본 차였다.

경지에 오른 기사의 기세는 단지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사나운 범과 마주친 것처럼 사람을 상하게 한다더니, 드라흔의 경지가 바로 그러했다.

귀족들은 이제 완전히 기가 눌려버렸고, 전처럼 강하게 딴지를 걸고 나설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선선히 아데스덴 왕가와 드라흔의 결합을 두고 보지도 않았다.

“경사스러운 일이 될 수도 일이나 너무 서두르는 건 아닌지….”

“조금 더 시간을 두고 좋은 때를 보아 결정을 내리는 것이 좋을 거라 사료되옵나이다.”

“드라흔 백작도 이제 막 전장에서 돌아왔으니 조금은 쉬어야 하지 않겠나이까.”

귀족들은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결정을 늦출 것을 제안했다. 물론 그들이 그렇게 말한다고 해서 호락호락 넘어갈 테오도르 국왕이 아니었다.

“그들을 들여라.”

작정하고 오늘의 자리에서 일을 마무리 짓기로 마음먹은 국왕은 준비해두었던 또 다른 패를 꺼내 들었다.

철컥, 철컥.

회의실의 문을 열고 들어선 두 사내가 무릎을 꿇었다.

“아덴버그의 온당한 지배자 테오도르 티레리우스 로 아데스덴 국왕 폐하께 경의를!”

갑작스럽게 등장한 낯선 사내들의 모습에 잠시 영문을 몰라 헤매던 귀족들이 뒤늦게 그들의 복색이 아덴버그의 것과는 확연하게 다름을 깨닫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핀도르에서 온 질베르 실베인 라파예트 경과 장 마리 드 롤랑 경이다.”

국왕이 씨익 웃으며 그들을 소개해주었다.

“창공의 기사!”

뒤늦게 그들의 정체를 알아차린 귀족들이 법석을 떨었다.

“칼스테인 요새에 있어야 할 이들이 왜 이곳에….”

귀족들은 거듭 예상하지 못했던 인물들이 회의실에 나타나자 도통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리핀 라이더들의 등장보다 더욱 놀라운 것은 따로 있었다.

“라파예트 경과 롤랑 경은 고국을 떠나 우리 아덴버그에 잔류하기로 결정했다.”

테오도르 국왕은 아무렇지도 않게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리고 이들을 설득한 게 바로 드라흔 백작이다.”

귀족들은 이번만큼은 표정 관리를 할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입을 쩍 벌리고 말았다.

“경들은 아직도 드라흔 백작의 전공이 부족하다 여기는가.”

**

테오도르 국왕은 차분히 귀족들을 설득하는 대신, 정신없이 몰아쳐서 그들이 감히 자신의 의견에 반박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계획은 성공했다.

이미 린넨만 백작이 볼썽 사납게 쫓겨난 이후 기가 눌린 귀족들은 창공의 기사들이 전향했다는 사실에 놀라 국왕의 의견을 더 이상 반대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핀도르의 보물이자 자랑이라 할 수 있는 그리핀 라이더들을 전향하도록 설득한 공은 귀족들로서도 상상치 못한 것이었다.

“허나 나 또한 곰곰이 생각해 본 바, 경들의 의견도 일정 부분 옳다는 사실을 통감하게 되었노라. 하여 나는 왕녀와 드라흔 백작을 약혼토록 하여 잠시 더 시간을 두고 지켜볼 생각이다.”

거기에 더해 당장에라도 결혼까지 밀어붙일 것 같았던 태도를 바꿔 한발 양보하는 척 약혼을 언급하니 더 이상은 귀족들도 반대할 구실이 없었다.

“폐하의 결정에 기꺼이 따르겠나이다.”

한 달여간을 질질 끌어오던 문제가 허무할 정도로 쉽게 결정이 나는 순간이었다.

“수고했다. 그대의 공이 실로 크다.”

“끄응.”

테오도르 국왕의 치하에 김선혁은 저도 모르게 앓는 소리를 내뱉고 말았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자신이 오늘 한 행동이 결국은 왕녀와의 혼담을 확정짓기 위한 것이었으니, 스스로 나서서 어린 왕녀와의 혼담을 추진한 것이나 다름이 없게 느껴져 기분이 복잡하기만 했다.

“하. 내가 대체 뭘 한 거지.”

과연 자신의 행동이 잘한 것인지 혼란스러울 지경이었다.

“그대의 용단이 왕국의 혼란을 막은 것이다.”

왕녀의 초대를 받아 참석한 티타임, 김선혁은 눈앞의 왕녀가 과연 스스로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고는 있는 것인지 의심이 갔다.

“장하도다. 장해. 그대는 진정한 기사이니라.”

연신 칭찬을 하는 왕녀를 빤히 바라보던 그는 결국 참지 못하고 묻고 말았다.

“왕녀께서는 괜찮으십니까? 이렇게 혼담이 결정되어도 아무렇지 않은 겁니까?”

어린 소녀가 받아들이기에는 지나치게 가혹한 현실이 아닌지 의문이 들어 물었더니, 왕녀의 대답이 가관이었다.

“그대는 이방인, 나와의 혼인을 빙자하여 사리사욕을 채울 가문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그대가 신랑감으로 모자란 것도 아니다. 내가 그대를 거부해야 할 이유가 따로 있는가?”

자신의 결혼마저도 정치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는 어린 소녀를 가여워해야 하는 것인지, 그도 아니면 현실적이라 칭찬해줘야 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게다가 지금 이 대륙에 그대보다 더욱 훌륭한 신랑감은 없노라. 귀족들이 나와 그대의 혼인을 반대하고 나선 이유 역시 그들 스스로가 그대와 혈연으로 묶이기를 바랐기 때문이니라.”

결국 김선혁은 왕녀에게 사적인 감상을 묻는 것을 포기했다.

“그대는 내가 싫은 것인가.”

왕녀의 질문은 기습적이었다. 가만히 차를 마시던 김선혁은 그 생각지도 못한 질문에 저도 모르게 사례가 들고 말았다.

“쯧. 칠칠치 못하구나.”

왕녀는 혀를 차면서도 친히 손수건을 건네 엉망이 된 그의 앞섶을 닦아주었다.

“가, 감사합니다.”

“그보다 나는 아직 대답을 듣지 못했다. 그대는 내가 싫은 것인가.”

잠깐 소란이 있었지만 왕녀는 대답을 듣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넌지시 물어오는 말에 김선혁은 처음으로 자신에게 질문을 던졌다.

나는 왕녀가 싫은 것인가.

이런저런 복잡한 사정에 얽혀 정작 왕녀에 대해서 깊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 사실을 깨달은 그는 왕녀를 앞에 두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고는 고민에 빠져들었다.

그렇게 생각에 잠긴 그를, 왕녀는 보채는 일 없이 가만히 기다려주었다.

“저는….”

한참을 고민하던 그가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