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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 아데스덴의 보물 (4)
수많은 귀족들 중에서도 오직 백작 이상의 고위 귀족들만이 참석 가능한 회의, 젊고 늙은 귀족들은 그 어느 때보다 결의에 차 있었다.
“할 일이 태산인데, 언제까지 이방인 하나 때문에 이렇게 시간을 낭비해야 하는지, 오늘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반드시 폐하를 설득해야 하오.”
귀족들은 오늘에야말로 고집쟁이 국왕을 설득하여 벌써 한 달이나 질질 끌어온 논공행상을 마무리 지을 작정이었다.
“이를 말이요 비록 내가 여러 귀족 분들에 비해 부족함이 많은 몸이오나, 왕국의 앞날에 도움만 된다면 기꺼이 나서서 직언을 아끼지 않을 정도의 기개는 있소이다. 설령 폐하께 미움을 사더라도 말이오.”
“미워하다니요. 현명하신 폐하라면 반드시 경의 충정을 알아줄 거요.”
저들끼리 하는 이야기만 보면, 세상에 충신도 이런 충신들이 없었다.
하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이들이 테오도르 국왕의 말을 반대하는 건 단순한 견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들은 가뜩이나 강력한 아데스덴 왕가가 전쟁영웅과 결합하기를 바라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나저나 폐하께서 지난 회의에서 공언하지 않으셨소. 오늘만큼은 어떤 식으로든 결착을 지을 거라고 말이요. 혹시 뭔가 우리가 모르는 혜안이 있으셨던 건 아닌지, 조금은 걱정이 되는구려.”
“워낙에 속이 깊은 분이니 나 역시 그 점이 가장 우려스럽소이다.”
테오도르 국왕은 다음 회의에서 이 비생산적이고 피곤하기만 한 회의를 끝낼 거라 선언했다. 귀족들은 그게 못내 마음에 걸렸다. 자신들이 놓치고 있는 무언가가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된 탓이다.
“설령 그렇다고 한들 뭐가 달라지겠소. 비록 혁혁한 공을 세웠다고 하나, 근본을 알 수 없는 이방인이오. 그런 자가 왕실의 하나뿐인 핏줄과 이어지다니,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요. 또 있어서도 안 되고 말이오.”
“지당하신 말씀이외다. 오필리아 왕녀께서는 장차 폐하의 뒤를 이어 아덴버그를 이끌어야 할 더없이 고귀한 분, 그런 분께서 그렇게 격에 맞지 않는 짝을 맞이하시게 할 수는 없소.”
절대로 막아야 했다. 가뜩이나 이번 대에 이르러 그 성세가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성장한 아데스덴 왕실이 새로운 패를 잡게 두어서는 안 된다.
“드라흔 만큼은 절대로 안 되지. 암 안 되고말고.”
저도 모르게 내뱉은 어느 귀족의 말에 다른 귀족들이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다 흠칫 놀랐다. 내심을 숨기고 표정을 관리하는 데 능한 귀족들답지 않은 실수, 그만큼 그들이 느끼는 위기감은 대단했다.
차라리 다른 상급 병과의 이방인이었다면 이리 기를 쓰고 반대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드라흔만큼은 절대로 막아야 했다.
드라흔은 그냥 이방인이 아니었다. 용기병이라는 듣도 보도 못한 병과를 지닌 존재이자 대륙에서도 단 하나뿐인 와이번 라이더였다.
거리의 이점도 지형의 유리함도 창공을 활보하는 용기병 앞에서는 무의미했고, 왕실이 드라흔을 손에 얻는 순간, 왕국 가장 외진 곳조차도 아데스덴의 손바닥 안에 놓이게 되고 만다.
말 그대로 테오도르 국왕이 아침을 먹다 명령을 하면 그날 저녁에 영지 하나가 사라질 수도 있는 것이다.
단지 이방인 하나가 그 정도의 힘이 있을까 싶기도 했지만, 이미 전례가 있었다.
귀족들은 드라흔이 어떤 식으로 녹테인을 농락했고, 또 어떻게 괴롭혀댔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그들은 자신들이 녹테인과 같은 신세가 되지 않기를 바랐다. 국왕의 뜻을 거스르면서까지 반대를 할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아덴버그의 온당한 지배자이자, 누구보다 존귀하고 현명하신 테오도르 티베리우스 로 아데스덴 국왕 폐하께서 입장하십니다!”
한참을 저들끼리 쑥덕거리던 귀족들이 시종관의 우렁찬 음성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이윽고 문이 열리고, 금갑을 두른 호위기사들을 거느린 테오도르 국왕이 모습을 드러냈다.
“왕국의 온당한 지배자, 테오도르 티베리우스 로 아데스덴 국왕 폐하께 경의를!”
귀족들이 각자 무릎을 꿇으며 예를 표하는 사이 국왕이 왕좌에 걸터앉았다.
“아아. 일어들 나게.”
국왕이 허락을 하고나서야 귀족들은 꿇었던 무릎을 펴고 고개를 들 수 있었다.
“다들 안색이 좋은 것을 보니, 푹 쉰 모양이군.”
정작 그렇게 말하는 국왕이야말로 안색이 꽤나 좋았다. 그간 거듭된 귀족들의 반대에 쌓여왔던 짜증과 피로마저 말끔히 날아간 모습이었다.
“시간이 없으니 바로 회의를 시작하도록 하지.”
귀족들은 그 여유만만한 얼굴을 보는 순간 덜컥 심장이 내려앉았다. 하지만 애써 내색하지 않고, 자신이 할 말을 골랐다.
“오늘 이 자리는 경들도 알다시피 드라흔 백작이 세운 전공에 대한 합당한 대가를 논의하는 자리이다. 이에 앞서 다시 한 번 그가 전장에서 이룩한 눈부신 공을 확인하겠다.”
테오도르 국왕의 눈짓을 받은 관료 하나가 또박또박 드라흔이 세운 전공을 읊기 시작했다.
“선혁 라인펄 김 드라흔 백작은 녹테인의 정예를 맞아 예순여섯 번을 싸워 예순여섯 번을 승리하였고, 그 과정에서 중대 규모의 적 보병대 이십여 개를 무력화시켰습니다. 또한 녹테인에서 파견 나온 푸른 늑대 기사단과 붉은 늑대 기사단, 2개의 녹테인 왕실 마법 병대를 맞아 기사 열넷과 마흔둘의 마법사를 격살시켰습니다. 거기에 더해 신출귀몰한 기동으로 적들의 발목을 묶어 실제 전투에 참여한 횟수보다 더욱 큰 영향력을….”
대체 누가 있어 한 번의 전쟁에서 단신으로 이런 혁혁한 공을 세울 수가 있을까. 귀족들은 이미 몇 번이나 들었던 전공 목록임에도 불구하고 새삼 감탄을 할 수밖에 없었다.
“들은 그대로다. 왕국 전사(戰史)에 길이 남을 업적이지.”
테오도르 국왕은 그런 귀족들의 표정을 보며 뿌듯한 얼굴을 해 보였다. 그게 귀족들의 기색을 보고 만족을 한 것인지, 그도 아니면 언제 들어도 대단한 드라흔의 전공에 흡족한 기분이 된 것인지 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국왕이 꽤나 기분이 좋다는 것만큼은 분명했다.
“나는 이에 합당한 보상을 내리고자 하니, 왕실의 곳간을 열어 그가 베어낸 기사와 마법사들의 수만큼의 금괴를 내릴 것이며, 그 두 배의 말과 소와 돼지를 하사할 생각이다. 또한 그의 영지에서 나는 은과 철을 5년간 시세대로 매입하는 계약을 왕실의 이름으로 맺을 것이다.”
그 뒤로도 한참이나 국왕의 말이 이어졌다. 세운 공이 공이다보니 보상도 그 길었던 전공의 보고만큼이나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물질적으로는 여기까지다. 이의가 있는가?”
“없사옵니다!”
벼르고 있던 귀족들은 선선히 국왕의 말에 수긍했다. 금과 가축 정도야 얼마나 퍼주든 간에 신경 쓰지 않았던 탓이다.
“허나 이것만으로는 그가 이룩한 성대한 전공에 미치지 못할 것이니, 나는 왕녀와 그를 연 맺어주어 왕실의 가족으로 맞이하려 한다.”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테오도르 국왕의 선언이 떨어지는 순간, 귀족들의 눈빛이 변했다.
“폐하. 드라흔 백작이 세운 전공이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한 것이기는 하나, 이는 어디까지나 무부(武夫)가 제 재주를 뽐낸 것에 불과할 뿐이옵나이다!”
“금과 가축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사료되옵나이다!”
“부디 거두어주소서!”
“부디 거두어주소서!”
강렬한 반대에 국왕의 시선이 한차례 귀족들을 스쳐갔다.
아데스덴 혈통 특유의 투명한 눈빛, 귀족들은 마치 발가벗겨진 듯 섬뜩한 기분이 들었지만 끝까지 자신들의 의견을 굽히지는 않았다.
“만약 그로 부족하다 여기시면 저희 귀족들이 왕국의 영웅을 위해 창고를 열어 농노와 재화를 보내 드라흔 백작이 조금도 부족함을 느끼지 못하도록 하겠나이다.”
귀족들로서는 하나뿐인 아데스덴의 혈통, 차후 이 나라의 지배자가 될 왕녀 오필리아와 드라흔의 혼인만 피할 수 있다면 기꺼이 제 재산을 헌납할 용의가 있었다.
“부디 선대로부터 이어져 온 왕실의 존귀함이 빛바래지 않도록 해주시옵소서!”
귀족들은 온갖 말을 주워섬기며 드라흔이 왕녀의 배필이 되기에는 지나치게 격이 낮다 주장했다. 하지만 테오도르 국왕은 자신의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그는 기사로서 세울 수 있는 최대한의 전공을 세워 그 가치를 증명했고, 나는 약속한 대로 기사로서 누릴 수 있는 가장 창대한 영광을 줄 생각이다.”
“큰 공을 세웠다고 하나 이는 마땅히 왕국의 기사된 자로 해야 할 헌신이며, 이를 셈하는 것은 그 숭고하고 거룩한 봉사를 모욕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나이다.”
도무지 좁혀지지 않는 간격, 귀족들은 국왕이 무슨 말을 하든지 간에 기를 쓰고 반대하고 나섰다.
“안 된다. 안 된다. 경들은 앵무새처럼 같은 말만 반복하는군.”
기분 좋은 말도 여러 번 들으면 지겨운 법이다. 그런데 기분 좋은 말도 아니고 제 의지에 반하는 귀족들의 말을 몇날 며칠 동안 듣고만 있으니 테오도르 국왕의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다소 격앙된 어조에 귀족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가 지닌 일신의 재주야 의심할 나위가 없지만, 그 출신이 근본을 알 수 없는 이방인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주소서.”
“이방인이라는 게 대체 왜 문제가 되는가!”
“그들은 태생부터가 다른 존재들인지라 이따금씩 드러나는 천박함과 존귀를 구분치 못하는 그 우둔함만큼은 어찌할 수가 없는 이들이나이다.”
“단지 능력이 있다 하여 천하디 천한 것들마저 중용한다면 나라의 근본이 무너지고 법도가 온데간데없게 되고 말 것이옵나이다.”
귀족들은 오늘이 마지막이라 생각해서인지 과격한 언변마저 서슴치 않았다.
“그 말은 마치 드라흔 백작이 천한 것들과 같은 처지라는 말처럼 들리는군.”
“그렇게까지 생각한 적은 없지만, 본질이 변하지 않는다는 건 사실이….”
제 말이 먹혀들었다고 생각한 것인지 신이 나서 입을 놀려대던 귀족이 말끝을 흐렸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언짢은 기색이 역력하던 테오도르 국왕의 표정이 어쩐지 웃고 있는 것만 같았던 탓이다.
앞장서서 드라흔의 출신을 트집 잡던 귀족은 그 은근한 미소를 보는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는 국왕이 어떨 때 저런 미소를 짓는지 잘 알고 있었고, 몇 번이나 보아왔다. 그때마다 유력한 귀족들중 누군가가 성세를 잃고 곤두박질 쳤다.
뒤늦게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다른 귀족들을 돌아보았다.
“아….”
그리고 보았다. 한창 열변을 토해내며 드라흔의 문제점을 나열하던 귀족들은 어느 순간부터인가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제야 귀족은 자신의 행동이 열의에 들떠 흥분한 나머지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은 것과 다름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치 수많은 소들 중에 자신이 도축될 소로 선정된 듯한 기분이었다.
“폐하. 제 말은 그게 아니오라….”
귀족은 수습하려 했지만 국왕은 기회를 주지 않았다.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라….”
그가 나서서 변명을 주워섬기기 전에 국왕이 먼저 입을 연 것이다.
“결국 그 말은 드라흔 백작의 출신이 천한 이방인이라 왕실과는 격이 맞지 않는다는 말이렸다.”
“폐하. 그게 아니오라….”
국왕은 불안해하는 귀족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았다.
“그렇다는군.”
테오도르 국왕의 시선은 귀족들이 아닌 자신의 뒤를 향해 있었다.
“저 말을 어떻게 생각하지, 드라흔 백작?”
“드라흔 백작이라니, 갑자기 무슨 말씀이신….”
뜬금없는 상황에 귀족들이 영문을 몰라 되묻는 사이 국왕 뒤편에 도열해 있던 금갑의 기사 하나가 앞으로 나섰다.
철컥.
들어 올려진 면갑 아래로 드러난 수호기사의 얼굴이 어쩐지 익숙했다.
“드, 드라흔 백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