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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 아데스덴의 보물 (3)
“아….”
동그란 이마와 커다란 담갈색 눈동자는 여전했지만, 젖살 빠져 갸름해진 뺨과 턱은 여인의 그것처럼 섬세하고 아름다웠고, 시녀들이 한참을 공들여 땋아 올렸을 머리 아래 드러난 새하얀 목선은 더없이 곱기만 했다.
이게 그 꼬맹이라고?
애써 만들어낸 의젓한 얼굴이 그저 귀엽기만 하던 여아가 어느새 이렇게나 자란 것일까. 자신의 어린 종자보다 훨씬 작고 앳되던 왕녀는 이제 완연한 소녀가 되어 있었다.
“뭘 그리 빤히 보느냐.”
너무도 놀라운 왕녀의 변화에 반쯤 넋을 놓고 바라보고 있던 김선혁은 왕녀의 차분한 목소리를 듣고 난 뒤에야 자신이 저도 모르는 사이에 왕녀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죄송합니다.”
뒤늦게 사과를 건네자 왕녀가 살포시 웃으며 대답했다.
“그리도 나의 모습이 많이 달라졌더냐.”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그저 하는 말이 아니었다. 왕녀는 정말 놀라울 정도로 변해 있었다. 마치 다른 사람이라고 해도 믿어질 지경이었다.
“단지 키가 조금 더 자라고 젖살이 빠졌을 뿐이니라.”
짐짓 대수롭지 않은 듯 말하는 왕녀였지만, 은근히 드러나는 뿌듯한 기색마저 숨길 수는 없었다.
겉모습은 변했어도 내용물은 그대로, 여전히 겉과 속이 따로 노는 모습에 김선혁은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하지만 낯선(?) 소녀에게서 어린 왕녀의 모습을 찾았다는 반가움도 잠시였을 뿐, 그는 금세 테오도르 국왕과의 대화를 떠올리고 어색한 얼굴이 되었다. 혼담이 오고 간 당사자와 이렇게 얼굴을 마주하고 있으니, 기분이 묘해진 것이다.
“멀리 왕성에서 그대의 활약상을 모두 듣고 있었노라. 그대로 인해 간악한 녹테인의 무리와 신의 없는 그리핀도르의 졸자들이 곤욕을 치렀으니 참으로 통쾌하도다.”
그에 반해 왕녀는 태연했다. 제 아비가 눈앞의 상대에게 무슨 제안을 했을지 뻔히 알고 있을 텐데도 불구하고 그녀는 마치 아무 것도 모르는 것처럼 행동했다.
“폭풍의 기사, 전장의 사신, 붉은 악마 드라흔, 그대를 가리키는 수식어에 하나같이 적들의 두려움이 묻어나니, 그대가 얼마나 큰 활약을 했는지 보지 않고도 알 수 있노라.”
예전이라면 질색을 했을 왕녀의 사탕발림, 하지만 지금은 차라리 이게 나았다. 불편한 화제를 피하기 위해 그는 적극적으로 전장에서의 일을 떠벌려대는 것을 선택했다.
“참으로 장하도다. 참으로 장해. 어느 누가 있어 드라흔과 같은 전공을 세울까.”
하지만 왕녀는 이 야심한 밤, 대화가 그저 사내의 무용담만으로 끝이 나기를 바라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래, 폐하를 알현했다지.”
그녀는 기어이 제 스스로 그 거북스러운 이야기를 꺼내고야 말았다.
“아.”
쉬지 않고 강박적으로 떠들어대던 김선혁이 뚝, 하고 입을 다물었다.
“폐하께서는 왕국의 새로운 영웅이라고 할 수 있는 그대와 내가 이어지기를 바라고 계시다.”
도대체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김선혁은 이런 상황을 한 번도 상상해보지 못했다. 그래서 좀처럼 대꾸할 말을 찾을 수가 없었다.
“우리 아데스덴 왕실은 그대와의 인연을 소중히 생각하는 바, 그대가 이룩한 눈부신 전공과 명성이 허튼 곳에 이용되지 않기를 바라노라. 그리하여 혹시라도 왕실과 그대가 서로를 경계하고 배척하는 일이 벌어지기를 바라지 않으며, 온전히 그대라는 존재를 포용할 수 있기를 바라노라.”
하지만 왕녀는 그와 달랐다. 그녀는 겸허히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을 넘어 적극적으로 이 혼담이 성사되어야 하는 이유를 나열하기까지 했다.
“크게는 그대라는 인재가 왕가와 함께 함을 알려 속 까만 귀족들 중 누군가가 그대로 말미암아 얻을 권세로 왕국을 어지럽히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요, 사적으로는 딸을 가진 아비가 훌륭한 배필을 맞이하기를 바라는 부성의 발로이니라.”
마치 남 이야기라도 하듯 태연하게 이런저런 말을 주워섬기는 왕녀의 모습은 열의에 차 있었지만, 역설적으로 더욱 차가워 보였다.
왕녀는 어릴지언정 필요에 의해서라면 기꺼이 자신의 미래를 희생할 정도의 냉철함이 있었다.
귀족이니 왕족이니 태생이 다른 존재들이라더니, 김선혁은 지금에서야 그 사실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대는 스스로의 위치가 어떠한지 깨달아야 하느니, 왕실 또한 그대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노라.”
왕녀의 말은 구구절절 전부 옳았다.
자신은 이방인이었고, 이곳 사람들처럼 충성으로 군주를 섬기는 성질의 사람이 아니었다. 그랬기에 왕실도 주종의 관계로 묶어 헌신을 강요하기보다는 거래라는 이름으로 적절한 대가를 주고받는 식으로 서로를 대해왔다.
하지만 이제는 새로운 방식이 필요했다. 거래만으로는 서로의 관계를 유지하기에는 드라흔의 이름값이 너무도 무거워져 버렸다.
초인 전력이 왕실에게 완전히 묶여버린 지금의 상황에서 그는 유일하게 스스로의 의지로 거취를 정할 수 있는 인물이었고, 상황에 따라 복잡하게 얽힌 왕국 내 판세를 단숨에 뒤엎어버릴 정도로 강력한 패이기도 했다.
그렇게 생각하면, 지금 왕실이 제안한 혼담은 차라리 합리적인 편이었다. 최소한 불합리하게 강압하고 배척하여 이용만 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왕실은 말 그대로 하나뿐인 왕위 계승자까지 그에게 내어주며 함께 할 것을 권하고 있었다. 제 나름대로 성의를 보인 것이다.
“아데스덴 왕실은 기꺼이 그대의 버팀목이 되어줄 것이며, 방패막이 되어줄 것이다.”
왕녀는 이 혼담이 단지 그를 구속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공존을 위해 필연적으로 거쳐야 할 과정이라 말했다.
차라리 탐욕과 아집으로 강압했다면 튀어 오르며 반발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영리한 아데스덴의 핏줄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단지 함께 하자고 말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만약 제가 이 혼담을 받아들인다면 저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한참을 고민하다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대가 뭘 그렇게 걱정하는지 나로서는 알 수 없으나 이것만큼은 약속할 수 있노라. 그대가 나의 반려가 된다고 해서 왕도에만 머무를 필요는 없다. 원한다면 지금처럼 자유로이 영지를 돌보되 그저 왕성에 그대의 반려가 있음을 잊지 않고 이따금씩이나마 찾아주면 그것으로 족하리라.”
“정말 그래도 되는 겁니까?”
제안을 받아들이는 즉시, 당연히 왕성에 발이 묶여버릴 줄 알았던 김선혁으로서는 왕녀의 말이 의외일 수밖에 없었다.
“그대에게는 날개 달린 멋진 짐승이 있지 않은가. 멀리 떨어져 있다 한들 그대가 원하기만 한다면 언제든 단숨에 왕도로 올 수 있을 테니, 거리가 문제가 될 건 없다 생각하노라.”
합리적이다 못해 파격적이기까지 한 제안에 김선혁은 진심으로 왕실의 제안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왕실이 바라는 것이 단지 드라흔과 아데스덴의 이름이 하나가 된다는 상징성 정도라면 굳이 못 들어줄 것은 없었다.
다만 왕녀의 나이가 마음에 몹시 걸렸을 뿐이다. 하지만 이곳은 자신이 살던 세상이 아닌 새로운 세상이었고, 이곳에서 그녀는 이미 다 자란 어른이나 다름이 없었다.
“물론 그대가 나를 잊지 않고 자주 찾아준다면 나는 무척이나 기쁠 테지.”
그는 왕녀가 던진 뜻밖의 말에 멍한 얼굴이 되고 말았다. 자신이 무슨 말을 들은 것인지 순간적으로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었던 탓이었다.
“지금 뭐라고….”
“시간이 야심하구나. 이만 가보아야겠노라. 그대 부디 평안한 밤을 보내기를 바라노라.”
왕녀는 대답을 해주는 대신 건조한 얼굴로 인사를 남기고는 몸을 돌렸다. 그런데 그렇게 몸을 돌린 왕녀의 귀가 어쩐지 붉어져 있었다.
당황한 나머지 배웅조차 하지 못했던 김선혁은 한참 만에 한숨을 내뱉었다.
하. 완전 요물 다 됐네.
왕녀는 떠났건만, 그녀가 남기고 간 체취는 아직도 진하게 남아 있었다.
**
호화로운 숙소, 더없이 편안하고 고급스러운 침대, 하지만 정작 김선혁은 도통 잠이 오지를 않았다. 한참을 끙끙대다 겨우 잠이 들었지만, 그는 이내 소스라치게 놀라며 잠에서 깨어나야 했다.
“내가 미쳤구나. 진짜. 완전히 돌아버렸어.”
잠조차 덜 깬 와중에도 내뱉는 그의 음성에 자괴감이 가득했다.
“꼬맹이가 꿈에 나올 줄이야.”
그는 황당하게도 왕녀 오필리아의 꿈을 꿨다.
“인간 김선혁. 진짜 바닥까지 갔구나.”
마치 큰 죄라도 지은 듯한 기분이었다.
이게 다 아데스덴의 부녀가 던진 혼담 때문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가 아직 다 자라지도 않은 왕녀의 꿈을 꿨을 이유가 없었다.
그래도 잘 자라긴 했지.
원래부터 미래가 기대되던 왕녀다. 그런 그녀가 1년 동안 더없이 훌륭하고 바람직하게 자랐다. 아마 자신이 왕녀와 같은 또래였다면 꽤나 가슴이 두근거렸을 것이다.
“안 돼! 정신 차려! 상대는 고딩도 아니고 중딩이라고!”
김선혁은 미친 사람처럼 지껄여댔다.
그만큼 그는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현실적으로는 왕실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게 이득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저쪽 세상에서 나고 자라며 굳어버린 고정관념이 못내 그를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게 만든 것이다.
“돌아버리겠네.”
고민 많은 밤, 그는 그렇게 선잠에서 깨어 다시 잠들지 못하고 밤을 꼴딱 새고 말았다.
**
“그래. 간밤에 생각은 해봤는가.”
초대 받아 참석한 왕가의 조찬이 끝나갈 무렵 테오도르 국왕이 물었다.
고작 하루 만에 인생의 중대사, 그것도 복잡하게 얽힌 문제에 대한 답을 찾았을 리가 없었다. 빤히 그 사실을 알 텐데도 뻔뻔하게 물어오는 국왕의 질문에 김선혁은 방금 먹은 음식이 체한 것 같은 얼굴로 대꾸했다.
“폐하. 왕녀께서 너무 어리신 건 아닌지….”
“아아. 나 역시 그대 이방인들의 문화 정도는 알고 있다. 이방인들은 스물이 넘어야 혼인을 생각한다지? 하지만 이곳은 그대들이 살던 세상이 아니다.”
국왕은 단박에 그의 대답을 잘라냈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적으로 이곳의 법도를 강요할 생각은 없다.”
재고의 여지조차 없는 듯 단호하게 말하더니, 금세 태도를 바꾸는 테오도르 국왕의 어르고 달래는 솜씨가 상당했다.
“그리도 왕녀의 나이가 걸린다면, 우선 혼례에 앞서 약혼식이라도 치르는 게 어떤가.”
“약혼 말입니까?”
김선혁은 약혼 정도라면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득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고작 하루가 지났을 뿐인데 국왕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쪽으로 기울어버린 자신을 발견한 탓이었다.
“약혼 정도면 그대도 부담이 덜할 터, 우선적으로 그리 못 박아두고 차후 시기를 보아 혼인을 올리는 것으로 하도록 하지.”
“혹시 제게 선택권이 있는 겁니까?”
“언제나처럼 나는 그대에게 그 어떤 것도 강요할 생각이 없다.”
강요는 하지 않지만 늘 따를 수밖에 없게 만드는 것이야말로 테오도르 국왕의 무서운 점이었다.
“다만 아데스덴이라는 버팀목이 없이는 그대 홀로 귀족 사회에서 살아남는 것이 쉽지 않으리라. 그대가 원하든 원치 않든 이제 귀족들은 어떻게든 그대를 끌어들여 제 파벌로 만들려 할 터, 그대는 노회하고 탐욕스러운 귀족들에게 뜯어 먹혀 거죽조차 남기지 못하게 될 것이다.”
국왕은 말하지 않았지만, 만약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왕실과의 관계가 꽤나 불편해질 게 분명했다.
귀한 딸을 거절한 놈팡이를 한결같이 대해줄 아비는 없었고, 그건 한 나라의 국왕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그는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제가 뭘 하면 되는 겁니까?”
마침내 마음의 결정을 내린 김선혁이 오늘 있을 회의에서 정확하게 자신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물었다.
“왕국의 당당한 고위 귀족으로 자리에 참석해주면 그만이다.”
“단지 그뿐입니까?”
설마 그럴 리가 없다. 그는 국왕이 바라는 것이 따로 있을 거라는 사실을 짐작하고 가만히 대답을 기다렸다.
“나는 오늘 회의에서 그대에게 많은 것을 줄 생각이노라. 그 유례 없는 포상에 아마도 많은 귀족들이 나서서 반대를 표하고, 나의 의지를 꺾으려 할 것이다.”
역시나 예상대로 국왕은 따로 그에게 바라는 것이 있었다.
“그 과정에서 어쩌면 그대는 참을 수 없는 모욕을 당하게 될지도 모르리라.”
“참는 거라면 이골이 났습니다.”
그의 말에 국왕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참으라는 말이 아니다.”
“그럼….”
테오도르 국왕이 능글맞게 웃으며 대답했다.
“만약 그런 일이 생긴다면, 그대는 마음껏 날뛰어도 좋다.”